몸은 힘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이보다 행복할 수 없었다.
그의 허리 밖에 오지 않는 산이가 느리게 걷는 그의 앞뒤로 연신 오가며 개구쟁이 본색을 보이고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들...,’
그런 산이를 따사롭게 바라보다가 그녀에게로 그 시선을 옮겼다.
시선을 타고 그녀의 머릿결에 감돌던 상쾌한 향기가 그에게로 넘어오더니 따스하게 그를 물들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병마를 이겨내고 자신을 만나러 오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것만, 어느 순간부터 산이는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졸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그는 목발을 짚고 의족 보행을 하면서도 무른 무릎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행복한 시간이 영원하기를 마음 속으로 깊이 빌었다.
그리고 또다시 올지 모를 자신의 망할 불행이 늘 두려웠다.
혹시 모를 불행이 걱정스러워지자, 그는 산이와 자신의 곁 그 누구보다 따사롭게 바라보는 사랑스런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남겨두고 싶었다.
***
그 높고 험한 경사로 땀을 쏟아내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은 해맑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 구걸할 때 봤던 그 얼굴에서 벗어나, 환해진 모습으로 싱그러워진 그녀는 더없이 행복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발걸음을 맞추고 흥분하여 뛰어다니는 산이를 부르며 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다시 없을 사랑이라 생각했기에, 자신이 받는 이 사랑이 그저 감사했다.
교만했던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면서 그녀는 온 마음 숨김없이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는 자장면 한 그릇에 담긴 그의 노력을 잊지 않기 위해 심장 한 가운데 크게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를 그의 반짝이는 눈빛과 함께 조각하고 있었다.
***
아트 디렉터일 때는 그 누구보다 잘 나갔다.
돈은 그저 통장에 찍히는 것.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와 산이와의 데이트 다음날, 자신의 구둣방은 참 부족해 보였다.
이 비루한 공간을 둘러 보아도 크게 남겨줄 만한 것이 없어 왠지 속상한 그였다.
‘산이는 이제 내 아들이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아트 디렉터의 일을 잠시 고민하는 그였다.
그리고 우선 당장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을 일하는 내내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민은 결심으로, 결심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의 구둣방은 크게 돈을 벌진 못했지만, 생명 보험과 적금 정도는 부을 수 있었다.
‘내가 만약 또다시 사고를 당해 없어져도 남겨진 그들은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
점심 시간은 아직 많이 남은 상태였지만, 한가함에 가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와 의족 보행 연습을 해 보았다.
목발을 양팔에 끼고 걷는 의족 보행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으나 서서 걸을 때 느껴졌던 사랑하는 그녀의 향기와 눈빛이 그리워 괴로운 고통도 이겨낼 수 있었다.
전철역 앞까지 천천히 연습하던 그의 눈에 헌혈 카페 간판이 들어왔다.
헌혈 카페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엄두도 못 낼 턱을 지닌 작은 건물 4층에 있었다.
산이가 백혈병을 앓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그였기에 ‘헌혈을 해볼까?’라는 생각에 잠시 그 앞에 멈췄다.
잠시 후, 언제 망설였냐는 듯 그는 목발을 꽉 짚고 “으샤!” 하고 전동 휠체어에게는 방어벽이 되었던 작은 턱을 넘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별거 아닌 턱이 그간 나를 막았구나.’
전동 휠체어가 오를 수 없던 턱도 이젠 그를 막지 못했다.
기분 좋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4층 헌혈 카페는 밝고 시원했으며 서너 명의 대기자가 앉아 있었다.
헌혈은 처음인 그에게 헌혈 카페는 무척 생소한 곳이었지만, 머뭇거림없이 파란색 제복을 입은 간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헌혈하고 싶어요. 어찌 해야하죠?”
양팔에 목발을 끼고 서 있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 본 간호사는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손가락으로 한쪽 벽에 마련된 태블릿을 가리켰다.
“저기서 신청하세요.”
“처음인데 신청을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아뇨, 신청은 직접하셔야 해요.”
예쁘장한 외모에 비해 상냥함이 조금도 없는 간호사의 차가운 반응은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산이를 위해’라는 명목하에 그는 태블릿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양팔에 목발을 낀 탓에 테블릿으로 전자 문진을 신청하는 것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에어컨을 틀었음에도 이마에 땀이 맺히고 의족을 낀 무릎이 시큰거렸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 돌려 보니 파란 제복을 예쁘게 입은 간호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게 시선에 들어왔다.
예쁜 얼굴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곁엔 다가오지 않고 잠시 바라만 보다가 고개돌려 자리를 피했다.
‘원래 이런 곳인가?’
한참을 목발에 의지한 채 테블릿과 씨름하며 전자 문진 작성을 완료하고 목발을 짚으며 간호사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가 가까이 오자 간호사는 손가락으로 번호표를 뽑는 기계를 가리키며 물었다.
“대기표 뽑으셨어요?”
그가 고개를 가로젓자 간호사는 알려주지도 않은 채, 다시 그를 피해 상담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색하고 낯선 허망함을 뒤로 하고 이번에도 ‘그래, 산이를 위해’라는 마음으로 목발에 의지해 대기표를 뽑고는 근처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려 보았다.
땀이 턱끝을 타고 툭,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혈압 체크하셨어요?”
그러다 다시 나온 간호사는 그의 곁을 지나며 진작에 해줬어야 하는 말을 툭 던졌다.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대기표 뽑는 기계 근처에 혈압 체크기가 보였다.
"으싸!" 주문처럼 산이를 위해 다시 목발을 짚고 일어 선 그는 혈압 체 크기 앞에 앉아 혈압을 재어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냉랭한 기운 가득한 간호사는 그의 혈압 체크 결과지를 받아들더니 무감각한 말투로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전혈하실 거죠? 지금 저희가 곧 점심 시간이라서 선생님은 바로 헌혈을 하기 어려우실 것 같아요. 두 시쯤 다시 오시거나 다음에 오세요.”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힐끗 바라보던 그가 의문 가득 물었다.
“다른 분들은 대기하시는 것 같으신데 저만 다시 오나요?”
대기 의자에 앉은 누구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어 그가 물어보자, 답답하다는 듯 간호사가 말한다.
“다른 분들은 선생님과 달리 건강하셔서, 점심 시간 전에 끝날 것 같아요. 두 시에 오시거나 다른 날 오세요, 전자 문진 유효 기간은 삼일이에요.”
그는 너무도 기계적인 간호사의 말투에 멋쩍게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두 시가 조금 넘어 구둣방 문을 닫고 다시 헌혈 까페에 들어선 그를 파란색 제복의 간호사가 상담실로 안내했다.
왠지 간호사의 표정이 좋지 않다.
이것저것 한참을 묻더니 힘겹게 입을 떼고 말한다.
“선생님은 처음 헌혈 하시는데다가 하반신이 불편하셔서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헌혈 후 안전사고 위험이 있어요. 보호자와 동행해서 다시 오시거나 날이 풀리면 오세요.”
‘아, 진작 말하지.’
그는 잘못함도 없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목발을 짚고 헌혈 까페를 빠져 나왔다.
나오는 길은 들어올 때보다 곱절은 길게 느껴졌다.
문 밖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 대기실 사람들의 시선이 아프게 꽂혔다.
“선생님 오늘 목소리가 왜 그리 기운 없으세요?”
오렌지색 불빛이 거리를 물들이자, 여느 때처럼 전화를 건 그에게 그녀가 물었다.
아마도 목소리에 침울함이 섞여있었을까?
“언제 시간 되시면 제 보호자가 되어 주시겠어요?”
오늘 헌혈 까페에 전자 문진을 하고도 그냥 돌아온 것이 못내 서운한지, 그녀에게 살짝 도움을 청하는 그였다.
***
마트에서 끝난 시간, 정확하게 그에게서 온 전화에 그녀는 미소를 띄고 통화버튼을 밀었다.
수화기 너머 왠지 우울함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 사이에 들려온
“언제 시간 되시면 제 보호자가 되어 주시겠어요?”라는 말이 심장을 아프게 울리고 있었다.
"선생님 왜요?"
수화기를 타고 흐르는 그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느껴지고 있었다.
"오늘 헌혈 카페를 갔습니다. 혹시 몰라서 헌혈증을 모아둘려고요. 그런데, 음 보호자가 필요하답니다."
' 산이를 생각해 헌혈을 하러갔었구나.'
그의 마음이 너무 고맙고 보호자가 없어서 그냥 돌아왔을 그의 상처에 그녀의 심장이 내려앉으며 극심히 아팠다.
"선생님 저 내일갈게요. 내일 제가 보호자 해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수화기를 사이에 둔 그는 잠시 동안 말을 잃었다.
"내일 마트는…,"
"하루 쉬죠. 뭐, 제게 더 중요한 건 선생님이시니까요. 선생님이 오늘 겪었을 그 상처가 더 중요해요. 내일은 제가 뵈러 갈 게요."
그의 다친 마음이 걱정되었다.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
다음날 아침부터 그녀는 분주하기 시작했다.
아가씨때 입던 원피스, 오랜만에 먼지 붙은 하이힐을 꺼내 놓고 곱게 화장하기 시작했다.
산이를 낳기 전, 그 아름다웠던 때로…,
그녀의 얼굴은 손길이 닿을 때마다 예뻐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껏 꾸미고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모습에 놀란 그를 보고 그녀는 씩 웃으며 "갑시다. 누구보다 저 예쁠 자신이 있거든요." 라며 서서히 걷는 그의 목발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물 입구의 턱.
‘하.’ 그녀의 가슴이 아팠다.
도착한 헌혈 카페에서 그녀는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간호사를 불렀다.
그의 눈에 어제 그 간호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제가 이동진 씨 보호자 입니다. 어제 힘들게 오신 분을 왜 돌려보내셨습니까?"
그녀의 아름답고 당당함에 기가 눌린것일까?
어제는 그렇게 커 보이던 간호사가 작은 아이가 되어 연신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날도 더우시고, 혹여 쓰러지시면…,"
"이보세요, 선생님."
그녀의 부드럽지만 조금 높아진 목소리,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똑같은 조건의 성인 남자가 비장애인이면 당신들 어제처럼 하겠어요? 어지럽거나 힘들면 저 소파에 앉아 잠시 쉬면 되는 것을…, 그 힘든 걸음으로 좋은 일하겠다고 온 사람을 그렇게 고생시켜요? 진짜 사람들 이상하네요. 이 분이 어떤 분인데 감히 당신들이 그런식으로 대해요? 네? 장애있으신 분들한테 걱정된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거 참으로 보기 좋지 않네요. 정상적으로 똑같이 대해주세요. 오늘 헌혈하는지 지켜보겠어요. 또 차별하시면 저는 민원을 제기할 수 밖에 없어요. 좋은 일하기 위한 헌혈 카페가 좋은 마음의 분께 그럴 수 없지요?"
***
그녀의 말에 간호사는 눈치만 보고있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이쪽으로 오세요. 선생님"라고 하며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피 뽑는 게 이렇게 간단한 것임을.
그는 왠지 서러움이 더욱 몰려오고 있었다.
헌혈증을 들고 나오는 길, 팔짱을 낀채 도도하게 앉아있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그였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 앉아 미소띤 그에게 속삭였다.
"제가 선생님의 명함이 되어드릴게요. 사실, 외모는 자신이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명함, 내 보호자…,
그의 마음은, 싱그럽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있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팔을 둘러 살짝 껴안았다.
"사랑해요. 내 사람."
그녀의 심장은 놀란 듯 그가 느껴질만큼 두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