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천라검형
작가 : 한성수
작품등록일 : 2016.4.12
  첫회보기 작품더보기
 
천라검형-13편.
작성일 : 16-05-16     조회 : 706     추천 : 0     분량 : 5361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2.

 

 디링! 디링!

 우후죽순(雨後竹筍)이랄까?

 자소궁의 이곳저곳에 솟구쳐 있는 고풍스러운 도관의 처마에 매달려 있던 풍경들이 한줄기 바람에 가벼운 소성을 울렸다. 산중을 떠돌던 바람 한 자락이 도관들 사이를 휘돌다가 풍경을 살짝 건드리고 떠나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풍경 소리를 뒤로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려던 바람은 또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풍경은 또다시 방금 전과 똑같은 울음을 토해 냈다.

 기사(奇事)!

 천하에 보기 드문 일이다.

 이는 무당파의 개파조사(開派祖師)인 장삼봉 진인이 남긴 비전이라 알려진 대천강진세의 영향이었다. 대자연의 조화조차 구속할 수 있는 진세가 발동한 것이다. 무당파에 속한 제자들 중 일류 이상의 무공을 지닌 삼백 명이 동원되어서 말이다.

 디링! 디링!

 여전한 바람과 풍경 간의 조우.

 자소궁보다 조금 아래에 위치한 태청궁(太淸宮)을 나서다 그 같은 광경을 접한 청려한 미모의 여도사가 입가에 가벼운 한숨을 매달았다.

 “하아, 현허 대장로님께서 행방불명되시고, 대천강진세가 발동한 지도 벌써 석 달째인데, 어째서 신무 사형은 돌아오질 않는 거람? 그동안 지나치게 진력을 소모한 탓에 내력이 거의 전폐된 사형제와 사질들의 숫자가 이미 십여 명이 넘어가고 있는데…….”

 한숨을 토해 낸 여도사의 이름은 우인혜.

 별호는 빼어난 미모답게 화선검(花仙劍)이다.

 그녀는 본래 무당파의 일대제자인 신자 항렬로 빼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고수였으나 몇 년 전 중대한 실수를 범해 도적에서 제명되었다. 신려(神麗)라는 도명을 잃고, 자소궁을 떠나 인근의 외오궁을 돌며 무당파의 잡무나 처리하는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상황은 이렇다.

 한때 하북성(河北省)과 호북성(湖北省) 일대를 주름잡던 화화공자(花花公子) 위무경이란 비열한 채화음적(採花淫賊)이 있었다.

 채화음적은 본래 무림공적인바.

 우연찮게 위무경이 범한 악행을 접한 우인혜는 그를 거진 일 년간이나 뒤쫓은 끝에 참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정절을 빼앗기고 채음보양(採陰補陽)을 당한 여인이 수십이었으니, 그녀의 결정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위무경이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착용한 걸 몰랐던 게 화근이었다.

 인피면구에 가려졌던 그의 정체는 사실 황제의 총애를 받던 공주의 부마도위(鳧馬都尉)였다. 졸지에 무당파의 제자가 황제의 사위를 죽인 꼴이 된 것이다.

 결국 무당파에서는 위무경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불문에 붙였고, 신려란 우인혜의 도명 역시 지워 버렸다. 그게 무당파와 그녀 모두에게 최선이란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쳇! 어차피 인생 더럽게 꼬인 내가 그런 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건가?”

 이젠 더 이상 도사가 아닌 우인혜가 나직한 투덜거림과 함께 자소궁 쪽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손에 들린 건 묵직한 음식 바구니.

 자소봉의 모든 요로에 흩어져 대천강진세를 펼치고 있는 사형제와 사질들의 점심인 소찬과 벽곡단이 잔뜩 담겨져 있다. 가뜩이나 죽도록 내력과 체력을 소모하고 있는데, 배까지 곪게 해선 곤란했다. 정말 맛없는 소찬과 벽곡단이나마 아쉽게 느껴질 정오가 거진 코앞이었다.

 

 3.

 

 “으랴! 으랴!”

 관도 위를 빠르게 내달리고 있는 마차의 어자석.

 적천경과 신무도장이 마부 노릇을 자처한 채 마차를 조종하고 있었다. 이 마차와 네 마리의 대완구들을 구입한 게 바로 황조경인 까닭이었다.

 당연히 이는 그녀가 무당산까지 적천경과 강제로 동행하기 위해 부린 수작이다. 자신의 경공으론 적천경과 신무도장을 절대 따를 수 없을 테니까.

 어쨌든 덕분에 세 사람의 무당행은 꽤나 편했다.

 네 마리 대완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어느새 무당산이 바로 코앞인 호북성의 균현에 도착했다. 강서성의 호검관을 떠난 지 고작 십여 일만에 말이다.

 

 두두두두두!

 어느새 멀리 보이기 시작한 거대한 산맥의 그림자.

 적천경은 문득 옆자리에 앉아서 눈을 반개하고 있던 신무도장에게 말을 걸었다.

 “도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무당산이 아닙니까?”

 신무도장이 비로소 눈을 떴다.

 “무당산이 맞습니다. 적 관주님은 필경 무당산엔 초행일 텐데, 정말 잘도 길을 찾아오셨습니다.”

 “본래 초행길을 찾는 데는 좀 재능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중원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 적이 있었으니까요.”

 “혹여 비무행(比武行)을 하신 것인지요?”

 “비무행같이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면?”

 “집을 가출해 잠시 전장을 전전한 적이 있었지요.”

 “군문(軍門) 출신이셨군요? 국가를 지키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요.”

 “단지 돈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예?”

 “집을 나온 후 꽤나 많이 굶주렸거든요. 당시 함께 가출했던 친구가 없었다면 분명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굶어 죽었을 겁니다.”

 “…….”

 적천경의 담담한 고백에 신무도장이 천천히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근자에만도 가뭄이 극심해 이재민 처리에 애를 먹고 있었다. 건장한 소년이 굶어 죽기 싫어서 전장에 뛰어드는 일은 일상다반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홀로 마차 안을 차지하고 앉아 무당산까지의 여행을 즐기고 있던 황조경이 퉁명스레 외쳤다.

 “적 관주, 마차 좀 잘 몰아요! 엉덩이가 하도 들썩여서 두 배쯤 커진 것 같다고요!”

 적천경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져 나왔다.

 “황 소저, 본래 엉덩이가 그리 작지 않았던 거 아니오?”

 “뭐라고요! 다시 말해 봐요!”

 “사나이는 본래 두 번 얘기하지 않는 법이오.”

 “캬앗!”

 마차 안쪽에서 터져 나온 포효에 적천경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하, 황 소저, 내가 잠시 농을 부렸으니, 용서하시오.”

 “그게 용서를 바라는 자의 태도인가요? 제대로 사죄하세요! 지금 당장!”

 “알겠소.”

 “뭘 알겠다는 거예요?”

 “지금 두 손 모으고 있소.”

 “헛소리!”

 퉁명스러운 황조경의 말에 적천경이 아주 즐거운 표정이 되었다. 아내 소연정이 죽은 후 참 오랜만이다. 이리 마음껏 웃어 보는 것은 말이다.

 그러자 두 사람의 대화를 곁에서 지켜보던 신무도장이 묘한 표정이 되었다.

 ‘적 관주는 황 소저와 정말 친한 것 같구나. 이리 허물없는 사이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평생을 순수 총각으로 보낸 그다.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란 극히 적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가 알고 있는 남녀 관계란 대부분 시정에 나도는 서책 같은 곳에서 본 게 다였다.

 무당파에 여제자가 아주 없는 건 아니나 엄격한 규율로 인해 남녀 간의 사사로운 감정 같은 건 나눌 수 없었다. 지금 두 사람의 기묘할 만큼 허물없는 관계를 주의 깊게 지켜보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한데, 그렇게 마차는 관도 위를 달리고, 두 남녀는 떠들고, 한 명의 도장은 고심 속에 잠겨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관도 위에 장애물이 등장했다.

 한 떼의 사람들.

 난민인지 피난민인지 분간이 안가는 행색을 한 사람들은 관도 위를 점거한 채 터벅거리며 걷고 있었다.

 사내들은 달구지를 끌고, 여인네는 머리에 큼지막한 보자기를 이고 아이들을 업고 매단 채다. 적어도 수천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대행렬이었다.

 그들의 행색을 섬전 같은 눈으로 살피던 신무도장의 안색이 가볍게 흐려졌다.

 “무량수불! 대천강진세의 영향으로 난민들이 갈 곳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이 엄청난 난민의 행렬이 무당파의 대천강진세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말인가?’

 적천경이 언제 황조경과 농담을 나눴냐는 듯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그러자 그의 시선을 접한 신무도장이 가벼운 한탄과 함께 설명했다.

 “하아! 앞서 적 관주께 설명했다시피 현재 무당산의 주변 마을에는 각지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모여든 상태입니다. 평소 같으면 본파에서 사람을 보내서 난민들을 구휼했을 것이나 금마옥의 파옥으로 모든 지원이 중단된 것 같습니다.”

 “대천강진세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대천강진세는 본래 본파 최고의 비기. 무려 삼백 명이나 되는 본파의 제자들이 동원된 만큼 현재 자소봉 일대는 그야말로 철옹성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무당산 자락에 위치한 마을에 모여들었던 난민들이 밖으로 내몰리게 된 것 같고요.”

 “토착민과 난민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는 뜻이로군요?”

 “확실치는 않지만 저들의 행색으로 볼 때 난민의 무리임에는 분명한 듯싶습니다.”

 “그렇군요.”

 적천경이 신무도장에게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가 어째서 무당행을 줄곧 서둘렀는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무당산의 그림자만 봐도 그 크기가 짐작이 간다. 그중 제일봉인 자소봉 전체를 단지 삼백 명만으로 완전히 봉쇄하다니, 과연 무당파의 저력은 대단하구나.’

 그때였다.

 슥!

 난민들의 행렬을 참담하게 지켜보던 신무도장이 일순 어자석을 박차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표홀한 유운신법으로 난민들의 행렬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무량수불! 빈도는 무당파의 제자인 신무라 합니다! 잠시만 빈도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순간, 조용해진 관도.

 잠시뿐이었다.

 곧 관도가 폭발적일 만큼 소란스러워졌다.

 완전히 지쳐버린 표정으로 정처 없이 이동하던 난민들이 느닷없는 신무도장의 등장에 놀라 마구 떠들어 댔다. 무당파의 제자라는 그의 말에 대한 반응이 매우 격렬하게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무당파의 선인(仙人)이시다! 선인께서 강림하셨어!”

 “선인은 무슨! 무당파의 도사님이시니, 진인이라고 하는 게 마땅하다구!”

 “무당파의 진인이 강림했다구? 진인이?”

 “진인님, 우릴 구해 주십시오! 우릴 구해 주세요!”

 “진인님, 먹을 것이 없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먹을 것을 주세요!”

 “그래요! 애가 굶고 있어요! 조금이라도 식량을 나눠 주세요!”

 신무도장의 예상을 월등히 뛰어넘는 반응이었다.

 소란이었다.

 난장판이 벌어졌다. 위험하기까지 했다.

 ‘이, 이런…….’

 신무도장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어렸다.

 심한 굶주림과 절망에 이성을 잃은 자가 족히 수천이 넘었다. 그런 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신무도장으로서도 일시 감당이 안 되었다.

 대형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

 반면 신무도장과 달리 여전히 어자석에 자리하고 있던 적천경은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눈앞의 광기?

 결코 전장을 뛰어넘지 못한다.

 그런 곳에서 적천경은 소년 시절의 전부를 보냈었다.

 틱!

 순간 적천경의 엄지손가락이 허리춤에 매달린 멸천뇌운검의 검갑을 가볍게 퉁겨냈다.

 탄(彈).

 손가락을 따라 일어난 한 가닥 진기가 퉁겨지니, 일순 광기에 젖은 난민들을 향해 벽력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파(破).

 물론 그것만으로 끝일 리 없다.

 적천경의 손가락이 다시 연속적으로 검갑을 두드렸고, 벽력같은 굉음은 곧 날카롭고 삐죽삐죽하게 변했다. 화살과 같은 음파가 되어 사위로 날아갔다. 퍼져 나갔다. 거진 신무도장의 코앞까지 이른 난민들을 순식간에 휩쓸어 버렸다.

 광기?

 흔적조차 없이 사그라뜨려 버렸다.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18 천라검형-18편. 6/8 531 0
17 천라검형-17편. 5/31 487 0
16 천라검형-16편. 5/23 616 0
15 천라검형-15편. 5/23 536 0
14 천라검형-14편. 5/16 712 0
13 천라검형-13편. 5/16 707 0
12 천라검형-12편 5/9 558 0
11 천라검형-11편 5/9 639 0
10 천라검형-10편. 4/12 636 0
9 천라검형-09편. 4/12 710 0
8 천라검형-08편. 4/12 757 0
7 천라검형-07편. 4/12 689 0
6 천라검형-06편. 4/12 853 0
5 천라검형-05편. 4/12 605 0
4 천라검형-04편. 4/12 627 0
3 천라검형-03편. 4/12 602 0
2 천라검형-02편. 4/12 755 0
1 천라검형-01편. 4/12 121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