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향기 #0. 프롤로그
그날도 아무렇지 않은 날이었다.
어쩌면 다른 날 보다 더 평범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돌바닥에도 작은 강에도 햇볕이 눈부시게 부서지는 순간들이었다.
여전히 이 도시는 눈부셨고 향기로 가득했다.
프랑스 남부, 세상에 모든 향기가 모여 있다는 그곳.
사람을 닮은 향수들로 유명한 작은 도시 그라스.
향기로 가득한 봄날. 새벽은 그 도시의 좁다라 한 거리를 걸었다.
거리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리고 특별한 만남을 기대하는 사람들로 생기 있는 느낌이다.
골목에는 아름다운 꽃을 파는 꽃집과 향수를 파는 작은 가게들.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가득한 노점들과 환하게 웃는 사람들, 꽃을 한 아름 안고 가는 중년의 아저씨.
달콤한 사탕을 손에 들고 엄마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인형 같은 아이들.
그런 모습들은 여느 날과 같은 평범한 이곳의 일상이었다.
다리를 건너 작은 언덕을 지나 새벽은 계속 걸었다.
새벽의 코끝에 느껴지는 여러 꽃들이 혼합된 조금은 강한 향기,
돌바닥에 스민 습기와 그로 인해 피어난 물이끼에서 나는 향,
지나가는 아저씨의 직업을 짐작하게 하는 진한 가죽 향까지.
새벽은 이 순간의 이 도시의 이 거리의 향기를 사랑했다.
그렇게 작은 골목으로 돌아가 5분쯤 걸어 작은 꽃집과 구수한 계란향이 가득한 빵집을 지나면 작은 건물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 건물 이층에는 "베리어스"라는 작은 간판이 걸려있는 새벽만의 공간이 있다.
창밖으로 복잡한 듯 평화로운 골목길과 골목길 끝에 작은 공원과 벤치, 나무들 그리고 행복한 사람들이 보인다.
새벽이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로 가득 찬 그런 하루다.
“찰칵 찰칵.”
사무실에는 카메라 소리가 들려온다. 새벽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앞에 서있다.
오늘은 한국의 한 언론매체에서 새벽을 인터뷰하는 날이다.
새벽은 어색함을 목 깊숙이 삼키려고 해서 그런지 계속해서 목이 마른다.
입 끝은 꽃샘추위에 떠는 새끼 고양이처럼 떨리고 눈은 겁먹은 강아지처럼 깜빡거린다.
"새벽씨 너무 긴장하신 것 같아요. 편하게 하셔도 돼요."
언론사 기자는 너무 쉽게 이야기하지만 새벽은 결코 편해질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사진촬영이 끝나고 본격적인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시시콜콜한 내용들과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사연들로 가득한 그냥 그런 인터뷰다.
새벽은 인터뷰 내내 자신이 만든 향수를 손으로 매만지며 불편하게 응대한다.
한 때, 새벽에게도 이런 자리가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하듯이 새벽도 그렇게 조금은 변해 있었다.
이런 자리가 결코 편하다고 할 순 없다.
그냥 자신에게 맞지 않은 향수를 뿌린 것처럼 어색하고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기자는 그런 새벽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질문한다.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하고 싶어요. 새벽씨가 향수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뭘까요?"
"제가 생각할 때.. 향수를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에겐 그 사람 고유의 향기가 존재하거든요. 그래서 단지 그 사람의 향기를 보완해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아.. 그럼 같은 향수를 뿌려도 사람마다 다른 향기가 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만드는 향수들은 대부분 제 기억 속에 어떤 사람들을 생각하며 만들게 되더라고요."
"그럼 향수를 선택할 때, 우리는 선물할 사람에게 어떤 향이 났었는지 생각하면서 선택해야겠네요. 그럼 새벽씨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을 텐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향기를 가진 사람이 있으세요?"
"그런 사람.. 있죠. 저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죠. 저에게는 마법 같은 일이었고 향기였고 사람이었죠.."
“궁금하네요. 어떤 사람인지. 혹시 남자친구? 헤어진 연인 이런 사람인가요?”
“그냥.. 약속을 간직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질문하는 기자.
새벽은 머릿속으로 한 사람을 떠올리며 그 공간, 그곳의 사람들의 모습들이 지워진다.
갑자기 코끝에서 그 사람의 향이 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새벽의 대답을 기다리던 기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급하게 인터뷰를 마무리한다.
인터뷰 기자와 사람들이 떠나고 새벽은 사무실 창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 사람에 대한 질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인터뷰를 하러 이곳으로 온다고 할 때, 사랑에 관한 질문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단 한 사람만 생각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 사람을 생각하면 코끝이 시큰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기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기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한 질문에 새벽이 혼자 그렇게 돼버린 건지도 모른다.
창밖을 바라보며 망상에 잡혀있던 새벽은 핸드폰 진동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다.
‘민아’라고 적혀 있는 핸드폰은 새벽의 속도 모르고 반복된 진동으로 새벽을 재촉한다.
새벽은 핸드폰을 집어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가만히 듣고 있는 새벽.
새벽의 눈은 급하게 창밖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그리고 멀리 있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옅은 미소를 띠는 새벽.
새벽은 전화를 끊고 급하게 외투를 챙기고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간다.
새벽이 뛰어나간 창밖으로는 골목길 지나 멀리 보이는 공원에 휠체어를 타고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