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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여인들
작가 : 헤이미치
작품등록일 : 20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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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년이 또 나댄다.
작성일 : 19-09-13     조회 : 47     추천 : 0     분량 : 5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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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는 이미 각오하고 왔다.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김원봉은 세미를 프랑스 조계령 외곽의 서양식 단층집으로 데리고 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통 살림집으로 보인다.

 

 놀랐던 건 집 안으로 들어가 김원봉이 20대의 서양인 남자를 소개한 거다.

 

 “여기는 헝가리인 마자르 동지입니다.”

 

 물론 서양인을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세미가 이렇게 대놓고 서양 남자와 마주 보는 건 처음이다. 마자르는 큰 키는 아니지만 적당한 체격에 정말 흰 피부에 코가 크다. 세미는 좀 당황스럽다.

 

 “여기는 조선 수원에서 오신 정세미 동지입니다.”

 

 김원봉이 마자르에게 세미를 소개한다. 세미를 보는 마자르의 눈이 반짝 빛난다. 둘은 서로를 유심히 살펴보며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내레 마자르를 도와주는 조수 박혁준임메다. 뭐이 심부름도 잘 하구 요리도 잘 하디요. 뒷간 소제도 잘 함둥.”

 

 마자르 옆에 작업복 차림으로 서 있던 20대 초반의 남자가 요란스럽게 나서며 세미에게 인사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의열단에 너무나 중요한 일이지요. 지하로 내려가서 보여 드릴께요.”

 

 서로 대강 인사를 마치자 김원봉은 세 사람을 이끌고 지하실로 향한다.

 

 세미는 이런 가정집에 이렇게 큰 지하실이 있는 게 놀라웠는데 진짜 놀라운 건 그게 아니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간 지하실 방은 제법 컸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단조롭게 마무리된 어두운 지하실엔 등불만 켜져 있고 방 가운데 커다란 작업대가 놓여 있다. 작업대 위에는 각종 화약 약품들이 나무 상자에 담긴 체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다.

 

 그 한쪽으로는 가루들을 섞는 커다란 사기그릇이 막대와 함께 있고 저울이 바로 옆에 있다. 다른 쪽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철형 주물이 보인다. 세미가 눈이 커져서 본다.

 

 “컴 플리이즈!”

 

 마자르가 세미에게 작업대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이게 뭔가요?”

 

 세미가 묻는다.

 

 “폭탄 만드는 겁니다. 폭탄이 뭔지는 아세요?”

 “그럼요. 던져서 건물도 부수고 사람도 죽이고 하는 거요.”

 

 김원봉이 묻자 세미가 대답한다.

 

 “정확히 잘 아시네요.”

 “이게 그 무서운 것들을 제조하는 덴가요?”

 “댓츠 라이트.”

 “이거이 대한 독립에 매우 도움이 되는 물건임메다.”

 

 마자르가 영어로 대답하고 김원봉이 덧붙이자 혁준이 깐죽대며 끼여든다.

 

 “아. 네. 그럼 제가 할 일은?”

 “이곳은 의열단의 비밀공장입니다.”

 

 세미가 묻자 김원봉이 대답하며 긴장한 표정으로 세미를 똑바로 본다.

 

 “절대 우리 네 사람 외에는 알려져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상해는 일본 밀정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에요.”

 “아. 그렇군요.”

 “내가 동지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이곳을 밀정들의 눈으로부터 지켜 달라는 겁니다.”

 “어떻게?”

 

 세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원봉에게 신경을 집중한다. 그런데 대답은 마자르가 한다. 어눌한 조선어다.

 

 “제 아내가 되어 주세요.”

 “네? 결혼을 하라구요?”

 

 세미가 놀라서 목소리가 올라간다.

 

 “하하. 진짜 결혼하기요?”

 

 혁준이 깐죽거린다.

 

 “놀라지 마세요. 진짜 결혼을 하라는 게 아니라 부부처럼 행세해 주세요. 밀정들로부터 의심을 사지 않게.”

 

 김원봉의 음성에는 신뢰감이 실려 있다.

 

 “아. 네. 아내처럼 보여 달란 말씀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고조 밥하고 빨래하는 건 아니 하셔도 됨둥. 기거이 내레 하디요.”

 

 혁준이 까불거린다.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네요.”

 

 세미의 얼굴이 환해진다.

 

 “동지는 폭탄 제조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는 일을 해 주세요. 아무래도 여자가 여러 면에서 밀정의 눈을 피하기에 좋습니다.”

 

 김원봉이 부탁한다.

 

 “아.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세미는 단단히 말하며 눈을 빛낸다.

 

 ***

 

 필용이 죽은 후 애숙도 죽은 듯이 시체처럼 며칠을 지냈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가끔 이젤 앞에 앉아 캔버스에 필용의 그림만 그리며 시간을 죽였다.

 

 하지만 서경과 종희 언니는 강연회 준비를 열심히 했을 거라는 걸 안다. 아무리 절망했어도 친구들의 노력에 관심이 완전히 꺼지진 않았다.

 

 오늘은 서경의 강연회 날이라 애숙은 힘을 내 집을 나와 종로 극장으로 향한다.

 

 저녁 8시. 종로 거리는 등불이 환히 켜진 체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애숙은 힘이 쭉 빠진 몸을 겨우 움직여 종로 극장에 도착한다. 극장 앞에는 ‘처녀 애국자 임세경 강연회 – 신여성의 자유 연애’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애숙이 잠시 서서 보다 발걸음을 극장 안으로 옮긴다.

 

 극장 안은 벌써 청중들이 꽉 채우고 있다. 애숙은 뒤쪽 자리에 가 숨어들 듯이 앉는다.

 

 앞쪽 무대 위에는 ‘처녀 애국자 임서경 강연회’라고 커다랗게 적혀 있고 애숙이 앉은 좌석 뒤쪽으로는 곤봉을 든 순사 세명 쯤이 왔다 갔다거리며 감시한다.

 

 무대 위에서는 화려한 양장을 차려 입은 서경이 연설을 한다.

 

 “연애는 종교와 예술을 합병한 평민적인 종합대학입니다. 연애는 어데까지던지 일개의 무정부주의적인 자유일 뿐입니다. 연애의 압제는 그를 견제하며 명령하며 압박할 하등의 권위자도 없습니다. 연애는 ‘사랑한다, 사랑이 냉각하면 헤어진다’하는 간단한 법률과 윤리가 있을 뿐입니다. ”

 

 연설이 불을 튄다. 청중은 웅성웅성거린다. 그 모습을 보며 애숙은 필용이 생각난다. 애숙에게 뜨겁게 키스하며 필용은 말했었다. ‘그대의 입술은 마치 불타오르는 장미 같구려. 난 그대의 입술에서 영원한 생명수를 얻는 것 같소.’

 

 오글거리든 그 말에 애숙은 정신 차리라고 핀잔을 줬지만 가슴은 벅차고 세상 날아갈 것 같은 마음이 되었었다. 대체 누가 그런 아름다운 시를 자신에게 다시 읊어 줄 수 있는가. 오직 필용만이 그런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지금 없다.

 

 애숙의 머리로는 필용의 말들이 환상처럼 펼쳐지지만 귀에는 서경의 불꽃 튀는 연설이 들려온다.

 

 “연애 그 자신 이외의 자에게는 그 사랑을 방해, 견제, 압박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연애의 당사자 여자 남자의 의지로 그 연애를 시작하고 끝낼 뿐입니다.”

 

 좌중은 술렁거린다. 곳곳에서 ‘뭔 연애 얘기냐?’ ‘그만 해라!’ ‘처녀 애국자가 맞느냐?’는 소리가 나온다.

 

 ‘처녀 애국자’라는 말에 애숙은 서경이 들려 준 개성에서 만세 운동한 얘기가 생각난다.

 

 ***

 

 “경성에서 어제 200장의 대한 독립 선언서가 도착했습니다. 이틀 후 보신각에 모여 만세 운동을 한다고 합니다. 개성에서 함께 호응해야 하는데 앞장 서실 분 없으신가요?”

 

 개성 북부 교회 예배당 안에는 10여명의 남자들이 모여 긴장된 얼굴로 목사의 제안을 듣는다. 그 뒤쪽으로 유일하게 여자인 서경이 남자들 뒤에 서 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고 좌중에는 조용히 침묵이 흐르며 서로 눈치를 본다. 뒤에 선 서경은 안타깝다.

 

 “독립 선언서는 예배당 지하에 잘 숨겨 뒀습니다.”

 

 목사가 조용한 좌중을 돌아보며 재촉하듯 말을 꺼내지만 여전히 나서는 사람은 없다. 다만 아직 한복에 상투를 튼 양반 하나가 좀 불만스럽다는 듯 대꾸한다.

 

 “경성에서 한다고 꼭 개성에서도 해야겠습니까?”

 

  그 말에 몇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그렇지요.”

 “이게 워낙 위험한 일이라서. 헌병대가 요즘 조선 불령 선인들 잡는다고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지 않습니까? 엊그제도 최대감이 상해에서 활동한다는 독립 운동가들이 와서 군자금을 요구했다고 헌병대에 신고해서 찾느라고 난리라고 했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지지하는 이가 나서자 다들 두려운 얼굴들이 된다. 서경은 불만스러워진다.

 

 “일단 헌병대에 잡히면 감옥에 들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고문을 당하는 게 무서워서...”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를 부르는 게 워낙 큰 희생을 해야 하는 일이지요. 그래도 조선 독립을 위해 나설 분 없으신가요?”

 

 목사가 웅성웅성하는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다시 말을 꺼낸다. 그러나 곧 조용해지며 서로 눈치만 본다. 서경은 남자 어른들의 이런 모습을 돌아보며 크게 실망이 밀려오는 걸 느낀다.

 

 “어르신들...”

 

 서경이 앞으로 나서자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서경을 돌아본다.

 

 “경성에서는 33인의 각계 대표자 분들이 자신의 이름을 선언문에 내놓고 만세 운동에 앞장 서시기로 했습니다. 그 분들은 두려움이 없으시겠습니까? 경성에서 하는 일을 개성에서 못 하라는 법이 있습니까?”

 

 낮고 단단한 음성이다. 서경이 말에 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해진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간나가 나대니? 나이도 어린 게 어디 어른 앞에서 입을 나불거려?”

 

 상투를 튼 양반이 이마를 찌푸리며 서경을 노려본다. 목사가 얼른 나선다.

 

 “임서경 양입니다. 저희 유치원 교사입니다. 이번 민족 대표로 나서신 오화영 선생님을 뵈었다고 합니다.”

 “네. 이화학당 선배님들을 통해 오 목사님을 만나 이번 만세운동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허. 참. 경성은 풍속이 해괴하다. 나이도 어린 간나한테 이런 중대사를 발설하니... 쯧쯧.”

 

 양복에 머리를 짧게 자른 다른 남자도 한마디 한다. 서경은 얼굴이 흐려진다.

 

 “어르신들. 조선 독립을 위해 앞장 서실 분이 아무도 없으십니까?”

 “저년이 또 나댄다.”

 

 서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른 남자 어른이 불만스럽게 얼굴을 찌프린다.

 

 곧 남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져 가고 서경은 이들을 실망스럽게 보다 목사와 눈이 마주치는데 목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다. 예배당을 나가는 남자들의 뒤를 쫓아 나간다.

 

 서경은 숨을 가다듬더니 예배당을 나와 발길을 호수돈 고등 여학교로 옮긴다. 밝은 달빛 아래 힘찬 발걸음이다.

 

 호수돈 고등 여학교 기숙사는 학교 옆에 붙은 르네상스식 2층 건물이다. 개성이 집이 아닌 여학생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서경이 건물 앞에 섰을 때에는 아직 방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서경은 기숙사로 들어가 학생회장과 만나 준비하고 있는 삼일 운동 얘기를 알린다. 고등과정 최고 학년인 회장은 분노하며 즉각 학생회 임원들을 휴게실로 소집시킨다.

 

 다들 아직 잠자리에 들어가지 않아 10여명의 학생회 임원들은 순식간에 휴게실로 모여들었다. 삼일 운동이라는 자세한 얘기를 들은 건 아니지만 학생회장이 ‘긴급 상황’임을 알려 모였기 때문에 긴장한 얼굴들이다. 학생회장은 임원들의 신뢰를 얻고 있는 신중한 여학생이다.

 

 “개성에서도 뭔가 해야겠지요.”

 

 서경이 경성에서 삼일 만세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대강의 상황을 설명하자 여학생들은 비분강개하며 다들 목소리를 높인다.

 

 “예, 당연합니다.”

 “경성에서 움직이는 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르신들이 비겁하네요.”

 

 목소리들이 제법 크고 웅성웅성하자 갑자기 문이 열린다. 기숙사 사감인 신관빈이 들어선다. 30대로 깐깐한 인상에 검은 안경을 쓴 신관빈은 모여있는 여학생들을 보더니 놀란다.

 

 “너희들 안 자고 뭐 하니? 빨리 방에 안 돌아가?”

 

 관빈이 화를 내자 여학생들은 당황한다. 서경이 앞으로 나선다.

 

 “사감 선생님. 지금 저희들 대한 독립 만세 운동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네? 대한 독립 만세 운동요?”

 “네. 삼월 일일 경성에서 만세 운동을 한다고 합니다.”

 

 서경이 설명하자 관빈은 입을 다문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눈치다. 그러나 곧 여학생들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얘기를 니들이 왜 하니? 나이도 어린 것들이...”

 “나이가 어린 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르신들이 나서지 않으신대요.”

 

 여학생들이 여기저기서 관빈에게 대꾸한다. 서경은 분위기가 격화될까 걱정이 되어 얼른 나서다.

 

 “목사님하고 어르신들 만났는데 나서시려는 분이 없네요. 우리들끼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에요.”

 

 관빈이 정색을 하며 서경에게 항의한다. 맞는 말이다. 서경도 여학생들이 너무 위험해질까 걱정이 된다.

 

 “독립 선언서 200장이 있으니까 그거라도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요!”

 

 서경의 말에 여학생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소리친다.

 

 “이건 정말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헌병에 체포될 거예요. 괜찮겠어요?”

 

 관빈이 얼굴이 굳어져 여학생들에게 목소리를 높인다. 일순간 여학생들이 조용해진다.

 

 “네. 압니다. 험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라 내가 앞장서겠어요. 아니 나 혼자라도 선언서를 돌리겠습니다.”

 

 조용했던 여학생들 사이에 파문이 인다. 학생 대표가 벌떡 일어나는데 얼굴이 빨개져 있다.

 

 “선배님. 그렇게까지... 아직 혼인도 안 하신 분인데. 한번 체포되면 앞 길을 알 수가 없어요.”

 

 대표가 흥분해 목소리가 떨린다.

 

 “그 정돈 각오하고 있어.”

 

 서경이 단호하게 말한다.

 

 “선배님!”

 

 여학생들이 일제히 서경을 부르며 보는데 걱정이 가득한 눈빛들이다. 학생 대표가 제일 걱정스런 얼굴로 서경에게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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