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호검관주(護劍館主)
1.
강서성(江西省) 악안(樂安).
성도 남창(南昌)과 꽤나 떨어져 있는 평범한 중소 도시인 이곳에 호검관이란 작은 무관이 들어선 건 칠 년 전. 신마혈맹에 의해 주도된 정사대전(正邪大戰)이 종식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디링!
새벽을 알리는 풍경의 맑은 울림.
그와 더불어 사부의 초상에 아침 인사를 하고 사당을 나서던 호검관주 적천경의 눈에 가벼운 이채가 떠올랐다.
그의 처소로부터 꽤나 멀리 떨어진 동리 초입.
오래된 감나무 위를 지키고 있던 까치 한 마리가 나지막한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새벽부터 까치가 우니, 오늘은 반가운 손님이라도 찾아오려는 것인가?’
까치와 손님.
멀리 동방에서 전래된 얘기로 천하를 종횡하는 걸 낙으로 삼던 사부에게 한차례 들은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가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쓸쓸하다.
사부와 헤어진 지 벌써 팔 년이 지나고 있었다. 어려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竹馬故友)의 죽음을 전해 듣고, 젊은 혈기에 무림에 나온 후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사이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하신 것이나 아니실런지…….
떠나가는 자신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던 사부의 주름진 얼굴을 떠올리자니, 마음이 크게 아프다. 크나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갚을 방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당을 만들었다.
생사를 확인치 못하게 된 사부에게 매일 같이 인사를 올리는 것으로나마 젊은 날의 혈기를 속죄하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사당 앞을 한동안 서성거리던 적천경은 천천히 걸음을 안채로 돌렸다.
근래 들어 제자가 조금 늘어서 뒤치다꺼리로 여제자들은 새벽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밥하고 빨래하고 어린 제자들의 경우 얼굴까지 씻겨준다.
그러다 보니 얼마 전까지 그녀들이 담당하고 있던 처제 소하연의 약 준비는 이제 적천경의 몫이 된 지 오래다.
‘며칠 전 동네 약방에 고려의 백 년 된 산삼 한 뿌리가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적천경은 탕약방을 향해 걸으며 잠시 딴생각에 정신이 팔렸다.
2.
동방에서 전래된 얘기는 틀리지 않았다.
오전에서 오후로 살짝 넘어가고 있을 무렵, 대문 바로 앞의 연무장에서 십여 명의 소년이 목검을 든 채 연무에 한창일 때였다.
사제들에게 검의 기본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가르치고 있던 호검관의 대제자 진호군의 검미가 슬쩍 치켜올라갔다. 낮에는 항상 활짝 열려져 있는 호검관의 대문 저편으로부터 자욱한 황진이 휘몰아쳐 왔기 때문이다.
“어떤 빌어먹은 인간이 감히 호검관 앞까지 말을 타고 오는 거야! 내가 그냥…….”
진호군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황진 속을 뚫고 나타난 한 필의 붉은색 대완구의 위.
늘씬한 몸매를 한 겹 홍의 무복으로 가린 시원스러운 인상을 한 미녀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본 까닭이다.
히히히히힝!
대완구는 은자 백 개의 가치가 있다는 명성답게 빨랐다. 진호군이 황진을 본 게 조금 전인데, 어느새 대문 바로 앞까지 이르렀다.
두 발을 들어 올리며 잘빠진 몸매를 뽐내는 대완구.
그 위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홍의미녀는 경쾌한 동작으로 안장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휘릭.
공중에서 한차례 신형을 뒤튼 탓에 홍의미녀의 치맛자락이 슬쩍 펄럭거렸다.
“우와아!”
“이야아!”
“와아아!”
진호군의 호랑이 같은 호령이 멈추자 검초 연마를 멈춘 소년들의 입에서 거의 괴성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홍의미녀의 멋진 신법과 슬쩍 드러난 치맛자락 사이로 내비친 늘씬한 각선미에 대한 순수한(?) 경탄이었다.
홍의미녀는 소년들의 순진무구함을 믿지 않았다.
스슥.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였다.
방금 전 허벅지까지 드러났던 다리를 앞으로 슬쩍 뻗은 홍의미녀는 단숨에 대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연이어 터져 나온 구타 소리!
퍼퍽!
퍼퍼퍼퍼퍽!
방금 전 탄성을 터뜨렸던 소년들의 입에서 이번에는 죽는다는 비명 소리가 곡소리처럼 터져 나왔다.
홍의미녀의 늘씬한 다리.
몇 차례의 화려한 각영을 만들어 낸 다리가 소년들의 온몸을 마구 두들겨 댔다.
“아악!”
“악악악!”
“대사형! 대사형!”
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풋내기 사제들을 가련하게 바라보던 진호군은 슬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외면이다.
호검관에 입문해 대제자가 된지 오 년. 그전까지 강호의 밑바닥을 전전하며 잔뼈가 굵은 진호군이었다.
눈치 보기는 그에겐 기본이었고, 비굴함은 선택이다.
눈앞의 홍의미녀.
어떨 땐 하늘같이 여기는 사부 적천경조차 어찌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감히 아직 정도 쌓이지 않은 어린 사제들을 구하기 위해 그녀에게 대드는 무모한 짓을 할 순 없다. 외면만이 살길이었다.
그때 적당히 소년들을 밟아준 홍의 미녀가 여전히 현실과 타협한 외면을 선택하고 있는 진호군에게 다가왔다.
“너!”
“예, 호군 여기 대령입니다!”
진호군은 홍의미녀 앞에 냉큼 다가가서 살가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팍 숙였다.
절대 충성을 다 받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피식.
홍의미녀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역시 사부와 달리 세상 물정을 잘 아는 기특한 녀석답구나. 네 사부는 지금 어디 있지?”
“잠시 외유를 나가셨습니다.”
“외유?”
“근처 약방에 가셨습니다. 고려에서 질 좋은 산삼이 들어온 게 있다고 해서요.”
“으음, 여전히 하연 동생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은 것이냐?”
진호군의 얼굴에 슬쩍 우울한 기색이 스쳐 갔다.
“늘상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홍의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연무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내당으로 던졌다.
“교령! 영령! 이 잡것들! 당장 튀어나오지 못해!”
내당의 커다랗고 고색창연한 지붕을 버티고 있는 네 개의 기둥. 그중 연무장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커다란 기둥에 숨어 있던 두 명의 여인이 화들짝 놀라 뛰쳐나왔다.
“부, 부련주님…….”
“헤헤, 갑자기 전언도 없이 어떻게…….”
교령과 영령.
통칭하여 쌍령이라 불리는 두 명의 여인은 삼 년 전부터 호검관에 식객으로 눌러 앉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 주변을 얼쩡거리기 시작했는데, 적천경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녀들이 매년 적절한 기부로 호검관의 재정을 상당 부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들을 대번에 설설 기게 만든 홍의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녀는 현 천하 삼대 거상 중 하나인 황금귀상련(黃金鬼商聯)의 부련주인 황조경으로 쌍령의 직속 상관이었다. 즉, 진정한 물주이다.
게다가 호검관주 적천경의 처제이자 안주인 노릇을 하는 소하연과는 의자매나 다름없는 사이라 적천경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근래 갑자기 황금귀상련의 일이 바빠져서 호검관에는 꽤나 오랜만에 방문하게 되었다. 족히 일 년은 넘은 듯싶다.
까닥!
황조경은 온몸을 배배 꼬고 있는 쌍령에게 손가락 신호를 보냈다.
자신을 향해 당장 튀어 오라는 의미.
쌍령이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황조경인만큼, 어찌 이를 거역할 수 있으랴.
교령이 먼저 달리고, 영령 역시 뒤질세라 죽기로 쫓아왔다.
두 사람이 황조경 앞에 도착한 시간은 촌각에 불과했다.
잠깐 사이에 절세의 경공이라도 연마한 것 같다.
황조경은 주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쌍령으로선 저항할 수 없는 순간이다.
그녀들은 작은 어깨를 오돌오돌 떨면서도 고개를 바닥으로 확 숙였다.
그저 황조경의 처분만 기다리겠다는 모습이다.
황조경은 이런 것에 마음이 약해질 여인이 결코 아니다.
따콩! 따콩!
쌍령의 동그란 머리를 한차례씩 쥐어박은 황조경은 잔뜩 울상이 된 두 사람에게 눈초리를 추켜올렸다.
“엄살 부리지!”
쌍령이 다급히 소리쳤다.
“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교령이 더듬거리며 대답한 데 반해 영령은 목소리를 있는 대로 높였다. 교령보다 대답이 늦은 것에 부담을 심각하게 느낀 까닭이다.
황조경은 이를 알면서도 굳이 탓하진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슬쩍 낮아졌다.
“하연 동생의 병세가 근래에도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너희가 보기엔 어떠냐?”
“그, 그게…….”
버릇처럼 머뭇거리는 교령을 대신해 영령이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부련주님, 하연 언니는 요새 아예 드러누우셨답니다.”
“드러누워?”
“예, 그래서 호검관의 안살림은 저와 여제자들이 함께 나눠서 하고 있어요. 빨래도 하고 밥도 짓고…… 암튼 온갖 궂은일은 몽땅 제가 도맡은 지 오래라구요.”
“지금 네가 공치사를 하는 게냐!”
황조경이 살짝 언성을 높이자 영령이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눈 속에 담긴 살기를 본 까닭이다.
###강조###
― 적봉황(赤鳳凰) 황조경.
###끝###
당금 상계의 떠오르는 기린아(麒麟兒)라 불리는 그녀는 빼어난 상술뿐 아니라 무공과 독심(毒心)으로도 유명했다. 한번 화가 나면 결코 용서가 없는 무서운 성품이었다.
그러자 교령이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영령을 대신해 조심스레 말했다.
“부련주님, 주변을 많이 돌아다닌 제 몫까지 영령은 그동안 호검관에서 참 고생을 많이 했어요. 결코 공치사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정말 그래 보이더냐?”
“……예.”
황조경이 그제야 추켜올려졌던 눈초리를 원상복귀시켰다. 살기 역시 많이 감소하였다.
“교령, 네 말을 믿겠다. 영령이 그 같은 말을 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테지만.”
영령이 언제 겁에 질렸냐는 듯 발을 굴렀다.
“아앙, 부련주님, 너무해요!”
그러나 황조경은 영령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교령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황조경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적 관주님이 오실 때까지 내당으로 드셔서 차라도 한잔하시지요.”
“그전에 할 일이 있다.”
“하연 언니한테 가시려고요?”
“하연을 거치지 않고 어찌 내가 적 관주를 볼 수 있겠느냐?”
“소매가 모시겠습니다.”
교령이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이고 냉큼 앞장섰다.
그때까지도 쉼 없이 발을 구르고 있던 영령은 팔짝거리며 뒤따르려다 황조경의 냉랭한 시선을 느끼곤 움찔거리며 멈춰 섰다. 왠지 황조경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터라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릴 수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