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의 대대적인 토벌이었다.
중앙 기사단 반절이 동원된.
당연, 마물들을 상대하는 것이니 아무리 중앙 기사단이라 해도 사상자나 부상자가 심심찮게 나왔다.
그러나 단언컨대, 단장직의 사람이, 메킨단 단장이 실종된 건 처음이었다.
장소가 헤르나 산맥임을 상기해보면 단장의 실종은 죽었다고 치부할 수밖에 없는 것.
그렇기에 열린 추모.
이번 토벌은 운 좋게도 부상자만 나와서 그런가 메킨단 단장의 실종(죽음)은 유독 머릿속에 슬픔으로 박혔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
메킨단 단장, 페르온은 살아있다.
*
아레샤는 오랜만에 헤르나 산맥으로 산책을 나섰다.
그러다 맡아지는 맛있고도 향기로운 냄새에 발걸음을 옮기니 옆구리가 피로 점칠 된 채, 시체 마냥 엎어져 있는 인간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아레샤는 엎어져 있는 인간을 발로 툭 건드려 뒤집어 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인간의 얼굴
그건 뱀파이어인 아레샤의 마음에도 쏙 드는 종류였다.
보랏빛 곱슬머리.
생채기가 있고 흙먼지가 덮여있지만 감춰지지 않는 잘생김.
응, 힐덴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네.
그리고 냄새도 좋아.
뱀파이어들과 비교해서 밀리지 않는 외모를 인간은 처음이라, 아니. 정확히는 인간 자체가 처음인 아레샤는 기쁘게, 쓰러져있는 인간을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옆에 검을 찬 것과 어울리게 건장한 체격을 가진 인간을 안아 들었음에도 전혀 힘들지 않은지 아레샤는 솜 뭉텅이 안아 든 것 마냥 가볍게 몸을 놀려 뱀파이어들의 지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뱀파이어 수장의 집으로 쳐들어가 주워온 인간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주웠어, 키워.”
“...”
그에 뱀파이어 수장, 힐덴이 뒷목을 잡은 건 당연했다.
그는 아레샤의 잘못을 어디서부터 집어줘야 할지 고민햇다.
그래도 제가 수장인데 수장 집에 허락도 없이 처들어온 거?
먹겠다, 도 아니고 키우겠다고 인간을 주워온 점?
키우자, 내가 키울 거야, 도 아니고 나보고 키우라 명령하는 거?
그리고 키우라고 데리고 올 거면 적어도 상태는 멀쩡해야 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성인으로 보이는 인간을 키우겠다라,
“잘도 키워지겠다, 미쳤냐?”
“안돼?”
“안 되지, 그럼. 되겠어? 일단 데리고 왔으니 식사를 하든 치료해서 인간들 지역에 던져주든 해.”
“응, 알았어. 그럼 치료해서 키워.”
“그래-,가 아니라 네가 해! 그리고 안 키운다고 몇 번 말해!”
당당히 명령하는 아레샤에 저도 모르게 그러겠다 답한 힐덴은 이미 사라진 아레샤에 분노할 뿐이었다.
한참을 씩씩댄 힐덴은 아레샤 대신이랄까, 아레샤가 데리고 온 인간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봤다.
하, 진짜 먹어버려?
말만 그럴 뿐, 힐덴이 아레샤가 데리고 온 인간의 피를 먹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아레샤가 주워온 인간, 페르온은 상쾌한 몸 상태로 깨어났다.
왜지? 나는 분명 마물에게 공격당해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텐데?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데 몸이 아프긴커녕 상쾌하다니.
그 의문에 페르온은 제 몸을 더듬었지만 작은 생채기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들리는 음성.
“------?”
“?!”
중앙기사단 단장씩이나 되는 제가 인기척을 눈치 못 챘다는 사실과 들리는 말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
이 두 개에 깜짝 놀라 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붉은 눈동자, 검은 머리칼, 창백할 정도의 피부, 건장한 체격.
조각같이 잘생겼다, 감탄하는 것을 떠나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남녀노소 전부 홀려 저자의 발밑을 길 거 같은 퇴폐적인 분위기.
인간의 말이 아니지만 계속 듣고 싶어지는 부드러운 음성.
이 모든 건 하나를 가리켰다.
‘뱀파이어’
뱀파이어가 어떤 존재냐.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
언제나 위에서 군림하고 모두를 내려다보는 고고한 존재.
동식물의 사체를 요리해서 먹는 저들과는 달리 피라는 신성한 액체를 식량 삼아 살아가는 신성한 존재.
그리고 동시에,
신과도 같은, 무서운 포식자.
아, 나 이제 죽나?
페리온은 홀린 듯이 멍하게 그리 생각하고 있자 뱀파이어가 손가락을 튕궜다.
그리고 들리는 인간의 말.
“이쪽 말을 못 알아듣는 다는 것을 까먹고 혼자 말하고 있었네. 나는 힐덴이다. 이젠 내 말 알아들을 수 있겠지.”
힐덴이라는 뱀파이어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가히 감탄을 자아내는 미소였으나 동시에 포식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페리온은 역시 고귀한 뱀파이어라 생각하며 잔뜩 기합이 들어간 채 대답했다.
“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쓰러진 저를 주워 치료해주신 건 힐덴님이십니까?”
“주운 건 내가 아니지만 치료한 건 내가 맞아.”
“아, 감사합니다. 감히 고귀한 존재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에 페리온은 피식,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뱀파이어인 나에게 제까짓 것이 은혜를 갚는 다라.
기껏해야 고양이의 보은 정도이려나.
아, 그래도 고등생물이니 고양이보단 낫겠지.
힐덴은 저 어둔한 인간에게 스스로의 처지가 어떤지 알려주기로 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넌 이제부터 내게 키워질 거니까. 애완동물이 아프면 치료해주는 것. 당연한 일이지.”
“예...? 저를 뱀파이어님이 키우신단 말이십니까?”
멍청하게 되묻는 페리온에 힐덴은 비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에 페리온이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 건 당연.
키운다고? 다 큰 성인인 나를?
가축 키우듯이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건가?
근데 난 먹을 거 없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인데 그냥 잡아먹으면 되지 여기서 뭘 더 키워...?
설, 설마... 저 뱀파이어도 남성, 저도 남성인데 그렇고 그런 쪽의 의미로 키우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하하, 설마... 진짜 설마...
저 뱀파이어님이 아무리 남녀노소 전부를 홀릴 것 같은 매력을 가졌다지만 저는 그래도 동성보단 이성이 좋았다.
페리온은 주춤, 최대한 힐덴에게서 멀어지며 제 상체를 엑스자로 보호하려 했다.
그에 이때까지 페리온의 생각을 읽고 있던 힐덴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안하지만 우리 뱀파이어도 평균적으론 남성 체는 여성 체, 여성 체는 남성 체를 좋아해. 그러니 그 역겨운 보호 자세 거둬라. 게다가 넌 인간이고 난 뱀파이어. 내 입장에서 너는 걸어 다니는 도시락 정도란 뜻이지. 넌 음식을 보면 맛있다는 생각보단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나 보지?”
“아...”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물론 겉모습은 비슷하다 하더라도 저들은 뱀파이어님들의 먹잇감.
힐덴은 페리온이 멍청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한숨 쉬었다.
망할 아레샤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멍청한 동물이라 그런지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나 보네. 잘 들어. 내가 널 키운다는 건. 넌 다신 인간 사회로는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다. 평생 뱀파이어 지역에서 다른 뱀파이어들의 시선을 견디며 혹여 주인인 내가 사라지면 잡아먹히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네 가족들이나 동료들을 그리워하겠지.”
아, 주인이 될 나에게 잘 보이면 인간 지역으로 산책 정도는 시켜줄게.
네 가족들이나 동료들이 참 좋아하겠다.
그렇지 않니?
페리온은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기적같이 고귀한 뱀파이어를 만나고 그 뱀파이어가 상처 입을 저를 잡아먹기는커녕 살려줬다는 동화 속에서 벗어난거다.
“저는 개나 고양이처럼 목줄을 채우고 키우고 싶다 하여 키우는 게 아닌, 사람입니다. 절 무슨 연유로 키우겠다 결심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페리온은 제 손에 잡히는 익숙한 물건, 검을 꼭 잡으며 꽤나 사나운 기세로 뱀파이어를 쳐다보며 말했다.
“놓아주십시오, 고귀하신 뱀파이어님.”
힐덴은 그런 페리온의 기세가 전혀 위협되지 않는지 비소를 한 번 더 날렸다.
“글세, 너흰 너희 인간끼리도 서로를 사고팔며 애완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하지 않냐? 뭐라더라 노예, 라고 부르면서 말이야. 하물며 우리는 너희와 같은 종족도 아닌데 인간인 너를 애완동물 마냥 목줄 채우고 키우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
힐덴이 물었으나 페리온은 답하지 않았다.
답을 듣기 위한 물음이 아닌, 비아냥거리기 위한 물음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뱀파이어에게서 무사히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그러나 하등 동물처럼 키워지며 목숨을 연명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럼,
철그럭,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도망치려는 시도라도 해봐야지.
그리 생각한 페리온이 빠르게 자세를 취하며 검을 뽑으려 할 때 힐덴이 가볍게 손을 휘둘러 페리온의 움직임을 막았다.
“!”
역사에서 그리 강하다 표현되긴 했지만 이 정도로, 한 획을 그어보기도 전에 완벽히 제압당했다.
그에 페리온이 놀랄 때, 힐덴에게서 피곤함이 가득 담긴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내게 키워지는 게 싫듯, 나도 너를 키우기 싫어. 그러니까 아레샤 좀 설득해주지 않겠니?”
제발.
*
뱀파이어들은 늙지 않은 채 긴 세월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힘을 얻는 것도, 성체가 되는 것도 오랜 세월이 걸린다.
“뱀파이어들 마다 속도가 다르긴 하지만 보통 성체가 되기까지 사백 년이 걸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냐?”
“예.”
“근데 아레샤는 이십 오 년 만에 완벽한 성체가 됐어. 그것도 오천 년 산 나를 뛰어넘을 정도의 두뇌 회전과 힘을 가진 채. 너희로 치면 두 살배기의 아이가 현자보다 똑똑하고 영웅보다 강한 힘을 가진 거지.”
당연히 뱀파이어 사회는 뒤집어졌다.
수장이 뒤바뀌는 것 아니냐부터 핏덩이를 수장 자리에 앉힐 수는 없다,
자질을 확인해야 한다 등등.
“아까 말했지. 뱀파이어 수장 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권력 많은 자리인지.”
“예. 저희 사회로 치면 폭군보다 더 막강하게 권력이 몰려있는 자리, 라고 하셨던 거 기억하고 있습니다.”
죽으라 명하면 죽는시늉이 아니라 진짜 죽을 정도로 철저한 복종.
물론 제가 수장을 이길 수 있을 거 같다 생각하면 덤비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 중요한 자리를 멋모르는, 갓 태어난 지 25년밖에 안 된 핏덩이에게 맡기리란 쉽지 않지. 그래서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자질을 실험한다는 명분으로 아레샤를 건드렸어.”
결과는 어떻게 됐을 거 같냐.
“아레샤라는 분은 지금 살아계시니... 혹시 아레샤라는 분을 건든 뱀파이어님들이 전부 죽었습니까...?”
그에 힐덴은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아니, 완벽히, 상처하나 입지 않고, 입히지도 않고 모두를 제압했다. 사상자, 부상자 한 명도 없이 끝났다는 말이야.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준 거지. 그리고 아레샤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명령했어. 수장 안 한다, 나를 건드리지 마라.”
수장 자리보다 더 위가 나타난 거지.
“그게 아레샤야. 그런데 그런 아레샤가 너를 키우라 내게 명령했어. 그러니 나는 뱀파이어 사회의 규칙에 따라 너를 키워야 해. 실질적인 수장은 아레샤니까 감히 거부할 수도 없지. 이제 네가 왜 아레샤를 설득해야 하는 지 알겠니?”
페리온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머뭇거리며 말했다.
“뱀파이어님의 생각, 사상은 먹이일 뿐인 저희가 재단할 수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헌데 아레샤라는 분은 그런 뱀파이어님들도 감히 재단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계신다고 하셨지 않습니다. 그런 분을 제가 어떻게 설득합니까...?”
그 물음에 힐덴은 여유만만한,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좋게 말해 재단할 수 없다지 한마디로 제정신 아니라는 말이야. 그러니 우리도 약간 미친 방식으로 가자. 네가 강아지나 고양이 마냥 사랑스럽게 굴어서 아레샤의 마음을 얻어.”
“예...?”
제가... 말입니까?
페리온이 얼떨떨해하며 힐덴에게 되묻자 힐덴은 그래, 네가.라며 단호히 긍정할 뿐이었다.
여유만만이 아니라 멘탈 나감의 미소였나 보네.
페리온은 강아지 마냥 순둥하고 청량하게 생기긴 했으나 귀엽다고는 빈말로도 말하지 못할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체격인데 사랑스럽게 굴라고?
페리온이 조심스레 질색하는 사이 힐덴은 진지하게 부탁했다.
“거기다 인간 사회에 아레샤를 데리고 나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사실 네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아 겁주기 위해서 그런 거지 우리 뱀파이어들은 유희 격으로 정체를 숨기고 너희 사회에 놀러 가기도 하거든. 이참에 아레샤도 제발 데리고 나가줘.”
진짜 제발.
아, 그리고 안심해. 정말 동물처럼 목줄 채우고 키우진 않을 테니 아레샤에게 키워지는 것도 나름 할 만할 거다.
“...”
그에 페리온은 잠시의 침묵 후 물었다.
“키워달라 부탁하기 전에 놓아달라 부탁해보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아님 힐덴님이 저를 키우시는 척하다 슬쩍 놓아주는 건 어떻습니까.”
“그런 게 허용됐으면 애초에 내가 널 맡지 않았겠지. 차라리 아레샤에게 키워지다 마음을 얻어 인간 사회로 돌아가고 싶다며 부탁하는 게 더 가능성이 높아. 물론 아레샤가 널 키우는 걸 거절한다면 다 허사지만.”
“아...”
“아레샤에 대해선 내가 너보다 더 잘 알 테니 인간 사회로 돌아가고 싶으면 내 말을 잠자코 따라.”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