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여자는 우여곡절 끝에 산 속 서경의 아지트에 도착한다. 벌써 한참 어두워진 건 다행이다. 남 학생복 차림의 서경과 기모노 기생 차림의 세미, 남장한 화상 차림의 애숙과 말타기 편한 차림의 종희가 가쁜 숨들을 몰아쉬며 방 안에 들어 온다.
“다행히 다들 무사히 돌아왔네.”
서경은 아직도 완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입술이 살짝 떨린다.
“종희 언니! 고마워요! 언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안 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왔어요?”
세미가 아직도 얼굴이 빨간 체 종희에게 고마워한다. 정말 그 자리에 종희가 말을 타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말은 주인에게 돌려주고 왔지만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
“안 오려고 했지. 우리 병원에 조선 총독부 경감이 독립 투사를 데리고 왔어. 그 투사가 너무 고문을 당해서 거의 죽음 직전이더라. 그 경감이 듣고 싶은 얘기를 듣더니 치료도 안 하고 감옥에 다시 쳐넣었어. 그럼 죽을 텐데.”
종희가 평소답지 않게 얼굴이 흐리다. 다들 숙연해진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종희가 깊은 목소리로 덧붙인다.
“언니 생각이 바꿨구나!”
종희가 폭력에 반대할 때 가장 반박했던 세미가 입을 열며 물끄러미 종희를 바라본다. 종희는 이런 숙연한 분위기는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 불편해진다. 표정을 바꾸고 애숙에게 장난스레 묻는다.
“너는 신혼인 애가 신랑이 뭐라고 안 하니?”
“언니 잊었어? 내 생활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결혼 서약서 쓴 거.”
“아하. 그랬지.”
“다들 수고했어. 역시 우리는 무적의 사공주야.”
세미가 하하 웃으며 말하자 세 여자는 긴장한 얼굴들을 편다. 하지만 서경은 얼굴을 펼 수가 없다.
“대구 경찰서에 하시모토가 있었어.”
“하시모토가 누구야?”
“조선 총독부 경감인데 사실 날 쫓고 있어.”
“뭐라구?”
세 여자가 일제히 놀라 서경을 본다.
“널 알아봤어?”
“아뇨. 못 알아 본 것 같아요.”
“하지만 곧 추격에 나설 거야. 서경이 너도 중국 갈 계획이고 나도 곧 상해 의열단에 복귀해야 하니 빨리 여기를 뜨자.”
의열단에서 김원봉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세미가 재빨리 판단을 내린다. .
“그래.”
서경이 동의한다.
“우리 그래도 잘 했지? 안 잡히고.”
서경은 얼굴을 펴며 세 여자를 자랑스럽게 둘러본다.
“아냐.”
세미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두운 얼굴빛이 된다.
“폭탄이 하나도 제대로 터지지 못했어. 내가 잘 못 만들었나 봐.”
세미의 가라앉은 음성에 다들 조용해진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이번 거사는 실패한 거야.”
처음 이번 거사를 제안하고 폭탄을 제조한 세미는 마음 깊이 미안해진다. 김원봉이 많이 지원했고 친구들이 모두 기댔었는데...
하지만 종희가 세미의 어깨를 감싼다.
“그래도 폭탄이 작게라도 터졌고 아마 대구에서는 난리가 났을 거야. 독립을 바라는 조선인들이 아직도 많다는 걸 사람들이 알았을 거야.”
“그럼. 일본 경찰도 많이 놀랐을 거고.”
서경이 얘기하며 적어도 바위에 던진 계란때문에 바위가 더러워졌다고 생각한다.
“다음번엔 좀 더 잘 만들어 봐! 폭탄이 그게 뭐니? 터지지도 않고”
애숙이다. 세미에게 못마땅한 표정이다. 그림을 그리느라 만사 완벽을 추구하는 애숙은 세미의 실수가 불만스럽다.
세미가 흘낏 애숙을 본다. 폭탄을 만드는 게 얼마나 기술이 필요한 일인데. 또 여기에서는 재료를 제대로 구할 수가 없어 처음부터 품질을 확신할 수 없었는데. 억울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차여차 변명할 수는 없다. 입을 다문다. 서경이 세미가 기분 나빠하는 표정을 읽는다. 얼른 분위기 바꾼다.
“오늘 수고했으니까 씻고 자자. 종희 언니랑 애숙이는 아침 일찍 경성 올라가야지.”
다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종희가 서경을 부른다.
“참. 서경이 너한테 줄 거 있다.”
종희가 가져온 가방을 여니 가발이 나온다. 단발머리 가발이다. 서경이 눈이 커지며 좋아한다.
“단발머리네.”
“이거 구하느라고 온 경성을 휘젓고 다녔다. 짧은 머리 미워서 너 이쁘라고 이 언니가 애 좀 썼다. 이거 쓰고 임처녀로 돌아가야지!”
“언니! 고마워요! 꼭 필요했어요.”
서경이 가발을 꼭 안으며 눈이 반달이 된다. 새삼 종희 언니의 깊은 배려에 마음이 울컥해진다.
***
“나 좋아하는 남자 생겼다.”
네 여자는 나란히 좁은 방안에 붙어 누운 체로 종희의 말을 듣고 일제히 종희에게 고개를 돌린다. 믿기 어려운 말이다. 우리 중에 가장 나이 많은 언니에 이미 결혼도 해 본 여자다.
평소 걸걸한 목소리답지 않게 조용하지만 내용은 폭탄 격이다.
“정말요?”
세 여자가 일제히 소리 지른다.
“언니 잘 됐다. 누군데?”
“같은 병원 근무하는 의사.”
“잘 해 봐요!”
“근데 그게 아니다.”
용기를 주는 서경의 말에 종희는 맥빠진 목소리다.
“뭐가요?”
“그 남자가 독립운동 왜 하냐고 한다. 조선 독립은 안 이루어질 거라고.”
“뭐야? 언니가 좋아할 타입이 아닌데...”
서경이 퉁명스럽게 내지른다.
“언제는 남자를 변화시키라며?”
애숙이 용석과 결혼하려고 고민을 토로했을 때 서경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남자 사겨봤자 뭐 있나?”
세미가 냉소적으로 말을 돌린다.
“그래. 내가 그런 남자 좋아하지 않지. 그런데 이 남자는 좋다. 나이답지 않게 신중하고 진실하고... 조선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말도 진심으로 하고.”
종희가 읊조리듯 내뱉는다.
“그래요? 그런 말도 진심으로 느껴져?”
서경이 몸을 일으켜서 종희를 똑바로 보며 다구치듯 한다.
“응. 마음이 기울어.”
애숙도 일어나 앉으며 누워 있는 종희에게 부드럽게 말한다.
“언니. 사랑은 마음이 기우는 대로 하는 거야. 마음이 기우는 데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거라구요.”
“지금까지 연애 박사의 말씀이셨습니다.”
연애 박사 애숙의 말에 서경이 장난끼를 발동시킨다.
“사랑 그런 거 아무 소용 없는데...”
“지금까지 연애 허무주의자의 말씀이셨습니다.”
세미가 냉기를 뿜어내자 서경이 말뚝을 박는다. 종희가 피식 웃는다.
“지금까지 일대일 상황입니다. 그럼 내가 중간에서 한쪽 편을 들어야 하나?”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난... 언니에게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한다에 한표 던집니다. 더 늙기 전에 사랑에 빠진다를 밀어 줍니다.”
“야! 넌 언니가 늙었으니까 더 늙기 전에 하라는 거야?”
서경의 능청스런 결론에 종희가 일어나 앉으며 서경의 등짝을 때린다.
“아야! 헤헤. 일단 언니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말에서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은 언니를 속이지 않을 거예요.”
얼굴은 장난이 가득하지만 서경의 목소리는 진지하다.
“그런가?”
종희가 잠시 생각한다.
“그래도 아니야. 조선 독립을 부정하는 사람과는 같이 할 수 없다. 난 여학교 때부터 독립운동하는 남자하고만 연애하기로 했어. 아니면 남자로 보지도 않기로 했다구. 서경이 너 기억나지?”
“그럼. 그래서 우리 겨드랑이에 태극기 문신도 하고 했잖아.”
“잘 생각했어요.”
세미가 단호하게 결론을 짓는다.
“그래. 아무래도 헤어지는 게 맞겠다.”
종희의 결심에 세 여자가 종희를 돌아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종희의 얼굴엔 아쉬움과 고민이 보인다.
“언니 생각대로 해야죠. 언니 자요!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해요. 오늘 하지 말구.”
그 말에 네 여자는 일제히 자리에 눕는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그녀들의 얼굴을 비춘다. 네 여자는 각자의 상념에 잠겨 몸을 뒤척이거나 눈을 감는다.
***
서경과 세미는 일본으로 건너간 후 상해로 가기 위해 부산항에서 일본 가는 배를 타기로 했다. 역시 승객들에 대한 검문검색은 심하다.
도쿄로 가는 배 오르는 계단 입구에 일본 경찰들이 서서 배에 오르는 승객들의 통행권을 세심히 검사한다. 경찰들 손에는 서경의 얼굴 사진이 들려 있다. 다행히 빵모자를 쓰고 남장한 얼굴이다.
서경은 기모노를 입고 종희가 구해다 준 단발머리 가발을 쓴 걸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배에 오르는 승객줄에 선다. 올 때처럼 중국 여자 옷을 입은 세미도 긴장한 얼굴로 세미 뒤에 선다.
둘은 경찰 앞에 서고 통행증을 내민다. 서경의 것은 홍석원이 만들어 준 통행증이다. 경찰이 세심하게 살피고 손에 든 서경의 사진을 대조하지만 특별히 알아채지는 못한다.
세미의 통행증은 의열단이 위조한 중국인 통행증이라 자세히 살피지도 않는다. 둘은 무사히 경찰 앞을 통과해 배에 오른다.
서경과 세미는 도쿄에서 배를 갈아탄다. 도쿄에서 상해로 가는 배라서 그런지 배는 훨씬 더 크다.
둘은 일반 객실에 자리를 잡는다. 넓은 객실은 마루로 되어 있어 50 여명의 승객들이 앉거나 누워 있다. 살짝 배가 흔들리지만 워낙 배가 커 움직임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승객들은 대부분 일본 옷차림이지만 간혹 중국 옷차림이거나 한복 차림인 사람도 보인다. 기모노를 입은 서경과 중국 여자 차림인 세미는 주변을 살피며 가까이 앉아 있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둘은 되도록 대화를 피하고 있다. 그녀들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기모노 차림의 중년 부인도 혼자 앉아 있다.
일반 승객실 마루 옆에는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니는 복도가 있고 그 사이를 상인이 지나가며 간단한 음식을 판다. 서경과 세미는 상인으로부터 주먹밥과 된장국을 산다.
둘은 객실 마루 한쪽에 둔 작은 상으로 가서 음식을 올려놓고 먹는다. 들고 있던 보퉁이를 펴 가져온 나무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낸다. 둘은 된장국을 상에 놓은 체 숟가락으로 퍼 먹는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기모노를 입은 중년 부인이 된장국을 손으로 들어 입에 부어 먹으며 서경과 세미를 힐끗힐끗 이상하게 본다.
밥을 다 먹은 후 서경은 앉아 쉬면서도 무릎 꿇고 오래 앉아 있지 못한다. 발이 저려 버선 신은 발을 자꾸 주무른다. 중년 부인은 꽤 오랫동안 기모노 차림 그대로 무릎 꿇어 앉아 있으면서 다리를 주무르는 서경을 이상하게 본다.
서경은 남들 보지 않게 돌아 앉아 기모노 묶음띠를 열고 안쪽을 확인한다. 묶음띠 천 안으로 종이가 접혀진 게 보인다. 접혀진 종이를 정리하고 바로 잡는 서경을 중년 부인이 유심히 쳐다본다. 서경은 눈치채지 못한다.
얼마 후 배는 상해 항에 도착한다. 배의 작은 창문으로 ‘상해항’이라는 글짜가 크게 보인다.
배가 부두에 닿고 승객들이 배에서 내리기 위해 줄을 선다. 입구 앞에는 일본 경찰들이 서서 통행증 검사를 실시한다.
서경과 세미도 승객 줄에 서서 초조하게 자기 순서를 기다린다. 서경의 바로 뒤에는 일본인 중년 부인이 섰다.
경찰이 승객들의 통행증을 검사하며 한명 한명을 불러 세운다.
“이치엔 고주엔 해봐!”
경찰이 요구하자 승객들이 따라 한다.
“이치엔 고주엔!”
말을 마치자 경찰이 승객을 통과시킨다. 세미는 중국인 통행증으로 무사히 통과하고 드디어 서경이 경찰 앞에 선다.
“이치엔 고주엔 해봐!”
서경이 따라 한다.
“이치엔 코주엔!”
경찰의 눈이 커지며 의심스러워진다.
“다시!”
“이치엔 코주엔!”
서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경찰의 칼이 서경의 목덜미로 들어온다. 슥.
“조선인이다!”
서경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앞에서 내리던 세미도 뒤돌아보며 얼굴이 새하얘진다. 숨가쁜 긴장이 그녀들 사이를 흐른다. 그때 침묵을 깨는 본토 일본어가 들린다.
“얘는 우리집 식모예요. 제가 데리고 왔어요!”
뒤에 섰던 일본 중년 부인이다. 서경과 경찰이 뒤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