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에 들어가 고문당한 의열단원을 침대에 눕힌다. 숨을 쉬지 않아 종희가 급히 가슴을 누르며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 하지만 의열단원은 반응이 없다.
“이 놈 살려 내야해! 내가 들어야 할 말이 있다구”
하시모토가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를 지른다. 종희가 계속 가슴을 누르고 인공 숨을 불어 넣으며 하시모토에게 묻는다.
“이 환자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나요?”
“물을 좀 많이 들이켰소”
“물을 많이 먹어서 이렇게 될 수 없는데...”
종희가 계속 팔을 움직이며 의심쩍어한다. 계속한 노력 때문인지 환자가 조금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제야 종희는 환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는데 맞아서 눈두덩이는 부어 있고 입술은 핏기 없이 백짓장 같고 얼굴 여기저기 피멍이 가득하다. 비참한 모습이다.
환자가 숨을 쉬기 시작하자 하시모토가 급히 얼굴을 환자에게 들이대고 묻는다.
“대구에서 뭐 하려고 했냐니까? 대구 경찰서에서 폭탄을 발견했다구. 폭탄으로 뭘 하려고 했어?”
하시모토가 환자의 상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칠게 묻는다. 옆에서 듣던 종희가 놀라서 하시모토와 환자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본다.
이때 의열단원이 입을 옴싹거린다. 그러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뭐라구?”
하시모토가 귀를 갖다 댄다. 그제야 말이 들린다.
“말 할 수 없다.”
하시모토의 얼굴이 화가 나 얼굴이 울그락붉으락 해지더니 그대로 환자의 가슴을 손으로 누른다. 환자가 욱 고통스러워한다. 종희가 하시모토의 팔을 잡으며 소리친다.
“뭐하시는 거예요?”
하시모토가 손을 떼 내더니 다시 환자에게 묻는다.
“말만 하면 당신 가족들도 내가 다 보살펴 준다니까. 알아보니까 네 아내랑 아기랑 굶어 죽기 직전이더라구.”
그 말에 환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입을 연다.
“대구 경찰서 폭파할 거요.”
하시모토가 눈을 크게 뜬다. 다시 환자의 입에 귀를 대고 묻는다.
“언제?”
“곧.”
작은 대답이 들린다. 하시모토가 환자에게서 몸을 떼더니 하하하 만족스럽게 웃는다. 종희가 의아스러워 쳐다본다.
“빨리 대구로 가야겠군.”
하시모토가 돌아 나가자 종희가 당황하여 등 뒤에 대고 소리친다.
“환자분은 어떻게 할까요?”
“감옥에 다시 가둬야지.”
“네? 이 분 죽기 직전이세요.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합니다.”
종희가 기가 막혀서 화를 낸다. 경감이고 뭐고 보이지 않는다.
“내 알 바 아니야.”
하시모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며 소리친다. 종희가 급히 하시모토를 따라가 앞을 가로 질러 막아선다.
“저 분 고문당하신 겁니까?”
분노로 목소리가 절로 올라갔다. 말을 뱉고 보니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당신이 고문한 거지? 당신은 저 환자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반말이 쏟아져 나온다.
“아니. 이 여자가 뭐래? 이 간호부 미쳤나? 감히 총독부 경감한테 대들어? 비켜!”
하시모토가 부하 경감 두 명과 병실을 나간다. 종희가 뒤따라 간다. 그들은 로비로 들어선다.
로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하시모토 일행은 사람들을 헤치고 급하게 나아간다. 종희가 따라가다가 소리친다.
“사람을 고문했으면 살려는 놔야지? 죽어 가는 사람을 그냥 내팽겨치는 거냐? 이놈아!”
종희가 분노에 차서 소리 지른다. 오가는 사람들이 그 소리에 종희와 하시모토를 돌아본다. 하시모토가 돌아서 종희를 잠깐 보지만 급한 얼굴로 그대로 로비를 가로지른다.
종희가 뛰어서 현관까지 따라간다. 하시모토가 현관 앞에 세워 둔 총독부 자동차로 향한다. 현관 위로는 아치형의 지붕이 있고 지붕에서 공사를 하려던 듯 사다리가 가로질러 옆에 놓여 있다.
하시모토는 무심하게 자동차에 오르고 종희는 그걸 보더니 현관 아치를 가로지른 사다리를 오르면서 소리 지른다.
“고문한 사람을 살려 놔라! 사람 목숨이 우선이다!”
평소 걸걸한 목소리 때문에 소리가 크다. 그러자 오가던 사람들이 쳐다본다.
자동차에 타려던 하시모토와 형사들도 멈추어 서서 사다리를 올라가는 종희를 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현관 아치 지붕을 쳐다본다.
마침내 종희가 아치 지붕 위에 올라서서 계속 소리친다.
“고문한 사람을 살려 놔라! 사람 목숨이 우선이다!”
온 힘을 다해서 소리 지른다. 이제 꽤 많은 사람들이 현관 아치 지붕 앞으로 몰려 들었다. 그들은 종희가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하시모토도 낭패한 얼굴로 올려다 본다.
하시모토는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옆에 있던 부하들에게 잡으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부하 경감 둘이 아치 옆 사다리에 가 오르기 시작한다.
조금 후 두 경감은 아치 지붕 위에 도달해 계속 소리 지르는 종희를 잡는다. 종희가 잡히지 않으려 몸부림치면서도 계속 ‘고문한 사람을 살려 놔라!’고 소리친다.
경감들이 종희의 팔을 잡고 사다리에 끌고 내려온다. 아치 지붕 아래에서는 상연이 뛰어 나오는 게 보인다.
드디어 경감 둘은 종희를 사다리에서 끌어 내려 양팔을 잡아 제어하고는 종희를 자동차 옆으로 끌고 온다. 그 주위로 사람들이 잔뜩 모여든다.
하시모토는 종희를 경찰서에 끌고 가려고 자동차에 태운다.
“급해 죽겠는데 뭔 간나가 이렇게 난리를 쳐! 빨리 빨리 경찰서에 쳐넣자!”
하시모토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부하들에게 짜증을 낸다. 종희는 자동차에 타려다 몰려 든 사람들 사이에서 상연을 본다. 안타까운 얼굴이다.
“선생님! 우리 어머니하고 아이한테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상연이 말을 듣고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종희가 그대로 자동차에 오른다.
종희는 종로 경찰서에 연행된다.
“이거 미친 여자야! 총독부 의료원에서 시위를 했어! 유치장에 좀 쳐 넣으라구.”
종희는 업무 방해죄로 유치장에 수감되자 하시모토는 뒤돌아 서면서 불만을 터뜨린다.
“내가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는데... 빨리 대구 내려가 봐야 하는데. 재수없어, 씨발!”
하시모토가 그대로 나가버리자 종희가 나가는 하시모토를 의미심장하게 본다.
***
“아무래도 글리센에틸렌이 부족해. 그걸 구해야겠어.”
아무래도 경상도 산 속 깊은 곳 집이라 부족한 게 많다는 걸 세미도 이해한다. 하지만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니 그거면 됐다.
서경이 숨어 있는 집 부엌에서 세미와 서경은 폭탄을 제조한다. 부뚜막에는 사기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릇마다 화약 가루가 담겨 있다.
중국에서 가져온 천칭이 가운데 있고 세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가루들을 천칭 그릇 위에 놓고는 무게를 가늠한다. 옆에서는 서경이 세미가 가르쳐 준 대로 그릇 안의 가루들을 섞는다.
“뭐, 글리 뭐라구?”
“글리센에틸렌. 감기약에 들어 있어.”
“그래? 그럼 약국 가서 감기약 사 오면 돼?”
“응. 서양식 약국이 별로 없으니까 대구 시내까지 나가야겠네.”
“그래야겠다.”
서경은 대구로 내려갈 채비를 한다. 서경과 세미는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 둘 다 위험한 처지라 각자 행동하기로 했다.
***
“이렇게 머리를 묶으니까 더 예쁘지?”
애숙이 이제는 딸이 된 열 살 민정의 머리를 묶어주며 다정하게 묻는다. 애숙은 학교 제자에서 딸이 된 민정이 적응을 못하고 반항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민정은 담담하게 애숙을 엄마로 대했다.
아직 엄마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애써 호칭을 생략하면서도 애숙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는다.다섯살 아들 민수는 더 아무것도 몰라서 애숙에게 잘 안긴다.
“어머니! 양말 찾아 주세요.”
“서랍에 양말이 없어? 얼른 가자! 내가 찾아 줄게.”
신혼여행을 가까운 곳으로 다녀와서 신혼 생활은 용석의 집에서 바로 시작되었다. 필용의 산소로 다녀온 신혼여행 이후 애숙은 용석에게 잘 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둘의 신혼 생활은 원만하고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다.
“조선 땅에서 유화를 제대로 그릴 줄 아는 여류 화가는 당신뿐일 게요.”
애숙은 용석이 마련해 준 2층 화실을 자주 이용한다. 화구도 최고급으로 구비되어 있고 창 밖 정원 풍경도 좋아 그림이 절로 그려지는 것 같다.
용석이 그림을 그리는 애숙 옆에 서서 칭찬한다. 처음 서약서를 쓴 대로 용석은 애숙의 그림 그리기를 전폭 지원하고 있다.
집 안에 식모가 둘이나 있으니 아이 돌보기나 살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그림에 집중하라는 거다. 애숙은 살림을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자신이 어떻게 돌보지 않겠느냐며 적지 않은 시간을 아이들에게 내주고 있다.
애숙이 아이들과 다정하게 지내는 걸 보며 용석은 더욱 만족스럽다.
“내가 정말 결혼 잘 한 것 같소. 이렇게 좋은 여자랑. 하하하.”
침대에서 용석은 애숙을 꼭 안으며 뜨겁게 말한다.
***
대구 시내 번화가에 하나밖에 없는 서양식 약국은 대구 경찰서에서 그리 멀지 않다. 서경은 세미가 가르쳐 준 글리센에틸렌이 들어간 감기약을 사서 약국에서 나와 번화가를 지나다 대구 경찰서 앞에 다다른다.
오늘 서경은 서양 바지와 셔츠의 남자 옷 차림에 빵모자를 쓰고 짧은 머리카락를 드러내고 있다. 변장하느라고 했는데 전에 홍석원 경감 밑에서 첩자 할 당시 옷차림이다. 가지고 있는 옷이 많지 않아 보부상 차림을 할 수는 없었다. 무심히 대구 경찰서 앞을 지나간다.
건물 앞에는 하시모토가 번화가를 오가는 사람들을 서서 관찰하고 있다. 의열단원을 고문해서 얻은 정보로 대구 경찰서로 내려온 하시모토는 서 앞에서 눈에 불을 켜고 사람들을 관찰 중이다.
그러다 남장 차림의 서경을 본다. 하시모토는 어디서 본 얼굴이라는 생각이 드는 데 빵모자 밑의 짧은 머리를 보고는 서경을 알아본다. 하시모토는 눈이 번쩍 뜨인다.
“아! 홍석원 조수”
하시모토가 ‘저년 잡아라’ 하고 소리치며 서경을 향해 달려나간다. 서경도 돌아보고는 하시모토를 금방 알아본다. 경악하여 거리를 달리기 시작한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아 계속 부딪히면서 서경은 뒷골목으로 접어든다. 조금 달리니 막다른 골목이다. 서경은 숨을 할딱거리며 당황한다.
골목을 나오려고 돌아서는데 하시모토가 나타난다.
“이거 대박인데! 홍석원 조수! 하하하!”
하시모토가 능글거리며 천천히 다가온다. 서경은 얼굴이 굳어지더니 하시모토에게 달려들어 발차기를 날린다. 하지만 하시모토가 가뿐히 피하며 서경의 등을 손으로 쳐 팔을 잡고 비튼다. 헉.
“내가 아주 대어를 낚았어! 가자!”
하시모토가 승리의 미소를 얼굴 만면에 띄우고는 수갑을 서경에게 채우려는데 갑자기 퍽 목을 맞는 소리가 들리더니 ‘윽’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꼬꾸라진다.
뒤로 보이는 얼굴은 이한이다.
“선생님!”
서경이 대번 이한을 알아보고 감격에 차 부른다.
“어떻게 아시고?”
하시모토를 살펴보면서 이한이 대답한다.
“상해에서 연락 받았어요. 조심하십시오.”
이한이 말을 마치자마자 골목을 나가 주변을 살피더니 돌아서 서경에게 고개를 까닥한다.
“다시 볼 날이 있겠지요. 그럼.”
이한이 돌아서서 고개를 숙이고는 골목을 나간다.
“선생님! 어디에 계세요?”
이한이 걸어가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못 들은 척 그대로 걸어나간다. 서경이 아쉬운 눈빛으로 뒷모습을 본다.
그때 멀리서 경찰들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서경이 넘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진 약봉지를 소중히 챙기더니 골목을 빠져나간다.
***
“이한이 나타나서 도와줬어.”
어두워져서야 산 속 아지트에 도착한 서경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세미에게 말한다. 서경을 기다리며 부엌에서 작업을 하던 세미는 약봉지를 열어 가루를 그릇에 쏟으며 묻는다.
“이한? 누구야?”
“의열단원.”
“그래? 내가 의열단원인데.”
세미가 고개를 들어 서경을 보며 눈을 반짝한다.
“너도?”
서경도 눈을 반짝한다.
“너도?”
“응. 상해에서 김원봉 만났잖아. 근데 의열단원들은 서로서로 잘 몰라. 경찰에 잡혀가면 정보 누설할까 봐 일부러 서로 모르고 지내.”
“그래, 그렇구나.”
서경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서경은 세미의 손놀림을 보면서 생각이 깊어간다. 이한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위험하지는 않은가? 밥은 잘 먹고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걸 서경은 막을 수 없다. 서경의 복잡한 머릿속과 관계없이 세미는 작업을 계속하며 그릇의 가루들을 섞는다.
“이게 마지막이야. 이제 3개 만들었어. 원료를 구하기 힘들어 이거 밖에는 못 만들겠다.”
세미가 푸념한다.
그때 밖에서 둘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온다.
“서경아! 세미야!”
애숙의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