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의 만남이 많아질 수록 두 다리와 함께 사라졌던 그의 자존감도 조금씩 살아났다.
정상인처럼 완벽한 걸음을 보여 줄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목발에 의지한 의족 보행만으로도 서서 걸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는 자애로운 신께서, 연인을 화염 속에 빼앗아간 불행이란 놈이 이후에도 감히 자신의 존재에 맞서지 말라며 잔인하게 두 다리마저 가져간 것에 맞서라 그녀를 보내 일어 설 수 있도록 해주었다 믿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용기였고 상실한 자존감을 치유해 주는 천사였다.
오렌지 불빛이 늘어진 거리에 그녀와의 통화는 일상의 마무리를 짓는 그의 행복이었다.
서서히 드는 작은 욕심 속에서 차츰 그녀의 일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몇 시에 일어났어요? 아침은 뭘 드셨나요? 점심 때까지 진상 손님은 없었나요? 점심은 어디서 드셨나요? 보고 싶어요."
그의 질문은 짧고 평범하며 딱딱했지만, 작은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통화를 마치고 가로등 불빛에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새삼 일어 설 수 있음에 또다시 감사했다.
그녀와의 거리를 더 가까이 하고 자주 보기를 원했지만, 그럴 때마다 여전히 불행이 던져준 이 삶으로, 정상인에 비해 초라한 자신의 모습과 누추한 형편이 그의 감정을 억제하고 있었다.
***
마트가 끝나는 그 시간, 그에게 했던 것처럼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져 그녀의 어두웠던 길을 밝힐 때면, 항상 외로운 전화기가 활발하게 그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었다.
그의 일상적인 질문은 항상 소소했지만, 다시 없을 로맨스에 그녀는 너무나 즐거웠다.
"오늘 7시에 일어났어요. 산이 학교 보내야죠. 아침은 계란 후라이에 멸치볶음 먹었네요. 안 그래도 오늘 어떤 아줌마 하나가 계산 물건 중 이중으로 찍힌 거 있다고 얼마나 화를 내던지. 아휴, 너무 힘들었어요. 점심은 마트 식당에서 먹었죠. 보러 오실래요? 내일?"
오렌지 불빛 속 그녀도 그와 이 길을 함께 걷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을 담은 눈빛을 바라보면서 나란히 걸을 수 있다면, 고된 일에 지친 몸이 한결 포근해질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 그녀였다.
***
그의 머리 속은 그녀의 "보러 오실래요? 내일?"이 한참을 맴돌았다.
그녀의 환한 목소리에 취해 가겠다고 응했지만, 막상 내일 그녀를 보러 직장까지 찾아 가는 것이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오늘 따라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의 그림자는 유난스럽게도 목발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절뚝절뚝 어둠이 내린 하루를 걸으며 집으로 향하는 그의 어깨가 무척 괴로워 보였다.
양팔에 낀 목발의 무게가 유독 무겁고 고단한 이유가 무엇인지...,
***
“자기, 오늘 무척 예쁘네. 은수 씨, 좋은 일 있나 봐.”
옆 계산대 여직원이 그녀의 곁을 지나며 평범한 인삿말을 툭 던졌다.
그녀는 그저 싱긋 웃으며 말없이 계산에 열중하면서도 오늘 만날 그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점심 시간이 되자, 그녀 주위로 계산대 업무를 보는 동료들이 하나 둘 모여 식당으로 향했다.
마트 계산대 업무를 보는 여직원 중 가장 젊은 그녀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동료들과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요즘 자기 얼굴빛 좋아졌더라? 연애해?"
그녀의 사정을 아는 친한 몇 명의 직장 동료들은 오늘따라 환하게 화장도 잘 먹은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인사치례가 아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네, 저 오늘 어때요? 언니."
언니들의 반짝이는 눈빛에 괜히 기분 좋아진 그녀였다.
"이뻐. 아주 이뻐.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거야. 부럽다. 젊음이, 그런데 오늘 약속있는 거야? 왜 이리 꾸미고 왔어?"
“오늘 사랑하는 사람이 퇴근 시간에 맞춰 올 거예요.”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아름답게 빛났다.
“어머 어쩜. 자기 요즘 연애했구나. 누구야? 뭐하는 사람이야?”
“은수 씨야 원래 이쁘지. 그런데 이렇게 고은 미인을 누가 데려가나 했더니 오늘은 직접 모시러 오는 거야?”
궁금함이 많은 동료들은 한껏 놀라면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그런 질문이 귀찮고 싫기는 커녕 반갑고 기쁘기만한 그녀였다.
***
그는 전동 휠체어를 이제 더 이상 이용하지 않았다.
힘에 겨워도 그녀와 보폭을 맞춰 걷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일하는 마트는 그의 구둣방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지하철역사에 있었다.
그녀를 보러 가기 위해 가게 문을 일찍 닫고 바람을 맞으며 길을 나섰다.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구두약 냄새를 바람에 날리면서...,
부끄러운 직업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직장으로 가는 오늘은 구두약 냄새가 몸에 남아있는 것이 싫었다.
고작 지하철 한 정거장의 거리였지만, 목발에 의존해 걷는 길은 생각보다 불편함이 많았다.
저물기 시작한 태양은 그의 뒤에 강한 열을 보냈고 차량 통행을 위해 군데군데 턱이 있는 끊어진 인도는 의족에 연결된 두 무릎을 시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녀가 일하는 마트에 도착할 무렵 가로등 불이 하나둘 빛나기 시작했고 자신의 몰골에 자신감 없어 마트 안까지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한 그는 가로등 아래에서 그녀의 퇴근을 기다리기로 생각했다.
양팔에 목발을 끼고 지하철역사 앞에 서서 마트를 바라보는 그의 행색은 비록 옷이 깔끔하다 해도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선입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마침 그가 서 있는 가로등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지하철 출입구 계단에서 목발 하나에 의지한 걸인이 구걸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영향인지, 근처에 서 있는 그의 대한 서람들의 시선 속에 선입견이 가득함을 그도 느끼고 있었다.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선 그를 지하철 입구에서 구걸하는 장애인과 동일시함이 분명하였다.
그렇게 어둠이 내리는 시간, 부정적 인식 속 사람들의 시선에 점점 침울해지며 초라해짐에 위축되는 그였다.
“동진 씨!”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밝은 그녀가 오늘은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며 경쾌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부름에 사람들의 부정적 시선은 사라지고 그도 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감사합니다. 나의 은수 씨.”
***
환한 가로등 불빛 속 그가 서 있었다.
같이 나온 언니들에게 "저 분이에요. 저 이제 가볼게요."라며 손을 흔드는 와중에 살짝 바라본 언니들의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의아함을 느꼈지만, 자신을 향해 속닥거리는 마트 언니들의 모습을 인지하지 못하고는 조심스레 소리도 못 내고 그저 그녀를 보면서 손만 흔드는 그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차이나 타운 이후, 엄청 힘들 텐데도 목발을 짚고 나온 그에게 그녀는 항상 고마웠다.
시선을 맞출 수 있어서, 그의 팔을 잡을 수 있어서, 그녀는 마냥 행복했다.
언제나 외롭고 쓸쓸했던 오렌지색 불빛이 세상 가득 채운 듯한 느낌은 그녀에게 너무나 신선한 경험이 되고 있었다.
"좋네요. 당신이 제 옆에 계시니."
그녀의 작은 웃음 소리에 그는 미소띤 얼굴로 함께 화답해 주었다.
산이가 기다릴세라, 오래 머물 수 없이 그녀의 집 근처까지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고 그녀를 배웅한 후 힘들게 돌아서 걷는 그의 모습에 미안함과 아쉬움을 담아 그녀의 시선은 쉽게 돌리지 못하였다.
그의 모습이 멀어져 사라질 때까지 담고 또 담으며 온 마음으로 무사히 집에 도착하기를 빌면서 바라만 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한 가득 담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다음날 자신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시선을 보내는 직장 동료 언니들에게 갇히고 말았다.
점심 시간, 식당에 모인 친한 언니들은 누가 먼저 말할 것인지 옆구리를 찔러 가면서 어색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가장 연장자며 아무 생각없이 거침없게 말하기로 유명한 언니가 그녀에게 망설이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저기, 자기 애인이 다리가 불편한 목발짚고 다니는 장애인이었어?"
"네. 사고로 다리가 불편하세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그녀 덕에 용기를 얻은 것일까? 언니들은 돌아가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애 키우기도 힘들잖아. 자기 힘들지 않아?"
"그 애인분, 저기 밥 벌이는 가능해?"
"모아둔 돈은 있는 사람이야?"
"돈이 중요한가. 남자가 보호해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자기랑 어떻게 알게 됐어?"
"자기가 옴팡 뒤집어 쓸 수 있어. 잘 생각해봐."
"왜 장애인이랑 사귀는 건데? 자기 예뻐. 부족하지 않다고."
"에이 짐이야. 짐. 자기 산이도 키워야 하잖아?"
"남자는 자기 가정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설마 결혼까지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언니들의 쏟아지는 부정어린 말에 밥 먹던 수저마저 들지 못하고 당황함이 가득해진 그녀였다.
그러다가 순간 올라오는 화에 그녀는 수저를 탁자에 탁 내려놓으면서 차분하지만,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말했다.
"그 분이 저랑 결혼해 주시면 정말 감사한 거죠. 언니들이 그 분의 겉모습을 볼 때, 저는 그 분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까요. 장애가 뭐가 중요해요? 그래서요? 다리 좀 불편한 게 뭐가 문제인데요?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어요. 그 분은 누구보다 밥 벌이 잘 하고 살아요. 걱정할 것은 또 뭔데요? 돈이요? 언니들, 부자들도 고민 있어요. 돈이 다 뭔가를 해결해 주는 건 아니라고요. 저 사람은요 제 마음의 병을 치유해 주셨고 우리 산이 아플 때 고쳐준 분이에요. 이 세상 가장 잘생긴 남자를 저에게 가져와도, 저 분이랑 안 바꿀 거예요. 부족해 보이죠? 정말 아닌 거 같죠? 외모가 뭐가 중요한데요? 언니, 외모는 쓸모 없어요. 아무 것도 나에게 준 것이 없거든요. 저 분 때문에 이뻐진 것이고, 저 분 때문에 밝아진 거예요. 동진 씨는요, 이 세상에 숨어져있는 몇 안 되는 천사고요. 저는 그 천사를 발견한 재수 좋은 여자인 거예요. 그는 제 자랑이고, 저의 자부심이예요."
그녀의 당당함에 할 말을 잃은 직장 동료들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기 시작했고, 그녀는 자신의 그가 그런 시선을 받았다는 것에 화가 나 식판을 들고 그 부족한 사람들 사이를 박차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