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낙조.
황홀할 만큼 붉은 기운이 대지 위를 온통 불태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전날과 다름없달까?
호검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묵직하게 무게를 잡으며 서 있는 황금왕 황대구의 배후로 한 명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쌍령 중 언니인 교령이다.
그녀가 도착과 함께 부복하자 황대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문했다.
“아경이는 적 관주를 따라 갔으렷다?”
“예, 한 시진가량 시간차를 둔 채 호검관을 떠나셨습니다.”
“허허, 급한 성질머리는 제 에미를 닮아 여전하구나. 그래, 교령 네가 보기엔 어떠하더냐?”
“적 관주와 부련주님 사이에 관계 진전은 여전히 없었던 걸로 압니다. 다만…….”
“다만?”
“……다만, 제 짧은 생각에 부련주님은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리신 것 같습니다.”
“평소대로의 철봉황으로 돌아왔다는 말이더냐?”
“그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어찌 호검관으로 돌아오셨겠습니까? 적 관주님에게 무당산 금마옥에 관한 사항을 알리고자 하셨다면 전처럼 전언을 주셔도 되셨을 거라 사료됩니다.”
“으허허헛!”
대소와 함께 황대구가 교령 쪽으로 신형을 돌려세웠다. 만면 가득 득의한 미소가 가득하다. 평소에 다시없을 만큼 만족스러운 기분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잠시뿐이었다.
곧 표정을 평상시로 되돌린 그가 화제를 바꿨다.
“그럼 멸천뇌운검에 대해 말해 보거라.”
교령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전에 보고 드린 대로 멸천뇌운검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그 정도의 신기를 지닌 마검은 호검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적 관주가 무당에 맨손으로 떠나진 않았을 터인데?”
“녹슨 철검 하나를 가지고 떠나셨습니다.”
“녹슨 철검?”
“예, 검인에 날이 빠지고 군데군데 녹이 슨 철검만을 가지고 떠나셨습니다.”
“자세히 살펴봤구나?”
“적 관주님이 평소 제자들에게 검법 시범을 보일 때 사용하곤 하던 장검입니다. 몇 번이나 몰래 살펴봤기에 그림까지 그려놓았습니다.”
교령이 말을 마친 것과 함께 품속에서 그림 한 장을 꺼내서 황대구에게 바쳤다. 세심한 그녀답다.
팔랑!
손을 뻗어 그림을 펼쳐든 황대구의 미간 사이에 작은 골이 패였다.
‘이건…… 정말 훌륭한 하나의 고철덩어리로군. 그럼 도대체 멸천뇌운검은 어디다 처박아 놓았다는 말인고!’
멸천뇌운검!
그가 전날 적천경을 꼬시기 위해 갖다 바쳤던 신마혈맹의 지존신물이자 절대마병이다.
그 뒤 중원에 남아 있던 신마혈맹의 잔당들로부터 황금귀상련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가. 잠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려 온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적천경과 멸천뇌운검.
이 둘 모두를 반드시 가져야만 했다. 손에 넣어서 쥐고 마음껏 흔들어야만 했다. 지난날 신마혈맹에 갖다 바친 황금귀상련의 막대한 재보에 대한 대가를 돌려받기 위해서 말이다.
‘뭐, 결국은 내 뜻대로 될 테지. 이번 무당 금마옥과 관련된 일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테니까.’
내심 음흉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한차례 추어보인 황대구가 교령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겹의 턱밑 주름이 가는 떨림을 보인다.
“되었다.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거라.”
“예.”
“아! 그리고…….”
“하명하시지요.”
“……아경이 말이다. 화장은 잘 했더냐?”
“부련주님에게 화장 같은 건 불필요한 일입니다. 여전히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우시니까요.”
“그렇지?”
“예.”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인 교령의 눈빛이 가벼운 그늘을 담았다.
호검관주 적천경.
대놓고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황조경이나 동생 영령과 마찬가지로 교령 역시 호감을 느낀 지 오래되었다. 지난 수년간의 세월 동안 그가 보인 따뜻함과 한결같음에 절로 마음이 기울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교령의 주인은 눈앞의 황대구.
그의 명을 따라야만 하는 운명이 섬세한 영혼을 지닌 교령의 마음을 난마와 같이 휘저어 놓고 있었다.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격류와 함께 말이다.
4.
호검관을 떠나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호북성 균현으로 향하는 관도 위를 묵묵히 질주하고 있던 적천경과 신무도장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들이 향하는 길목 한편.
※사전에는 편이나 쪽만 표준어로 삼고 있다고 나옵니다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라 작가님께서 하나를 남겨 주시면 다른 부분도 통일하겠습니다. 총 4번이 나오는데 다른 부분에는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집채만하고 넓적한 바위 위에 한 명의 익숙한 홍의 미녀가 드러누워 있었다.
철봉황 황조경이다.
그녀는 자신의 대완구를 완전히 혹사시켜서 적천경 일행을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관도와는 달리 거친 샛길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한쪽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 대완구는 연신 투레질을 하고 있다. 주인의 혹사에 완전히 삐져버린 듯하다. 아예 황조경 쪽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무량수불! 혹시 약속이라도 하셨던 것인지요?”
“그럴 리가요.”
의혹의 눈초리가 여실한 신무도장에게 단호한 한마디를 남긴 적천경이 황조경 쪽으로 다가갔다.
히힝!
히히히히힝!
그러자 마구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한 대완구.
영물에 가까운 놈이라서인지 한 번밖엔 본 적이 없는 적천경을 알아본다. 어쩌면 주인 황조경이 갑자기 흉포해진 원인이 그임을 알아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응?”
황조경이 그제야 바위 위에서 상반신을 천천히 일으켰다.
하루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린 탓에 살짝 잠이 든 참이었다. 옷차림 역시 꽤나 무방비 상태다. 육감적인 몸매에 기능적으로 맞춰진 치마 자락은 특히 더욱 그렇다.
‘치마 안쪽이 보이는데…….’
황조경 쪽으로 고개를 치켜올리던 적천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본의 아니게도 좋은 구경을 하게 되었다.
“너무 늦었잖아요!”
“날 기다렸던 것이오?”
“아니면 내가 뭐 하러 이런 곳에서 드러누워 있었겠어요? 그보다 눈 안 치워요!”
“…….”
적천경이 그제야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가늘어졌던 눈매 역시 정상으로 되돌린다.
휘익!
그 순간 바위를 박차고 황조경이 뛰어내렸다.
붉은 옷자락이 바람에 격한 나부낌을 보인다. 멋진 공중제비다.
그러자 옆으로 돌아갔던 시선을 얼른 그쪽으로 던지는 적천경.
파팍!
어느새 바닥에 착지한 황조경의 늘씬한 다리가 번개같이 적천경의 앞을 오고간다. 위협한다.
“작작 좀 하시지!”
“여전히 멋진 각법이로군.”
“물론이에요. 어떤 사내의 얼굴이든 가볍게 뭉개버릴 수 있죠. 내 치마 안쪽을 보기 전예요. 여전히 볼 의향이 있나요?”
“전혀.”
“아쉽군요. 적 관주라면 보여 줄 생각도 있었는데.”
“하하!”
짤막하게 웃음을 지어 보인 적천경이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다시 호검관주로 돌아간 것이다.
“어째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오?”
“당연한 걸 뭘 물어요.”
“당연한 거?”
“하연 동생이 간곡하게 부탁했어요. 적 관주는 자기나 호검관의 제자들이 없을 때에는 사람이 완전히 변하니, 잘 좀 챙겨주라고요.”
“…….”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할 말을 잃어버린 적천경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황조경이 신무도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에게 자신의 합류를 확인시키기 위함이었다.
히힝! 히히히힝!
멍한 표정이 된 적천경을 향해 대완구가 다시 울부짖었다.
왠지 고소해 하는 표정이 완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