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케야 신기부쉬 푸시에 주취에시데야호. 징데야 주도옹포 취데야호. 게와 메이찡 잉고찡. (두통, 몸살, 설사, 지사에 필요한 약들 주세요. 복통에 필요한 약도 주시구요. 각각 1키로씩 주세요)”
세미가 상해 약국으로 들어와 중국어로 약을 달라고 한다. 프랑스 조계령 내 번화가에 있는 약국은 중국인이 운영하고 있지만 지역 특성 탓에 외국인들도 많이 드나든다.
세미는 임무에 필요해 겨우 익힌 몇마디 중국어로 화약 재료를 구하려고 한다. 창문 밖으로는 멀리에서 김원봉이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중국인 약사는 세미의 주문에 의심하는 눈빛을 보인다.
“무슨 약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세요? 도대체 어디가 아프신 건가요?”
중국어로 물어보는 중국인 약사의 말을 세미가 못 알아듣고 우물쭈물한다. 엉겁결에 조선어가 나온다.
“아니. 그게.”
중국인 약사가 세미의 조선어를 알아들었다. 옆에 서 있던 다른 약사와 중국어로 얘기한다.
“무게도 딱딱 맞춰서 말하고 좀 이상한데.”
세미는 중국인 약사가 수군거리자 당황해 눈치를 살핀다.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하는지 걱정이 된다. 옆의 약사가 귀에 대고 수군거린다.
“약이 이렇게 많이 필요하다니. 여기는 조선인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지역이다. 조선인들 망명정부인가가 이 지역에 있잖아. 거기 작년에 조선에 폭탄도 던지고 한 집단 아니야?”
“약품 속에는 화학 물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죠. 폭탄 제조하는 데 쓰이기도 해요. 아무래도 여자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중국인 약사들은 세미를 의심의 눈빛으로 훑어보며 계속 수군거린다. 세미는 그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다. 얼굴이 하얘지고 손에서 식은땀이 난다.
등 뒤에 손을 숨기고 흔들어 약국 유리문 밖에서 지켜보는 김원봉에게 표시를 한다. 김원봉이 주변을 살피며 약국으로 다가온다.
그때 옆에서 주문을 한 후 약을 기다리던 서양 남자가 영어로 약사에게 말한다.
“던유 기브 미 마이 메드생? (제 약 안 주세요?)”
“싱셔덩 (기다리세요).”
중국인 약사가 알아듣고 급히 제조실로 들어간다. 김원봉이 약국 문을 열고 들어선다. 세미가 김원봉을 모르는 체하며 급하게 서양 남자에게 가더니 말을 붙인다.
“굿모닝! 젠틀맨!”
서양 남자가 뭐야 하는 눈빛으로 세미를 본다. 하지만 예쁜 동양 여자라 웃으며 인사한다.
“하이!”
“굿 애프터눈! 젠틀맨!”
세미는 아는 영어가 몇마디 없다. 일단 급한대로 아무거나 지른다. 서양 남자가 세미의 말에 당황한다. 하지만 여전히 예쁜 동양 여자가 생글생글 웃는다.
“굿 애프터눈!”
대답해 준다. 중국인 약사가 조제실에서 나오며 둘을 본다. 세미는 얼른 서양 남자 옆으로 다가가 팔장을 낀다.
“굿 이브닝! 젠틀맨!”
세미가 팔장을 낀 체 생글거리며 말하자 서양 남자가 헉 놀란다. 옆에 서 있던 중국인 약사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저기’하며 중국말로 끼어들자 세미가 서양 남자를 팔장을 낀 체 퍽 끌더니 약국 문을 연다.
그때 뒤에서 약사가 약봉지를 흔든다. 그걸 김원봉이 얼른 받아서는 서양 남자를 잡는다.
“히얼 유 아.”
서양 남자가 엉겁결에 약봉지를 받는다.
“댕큐!”
“젠틀맨! 고!”
세미가 서양 남자를 끌고 나간다. 서양 남자가 영문도 모르고 끌려나간다. 중국인 약사가 눈이 커져서 둘이 나가는 걸 보지만 동양인 특유의 서양인 공포 증상 때문에 잡지 못한다.
팔장을 낀 세미와 서양 남자가 완전히 약국을 나가 문을 닫는데 중국인 약사는 쳐다만 보고 김원봉은 슬며시 만족스럽게 웃는다.
약국을 나오자마자 세미가 서양 남자에게서 급히 팔을 뺀다.
“댕큐!”
세미가 고맙다고 말하자 서양 남자가 황당해서 겨우 말한다.
“유아 웰컴!”
세미가 세차게 돌아서 걸어가는데 안심하면서도 낭패한 얼굴이다. 그 뒤로 서양인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세미에게 소리친다.
“레이디! 왓? 후 유아? (숙녀분! 뭡니까? 당신 뭐예요?)”
세미가 못 들은 척 뛰어나간다.
***
오후 수업이 끝나고 경성 국민학교 미술실에서 애숙은 교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미술실 문이 열리고 40대 후반의 남자가 들어온다. 교장 선생님이다.
“교장 선생님이 웬일로?”
“아. 선생님한테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네. 무슨 부탁을?”
“4학년 1반 고정미 학생 가정 방문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고용석의 딸? 애숙은 교장의 의도가 다 읽혀서 얼굴을 찌프린다.
“네? 정미는 제가 담임이 아닌데요.”
“담임 선생님이 많이 바쁘셔서요. 담임 선생님을 좀 도와주세요. 아니 오늘부터 4학년 1반 부담임하시면 되겠네요.”
“네? 제가 부담임을요?”
“고정미 학생이 좀 특별하거든요. 거기 아버님이 조선에서 몇 안 되는 변호사이고 학교에 기부도 많이 하셔서 특별 관리하고 있습니다.”
애숙은 이미 용석의 손이 다 뻗쳐 있는 걸 느낀다. 기분이 나빠진다.
“꼭 제가?...”
“부탁드립니다.”
교장이 능글능글하게 웃는다.
“갔다 오신 후에 보고서 제출하셔야 합니다.”
교장이 덧붙인다. 애숙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지만 교장은 못 본체 하고 문을 열고 나간다.
애숙은 용석의 집 앞 대문에서 사람을 부르면서 주변의 고급스런 주택들의 풍경에 탄복한다. 집은 한일 병합 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새롭게 조성된 성북동 고급 주택지에 자리 잡고 있다.
담이 높아 안쪽 정원 풍경은 잘 보이지 않지만 잘 관리된 말끔한 대문과 대문 너머 보이는 서양식 단층 주택의 지붕은 새로 지은 티를 팍팍 내고 빛난다.
곧 식모가 와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안내한다. 거실로 들어서니 으리으리한 거실 한 가운데 용석이 기다리고 있다. 미리 이 시간에 온다고 연락을 해 놓기는 했었다.
“어서 오십시오! 선생님!”
용석은 환한 얼굴로 웃는다. 거실은 가정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샹드리에가 떨어지고 서양식 소파와 테이블로 이루어진 응접 세트가 반짝거린다.
애숙도 부유한 집이라 살림이 고급인 편에 속하는데 용석의 집은 한 단 격이 놓은 것 같다. 호랑이 표피인 듯한 양탄자도 바닥에 깔려있다.
하지만 애숙은 이 시간 용석이 집에서 자신을 맞아주자 속이 보여 얼굴이 찌푸려진다. 다만 예의를 잃을 수는 없어 허리 굽혀 인사한다.
“안녕하세요?”“누추한 곳에 다 왕림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정미는 어디 있나요?”
“하하. 선생님! 천천히 하세요. 아니 오신 김에 집 구경 먼저 시켜 해 드릴게요.”
용석이 거실 앞 커다란 창을 통해 보이는 정원을 가리킨다. 일본식으로 깔끔하게 가꾸어진 정원이다. 애숙도 아까 들어오면서 감탄했다.
“정원 손질하느라 사람을 따로 두고 있어요. 그러니까 좀 볼 만 하더라구요.”
“...”
애숙은 입을 열지 않는다. 괜히 일일이 반응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다. 그런 애숙의 냉담한 반응에 용석은 좀 성급해진다.
“방 구경도 하실래요?”
용석이 안방으로 발길을 옮기며 방문을 연다.
“이리 와 보세요!”
애숙이 가까이 가지는 않았지만 거실에서 보이는 안방에는 화려한 침대와 옷장, 화장대 등이 보인다. 애숙의 눈이 커진다.
“이혼한 전 아내 화장대를 아직 못 치웠네요. 하하. 2층에 다른 좋은 방도 있는데 한번 구경하시겠어요?”
용석이 앞서 나가며 애숙을 2층 계단으로 안내한다. 2층 중앙에 있는 가장 커다란 방은 정원 쪽으로 창이 커다랗게 나 있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방 한가운데에는 이젤이 놓여 있다.
“뭐 하시는 방이에요?”
“우리 아이가 가끔 와서 그림 그립니다.”
“아이가 그림 그리기에는 너무 좋은 방이네요.”
“애숙씨 같은 분이 그림 그리기에 좋은 방이지요. 하하하”
용석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애숙은 얼굴을 확 구긴다. 하지만 용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저하고 결혼하시면 그림은 마음껏 그릴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애숙은 못 들은 척 말없이 창문 너머 정원만 내려다본다.
“예술가들이 자유분방한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 생각도 제가 다 이해하고 포용하겠습니다.”
그 말에 애숙이 고개를 돌려 용석을 유심히 본다. 그리곤 입을 연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부를 누리시는 게 조선인으로서 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용석이 당황한다. 무슨 말이야 하는 듯한 눈빛이다.
“아. 그건. 뭐. 조선인들이 못 나서...”
하다가 입을 다문다. 이 남자는 머리 회전이 빠르다. 애숙이 하는 생각이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
“조선인들이 일본인들 때문에 땅도 빼앗기고 세금도 많이 부과되고 또 국왕도 폐위되고...”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애숙이 다구친다.
“그, 그럼요.”
용석이 대답하자 애숙이 살짝 미소짓는다. 용석도 마주 웃어준다.
***
종희가 병실에서 바쁘게 일하는데 남자 아이가 와서 툭 치더니 종이쪽지를 넘긴다. 쪽지를 펴 보고 종희는 놀라며 너무 반가웠다. 안에는 ‘마포 나루 보부상들한테 유명한 장터 국밥집에 있다. 배고프다. - 임난봉’이라고 적혀 있다.
종희는 바로 서경인 걸 알아챈다. 한달 전 경성에서 처녀 애국자 강연회를 한 후 서경이 개성으로 간 건 아는데 이후 소식이 끊겼다.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 연락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개성 부모님도 종희를 찾아 왔었다. 당분간 자신을 찾지 말라고 편지를 써 놓고 행방이 없어졌다는 거다. 편지에는 건강하게 잘 지내시라구 저도 건강하게 잘 지내겠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종희는 너무 걱정하시는 부모님을 뵙는 게 민망했다.
종희는 일단 무슨 사정인지 서경을 먼저 만난 후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애숙에게도 연락해 함께 마포 나루로 간다.
종희와 애숙이 국밥집을 들어서니 원래 보부상들에게 유명한 국밥집답게 여기저기 밥상엔 보부장들이 잔뜩 있었다. 다들 남자라 종희가 애숙은 여기에 서경이 있을까 의심했다.
하지만 저쪽 구석에 예쁘장하게 생긴 보부상이 손을 흔들 때 종희와 애숙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보부상 모자 아래에 머리카락이 짧은 남장이지만 얼굴은 영락없는 서경이다.
종희와 애숙이 급히 다가가 말을 건넨다.
“임서방님이십니까?”
“네. 개성에서 내려왔습니다.”
종희가 웃음을 참으며 점잖게 묻자 서경도 굳이 남자 목소리를 흉내내며 점잖게 대답한다.
“주문한 빗이랑 연지분은 가져 오셨나요?”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제가 또 약속을 탁탁 지키는 남자잖습니까?”
애숙이 살랑거리며 묻자 서경이 묵직하게 대답한다. 그리곤 누가 눈치를 챌까 주변을 돌아보는데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자 셋은 잠시 킥킥 웃는다.
애숙과 종희가 서경 앞에 앉으며 작은 소리로 묻는다.
“너 어디 있었니?”
“개성에서 너희 부모님 난리 났다. 딸 없어졌다고.”
서경이 이한의 첩자로 일했다는 걸 종희와 애숙은 모른다. 서경은 이들에게 그 사정을 얘기할 수 없다고 다짐한다.
“응. 나 잘 지냈어.”
밝은 표정이다.
“아니다. 잘 못 지내고 있어. 배고파 죽겠다. 쌀 좀 사줘.”
하긴 얼굴이 좀 그을리고 여위였다. 종희가 서경의 등을 손으로 탁 친다.
“야. 뭐야? 굶고 지내냐?”
“옷은 이게 뭐니? 머리 짧은 거 좀 봐! 너 남자 행세하니?”
허름한 서경의 보부상 옷차림을 보고 애숙이 나무란다. 서경은 급히 입술에 손을 갖다 대며 ‘쉿’한다.
“그럴 일 있어. 좀 숨어 다녀야 해.”
서경이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더 낮춘다.
“나 경상도 산 속에 살고 있어. 짐승 잡아 먹으면서.”
종희와 애숙이 크게 웃는다.
“그런데 쌀은 왜 사 달래냐?”
“밥을 너무 오래 못 먹었더니 못 살겠다. 짐승이 돼 가는 것 같애.”
“헐. 하긴 몰골이 짐승 비슷하다.”
애숙이 자신의 고급스런 스커트에서 먼지를 털어내며 서경에게 말한다.
“그럼 밥부터 먹어라. 내가 돈 낼게.”
서경 앞에 놓인 국밥을 가리키며 종희가 말한다. 서경은 헤헤거리며 편한 얼굴로 허겁지겁 먹는다.
그리곤 세 여자는 종희의 집으로 갔다. 서경은 하룻밤 자고 갈 예정이다. 밤이 되자 종희 방에 이부자리를 펴고 세 여자는 편하게 눕는다.
“검문 검색이 심해서 기차로는 못 왔어. 보부상 길 따라서 한참 걸어 왔네. 다행히 머리가 짧아 남자 행세 하기 편해.”
“너 죄 지었니? 왜 기차를 못 타?”
“나 좀 큰 죄 지었어. 하지만 모른 체 해 줘. 그리고 우리 부모님한테 나 잘 있다고 전해줘요.”
서경이 밝은 표정으로 종희에게 말한다. 그동안 부모님 걱정이 컸다.
세 여자는 다리를 쭉 펴고 이불을 덮는다. 편한 얼굴들이다.
“나 청혼 받었어.”
애숙이 갑작스럽게 말을 꺼내자 서경과 종희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