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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여인들
작가 : 헤이미치
작품등록일 : 20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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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애국자 강연회는 흥행하길 바래!
작성일 : 19-09-10     조회 : 53     추천 : 0     분량 : 5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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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은 상해 임시 정부에서 왔다며 뜬금없이 명령 비슷한 부탁을 하고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고 떠난 남자의 얼굴이 머리에 박힌 걸 느낀다.

 

 내내 그 생각을 하며 개성 장터 옆 비교적 번화가에 있는 ‘봉성 여관’ 앞에 선다. 일본식 2층 건물인 이 여관은 서경의 집이다. 서경은 몇 개월 만에 오는 다정한 집 냄새에 눈물이 난다.

 

 문을 왈칵 열고 아버지, 어머니를 부른다.

 

 “아버지! 어머니!”

 

 그 소리에 안쪽 살림집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버지, 어머니가 달려 나온다. 버선발인 체로. 희끗한 머리가 보이는 아버지와 세련된 한복을 입은 40대의 어머니.

 

 이들은 서경의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 안는다. 몇 개월만인가. 부모님은 삼일 만세 운동 후 딸이 소식도 없이 사라져 매일 가슴이 무너지는 듯이 살았다. 다른 사람을 통해 서경이 만주로 도망간다는 소리도 듣고 또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여러 번 딸을 찾아 형무소로 면회도 갔었다. 하지만 오늘 갑자기 출감하게 되는 줄은 몰랐다, 부모는 딸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며 눈물을 흘린다.

 

 서경은 여관 뒤편 살림집 부모의 방에서 무사한 귀환의 절을 올린다. 아직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버지 어머지는 서경이 절을 마치자마자 손을 잡고는 앞에 앉히고 안부를 묻는다.

 

 “우리 서경이 얼굴 상한 거 좀 봐!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어머니가 걱정하지만 서경은 밝은 얼굴이다.

 

 “괜찮아요. 감옥소 시계도 꼬박꼬박 잘만 돌아가는 걸요. 뭘.”

 “그래. 우리 서경이 거룩한 독립운동 하느라 애썼다.”

 

 아버지가 칭찬한다.

 

 “이게 다 아버지가 가르친 대로 한 거잖아요. 다섯 살 때부터 서경이 너는 조국의 딸이 되어야 한다. 민족의 딸이 되거라 하셔서 이 좋은 길로 나섰네요. 하하.”

 

 서경이 웃는다. 하지만 어머니는 옆에 앉은 아버지를 눈으로 흘겨본다.

 

 “당신은 정말... 독립 운동의 길이 이렇게 험한 길인 줄은 모르고 왜 그렇게...”

 “잘 했다. 개성에서도 경성에서도 너 처녀 애국자로 명성이 자자하다. 내가 딸 하나는 잘 키웠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을 자르고 말하자 서경이 환히 웃는다.

 

 어머니는 다음날 서경이 일어나자마자 목욕을 시킨다. 여관 한쪽에 있는 일본식 목욕탕은 부모님의 성격대로 깔끔하고 나무로 만들어진 욕조에서 따뜻한 증기가 포실포실 올라온다.

 

 서경은 어머니가 마련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는 너무 오랜만에 몸과 마음이 풀어지는 걸 즐긴다. 어머니가 물에서 나와 있는 서경의 어깨와 팔을 수건으로 쓱 닦자 서경이 비명을 지른다. 어깨와 팔에 상처가 여기저기 나 있다.

 

 “악! 아퍼.”

 

 어머니가 화들짝 멈추고는 눈이 글썽글썽해진다.

 

 “많이 아프니?”

 “아니예요. 괜히 엄살 부렸지. 너무 오랜만에 어머니가 닦아 주니까 아기가 되고 싶잖아.”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서경은 아픈 표정을 감추고 애교를 부린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다.

 

 “너 아프면 소리 질러도 돼. 왜 이렇게 몸에 상처가 많니? 흑흑”

 

 어머니가 서경의 몸을 살피더니 급기야는 울기 시작한다.

 

 “에이 참. 어머니. 나 하나도 안 아퍼요.”

 “이거 고문당하다 그런 거지?”

 

 서경은 얼굴이 굳어지며 입을 다문다.

 

 “죽일 놈의 일본 놈들...”

 

 어머니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서경은 얼른 얼굴을 편다.

 

 “어머니! 계속 때 밀어주세요. 갓난 아기가 되고 싶어요.”

 

 서경이 물속에서 몸을 흔들며 아양을 떤다. 어머니가 하하 웃으며 수건으로 서경의 어깨를 계속 닦는다.

 

 일주일을 개성 집에서 편하게 먹고 쉬고 책 읽으며 지내니 서경은 온 몸에 힘이 다시 나는 걸 느낀다. 내일은 경성에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날이다.

 

 어제부터 장에 나가 오랜만에 옷도 사고 단발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며칠 잘 먹어서인지 얼굴도 좋아졌다. 서경은 자기 방에서 새로 산 옷을 입고 거울을 들여다 보는데 문득 이한의 말이 생각이 난다.

 

 상해 임시 정부에서 왔다며 독립 운동을 계속 하려면 조선 총독부 홍석원 경감을 찾아 달라던 그 말. 그리고 그 진실하고 형형한 눈빛.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방문이 열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어온다.

 

 “우리 서경이 예쁘네. 그렇게 입고 좀 다녀라”

 “어디 가려구?”

 

 어머니가 칭찬하고 아버지는 묻는다.

 

 “경성 가려구요. 친구들이랑 여성 교육 강습소 세우는 일을 해 볼까 해요.”

 

 그 말에 어머니는 벌써 걱정스런 얼굴이다.

 

 “여성 강습소 얘기만 할 거지? 독립 운동 얘기는 안 할 거지?”

 

 옆에 선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아내가 무슨 말을 할지 본다.

 

 “내가 목욕시키면서 니 몸 보니까 눈물이 다 나더라. 어쩌면 처녀 몸에 상처가 그렇게 많고...”

 

 어머니의 걱정에 서경이 말을 멈춘다. 침울해져 얼굴이 어두워진다.

 

 “너 나이 스물 세살이다. 남들은 혼인 다 했어. 더 늦기 전에 시집가자!”

 

 어머니가 말하자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못하고 가만히 서 있다. 서경은 웃으며 말한다.

 

 “어머니는... 저 아직 사랑하는 남자를 못 찾았어요. 결혼은 사랑하는 남자하고 해야죠.”

 

 어머니의 얼굴이 흐려진다.

 

 “너가 공부를 너무 많이 했다. 조선 여자가 사랑해서 결혼하는 경우가 어디 있니? 다 집에서 정해주는 대로 시집가는 거지. 혼담 많이 들어온다. 사람들이 너 거룩한 독립 운동했다고 좋다고 생각하더라.”

 “에이. 어머니도. 이제 와서 그런 말을.”

 “난 너 감옥소 갔다오고 나서 다른 건 다 필요없어졌다. 너가 장안에 처녀 애국자로 소문이 짜하지만 그게 우리 딸 행복을 보장하는 게 아니잖니?”

 

 어머니가 폭포처럼 말을 쏟아내자 틀린 말이 없다. 아버지가 포기하듯 말을 잇는다.

 

 “다른 여자들처럼 시집가서 신랑한테 사랑받고 애 낳고 사는 게 험한 일 안 당하고 사는 법이긴 하다.”

 

 서경이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신랑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시집가서 화려한 병풍 펼쳐진 안방에서 하루 종일 꽃같이 앉아 수나 놓고 사는 거요? 뭐 제대로 바깥 출입도 못하고 주단 치마를 넓게 펼치고 앉아서 온 몸에 금은보화를 걸치고 하인들한테 명령이나 하며 답답하게 사는 거요? 저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네요. 그러면 차라리 감옥소에 다시 들어가겠어요. 거기선 언니 동생들이랑 가마니 짜면서 밥도 나눠 먹고 얘기도 실컷하고 서로 노래와 춤도 배우고 차라리 거기가 좋아요. 하루 종일 꼼짝도 못하고 꽃같이 앉아 있어야 하는 안방은 지옥일 거예요. 전 그렇게 못 살아요. 아버지, 어머니 전 그냥 조선 독립을 위해 운동하는 독신 여성으로 살래요. 전 조선 독립과 결혼했어요.”

 

 서경이 줄줄이 얘기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안이 벙벙해져 말을 잃는다. 서경의 표정은 밝다.

 

 경성 번화가 세련된 다방 안에서는 최신 유행의 서양 가곡이 흘러나오고 구석 테이블에는 서경, 종희, 애숙 세미가 둘러앉아 얘기를 나눈다.

 

 “감방에서 얘기했던 대로 여성 교육 강습소를 차리자고.”

 

 먼저 제안했던 서경이 말문을 연다. 다들 수수한 블라우스에 스커트나 바지 차림이다. 그러나 종희만 여전히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고수하고 있다. 총독부 의료원에서 퇴근해 간호사복을 벗고 평상복 차림인데 그렇다.

 

 다들 집에서 며칠 잘 쉬어 얼굴이 좋고 희망으로 빛난다. 세 여자는 좋다고 서경의 말에 호응한다.

 

 “나 도쿄 학교 휴학했어. 아버지가 감옥소 갔다 왔다고 학교 안 보낸단다.”

 

 부유하지만 보수적인 애숙의 집답다. 그런 집 딸이 어떻게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지 모르겠다고 서경은 생각해 왔다.

 

 “어휴! 꼰대!”

 

 서경이 얼굴을 찌프린다. 종희가 평소 버릇대로 말을 꺼내기 전 일단 애숙의 팔을 친다. 찰싹.

 

 “그럼 넌 앞으로 뭐 할 거야?”

 “아야. 언니. 아직 뭐. 서경이랑 여성 교육 강습소하면 되겠네.”

 

 애숙이 아파하면서 대답한다.

 

 “좋지. 그럼 우리 운동하자!”

 

 서경이 다음 제안을 한다.

 

 “만세 운동?”

 “만세 운동 많이 했다.”

 “더 해도 돼!”

 

 종희, 애숙, 세미가 각각 성격대로 말한다.

 

 “그게 아니라 돈 벌기 운동!”

 

 서경이 답하자 다들 의문의 눈으로 서경을 쳐다본다.

 

 “돈 있어야 강습소 차리지!”

 

 서경이 설명하자 다들 긍정하는데 종희가 질문한다.

 

 “완전 좋지. 근데 돈은 어떻게 버냐?”

 “나 유명하잖아!”

 

 세 여자가 일제히 서경을 본다.

 

 “너 처녀 애국자로 장안에 소문이 자자하지.”

 “나도 수원에서는 유명한데...”

 “세미야, 난 경성에서 유명해! 내 유명세를 이용해 볼까?”

 “뭘?”

 

 세 여자가 일제히 서경에게 묻는다.

 

 “강연회 합시다! 처녀 애국자 강연회...”

 

 다들 금방 동의한다. 하지만 애숙이 의문을 제기한다.

 

 “그 정도로 돈을 벌 만큼 너가 유명하지는 않는데...”

 “그래. 그건 좀 약하지.”

 

 종희도 애숙의 의문을 지지한다.

 

 “음. 이건 어때요? 신여성의 자유연애란 무엇인가?”

 “신여성의 자유연애?”

 

 세 여자가 일제히 소리지른다. 종희가 성격대로 테이블을 손으로 탁 치며 일어서며 큰소리를 낸다.

 

 “야! 너 이화학당 나온 신여성이야!”

 “거룩한 독립운동을 한 처녀 애국자라구!”

 “독립운동 얘기를 해야지.”

 

 종희와 애숙의 말에 세미도 합세한다. 하지만 서경은 눈을 빛낸다.

 

 “그러니까 더 좋지. 처녀 애국자 강연회. 신여성의 자유연애란 무엇인가? 장안의 화제가 되지 않겠어?”

 

 서경이 큰소리치자 애숙이 잠시 생각한다.

 

 “하긴 그렇겠다. 독립운동에 대한 강연회는 허가가 안 나.”

 “그렇지.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여성도 독립적인 존재다 하고 외치며 집을 나간 게 40년이 지났는데 조선 여성들도 집에서 벗어나서 연애도 좀 마음껏 하자고 해야지!”

 

 종희가 걸걸한 목소리도 주변의 이목도 생각하지 않고 큰소리로 말한다.

 

 “내 말이. 다들 찬성?”

 

 서경이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세 여자를 돌아본다. 하지만 세미는 못마땅한 얼굴이다.

 

 “독립운동도 말하지 못하는 강연은 왜 하려구? 난 같이 못 하겠다.”

 

 세미의 말에 가시가 돋혀 있다. 세 여자는 일제히 세미를 본다.

 

 “난 상해로 갈 거야.”

 

 세미가 말하자 세 여자가 ‘왜?’라는 얼굴로 본다.

 

 “아. 그렇죠.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지? 얘기 들었어.”

 

 서경이 아는 소식을 전한다.

 

 “나는 교육 운동으로는 조선 독립을 앞당길 수 없다고 생각해. 상해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과 함께 할 거야.”

 

 말하는 세미는 결연하다. 나머지 세 여자는 세미를 보며 선뜻 찬성하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반대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서경이 세미의 어깨에 손을 얻는다.

 

 “세미야, 이해해. 삼월일일 거사 이후 상해로 넘어간 독립 운동가들이 많다니까 거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도 좋을 거야.”

 

 세미가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얼굴로 서경을 본다. 종희와 애숙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세미와 눈을 맞춘다. 세미가 세 여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언제 떠나는데?”

 “곧. 하지만 우리 처녀애국자 강연회는 흥행하길 바래!”

 

 세미가 웃으며 서경에게 힘을 준다. 종희가 당연하다는 듯 주먹을 흔든다.

 

 “그럼. 내가 길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서 여기 처녀 애국자가 자유 연애한대요 하고 광고를 해야지.”

 “그럼 완전 흥행하겠네.”

 

 애숙이 한술 더 뜬다.

 

 “뭐야! 내가 언제 진짜 자유 연애를 한다구. 연애는 조선 독립이랑 한다니까...”

 

 서경이 얼굴을 찌푸리며 볼멘 소리를 한다.

 

 “지나가는 남자 발 걸어서 진짜 연애를 해봐! 하하하!”

 

 세미가 부추기자 네 여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는다.

 

 ***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감할 때도 애숙의 애인 필용은 심하게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아픈 증세는 나날이 심해져만 갔다.

 

 출감 후 애숙은 거의 매일 필용의 집에 간다. 침대에 파묻히듯 누워 있는 필용의 얼굴엔 눈이 휑하게 들어가 있고 얼굴은 미이라마냥 심하게 야위고 패어 있다. 베고 있는 베개 옆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여기저기 얼룩져 있다.

 

 필용은 심하게 기침을 하고 소리는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듯 거칠고 힘들다. 기침을 할 때 입을 가린 손에는 피가 배어져 나온다.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애숙은 필용이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할 때마다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준다.

 

 “필용씨! 아파서 어떻게 해!”

 

 애숙이 너무 안타깝게 필용의 이름을 부르지만 필용은 대답도 못하고 죽을 듯이 콜록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꺽으며 괴로워한다. 애숙의 얼굴은 어두워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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