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진호군의 어깨를 두드려준 적천경이 주변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쌍령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평소대로 영령이 쪼르르 달려온다.
“적 관주님, 부련주님은 여전히 화가 잔뜩 나 계세요!”
“그건 큰일이로군.”
“아이 참! 자기 일 아니라고 또 이러신다! 부련주님, 화나시면 정말 무섭단 말예요!”
“그렇군.”
여전한 적천경의 태도에 결국 영령이 마구 발을 굴려댔다. 가뜩이나 만두 같은 양 볼이 이미 빵빵하게 부풀어 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적 관주님 정말 너무 하세요! 그동안 우리가 호검관을 얼마나 성심성의껏 도왔는데…….”
“우리가 아니라 부련주님이시겠지.”
“……그게 그거잖아!”
“완전히 달라.”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로 영령의 입을 다물게 만든 건 교령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총명하고 차분해 보이는 눈동자.
교령이 평범한 은채로 고정시킨 긴 머리를 한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고는 적천경에게 말했다.
“적 관주님, 부련주님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마세요.”
“그래도 될까?”
“부련주님은 하연 언니한테 무척 약하세요. 하연 언니의 뜻이 분명하신 만큼 자신의 뜻을 계속 우기시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여행 중에 필요하실 것 같아서 몇 가지 물품을 준비했습니다.”
교령이 내민 작은 보퉁이를 적천경이 미소와 함께 받아 들었다. 크기에 비해 제법 무게가 묵직하다.
“신세를 지게 되었군.”
“보중하세요.”
“그러지.”
적천경이 보퉁이를 자신의 짐과 한데 합쳐서 어깨에 들쳐 멨다. 그러자 영령의 두 볼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교령 언니, 이건 배신이야! 부련주님에 대한 배반이라구!”
교령이 새침하게 바라봤다.
“너만 입 다물면 돼!”
“그, 그치만…….”
“설마 부련주님한테 고자질을 하겠다는 건 아닐 테지?”
“……절대!”
영령이 얼른 양손을 휘저어 보였다.
친자매인 걸 떠나서 교령에겐 절대 당적할 수 없는 영령이었다. 적어도 열 배 이상의 보복을 감수할 각오를 했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러는 사이 다시 진호군에게 몇 마디 당부의 말을 건넨 적천경이 이미 정문을 벗어나 있던 신무도장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일찌감치 칠성검수와 대화를 끝낸 그가 나직한 도호를 입에 담았다.
“무량수불! 말씀은 다 끝나셨는지요?”
“예.”
“그럼 출발하실까요?”
“그러지요.”
적천경이 대답했고, 신무도장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여 보였다.
칠 년.
녹슨 철검을 거두고, 강서성 악안의 작은 무관에 몸을 거했던, 적천경이 무림에 재출도하는 순간이었다.
잘끈!
황조경이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양 주먹에도 평소와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의 힘이 들어가 있다.
중원 상계를 주름잡는 마녀!
강철로 된 봉황새라 불리우는 고강한 무력의 소유자답게 그녀는 지금 심각할 만큼 폭력에의 갈구를 느끼고 있었다.
적천경?
물론 포함된다.
한 떨기 가련한 꽃과 같은(?) 자신의 부탁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짓밟고 떠나가고 있는 그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뒤로 미뤄둔다.
지금 그녀가 분노하고 있는 대상은 쌍령, 그중에서도 교령이었다. 감히 자신의 의중을 알고서도 적천경이 호검관을 떠나는 걸 지지한 그녀를 결단코 그냥 놔둘 수 없었다.
‘교령, 내 너를 총애했거늘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이야! 날 배신한 걸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다!’
서늘한 눈가에 깃든 살기!
당장 피를 볼 것만 같다. 그럴 작정이었다.
한데, 정문 쪽에 고정되어 있던 황조경의 눈살이 슬쩍 찡그려졌다. 문득 그녀의 배후로 조심스레 다가들고 있는 여인의 힘겨운 호흡성을 느낀 까닭이었다.
“하연 동생, 어째서 밖으로 나온 거야?”
정문 쪽에서 시선을 떼어 낸 황조경에게선 어느새 살기가 절반 이상 사라져 있었다. 그러자 호검관의 안주인이자 그녀의 의자매인 소하연이 하얗게 웃어 보였다.
“조경 언니, 많이 화나셨지요?”
“내가 화가 나? 전혀! 내가 왜 적 관주가 하연 동생을 놔두고 호검관을 떠나는 걸 화내겠어? 그 바보같고 어리석은 친구와의 약속이란 것 때문에 말야!”
“화 나셨네요.”
“아, 정말! 화 안 났다니까!”
“죄송합니다.”
갑자기 고개를 숙여 보이는 소하연의 태도에 황조경이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어째서 하연 동생이 사과를 하는 거야! 이 모든 건 적 관주의 잘못인데…….”
“형부의 잘못에는 제 몫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하아! 하아!”
잠시 가슴을 손으로 짚은 채 호흡을 고르느라 말끝을 흐린 소하연이 황조경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경 언니가 이번에 형부의 무당행을 반대하신 걸 저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언니가 제게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도 알고요.”
“뭐, 그야 적 관주는 못 말릴 고집쟁이잖아. 그래서 하연 동생도 그의 뜻을 따른 것일 테고 말야.”
“잘 아시네요.”
“정말 그랬단 말야!”
황조경이 소하연에게 두 눈을 부릅떠 보였다. 다시 눈 속에서 서늘한 살기가 뻗쳐 나온다.
잠시뿐이었다.
곧 황조경이 살기를 거둬들였다. 소하연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모습을 본 까닭이다.
“미안.”
“괘,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얼른 침소로 돌아가자.”
어느새 다가와 허리에 팔을 두른 채 부축한 황조경에게 소하연이 가볍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여전히 안색은 좋지 못했으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강인하다.
“그전에 조경 언니한테 할 부탁이 있어요.”
“부탁? 뭔데?”
“조경 언니에게 형부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뭐?”
놀란 나머지 황조경이 소하연에게서 몸을 빼내려다 포기했다. 허리에서 손을 떼자마자 그녀의 몸이 바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소하연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오해예요. 저는 아직 언니처럼 형부를 혼자 둔 채 죽을 생각이 없어요.”
“그, 그렇지!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서 조경 언니가 형부를 무사히 호검관으로 돌아오게 해 주셨으면 해요. 빠른 시일내요.”
“나 더러 적 관주의 뒤를 따라가란 뜻이야?”
“예, 그래 주실 수 있겠어요?”
“…….”
황조경이 즉답을 피한 채 잠시 소하연을 바라보다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은 듯했다.
그러자 더할 나위 없이 환해진 소하연의 표정.
‘연정 언니, 기대해도 되겠죠? 이번엔 진짜 저와 한 가족이 되는 걸요?’
소하연은 그렇게 자신의 속내를 숨겼다.
적천경과 황조경.
언니 소연정의 죽음 이후 줄곧 공전하고만 있는 두 사람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한 식경 후.
호검관을 뒤로하고 붉은 피와 같은 땀을 흘리는 대완구에 올라탄 황조경이 바람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일진광풍(一陣狂風)!
어느새 그녀와 대완구의 주변에 자욱한 흙먼지를 만들어 낸다. 마치 향후 벌어질 대혼란을 예고라도 하려는 듯.
히히히힝!
대완구는 울부짖고 황조경은 채찍질에 여념이 없다. 앞서 떠나간 적천경 일행을 단숨에 따라잡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