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사숙은 형님이다
“헤헷…우헤헤헷.”
둔보는 오늘따라 기분이 너무나 좋아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사냥을 나갔다가 운이 좋게도 살집이 실한 사슴을 한 마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 십만대산에서 사슴을 잡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보살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은거한 마인들이 너도나도 짐승들을 잡아먹는 통에 갈수록 짐승들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산이 워낙 방대하여 짐승들의 씨가 마를 일은 없었다.
“헤, 사부님들이 이놈을 보면 무척 좋아하시겠지.”
사부들을 떠올리니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그에겐 두 명의 사부가 있었다.
둔사정(屯私偵)과 보가력(輔嘉轢).
둔보(屯輔)란 그의 이름은 사부들의 성을 따 지은 것이었다.
그의 사부들은 사슴고기라면 환장했고, 그에 못지않게 술도 환장했다. 특히나 독한 화주(火酒)를 말이다.
사슴고기를 안주삼아 화주를 마시는 날에는 평소와 달리 서로 다투는 일도 없었다.
“우헤헤헷.”
둔보는 헤벌쭉 웃으며 혀로 두툼한 입술을 쓰윽 핥았다.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진 사부들이 돌아가며 자신에게 화주를 따라주는 광경을 상상한 것이다. 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화주가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들어갈 때의 그 몸서리쳐지도록 짜릿한 기분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입안에 침이 잔뜩 고였다.
사부들을 닮아 그도 술이라면 환장했던 것이다.
이윽고, 둔보는 계곡 가의 구릉 위에 나란히 세워진 세 채의 오두막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이 바로 그가 사부들과 함께 사는 집이었다. 가운데 오두막이 그의 처소였고, 좌우는 사부들의 처소였다.
“웃차.”
어깨에 들쳐 멘 사슴을 앞마당에 내려놓은 둔보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사부님들, 제가 뭘 잡아 왔나 보세요!”
보통 때 같으면 곧바로 뛰쳐나오셨을 텐데, 오늘은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사부님들, 어서 나와 보시라니까요!”
재차 소리치고 나서야 왼쪽 오두막에서 초로의 노인 둘이 걸어 나왔다.
양 볼이 축 늘어진 살집 좋은 노인은 둔사정.
비쩍 마른 외팔이 노인은 보가력이었다.
‘엥?’
둔보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사부들이 사슴엔 관심조차 주지 않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가 비상한 그는 사부들의 심사가 잔뜩 뒤틀려져 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표정이 왜들 그러세요? 또, 애들처럼 대판 싸우셨어요?”
“그놈,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둔사정은 눈을 부라렸고,
“자나 깨나 수련에만 열중하라고 입이 닳도록 씨불인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은 것이냐! 어째 매일 같이 발정난 개새끼처럼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느냔 말이다!”
보가력은 버럭 호통을 쳤다.
화들짝 놀란 둔보가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사부님께서 아침에 절 보시자마자 오늘은 이상하게도 사슴고기가 땡긴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내가 언제 땡긴다고 하였느냐? 그냥 오랫동안 고기 맛을 보지 못했더니 입안이 약간 텁텁하다고 하였지.”
“그게 그거죠.”
“뭐가 그게 그거야!”
“둘 다 그만!”
크게 소리쳐 두 사람의 입씨름을 막은 둔사정이 보가력을 흘겨보았다.
“그러니까 왜 애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는. 쯧쯧쯧.”
혀까지 차고는 곧바로 둔보에게 손을 내둘렀다.
“네놈도 더 이상 나불거리지 말고 얼른 가서 사숙이나 모셔오너라.”
“사숙님을요? 왜요?”
“모셔오라면 모셔와.”
“무슨 이유인지 알아야….”
둔보의 계속되는 말대꾸에 옆에서 지켜보던 보가력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홱 몸을 돌린 그는 오두막에 기대 놓은 작대기를 잡고 사납게 쳐들었다.
“이놈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냉큼 다녀올 것이지, 웬 말이 그리도 많으냐! 피가 나도록 맞아봐야 정신을….”
“가요. 간다고요!”
입술을 삐쭉이며 앙칼지게 소리친 둔보는 뒤돌아 쌩하니 도망쳤다. 하지만 너무 서둘러서인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발을 삐끗했다.
“우헤헥!”
황급히 양팔을 허우적거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사부들이 보기엔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십여 년 동안이나 고생고생하며 무공을 가르친 노력이 모두 허사였구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에이!”
신경질적으로 작대기를 내팽개친 보가력이 홱 고개를 돌려 둔사정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영풍(無影風)을 어떻게 가르쳤기에 애가 지금까지도 저 모양이냐? 저리 미욱한 놈을 밖에 내보냈다가 나까지 비웃음거리가 되면 네놈이 모두 책임질 것이냐?”
“허험.”
겸연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한 둔사정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그러는 네놈은! 도대체 섬전무극도(閃電無極刀)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애가 지금껏 도법의 오의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더란 말이냐?”
보가력의 소싯적 별호는 독비혈우(獨臂血雨), 둔사정은 무영귀수(無影鬼手)였다.
보가력은 섬전무극도라는 쾌도에 능했고, 둔사정은 무영풍이라는 경공과 연환칠공표(連環七攻鏢)라는 암기술에 능했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성명 절기를 둔보에게 가르쳤지만 어찌된 일인지 둔보는 진보가 한없이 느리기만 했다. 두 사람이 툭하면 다투는 이유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 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로 탄식을 터뜨렸다.
“허어, 저 녀석은 어째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무공이 퇴보하는지 모르겠다.”
“후우, 그러게 말이다. 저 녀석처럼 가르치는 보람이 없는 제자 놈은 세상에 다시없을 게다.”
두 사람은 실로 오랜만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그러한 사실이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갑자기 둔사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진보가 빠르더라.”
보가력의 눈이 번쩍 뜨였다.
“빨라! 그게 뭔데?”
“투법.”
말이 좋아 투법(偸法)이지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질이다.
남달리 손재주가 좋은 둔사정은 투법에도 일가견이 있어 둔보에게 모든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다. 지닌 재주가 많을수록 이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남기가 수월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다른 무공엔 진보가 형편없이 더디던 놈이 괴이하게도 투법만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진보가 빨랐다.
나중엔 가르쳐주지 않은 기술까지 제 스스로 개발해 자랑삼아 시전해 보이곤 했을 정도였다.
보가력이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다정(多情)이 죄로다. 자고로 제자 놈은 사백처럼 무정(無情)하게 가르쳐야 하는 것을.”
둔사정도 동감이었다.
둔보는 그들 두 사람에겐 친 자식이나 다름이 없는 존재였다. 핏덩이 때부터 길러온 탓에 정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이 들었다.
그 정(情)이란 놈이 문제였다.
그놈의 정 때문에 냉정하게 가르칠 수가 없었고, 사부들의 다정함을 눈치 챈 녀석이 게으름을 피우는 통에 끝내 저 모양 저 꼴로 장성한 것이다.
이제 며칠 후면 둔보를 밖으로 내보내야만 한다.
그처럼 미욱한 놈을, 준비가 아직 한참 덜된 놈을 밖으로 내보낼 생각을 하니 두 사람은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둔사정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강호에 나가 고생을 하면 정신을 좀 차리려나.”
“사제 곁에 바짝 붙어 있으면 몸은 성해서 돌아올 테니, 그때부턴 정말 제대로 가르쳐 보자.”
“난 어째 좀 불안하다.”
“뭐가?”
“사제 말이다. 그 괴팍한 성격으로 잘 참고 견뎌낼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란 말이다.”
“하긴…후우.”
둔사정과 보가력은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다.
늙으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약해진다더니,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
“화, 오늘따라 왜들 저렇게 예민하신 거야?”
둔보는 도무지 사부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좋아하는 사슴을 잡아왔는데도 다짜고짜 구박을 하시질 않나, 난데없이 사숙을 모셔오라고 하시지를 않나.
전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거늘.
사람이 늙으면 변덕이 심해진다고 하더니 그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에이.”
둔보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는 본래 뭔가를 깊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성미가 아니었다.
짧은 인생. 최대한 즐기며 살다가, 갈 때가 되면 바람처럼 미련 없이 가야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매일같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서로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싸우는 사부들과 함께 살다보니, 그런 신념이 자연스레 생겨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것이다.
“그나저나 형님은 집에 계시려나?”
사숙을 떠올리니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감돌았다.
한데, 괴이하게도 그는 사숙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사숙은 그와 나이가 엇비슷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숙이 그보다 두 살 많았다.
강호에서 두 살 차이는 맞먹어도 되는 나이였다.
둔보에게 그처럼 나이 차가 거의 나지 않는 사숙이 생긴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숙의 선사인 초마(超魔).
그 초마란 분이 둔보에겐 사백조(師伯祖)나 다름이 없는 존재였다.
자세히 말하면 사부들이 우연히 만난 사백조께 약간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로인해 크게 깨달음을 얻은 사부들이 자청하여 그분을 사백으로 받들어 모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사부들은 사백조께서 세운 이 초마곡(超魔谷)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
그 초마 사백조께선 삼 년 전에 돌아가셨다.
둔보는 사백조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사백조께서 누군가를 만나는 걸 지극히 꺼려하셨기 때문이다.
사부들은 사백조께서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우화등선(羽化登仙) 하셨다고 했지만, 둔보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신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상보다 현실을 중요시하는 둔보로선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여하튼 둔보도 처음엔 사숙을 사숙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숙이 열일곱 살이 되던 해부턴 형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쑥스럽게 사숙이 뭐냐? 앞으론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
“아무리 그래도 강호의 법도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아아, 괜찮아. 당사자들이 그러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냐?”
“제 사부님들은 분명 뭐라고 하실 걸요.”
“둔보야, 우린 고리타분한 정파 나부랭이들하고는 달라. 우린 호방하고 거침없는 마인이란 말이다. 마인! 마인은 뭐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되는 거야. 법도 따위에 얽매여 하고 싶은 일도 못하는 소인배들은 마인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어. 네 사부들이 그 일로 널 구박하거든 날 찾아와. 내가 그냥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