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이야기 구조입니다.
앞 부분에 조연처럼 등장했던 나왔던 인물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요 인물이 되는가 하면 인물과 인물의 관계가 거미줄처럼 엮어 전체적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조입니다.
또한 앞 부분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나중에 일어날 일의 복선이 되기도 하는 등 전체적으로 이야기 구조를 짜임새 있게 엮었습니다.
또한 남자의 시선과 여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나누어서 진행되며 중간에 교차되기도 하는 구성을 통해 마치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극적 구성을 더하였습니다.
따라서 항상 회차별 제목을 꼭 확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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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하고는 하드나 사먹을까 하고 슬리퍼를 끌고 집을 나섰다. 낮 시간에는 동네가 조용하다.
날씨도 많이 따뜻해져서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집 근처의 구멍 가게를 찾았다. 가게 앞에 놓여 있는 아이스크림 냉장고에서 하드를 하나 골라 계산을 하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두 세 평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공간에는 여기저기 물건들이 쌓여 있었고 가게를 지키는 할머니는 구석에서 작은 TV를 보고 있었다.
“할매, 여기 아이스 크림이요.”
벌써 1년 가까이 이 가게를 다니다 보니 주인 할머니를 친근하게 할매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할머니는 말이 없었다. 가격을 물어보면 금액만 알려줄 뿐 할머니들 특유의 수다는 물론 그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 날도 일우가 돈을 내니 고개를 돌려 돈을 받고는 거슬러만 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TV에 뭐 재미있는 거 해요?”
혹시나 싶어 말을 걸어 봤지만 할머니의 시선은 여전히 TV에 고정되어 있을 뿐 일우를 마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우는 멋쩍은 마음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몸을 돌려 가게를 나오려고 할 때였다.
“이봐, 총각.”
할머니의 얘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일우는 다시 몸을 돌려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오, 할매 얘기도 하시네. 어쩐 일이시래.”
하지만 할머니는 바로 얘기를 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물었다.
“올해 몇 살이지?”
“스물 다섯 살이요. 그건 왜요?”
할머니는 다시 입을 닫고는 일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원래 도통 얘기란 걸 안 하던 할머니가 질문을 하고는 아무 얘기가 없자 무슨 일인가 싶어 괜시리 일우 혼자 똥쭐이 탔다.
“아, 왜 그러시냐고요.”
“사람 한 번 안 만나 볼래?”
“사람이요? 무슨 사람.”
전혀 뜻 밖의 얘기였다. 1년 가까이 드나드는 동안 한 마디도 얘기가 없던 할머니가 꺼낸 얘기가 사람을 만나보라니? 일우는 하드를 먹으며 계속 할머니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여전히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잠시 후 연필을 들더니 종이에 무언가를 쓴 후 일우에게 건네주고는 다시 TV를 보기 시작했다. 의아함에 할머니가 건네준 종이를 받아보니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0월 0일. 대원각. 12시. 김미향 예약.’
“이게 뭐에요, 할머니?”
일우가 묻자 할머니는 시선은 그대로 TV에 고정한 채 간단 명료하게 대답했다.
“그날 그 곳으로 가서 그 사람을 찾으면 돼.”
“이 사람이 누군데요? 그리고 만나서 뭘 해야 되는데요?”
“그냥 가 보면 알아.”
그 말을 끝으로 할머니는 입을 굳게 닫았다. 경험상 더 물어봐야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알기에 그 종이를 대충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가게를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지? 어, 그런데 종이에 써 있던 날짜가 내일 모레네? 일우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다시 한 번 날짜를 확인했다. 틀림없이 내일 모레다.
이틀 후 일우가 방문한 대원각은 생각 보다 훨씬 더 으리으리한 한정식 식당이었다. 가운데 마당을 두고 ‘ㄷ’자 형태로 지어진 전통 한옥 건물인데 마당 가운데에는 연못이 있고 작은 물레방아 같은 것도 돌아가고 있어서 주변에 심어 놓은 형형색색의 꽃들과 어우러져 한층 분위기를 살려주었다. 10분 일찍 도착해서 김미향이라는 이름을 말하자 어느 방으로 안내해 주었는데 한정식 집답게 테이블과 방석이 놓여 있었고 바닥은 일식 집처럼 뚫려 있어서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일단 한 번 가봐.”
이틀 내내 고민하면서 용희에게 어떻게 할까 물어봤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그래도 무슨 일인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 가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설마 대낮에 서울 한 복판 식당에서 널 납치라도 하겠냐?”
인터넷으로 대원각을 찾아보니 한정식 집이라며 용희가 걱정 말라고 얘기했고 그 얘기에 안심은 됐지만 그래도 적잖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상대방이 누군지,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와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불확실’이라는 얘기가 맞는 듯 하다. 혼자서 방 안에 앉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방문 밖으로 사람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선 사람을 보고 일우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키는 168~170 정도, 세련된 투피스 정장을 입었으며 치마 밑으로 들어난 각선미가 예뻤고 전체적으로 늘씬한 몸매에 얼굴은 계란형으로 굉장한 미인이었다.
웬만한 연예인하고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였고 도진경보다도 훨씬 미인이었다. 나이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듯이 잘 가늠이 되질 않았다. 일우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서 그녀를 맞았다.
“앉아 계셔도 되요.”
그녀는 품위 있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일우의 맞은 편에 앉으며 그녀를 안내해 준 사람에게 말했다.
“음식 주세요.”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사람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러자 이 공간에 그녀와 일우 두 사람만 남게 되었고 방 안의 공기는 더욱 무겁고 어색해졌다. 그 때 어색함을 깨려는 듯 그녀가 먼저 얘기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전 김미향이에요.”
아, 이 아름다운 미인의 이름이 그 종이에 써 있던 김미향이구나. 그런데 이름은 외모와는 다르게 좀 촌스럽네.
“그런데 무슨 일로…전 아무 얘기도 못 들었거든요.”
“역시 그 분이 아무 얘기도 안 해주셨군요. 얘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죠.”
그 분? 동네 가게 할머니를 얘기하는 건가?
“실례지만 나이가?”
“25입니다.”
“좋은 나이군요.”
그녀는 자신의 나이는 말하지 않은 채 일우에게 존댓말을 썼다.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음식이 들어왔다. 한정식 집이라 그런지 어마어마한 가짓수의 음식들이 들어와 상위에 하나 둘씩 차려지는데 상 차리는 데만 5분이 넘게 걸렸다. 상이 다 차려지자 음식을 들고 오셨던 분들이 다시 방문을 닫고 나갔고 방 안에는 다시 우리 둘만 남았다.
“드시죠.”
그녀가 젓가락을 들면서 먹기를 권했다. 말하는 거나 작은 행동에도 뭔가 기품이 있어 보았다. 음식은 맛있었다. 용희가 얘기한 것처럼 유명한 집이다 보니 음식을 제대로 만드는 집 같았다.
“그런데 뭐 하는 분이세요?”
음식을 먹으며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입 안에 있던 것을 꼭꼭 씹어 먹고는 말했다.
“이 식당 주인이에요.”
아, 그렇구나. 그래서 이 집에서 만나자는 거였군.
“그리고 혹시 젬므라는 보석 브랜드 알아요?”
“알아요. 백화점에도 매장이 있던데요.”
“맞아요. 그 브랜드도 제가 운영하는 거에요.”
일우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상당히 젊어 보이는 나이에 이렇게 크고 고급스러운 식당을 운영하는 것도 모자라 그렇게 유명한 보석 브랜드 회사를 운영한다니. 집안이 원래 부자인 건가?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요. 그냥 운이 좋아서였으니까.”
일우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놀라긴요. 그냥 의아해서.”
그렇게 대단치 않은 얘기가 잠시 오가더니 그녀가 물었다.
“혹시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무슨 부탁이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 고급 식당과 보석 브랜드까지 운영하는 그녀가 나에게 부탁할 게 뭐가 있을까 일우는 궁금했다. 그녀는 수저를 가지런히 놓더니 천천히 일어나서 그녀 뒤에 있던 벽으로 걸어갔다. 행동 하나하나가 차분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벽의 어느 부분을 누르자 갑자기 벽이 문처럼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것처럼 방 안에 또 다른 방이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와서 잠깐 안을 보세요.”
일우는 천천히 일어나 그녀 쪽으로 다가가서는 방 안을 둘러 보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퀸 사이즈 침대는 물론 화장대까지 있었고 방 안에 들어가서 자세히 보니 화장실 겸 샤워실까지 딸려 있었다.
“이게 뭐에요?”
그 사이 그녀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음식을 먹고 있었다.
“와서 앉으세요.”
그녀의 얘기에 일우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작지만 뭔가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매주 수요일 이 시간에 한 번 만나는 거에요. 만날 때마다 200, 그리고 그것과는 별도로 한 달에 300을 드릴게요.”
뭐야, 그럼 한 달에 1,100만원을? 뜬금없는 얘기에 일우는 저으기 당황스러웠다. 처음 만났는데 갑자기 돈을, 그것도 한 달에 천 만원이 넘는 돈을 준다니.
“저, 갑자기 그 돈을 저한데 왜 주신다는 건지…”
“저 방에서 두 시간을 보내는 조건이에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들고 있던 일우는 젓가락을 떨어트릴 뻔했다. 자신의 불륜남이 되어 달라며 그 조건으로 한 달에 그 많은 돈을 준다니. 아니, 아직 결혼 했는지는 모르니 반드시 불륜남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1주일에 한 번 2시간만 만나는 걸 사귀는 사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저, 죄송한데요 너무 느닷없는 제안이라서.”
“알아요. 당황스러우시겠죠. 지금 바로 결정 안 하셔도 되요. 단, 마음의 결정이 되시면 다음 주 수요일 낮 12시에 이 곳으로 오시면 되요.”
당황스러운 일우와는 달리 굉장히 차분한 것이 그녀에게는 꽤나 익숙한 듯한 상황으로 보였다. 덩달아 일우는 자신도 모르게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빠르게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혹시, 이런 거 여쭤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결혼 하셨어요?”
너무도 궁금해서 일우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했다.
“공식적으로는 안 했어요.”
그녀는 여전히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공식적’이라니 그게 무슨 뜻일까? 결혼은 했지만 혼인 신고를 안 했다는 걸까 아니면 동거만 하고 있다는 걸까?
그렇게 그녀와 헤어진 다음 날 일우는 바로 동네 구멍가게의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일우가 가게에 들어선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여전히 TV만 보고 있었다.
“할매, 어제 그 여자 대체 뭐에요?”
역시나 언제나처럼 할머니는 답이 없었다.
“할매, 그 여자가 자기랑 바람 피는 조건으로 한 달에 엄청 많은 돈을 준다고 했다고요. 이런 내용 할매는 알고 있었지?”
얼떨결에 자신도 모르게 말이 짧아졌다. 그러자 할머니는 여전히 시선을 TV에 둔 채 느리게 말했다.
“만나고 싶으면 만나는 거고, 싫으면 안 만나는 거지.”
할머니의 얘기에 일우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할머니 얘기가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선택에 대한 권한은 나에게 있으니 김미향이란 여자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일우 본인이 선택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니까.
선택이란 오로지 자신의 몫인 것이다.
“아니, 그래도 누군지는 알아야…”
“누군지 알면 뭐하게? 데리고 살 거야?”
이번에도 할머니 얘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같이 살 것도 아닌데 누군지 알면 뭘 할 것인가. 그 식당과 보석 브랜드 사장이라는 정보는 갖고 있으니까.
“알았어요. 알았다고. 하지만 이상한 사람이면 할매가 책임져!”
그리곤 일주일 동안 일우는 꽤나 많은 고민을 했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선택은 후회를 남긴다. 하나를 포기하고 나머지를 택해야 하기 때문에 택하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미련에 대한 후회는 항상 남기 마련이다. 다만 오래 후회하느냐 짧게 후회하느냐가 결정 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것이 더 낫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다. 오래 후회하느냐 짧게 후회하느냐를 선택하는 것이지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 다음 주 수요일 정오에 맞춰 일우는 그 식당으로 가고 있었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