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원은 조선인이지만 인정받고 있는 고등 경무라 조선 총독부 내에 따로 개인 사무실을 가지고 있다. 서경이 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곧 ‘들어오세요’하는 홍석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서경이 문을 열고 들어가 그대로 뒤로 돌아 문 밖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문을 꼭 닫고는 책상에 앉은 홍석원에게 다가간다.
홍석원이 의문의 눈으로 쳐다본다.
“누구신지?”
“임서경이라고 합니다. 처녀 애국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경이 의자에 앉아 있는 홍석원에게 가까이 가 몸을 기울이고 작은 소리로 말한다. 홍석원은 눈이 커진다.
“허허. 애국자가 호랑이 굴로 다 걸어 들어오셨네.”
서경은 홍석원에게 몸을 더 기울이고는 귀에 대고 말한다.
“상해 임시 정부에서 와 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 말에 홍석원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사무실 문으로 얼른 가 다시 문을 열고 복도를 살핀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재빨리 닫고는 천천히 걸어 서경이 서 있는 곳으로 온다. 생각하느라 잠시 침묵이 흐른다.
“나는 수족이 되어 줄 조수가 필요합니다. 내 조수 하시오.”
“네?”
서경이 눈을 크게 뜨고 홍석원을 본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했다. 하지만 금방 이해한다.
“네. 알겠습니다.”
“여자라 너무 눈에 띄는데. 게다가 처녀 애국자로 유명하고.”
홍석원이 말을 흐리자 서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제안한다.
“제가 남장을 하면 어떨까요?”
“남장? 그거 좋은 생각인데... 근데 목소리가...”
“남들 앞에서는 제가 말을 잘 안하게 해주세요.”
그 말에 홍석원은 뜻을 금방 이해한다. 둘은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짓는다.
***
안창호에게서 받는 월급이 적어 어머니의 병을 제대로 치료하기 어려운 비서에게 하시모토의 유혹은 강력했다. 비서는 하시모토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어 결국 그의 도움으로 어머니를 조선 총독부 의료원에 모셔간다.
조선 최고 실력의 의사들과 시설을 갖춘 총독부 의료원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더구나 가난한 조선인들은 발 들여 놓기 힘든 장소이다. 그런 곳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건 커다란 특혜이다.
하시모토는 가난한 동네에 있는 비서의 집에 총독부 자동차를 보내 어머니를 의료원에 모시게 했다.
“고맙습니다.”
비서가 하시모토에게 허리 굽혀 인사한다. 하시모토의 도움으로 비서의 어머니는 특실인 1인실에 입원한다.
“아니. 뭘. 이 정도 가지구.”
“치료비가 문제가 아니라 조선인이 이렇게 좋은 치료를 받기가 어려운데...”
“아니야. 어려운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구. 나 조선총독부 고등 경무야.”
“네.”
비서의 얼굴에서는 감동한 눈빛마저 흐른다.
“그럼 어머니를 잘 보살펴 드리게.”
하시모토가 병실을 나가다가 잠시 멈추더니 돌아서 비서에게 묻는다.
“지난번 안 선생님 강연회 때 대기실에 있던 남자 둘이 중국말로 뭐라고 하던데?”
“네?”
비서가 눈이 커지며 긴장한다.
“아니. 뭐. 그 뒤에 내가 뒤따르면서 봤는데 조선어로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 내 앞에서는 중국어로 하고 내가 안 보이니까 조선말로 하는 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그게... 조, 조선어 뭐 들으셨습니까?”
비서가 당황해 말을 더듬는다.
“별말은 아니었어. 내가 누구냐고 내 이름 뭐냐구 묻고 안 선생님이 대답하시더라구.”
“아. 그, 그건...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서가 대답하며 조금 안심한다. 하지만 하시모토의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조선인이 중국어를 하는 데 별 일이 아니라구?”
비서가 움찔한다.
“중국에서 온 불령선인들 맞지?”
하시모토의 질문에 비서의 얼굴이 헉 굳는다.
“얼굴을 보니 맞구만. 나도 다 중국에서 정보를 듣는 데가 있어. 누구야?”
비서가 잠시 망설이는 눈치다. 하지만 결국 입을 연다.
“그, 그게... 상해에서 조선 독립 활동을 하는 무장 투쟁 단체 단원들입니다.”
“뭐야?”
하시모토의 목소리가 커졌다.
“저도 거기까지밖에 모릅니다.”
비서가 손을 흔들며 당황해 말한다.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런 건 빨리빨리 나한테 얘기해야지.”
하시모토가 소리 지르자 비서는 낭패한 얼굴이 된다. 하시모토는 잠시 비서를 노려보다가 더 캐묻는다.
“뭐 더 아는 거 없어?”
“없습니다. 선생님이 두 분하고 얘기할 때는 저 보고 나가 있으라고 하셔서. 단지 두 분이 상해에서 온 무장 투쟁 단체라고 하는 소리만 들었고 총과 폭탄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하시모토가 눈이 커져서는 얼른 돌아서더니 병실 문을 열고 나간다. 한 건 했다는 표정이다. 조선 총독부로 달려간다.
***
서경은 조선 총독부 홍석원의 사무실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문이 확 열리더니 하시모토가 문을 확 열고 미처 들어오기도 전에 소리친다. 손에는 서류를 들고 있다.
“선배님!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상해에서 결성된 폭력 집단이 경성에 들어 왔다고...”
하시모토는 홍석원의 총독부 내 라이벌이다. 둘은 승진을 앞두고 경쟁하고 있다. 하시모토는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홍석원 옆에 선 빵모자를 쓴 20대 남자를 본다. 남장한 서경이다. 남자치고는 예쁘장하다고 하시모토는 생각한다.
“이 아이는 누굽니까?”
하시모토가 이상해서 홍석원에게 묻는다. 홍석원은 자기 자리에 앉은 체 서류를 보다가 고개를 들고 하시모토를 본다.
“응. 내 조수.”
“처음 보는 앤대요?”
하시모토는 서경을 위아래로 훑으면서 말한다.
“응. 이번에 새로 채용했어. 아주 잘 해.”
“믿어도 되는 앱니까?”
하시모토는 홍석원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온다.
“그럼. 그럼.”
하시모토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하시모토가 서경을 보며 질문한다.
“너 이름이 뭐니?”
하지만 서경은 보기만 할 뿐 대답을 안 한다.
“박종혁.”
홍석원이 대신 대답한다.
“박종혁요?”
하시모토가 홍석원에게 되묻는다.
“그렇지. 그런데 아까 하려던 얘기는 뭔대?”
홍석원이 서경에게 더 질문하지 못하게 얼른 주의를 돌린다.
“이놈 앞에서 막 얘기해도 됩니까?”
“그렇다니까. 내가 채용했는데 나를 못 믿어?”
하시모토가 의심스러운 눈치를 거두지 못하자 홍석원이 오히려 역정을 낸다.
“뭐, 그렇다기보다는...”
하시모토가 말을 얼버무리다 다시 긴장한 얼굴로 돌아온다.
“상해에서 결성된 조선 폭력 집단이 얼마 전에 폭탄을 가지고 국내로 들어 왔답니다.”
“응. 그래. 의열단이라고 하지.”
“아, 아십니까?”
홍석원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하시모토가 놀라 말을 더듬는다.
“그럼. 이놈이 물고 온 정보야.”
“이 자식이요?”
하시모토가 서경을 보며 목소리가 올라간다.
“네.”
이번엔 서경이 대답해 준다. 너무 아무 말도 안 하면 하시모토가 의심할 것 같다.
“그중에 이한이라는 작자가 있는데 애가 그놈 은신처를 알아 왔어. 오늘 밤에 가서 잡으려고.”
“네? 정말입니까?”
하시모토가 놀라서 들고 온 서류를 떨어뜨린다. 당황해 말을 더듬는다.
“저, 저에게 알려 주실 수 없습니까?”
“아니. 허허. 내가 알아낸 정보를 왜 자네한테 알려주지?”
홍석원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반문한다.
“그건 뭐...”
“나가 봐! 우리 지금 이한 체포 작전 짜느라 바쁘니까.”
홍석원이 귀찮다는 듯 하시모토에게서 눈을 돌린다.
“아. 네.”
하시모토는 아쉽다는 듯 돌아서 나가면서 서경을 본다. 서경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정말 그날 밤 홍석원과 서경은 이한을 잡으러 나갔다. 홍석원이 미리 상부에 보고해 헌병 10여명을 배정받았다.
이들이 모의한 이한의 은신처는 경성 외곽 초가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이다.
“이한! 꼼짝 마라! 경기도 경찰청 경감 홍석원이다.”
한밤중 초가집 동네는 고요하고 달빛만 흐르는데 양복 차림의 이한이 골목 사이에 나타나자 골목 옆 수풀 사이에 숨어 있던 홍석원은 권총을 앞세우고 이한의 앞을 막는다.
골목 옆 수풀 여기저기에는 10 여명의 헌병이 숨어 있었고 서경도 그 중 끼어있다. 홍석원이 소리를 지르며 이한 앞으로 나서자 헌병들도 장총을 앞세우고는 일제히 수풀을 나와 이한을 둘러싼다.
이한이 놀라 입고 있던 양복 안주머니에 숨겨 논 권총을 꺼내 홍석원에게 쏘지만 총알은 홍석원을 빗나간다. 팡. 그러나 이한을 둘러싼 헌병들이 일제히 장총을 들어 이한의 머리에 겨눈다.
서경도 이한의 옆머리에 권총을 겨눈다. 팽팽한 긴장이 이들 사이를 둘러싼다.
“넌 완전히 포위됐다. 항복하라!”
어쩔 수 없이 이한이 총을 거두자 홍석원이 다가가 수갑을 채운다. 이한이 옆에 선 남장한 서경을 지긋이 보고 둘은 눈을 마주친다.
“이놈이 이한입니까?”
조선 총독부 지하 고문실 문이 확 열리고 얼굴이 빨개진 하시모토가 계단으로 뛰어 내려온다. 고문실 중앙 고문 의자에 이한이 결박되어 앉았다.
여기저기 옷이 찢기고 피가 배어 나온다. 얼굴에도 상처가 나고 피로 얼룩져 있다. 이한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축쳐져 앉아 있다.
옆에는 홍석원과 부하 형사가 서 있고 그 뒤로 서경이 서서 지켜본다. 하시모토의 질문에 홍석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시모토가 계단을 다 내려와 이한 옆에 서며 숨가쁘게 묻는다.
“뭐 실토하는 게 있습니까?”
“몇 대 때리니까 술술 불던데.”
“중국에서 몇 명이나 들어 왔답니까? 총이랑 폭탄은 어디에 숨겼대요?”
“어허. 내가 어렵게 알아 낸 걸 자네에게 말해 줄 수 있나?”
“에이. 홍 선배님. 여러 명이 들어 왔고 총이랑 폭탄도 많이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그렇긴 하지.”
하시모토의 연이은 질문에도 홍석원이 대답하는 걸 꺼리는 눈치를 보이자 하시모트는 홍석원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애가 달아서 말한다.
“선배님! 정보를 혼자 다 가지시지 마시고 저랑 좀 나누세요. 제가 중국에서 폭력 집단이 들어왔다고 알려 드리지도 않았습니까?”
“내가 왜 그러는데? 됐어.”
홍석원이 거절하자 하시모토가 아쉬운 표정으로 이한에게 가까이 가더니 고개를 들이밀고는 이한의 몸을 자기 곤봉으로 쿡쿡 찌른다.
“이한! 나한테도 말해봐! 누가 또 들어왔어? 폭탄을 어디다 숨겼어?”
이한이 축 늘어져 있다가 눈을 부릅뜨더니 하시모토에게 침을 뱉는다. 하시모토가 화가 나서 몽둥이로 이한을 미친 듯이 때린다. 퍽퍽. 이한이 죽을 것 같아 홍석원이 나서서 말린다.
“내 전리품을 막 다루지 말게. 죽으면 어떡하나?”
“에이 씨발!”
이때 이한이 몸을 곧추 세우더니 하시모토에게 똑바로 말한다.
“니가 좀 말해봐라! 상해에 밀정을 얼마나 숨겨놨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