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얼마나 걸었을까?
기련산을 떠난 후 거진 수개월 간 방향을 잃어버린 채 아무렇게나 관도 위를 걷던 적천경이 갑자기 길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사이 더욱 꼬질꼬질해진 옷차림.
검기를 잃은 채 한 자루 녹슨 철검으로 화한 멸천뇌운검은 어느새 허리춤에 대롱거리고 있었다.
당연하다.
이미 절대의 천품을 잃어버린 마병이다.
예전처럼 굳이 천 조각으로 가려놓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저번에 떨어뜨린 후 다시 감쌀 만한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지금 역시 그 상태가 변한 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꽤나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아니다.
그보다 더욱 심각하다. 걷지도 못 할 만큼 지쳐서 길바닥에 누워 버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찌 되려나…….’
적천경은 하늘을 올려다본 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날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푸른 하늘.
뜨겁게 내려 쬐는 태양이 눈을 부시게 한다. 계속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다.
깜빡!
그래서 눈을 감았다.
사유의 흐름조차 멎어 버렸다. 극도로 지쳐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렇게 흘러가기 시작한 시간…….
점점 적천경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관도?
도시와 도시를 잇는 길이라 생각했던 게 사실은 사람들이 쉽사리 오고가는 대로변이었다.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하릴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이름도 모르는 소읍에 들어서 버리고 만 것이다.
당연히 갑작스러운 적천경의 등장에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느닷없이 대로변으로 걸어와 길 한복판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뉘인들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경거리도 보통 구경거리가 아닐 터였다.
잠시뿐이었다.
어느새 태양은 중천에 올랐고, 사람들은 곧 제 갈 길을 찾아 떠나갔다.
“쯔쯧, 미친놈 하나가 동네에 들어왔구만!”
“노숙을 하려거든 사람들 다니지 않는 곳이라도 찾아서 갈 것이지 원!”
“안됐군. 아직 젊어 보이는데…….”
“공부 안하면 너도 저렇게 된다!”
적천경을 피해 걸어가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눈까지 감아버린 적천경이 꽤나 만만하게 여겨진 까닭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기 시작한 적천경은 한참 만에 감았던 눈을 떴다.
여전히 하늘이 그를 반겨준다.
그사이 중천에 떴던 태양은 서편 하늘 끝에 걸려 있었다.
곧 붉은 노을이 지고, 어둠이 찾아오리라.
‘아름답군.’
적천경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하루 중 반드시 한 번은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늘상 여상스레 지나쳐갔다.
그런데 지금 태양과 하늘이 만들어 내고 있는 장관은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적어도 이렇게 느긋하게 지켜보는 건 그런 듯싶다.
그때 앞만 보고 걸어왔던 지난 나날…….
잠시 주마등처럼 떠오르려다 사그라진다. 불쑥 일어났던 상념조차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그사이 서편 하늘을 불태우던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졌다.
온통 새카맣게 변했다.
주변을 모조리 검은 장막 안에 가둬 버렸다.
잠시뿐이었다.
곧 어둠 속을 뚫고서 별이 한가득 떠올랐다. 마치 그렇게 될 줄 알았던 것처럼 적천경의 눈동자 속을 가득 메웠다. 손만 뻗으면 당장 한 움큼 쥐어낼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손이 움직이지 않는군.’
아쉬웠다.
진심으로 그랬다.
어쩌다 보니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온몸의 근육이 굳어버리고, 기경팔맥이 꼬이고, 전신혈도가 점혈당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무기력함에 장악당한지 오래인 적천경이었다.
깜빡.
언제 눈동자를 채운 별무더기에 집착했냐는 듯 적천경은 다시 눈을 감았다. 마치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사흘이 흘렀다.
그때까지도 적천경은 처음 누운 대로변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실은 미동조차 안했다.
첫날 밤을 보낸 후 완전히 몸이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냥 움직이지 않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곁으로 다가오는 자조차 없어졌다. 사람들로부터 흥밋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까닭이었다.
아니다.
오히려 근래 적천경에게 관심을 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여인.
대충 열여덟가량 되었을까?
어깨를 살짝 덮는 짧은 단발에 개구진 소년 같은 복장을 한 귀여운 용모의 여인은 이틀 전부터 적천경 주변을 빙빙 돌았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적천경을 살피곤, 돌멩이를 툭툭 던져대며 한나절을 꼬박 보내곤 했다.
커다랗게 반짝이는 두 눈.
호기심과 장난기를 동시에 담고 있다. 반드시 뭔가를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의지 역시 엿보인다.
투닥!
결국 다시 돌 몇 개를 던져서 적천경의 이마에 피까지 낸 여인이 놀란 표정으로 후다닥 다가들었다. 팔에는 여태까지와 달리 작은 광주리 하나가 매달려 있다.
“정말 죽어 버린 거예요?”
“…….”
적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마에서 피가 나는 걸 알았으나 그냥 내버려 뒀다. 어차피 살짝 까진 정도니 놔두면 알아서 지혈이 될 터였다.
여인의 의견은 달랐던 것 같다.
찌익!
잠시 머뭇거리던 여인이 소맷자락을 찢더니, 적천경의 이마를 꾹 눌러줬다. 달콤한 과일향이 코끝을 스친다.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적천경은 다른 향기에 반응을 보였다.
꼬르륵!
소매의 광주리에서 흘러나온 고소한 전병의 냄새에 배가 요동을 쳐대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지 사흘이 넘었다.
굶은 지는 조금 더 된 것 같다.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임에도 생리 현상은 어쩔 수 없었던 같다. 저절로 반응을 보인다.
“어?”
지혈에 집중하고 있던 여인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커다란 두 눈이 한차례 깜빡이더니, 적천경을 빤히 내려다본다. 돌에 맞아 이마가 터지고도 움직이지 않던 사람의 뱃속에서 울려 퍼진 밥달라는 소리가 신기하기도 했으리라.
※뱃속은 마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배의 안은 배 속이 맞다고 합니다. 그래도 많이 쓰는 표현이 뱃속이라 작가님께서 남겨주신 방향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적천경은 눈을 감고 있었다.
낯빛도 변함이 없다.
여인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뭘 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전병 먹어요!”
“…….”
“아이 참! 비싸게 굴 거 없잖아요! 이건 내가 방금 전에 만든 거라 진짜 맛있다고요!”
“…….”
“에잇! 모르겠다!”
살짝 짜증을 낸 여인이 적천경의 입을 강제로 열고, 전병을 억지로 우겨 넣었다. 조그마한 몸집을 한 주제에 손힘이 장난 아니다. 족히 사내의 완력을 능가한다.
깜빡!
놀란 건 적천경이었다.
여인에 의해 입안으로 전병 하나가 밀려들어온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떴고,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환해졌다.
목이 메어왔다.
피곤하다 못해 미동조차 할 수 없던 전신에 활력 역시 돌아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적천경은 잠시 얼떨떨한 기색을 지어 보이다 여전히 입 안 가득 밀려들어 온 전병을 씹어 먹었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근데 이런 행위가 무척 낯설었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인걸까?
꼼꼼하게 전병을 다 씹어 먹고서야 깨닫는 게 있었다. 그냥 머릿속에서 확 떠올랐다.
‘맛있다…….’
뭔가 이해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난 배가 고픈 거였어!’
그러자 다시 꼬르륵 거리기 시작한 배.
“더 줘요?”
“…….”
적천경이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맛있는 전병이다.
하나로는 허기를 다 매우긴 어려웠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하나를 더 먹는다면 느닷없이 찾아온 이 무력감을 해소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여인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픽!
더 이상 적천경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지 않는 걸 확인한 여인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바구니 안에는 전병 몇 개가 남아 있었으나 적천경에게 내어줄 생각 따윈 전혀 없어 보인다.
“이마는 이제 괜찮은 거 같네요. 전병이 더 먹고 싶다면 날 따라와요.”
“……뭐?”
“배고프면 날 따라오라구요. 밥 줄 테니까!”
짤랑거리는 말과 함께 여인이 쪼그려 앉았던 자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눈부신 태양 빛.
문득 여인의 작은 얼굴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마치 후광처럼 말이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칠 년.
그 정도나 되는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