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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여인들
작가 : 헤이미치
작품등록일 : 20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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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시대를 앞서가는 신여성이십니다!
작성일 : 19-09-20     조회 : 353     추천 : 0     분량 : 5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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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일본인으로 행세하고 싶었습니다.”

 

 상연이 담담하게 대답한다. 종희는 이해할 수 없다.

 

 “뭐라구요?”

 “일본 있을 때부터 조선인들은 워낙 차별을 많이 받아서 일본인처럼 살고 싶었어요.”

 “그래도 의료원에서는 채용할 때부터 알았을 텐데요.”

 “그렇죠. 단지 병원 안에서 생활할 때는 일본인처럼 행세했습니다. 일본인 의사들 상관들하고 친하게 지내구요.”

 “그런데 갑자기 왜 포기하셨어요?”

 

 종희가 묻자 상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잇는다.

 

 “지난번 다리를 다친 조선인 환자가 들어 왔을 때 기무라 선생이 하는 짓을 보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종희는 조용히 이어지는 상연의 말에 집중한다.

 

 “내가 조금만 움직이면 저 환자를 살릴 수 있는데 괜히 일본인 행세하느라 한 사람을 죽이는 구나 하는 생각.”

 

 종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네요. 최선생님도 어쩔 수 없는 조선인이십니다.”

 

 종희는 상연의 진심이 전해지는 걸 느낀다. 상연의 진심에 종희는 마음이 열리는 걸 느끼며 자신의 이야기도 풀어 놓는다.

 

 “우리 시헌이 잘 생겼죠? 전 16살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한테 시집가서 17살에 시헌이를 낳았어요. 18살에 남편이 죽고 그때 죽을 힘을 다해서 시집을 나왔지요. 그리곤 19살에 개성 호수돈 고등여학교에 들어갔어요. 입학할 때 기혼자는 안 된다고 어찌나 그러던지. 교장 선생님하고 대판 싸웠잖아요. 그래서 이겼습니다.”

 

 상연이 종희의 옆얼굴을 보며 놀란 눈이다.

 

 “대단하시네요.”

 “좀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딜 가던 남들보다 5살 많아요. 항상 왕언니입니다. 하하하.”

 

 종희가 호탕하게 웃는다.

 

 “그리곤 22살에 이화학당 가신 거예요?”

 “네. 3년 다니곤 졸업해서 1년 간호학교 끝내고 총독부 의료원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진짜 시대를 앞서가는 신여성이십니다.”

 

 상연이 칭찬하듯 말하자 종희는 안심이 된다.

 

 종희는 조선 여성으로서는 평범하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솔직하게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일은 많지가 않다. 진짜 마음이 통한 서경, 애숙 정도에게만 말했다. 남자에게 얘기하는 건 처음이다.

 

 상연에게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 ‘자신의 마음이 열려서일 거다’고 종희는 생각한다. 하지만 상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마음을 졸였는데 이렇게 심상하게 받아주니 비록 연하지만 상연의 마음의 크기가 넓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포근해진다.

 

 “제가 그렇죠? 신여성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하죠. 최 선생님도 저를 누님이라고 부르세요. 저보다 두 살 나이가 어리시잖아요.”

 “하하. 그건 생각해 보구요.”

 

 상연이 설핏 웃는다. 종희도 마주 웃는다. 밤하늘의 달빛이 다정하게 비춰준다.

 

 ***

 

 조선 변호사 협회에서 나온 종로 갤러리 ‘모네’ 그림 전시회 초대권을 준다고 해서 애숙은 냉큼 정미의 아버지 용석을 만나기로 했다. 용석은 시내 유명 호텔 커피숍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 호텔 커피숍은 경성 시내 최고급 다방으로 최고 멋쟁이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애숙도 그 장소의 격에 어울리게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평소에 잘 입지 않던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장소에 나왔다.

 

 호화로운 인테리어의 커피숍으로 들어서자 저쪽에서 용석이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든다.

 

 “선생님! 여기요!”

 

 애숙이 다가가 맞은편에 앉는다.

 

 “안녕하세요? 초대권은 어디에?”

 “여기 있습니다.”

 

 용석이 초대권을 테이블 위에 놓는다.

 

 “고맙습니다.”

 

 애숙이 감사를 표하고 초대권을 잡고 보는데 두 장이다.

 

 “두 장이어서 저와 함께 가시면 좋겠습니다.”

 “네?”

 

 애숙은 좀 당황스럽다. 미리 알려주지 않았던 상황이다.

 

 “개막식이어서 원래 2장이 왔습니다.”

 “저한테는 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면서...”

 “뭐 그런 거 상관있으십니까?”

 

 용석이 무심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특유의 권위적인 눈빛이다. 애숙은 기분이 나쁘면서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어 입을 다문다. 뭐 잠시 같이 구경하는 거야..

 

 종로 갤러리는 조선 최고의 미술 전시관답게 으리으리하고 화려했다. 미술관 로비로 들어서니 바닥은 대리석이 거울처럼 깔려있고 천정에서는 반짝거리는 샹들리에가 떨어진다.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니 은은한 조명 아래 모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곳곳에는 화려한 최신식 드레스를 입은 숙녀들과 최고급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마치 애숙과 용석처럼.

 

 “모네의 그림은 빛의 각도과 방향에 따라 사물들이 다 다른 모양으로 보이네요.”

 

 애숙이 집중해서 모네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감탄한다. 하지만 용석의 얼굴은 지루하다.

 

 “아. 뭐. 그렇습니까? 제 눈에는 뭐 풍경들이 다 흐믈흐믈하고 힘도 없어 보이고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네?”

 

 애숙이 대번 얼굴을 찌푸리며 용석을 쳐다 본다.

 

 “아. 뭐. 그렇잖습니까? 그림이 명확하지 않고 뭐 경계선도 없고.”

 

 용석은 심드렁한 목소리다.

 

 “아버님. 이게 모네 그림이 위대한 이유입니다. 세계는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다라는 정신을 드러낸 거라구요.”

 “아. 그런가요? 몰랐습니다.”

 

 용석의 무심한 얼굴을 보며 애숙은 한심하다. 그런데 용석이 애숙의 그러한 표정을 읽는다.

 

 “아버님. 재미없으시면 그냥 나가세요. 전 더 보고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용석이 황급하게 손을 흔든다. 애숙의 앞으로 안내하듯 손을 내밀며,

 

 “선생님! 계속 구경하시지요.”

 

 재촉한다. 애숙이 용석을 좀 노려보다가 못마땅한 얼굴로 걸어나간다. 용석이 그 뒤를 따른다.

 

 “그림에 그렇게 관심이 없으시면서 왜 오셨어요?”

 

 커다란 창 너머로는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져 있고 나무가 바람이 살랑거리며 흔들려 낭만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애숙과 용석은 그림 감상을 마친 후 종로 갤러리의 세련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하. 그건.”

 

 용석이 잠시 침을 꼴깍 삼키더니 털어놓는다.

 

 “선생님에게 관심이 있어서요.”

 

 말을 마친 후 용석은 슬쩍 웃는다. 당황한 건 애숙이다. 얼굴이 빨개진다.

 

 “아버님...”

 “네. 알아요. 저 아이가 둘이나 있는 홀아비입니다.”

 “저. 그게...”

 “아내와는 작년에 이혼했어요. 일본 유학을 다녀왔더니 대화가 안 통하더라구요.”

 

 애숙은 용석이 갑자기 털어놓는 신상에 딱히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저 도쿄 법대 나왔고 조선에서 세 번째로 변호사 자격증 딴 사람입니다.”

 “그러시군요.”

 “선생님도 도쿄에서 유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말씀하시는 게 다르시군요.”

 “뭐...”

 

 용석이 애숙의 온몸을 훑어가며 바라본다.

 

 “너무 아름다우시구요.”

 

 애숙은 용석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끼며 반응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커피만 홀짝거린다. 잠시 후 용석이 한 박자 쉬더니 말을 꺼낸다.

 

 “저랑 결혼해 주세요.”

 

 애숙이 놀라서 벌떡 일어선다.

 

 “네? 아버님. 저랑 두 번째 만나는 거예요.”

 

 애숙의 목소리가 떨린다.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아니다. 먹고 사는 데 걱정 없이 그림 그릴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용석의 목소리는 자신만만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겨우 두 번째 만났는데 저한테 청혼하시는 건가요?”

 “선생님 딱 봐도 견적 나오는데요. 배우신 신여성에 아름다운 미인에 부유한 집안. 좋은 교육 받으신 거. 완벽하십니다.”

 

 용석의 자신감에 애숙은 얼굴이 굳어진다.

 

 “제가 무슨 물건인가요? 정말 기가 막혀서.”

 

 애숙이 얼른 가방을 챙겨 들더니 돌아 나간다. 그러자 용석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애숙의 팔을 잡는다.

 

 “저랑 결혼하시면 후회할 일을 결코 없을 겁니다. 전 조선에서 도쿄 법대를 졸업한 세 번째 변호사라구요.”

 

 용석이 강하게 말한다. 애숙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용석의 손을 내치고는 세찬 발걸음으로 카페를 걸어나간다.

 

 ***

 

 “안녕하세요는 영어로 뭐예요? 하이는 알겠구.”

 

 상해의 의열단 아지트 지하실에서 세미가 철형통 안에 배합된 화약 가구를 집어넣으며 마자르에게 묻는다. 아름다운 얼굴 여기저기에 검은 화약 가루가 묻어 있고 그사이 땀이 흐른다.

 

 손에 장갑은 꼈지만 까맣고 작업복 위 여기저기도 화약 가루가 묻어 있다. 익숙하게 무게를 재는 천칭에 화약 가루를 붓는 마자르가 세미의 조선어를 못 알아들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세미를 본다.

 

 “아. 못 알아들으셨구나.”

 

 세미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시늉을 낸다.

 

 “이거 뭐냐구요?”

 

 마자르를 알아들었다.

 

 “오. 굿모닝!”

 “굿모닝!”

 

 세미가 따라 한다. 마자르가 이번에 밥 먹는 시늉을 한 후 말한다.

 

 “굿 애프터눈!”

 “굿 애프터눈!”

 

 세미가 따라한다. 다시 마자르가 밥 먹는 시늉을 한다.

 

 “저녁 먹고. 굿 이브닝!”

 “굿 이브닝!”

 “드 유 언더스탠드?”

 

 세미가 마지막 말은 못 알아들었다. 옆에서 함께 작업하던 조수 혁준이 깐족거린다.

 

 “이해했냐고 묻지 아니함메?”

 “아. 네. 이해했어요. 근데 뭐라 그랬더라. 드 유 언더스탠드?”

 

 세미가 어설프게 따라 하자 마자르가 대뜸 대답한다.

 

 “응. 그래.”

 

 반말이다. 세미는 좀 당황한다.

 

 “어. 고마워.”

 

 반말로 대응해준다.

 

 “아주 딱딱 맞아 돌아감둥. 찰떡궁합이십메다. 하하하.”

 

 혁준이 배를 잡으며 웃는다.

 

 “저 영어 좀 하죠?”

 “어. 잘해. 베리 굿!”

 

 마자르가 한껏 웃으며 세미에게 엄지척해 보인다. 둘이 얼룩덜룩 검어진 얼굴로 서로 웃는다.

 

 ***

 

 한강변 마시장엔 말들이 히힝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쭉쭉 뻗은 잘 생긴 말들이 갈기를 휘날리며 여기저기 서 있고 말 장삿꾼들이 이리저리 흥정을 한다.

 

 쉬는 날이라 종희가 오자고 해서 왔지만 상연은 아직도 종희가 말을 탄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말똥 냄새가 풍겨나오고 말 울음소리와 장사치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한 마시장 입구에 종희와 함께 들어서면서도 상연은 왜 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한다.

 

 “여기서 말 타신다구요? 이 선생님이요? 말 타실 형편이 아닌 것 같은데...”

 

 상연이 미심쩍게 묻지만 종희는 환한 얼굴로 대답한다.

 

 “하하하. 저 가끔 타요. 말 타는 건 제 로망이에요. 말 타고 넓은 벌판을 달리면 속이 탁 트입니다.”

 

 말타기 좋게 서양 남자 바지 차림인 종희는 즐거운 표정이다.

 

 종희는 마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이리저리 둘러 보더니 친한 말 상인을 발견하고는 부르면서 간다.

 

 “마포 아저씨! 안녕하세요?”

 

 말 상인도 종희가 익숙한 모양이다. 반가워한다.

 

 “이 선상님 오셨어? 오랜만이야.”

 

 종희가 말 상인에게 가까이 가서 뭐라고 얘기하는 모습을 상연이 좀 떨어져서 본다. 종희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상인에게 건네주고 상인은 종희에게 말을 건네준다.

 

 종희가 넘겨받은 말고삐를 잡고는 상연에게 다가온다. 활짝 웃는 얼굴.

 

 “저 말 타는 거 구경하세요! 완전 잘 합니다!”

 

 큰소리친다.

 

 “네?”

 

 상연은 믿기 어렵다.

 

 종희가 익숙하게 말 허리를 쓰다듬더니 힘차게 말에 올라탄다. 말이 ‘히히힝’ 울면서 한번 뛰지만 종희가 익숙하게 말 갈퀴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킨다.

 

 종희가 말허리를 발로 한번 치자 말이 조금씩 걸어나간다. 한참 마시장에서 떨어져 걸어나가자 너른 강변 벌판이 나온다.

 

 종희가 말허리를 발로 세게 차자 말이 벌판을 가볍게 달린다. 한강의 흐르는 반짝이는 물결을 배경으로 바람이 불어와 종희의 머리카락을 날리고 말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유연하고 벌판을 달려나간다.

 

 벌판의 풀들과 꽃들이 말발굽이 지나갈 때마다 흔들리고 말의 움직임에 유연하게 몸을 맡긴 종희의 움직임도 아름답다고 상연은 탄복하며 바라본다.

 

 종희의 말이 원을 그리며 돌아와서는 상연 앞에 선다.

 

 “선생님도 타세요”

 

 종희가 말 안장 위에서 손을 내민다.

 

 “제가요?”

 “네. 기분이 얼마나 좋다구요.”

 “아이. 뭐. 나까지.”

 

 상연이 손사레를 치지만 종희가 몸을 굽혀 상연에게 손을 내밀자 상연은 엉겁결에 손을 잡는다. 종희가 잡은 손을 힘껏 끌어 올리고 상연의 몸이 훌쩍 말 안장으로 올라 안착한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상연은 당황하고 높은 말 위에서 좀 무서워진다.

 

 “무서우시면 제 허리를 꼭 잡으세요.”

 “네?”

 

 상연이 당황하지 종희가 상연의 팔을 뒤로 잡더니 자기 허리 위에 올려 놓는다.

 

 “생각보다 많이 흔들려요. 저를 꼭 잡으셔야 해요.”

 

 종희가 다구친다.

 

 “이거 참.”

 

 하면서도 상연은 종희의 허리를 꼭 잡는다.

 

 “우리 달려 보자구요!”

 

 종희가 말허리를 발로 차고 말이 공터를 향해 달려나간다.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흔든다. 둘은 웃는 얼굴로 바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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