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章
강호무림엔 알려지지 않은 은거고수(隱居高手)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천마신교(天魔神敎)의 본거지가 있는 십만대산의 어느 골짜기에도 그런 고수가 하나 살고 있었다.
그는 마왕(魔王)도 아니고, 마두(魔頭)도 아니었다.
그는 천마신교의 최하층 계급인 마졸(魔卒)이었다.
*
드넓은 골짜기를 감싸듯이 둘러쳐진 견고한 목책.
저리 목책까지 둘러친 걸 보면 과연 잠마곡은 그 규모가 제법 큰 마곡임이 분명했다.
“으음.”
무심한 눈길로 목책을 바라보는 멋스러운 청년.
얼굴은 다소 앳돼보였지만 체구만은 당당했다.
“감히 내 아우의 가슴에 멍울을 남겼단 말이지.”
뭔지 모를 말을 나직이 중얼거린 청년은 책문(柵門)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책문 위의 망루에서 보초를 서던 두 명의 마인이 청년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한밤중에 웬 놈이지?”
“병기를 지니고 있진 않은데….”
청년이 책문 앞에 멈춰 서자 둘 중 인상이 험악한 마인이 소리쳐 물었다.
“너 뭐냐?”
청년이 고개를 쳐들었다.
“여기 곡주가 혼세비마라며?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해.”
“허어.”
“저거 미친놈일세.”
두 마인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어린놈이 겁대가리가 없어도 유분수지.
어디서 감히 곡주님을…!
“야이, 미친놈아. 좋은 말로 할 때 썩 꺼지지 못해. 이 형님들 뚜껑 열린 후엔 애걸복걸해도 절대 사정 안 봐준다.”
“반응이 딱 그럴 줄 알았다니까.”
피식 웃은 청년이 우장을 책문에 대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새끼 저거, 술 취한 것 같은데.”
“너 거기다 오줌 싸면 죽어!”
마인들이 한 마디씩 씨불였지만 청년은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리고 이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끙.”
우지지지직! 쿠우우우웅!
청년이 괴상한 신음을 흘리자마자 굵은 통나무를 엮어 만든 육중한 책문이 통째로 넘어간 것이다.
실로 엄청난 괴력이었다.
“어어…!”
“저저저…!”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인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어린놈이라서 만만하게 봤거늘.
이제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 저 정도의 괴력이면 고수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아닌가!
한밤중에 찾아와 저러는 것을 보면 분명 불순한 의도를 지닌 놈이다. 다시 말해 작금의 상황이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만약 놈이 망루 위로 올라와 공격하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둘은 죽은 목숨…다행히 놈은 넘어간 책문을 사뿐히 지르밟으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후아.”
“심장 멎는 줄 알았네.”
서로를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린 마인들.
그러다 퍼뜩 자신들의 실태를 깨닫고 부랴부랴 보초의 가장 중요한 책무를 실행에 옮겼다.
“침입자다!”
“강적이다!”
뎅뎅뎅뎅뎅뎅!
등 뒤에서 침입을 알리는 고함소리와 급박한 종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졌지만, 청년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목책 안쪽엔 크고 작은 전각 삼십여 채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저 어딘가에 그 우라질 놈들이 있다.
오늘 기어코 놈들에게 앙갚음을 하리라.
청년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이게 무슨 난리냐?”
“도대체 어떤 놈이 침입했다는 거야?”
그때, 사방 전각에서 병장기를 꼬나 쥔 마인들이 앞 다투어 달려 나왔다.
“저놈이 수상하다!”
청년을 발견한 마인들이 그를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쉬익!
그중 가장 앞선 마인이 청년을 향해 강도를 휘둘렀다.
침입자에겐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짜고짜 공격부터 하고 보는 습성. 과연 패도(覇道)를 추구하는 마인다웠다.
스윽!
마치 환영처럼 청년의 신형이 우측으로 이동했다. 강도가 맨 허공을 가르는 순간, 청년은 우각을 번개처럼 차올려 마인의 턱을 날려버렸다.
“컥!”
그것이 시작이었다.
앞선 마인을 한방에 거꾸러뜨린 청년은 지체 없이 앞으로 신형을 날려 나가 우르르 몰려드는 마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마인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휘둘러 청년을 공격했지만, 청년은 신묘한 움직임으로 병장기 사이를 요리조리 누비며 마인들을 하나하나 때려눕혔다.
그야말로 양떼 사이를 누비는 맹호란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잠깐 사이에 이십여 명의 마인들이 청년의 권각(拳脚)에 얻어맞고 고꾸라지자 어디선가 웅혼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놈을 십방마혼진(十方魔魂陣)에 가두어라!”
거짓말처럼 공세를 멈춘 마인들이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법(陣法)을 펼치려는 것이다.
청년은 차가운 표정으로 마인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윽고 마인들이 청년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일렬의 마인들은 강도를 들었고 이열의 마인들은 기다란 월도(月刀)를 들었는데, 월도가 일렬의 마인들 사이사이로 불쑥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삼열의 마인들은 저마다 양손에 화혈비(化血匕)라는 암기를 들었다. 진에 갇힌 상대가 허공으로 뛰어올라 도망치려할 경우 암기로 공격하려는 속셈이었다.
십방마혼진이라는 이름다운,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살벌한 진법이었다.
휘라라락!
그때,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백포자락을 멋스럽게 휘날리며 진 안으로 날아 내렸다.
큰 키에 비쩍 마른 체구. 요대엔 고색창연한 장검이 매달려 있었고,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어찌나 강렬한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웬 놈이냐?”
청년이 씨익 웃었다.
“드디어 곡주께서 납시셨군. 나 초마곡에서 왔어.”
노인이 바로 이곳 잠마곡의 곡주, 혼세비마(混世飛魔)였다.
‘초마곡…?’
혼세비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초마곡(超魔谷)이란 마곡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초마곡은 곡인이 다섯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곡이라 모르는 게 당연할 수도 있었다.
“초마곡이고 나발이고 왜 한밤중에 본곡을 찾아와 난동을 피우느냐?”
“여기 마졸 세 놈이 내 아우를 아무 이유도 없이 죽사발로 만들어 놨더라고. 그래서 나도 그놈들을 똑같이 만들어주려고 왔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똑같이 만들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두 배, 세 배 아니 한 열배는 더 때려줘야 분이 풀릴 터였다.
혼세비마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청년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겨우 그깟 일로….”
“당신한텐 겨우 그깟 일일지 몰라도 내겐 무척 중요한 일이거든.”
“닥쳐라, 이놈!”
혼세비마가 사납게 호통을 쳤지만 청년은 조금도 주눅 든 기색 없이 할 말을 했다.
“당신이나 닥치고, 어서 그 마졸 놈들이나 내 앞으로 끌고 와.”
“좋게 말로해선 안될 놈이로구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혼세비마가 신형을 날려 진 밖으로 빠져나가며 대갈을 터뜨렸다.
“진을 발동하라.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스스스스스슷!
명이 떨어지자마자 일렬의 마인들이 우측으로 빠르게 돌며 진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이열의 마인들은 그와 반대로 돌며 월도를 비스듬히 위로 쳐들어 칼 지붕을 만들었다.
진 안에 갇힌 상대를 위축시킴과 동시에 퇴로를 좁히려는 속셈이었다.
삼열의 마인들은 청년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암기를 던질 만반의 차비를 갖추었다.
‘해보자 이거지.’
청년의 눈빛이 매서워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쌍권이 붉은 광채로 뒤덮였다.
쉬이이잇!
청년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쌍권을 맹렬히 교차시켰다.
파파파파파파팡!
청년의 쌍권에서 뿜어져 나간 붉은 권영(拳影)이 거리를 좁혀 오던 일렬의 마인들을 연속으로 강타했다.
“크윽!”
“커억!”
튕겨지듯 뒤로 날아간 일렬의 마인들.
그들은 이열의 마인들과, 이열의 마인들은 삼열의 마인들과 세차게 부딪힌 뒤 한데 뒤엉켜 볼썽사납게 널브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 진을 형성했던 마인들 중 칠 할이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상황.
진은 이미 파훼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잠마곡이 자랑하는 십방마혼진이 이름 없는 청년의 공세에 힘도 써보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괴로운 신음을 흘리는 마인들 사이를 지나친 청년은 넋이 반쯤 나가버린 혼세비마를 마주하고 섰다.
“그 마졸 놈들 데려오라니까.”
“…!”
촹.
퍼뜩 정신을 차린 혼세비마가 황급히 장검을 뽑았다.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끝까지 해보자고?”
“건방진 놈. 노부가 오늘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지랄!”
청년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혼세비마의 지척까지 쇄도했다. 눈으로는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쾌속한 신법이었다.
“헛!”
대경실색한 혼세비마는 황급히 오른발을 뒤로 빼며 청년을 향해 무지막지한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은퇴하기 전 그의 계급은 대마두였다. 대마두는 마인으로서 갖춰야할 품성과 마공, 두 가지가 모두 경지에 도달해야만 오를 수 있는 꽤 높은 계급이었다.
그런 혼세비마가 혼신의 힘을 다해 공세를 펼쳤으니 청년은 죽었어야 당연했다.
‘베었…응?’
청년을 베었다고 확신했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응당 피를 뿌리며 쓰러져야할 청년의 모습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혼세비마는 다급히 기감을 집중했다.
‘뒤…!’
쉬이이잇!
뒤로 돌며 검을 가로로 그었다.
하지만 검은 애꿎은 허공만을 갈랐을 뿐이다.
툭!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젠장…!’
등골이 서늘해진 혼세비마는 다시금 뒤로 돌며 검초를 뿌렸다.
슷!
뭔가가 검에 잘려나갔지만 혼세비마는 조금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청년의 몸통이 아니라 청년이 입고 있는 흑의 자락을 잘라낸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쩝, 아깝네.”
잘려나간 흑의를 손으로 툭툭 털며 입맛을 다신 청년이 혼세비마를 돌아보았다.
“이쯤에서 포기하면 더 이상 체면 구기는 일은 없을 텐데.”
당신은 절대 상대가 안 되니 그만 항복하라는 투였다.
“놈!”
대갈을 터뜨린 혼세비마가 청년을 향해 짓쳐들며 세차게 검을 찔렀다. 일체의 변화를 배제한 눈부시도록 빠른 검초였다.
슷!
살짝 상체를 비틀어 가슴 앞으로 검초를 흘려보낸 청년이 왼손으로 혼세비마의 손목을 덥석 거머쥐었다.
“헛!”
혼세비마의 입에서 헛바람이 토해지는 순간, 청년은 오른 손등으로 혼세비마의 몸통을 순식간에 십여 차례나 가격했다.
“커커커커컥!”
청년이 손목을 단단히 거머쥔 탓에 혼세비마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얻어맞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청년의 옆구리를 노리고 오른발을 차올렸다.
“큭!”
하지만 그것마저도 청년의 주먹질에 가로막혔다.
청년이 손목을 놓아주자마자 혼세비마는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청년의 주먹이 무릎 위의 양구혈을 가격해 하체가 순식간에 마비된 것이다.
혼세비마는 분노와 두려움이 교차된 표정으로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처음과 달리 눈빛이 시들했다. 청년의 압도적인 무위에 투기가 사라진 탓이었다.
“그 마졸 놈들 데려와.”
“시, 싫다.”
혼세비마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곡주로서 곡인들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인의 마지막 자존심일 수도 있었다.
“좋아.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해. 아, 이해한다고 해서 그냥 돌아가겠다는 말은 아니니까 절대 오해는 하지 마.”
느긋하게 주변에 널려 있는 월도 하나를 집어 든 청년이 혼세비마의 머리 위로 월도를 높이 쳐들었다.
“내 사부님이 그러더라고. 일은 심사숙고해서 벌이고, 일단 일을 벌였으면 후환이 남지 않도록 확실히 마무리 하라고. 곡인들을 잘못 가르친 벌이니 담담히 받아들여.”
혼세비마의 눈빛이 세차게 일렁였다.
젊은 놈답지 않게 눈빛이 무심했다.
표정마저 담담하여 더욱 무정해 보였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한번 뱉은 말은 꼭 실천해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니 조심하라고.
이대로 가만있다간 놈이 정말로 자신을 죽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굴욕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죽고 싶진 않았다.
“자, 잠깐!”
“왜?”
“데려오겠다.”
월도를 거둬 척하니 어깨에 걸쳐 멘 청년이 그를 재촉했다.
“나 바쁘니까 서둘러.”
혼세비마가 주위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어서 그 잡놈들을 데려와!”
몸이 성한 마인 몇이 전각 사이로 달려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겁에 질린 마졸 셋을 끌고 와 청년의 앞에 무릎을 꿇렸다.
마졸들은 청년과 비슷한 또래였다.
청년이 나직이 물었다.
“너희들, 둔보 알지?”
“모르는데…요.”
“며칠 전에 키 작고 못…아니 귀엽게 생긴 마졸 때린 적 있잖아.”
“아! 그 해괴망측하게 생긴….”
마졸은 하던 말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청년의 표정이 무섭게 돌변했기 때문이다.
“해괴망측…너희들도 곧 그렇게 만들어 주지. 기대해도 좋아.”
뚜둑!
청년이 어깨에 메고 있던 월도를 양손으로 잡고 꺾자 도신이 힘없이 부러져 나갔다.
월도가 오 척 길이의 몽둥이로 둔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