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이야기 구조입니다.
앞 부분에 조연처럼 등장했던 나왔던 인물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요 인물이 되는가 하면 인물과 인물의 관계가 거미줄처럼 엮어 전체적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조입니다.
또한 앞 부분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나중에 일어날 일의 복선이 되기도 하는 등 전체적으로 이야기 구조를 짜임새 있게 엮었습니다.
또한 남자의 시선과 여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나누어서 진행되며 중간에 교차되기도 하는 구성을 통해 마치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극적 구성을 더하였습니다.
따라서 항상 회차별 제목을 꼭 확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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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쌀쌀해진 날씨만큼 해도 짧아져 벌써 하늘이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나올 법도 한데 아직 공장 문을 나서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발끝으로 땅바닥에 박혀 있는 돌을 톡톡 건드리며 기다려 보지만 그 시간이 꽤나 지루하다. 혹시나 입김이 나올까 ‘하-‘하고 불어보니 옅은 입김이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들이 공장에서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고 그 사이로 하얀 파마머리와 구부정한 허리를 한 채 낡고 두툼한 옷을 입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일우는 그 사람이 공장 출입문을 벗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다가가서는 천천히 불렀다.
“엄마.”
일우가 부르자 엄마는 깜짝 놀란듯한 표정으로 뒤돌아 보더니 이내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과 반갑다는 표정이 얼굴에 교차했다.
“일우 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엄마는 두 손을 내밀어 일우의 손을 꼭 쥐었다. 거칠었다. 평생을 고생스럽게 살아 온 엄마의 손은 그 시간의 길이만큼 거칠어진 것이었다.
“그냥, 엄마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래, 잘 왔다. 밥은 먹었고?”
늘 그랬다. 이따금씩 엄마를 보러 오면 언제나 엄마의 첫 번째 질문은 ‘밥 먹었냐’는 것이었다. 하루 세끼 중에 한끼 정도 안 먹는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늘 그 질문이 제일 먼저였다.
“아직이요. 엄마랑 같이 먹으려고. 오늘은 엄마가 좋아하는 추어탕 먹으러 가요.”
“아니다. 집에 쌀 있는데 뭐 하러 밖에서 사 먹냐. 얼른 가자. 내가 해줄게.”
엄마는 항상 손수 밥을 지어주셨다. 일을 마치고 힘들고 지칠만한데도 일우가 찾아가면 언제나 손수 밥을 차려주셨다. 김치와 두부 전, 된장국 같은 것들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주는 엄마의 밥은 언제나 맛있었고 늘 배가 불렀다. 그깟 밥 한끼가 뭐라고, 그깟 따뜻한 밥 한끼가 뭐라고 엄마는 늘 손수 밥을 해주셨다.
“아니에요. 오늘은 저도 추어탕 먹고 싶어서 왔어요.”
일우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주차해 놓은 곳으로 엄마를 이끌었다.
“이게 무슨 차냐?”
일우의 차를 본 엄마는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오늘 하루만 아는 형한테 빌렸어요. 엄마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간다고 하니까 빌려줬어요.”
그러게 얼버무리고는 엄마와 함께 근처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추어탕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자리가 있어 바로 주문을 할 수 있었다.
“엄마, 이제 일 좀 그만 하세요. 내일 모레면 칠순인데.”
식탁에 수저를 놓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일 안 하면 뭐하고 살라고. 어차피 죽으면 썩어질 몸인데 살아 있을 때 움직여야지.”
늘 똑 같은 대답이다.
”그나저나 진짜 별일 없는 거냐? 평소에는 온다고 연락이나 하고 오더니 오늘은 못 보던 차도 갖고 갑자기 오고.”
“네, 별일 없어요.”
그래도 아들이라고 살갑게 얘기하는 편이 못 되다 보니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밥을 먹는 동안 일우의 눈은 거친 엄마의 손, 자글자글한 엄마의 눈가, 거뭇거뭇해진 얼굴 피부를 살피다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안되겠다 싶어 꾸역꾸역 추어탕을 입 속으로 밀어 넣고는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엄마, 이거 쓰세요.”
“이게 뭐냐?”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모셔다 드리는 차 안에서 일우는 엄마에게 흰 봉투 하나를 건네 드렸다.
“제가 요즘 알바 하는데 보너스가 나왔어요. 그래서 엄마 옷을 하나 사 올까 하다가 그냥 돈으로 드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차마 사실대로 얘기는 못하고 그렇게 둘러대자 엄마는 일우의 손을 밀어내며 대꾸했다.
“됐다. 나도 아직 돈 번다. 네가 번 것은 은행에 저금해서 연애도 하고 장가도 가야지. 그냥 너 써라.”
“아, 그러지 말고 좀 쓰세요. 공장 아줌마들한테 밥 좀 사면서 아들 자랑도 좀 하고. 입고 싶은 옷도 좀 사 입고.”
“괜찮다.”
엄마는 끝내 그 봉투를 받지 않으셨고 일우는 엄마의 옷 안에 우격다짐으로 우겨 넣고는 엄마를 내려 드리고 집으로 향했다. 룸 미러로 뒤를 보니 엄마는 집에 들어가지 않으신 채 그대로 서서 내가 가는 길을 계속 바라보고 계셨다. 그게 엄마다. 우리 엄마다.
“야, 이거 우리 일우가 스폰 하나 제대로 잡았구나.”
윤상무가 나를 보자마자 평소처럼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스폰은요, 무슨. 그냥 손님인 거죠.”
“그냥 손님이 이렇게 자주 온다고? 게다가 한창 잘나가는 젊은 여배우가 말이야. 그것도 친히 예약 전화까지 주고 말이야.”
도진경이란 배우가 오늘 또 온다고 예약을 했다. 담당으로는 나를 지목하면서.
“뭐 그건 그 사람 자유니까요.”
일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건조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은근히 신경이 쓰이긴 했다. 윤상무의 얘기대로 한창 잘나가는 젊은 여배우가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런 곳에 자주 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편하게 생각해. 그렇다 잘 되면 좋은 거고.”
윤상무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방을 나갔다. 일우의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이 곳에 출근을 했고, 손님을 맞았으며 그들과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돈을 벌었다.
그렇게 무의미한 듯 건조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일우에게 신경 쓰이는 건 오히려 지난 번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골목길에서 만난 김미향이란 여자였다. 그날 골목길에서 마주한 김미향은 천천히 일우 쪽으로 걸어 와서는 오른쪽 손을 내밀었다. 일우는 아직 전화기를 한 손에 든 채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그냥 서 있었다.
“뭐야, 내 손 부끄럽게.”
김미향은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잠시 어디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그 얘기에 일우는 정신이 돌아왔다.
“아니요. 할 얘기 있으면 지금 여기서 하세요. 최대한 간단히. 지금 친구들이 안에서 기다리거든요.”
“그래, 어쩔 수 없지.”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있는 말투였다.
“그동안 너 많이 찾았어. 그날 그런 일을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도 됐고. 정말 별일 없지?”
“네, 별일 없어요. 아주 잘 지내고 있거든요.”
일우는 최대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까 물어봤던 거 다시 한 번 물어 볼게. 우리 다시 만나면 안 될까?”
“아까 안 된다고 했잖아요. 이유도 얘기했는데, 대체 왜 그러세요?”
“너한테 익숙해졌으니까.”
그녀의 대답을 듣고는 갑자기 머리가 멍해진 기분이 들었다.
“누가 그러더라. 사람은 한 번 익숙해지면 그것을 지우기까지, 익숙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까지 그렇게 힘든 거라고. 너와 나, 어떻게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자주 만나면서 너에게 익숙해진 것 같아. 그래서 네가 끊임없이 보고 싶었어.”
일우에겐 조금 충격적인 얘기였다. 철저히 계약 관계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애초부터 계약이 끝나면 굳이 다시 볼 생각이 없었던 일우와는 달리 김미향은 일우에게 익숙해졌다는 것이었다. 마치 한 때 연인이었던 사람에게 얘기하는 것처럼.
“특히”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게 좋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벌었냐, 사업은 어떻게 시작했냐, 당신 같은 외모로 왜 연예인을 안 하느냐, 젊은 나이에 성공한 비결이 뭐냐 같은 무의미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쏟아 냈거든. 그럴 때마다 난 정말 지겨웠어. 지금은 너도 알지만 내가 원해서 시작한 사업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이 생활을 하게 된 것도 아니니까. 그런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도 없었고 설명하기도 싫었는데 넌 그 어떤 것도 나한테 물어보지 않았잖아. 그래서 너에게 끌린 것 같아.”
조곤조곤히 말하는 그녀의 눈이 무언가에 반짝였다. 아마도 눈물이 살짝 고인 듯하다. 그 때였다.
“일우야, 여기서 뭐해?”
용일이었다.
“전화 받으러 나간 애가 뭐하길래 이렇게 오래 걸리나 싶어 나와봤지. 아는 분이야?”
“응, 그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머뭇거리는데 용일이가 김미향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일우 친구 용일이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와, 굉장한 미인이시네요. 그나저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한 잔 하실래요? 우리는 남자들끼리만 있어서 분위기가 영 칙칙하거든요.”
“용일아 그게…”
용일이가 김미향에게 뜬금없는 제안을 하자 일우는 당황해서 말리려고 했다.
“좋아요.”
일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김미향은 용일이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고 손을 쓸 새도 없이 두 사람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일우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녀를 언제나 따라다니는 일본인 보디 가드들이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잘못하면 용일이랑 지완이 그리고 학주까지 자기가 경험했던 상황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눈에는 띄지 않았고, 일우도 어쩔 수 없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 때부터 두어 시간쯤이나 다섯 명은 함께 술을 마셨다. 아니 정확히 말자면 김미향과 일우를 제외한 친구들은 신나게 떠들며 술을 마셨고 일우는 여전히 주위를 경계하며 가슴을 졸여댔다. 친구들은 김미향에게 ‘미인이시다’, ‘갑자기 술자리가 환하게 밝아졌다’며 입 발린 소리를 날리는가 하면 일우와는 어떤 사이인지 집요하게 물어댔고 그 때마다 김미향은 이런 저런 얘기로 상황을 모면하며 자리를 이어갔다.
그렇게 술 자리가 파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갈 때 김미향이 일우에게 물었다.
“우리 어디 가서 딱 한잔만 더하자. 그러면 앞으로 귀찮게 하지 않을게.”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제안을 단호하게 뿌리쳐야 했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언가 절실하게 할 말이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딱 1시간만이에요. 그리고 술 보다는 차나 한 잔 해요.”
“그래, 고마워.”
그녀의 대답과 함께 두 사람은 근처의 한 카페로 향했고 그 와중에도 일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보디가드들이 있는지 살펴보며 움직였다.
김미향의 어린 시절은 집 안은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했다.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잘 돼서 큰 걱정없이 살았고 본인은 타고난 외모 때문에 주변에서 연예인을 하라는 제의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을 법한 사연인, 아버지의 사업에 문제가 생겨 집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빚쟁이들이 찾아왔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들을 피해 어디론가 도망간 상태여서 어머니 혼자 빚쟁이들을 상대했다.
그런데 그 빚쟁이들 중에 일본 사람들이 있었다. 빚이 빚을 낳는다고 사업 확장을 위해 대출을 했었는데 사업이 생각만큼 안 풀리자 그만 일본계 사채를 끌어 썼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본 사채업자가 아버지를 찾아 집에 왔을 때 김미향을 보고는 그녀의 어머니한테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녀를 달라고. 연예 기획사에 소속되어 연기 학원을 다니며 배우를 준비하고 있던 그녀를 보고 제안을 한 사람이 바로 야쿠자 두목이었다.
당연히 어머니는 단칼에 거절하셨지만 야쿠자 두목은 잘 생각해보라며, 만약 거절한다면 그녀와 함께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까지 찾아내서 장기 매매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방 안에서 몰래 그 얘기를 듣고 있던 그녀는 다음 날 그들이 남기고 간 명함을 들고 그 곳을 혼자 찾아가서는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대신에 아버지 빚을 모두 갚아달라고 했다.
“어머니 때문에.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왔는데 엄마가 혼자서 울고 있는 걸 봤거든. 내가 있을 땐 한 번도 눈물 흘리시는 걸 본적이 없었는데 혼자 계실 땐 그렇게 울고 계셨던 거야. 하긴, 평생을 아버지랑 걱정 없이 살았는데 갑자기 그런 상황이 됐으니 울지 않으면 더 이상한 거겠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조건은 고등학교는 졸업하고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것.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야쿠자 두목이 마련해준 집으로 옮겼고 그 전에 아버지의 빚은 그 사람이 모두 갚아주었다고 했다. 당연히 집을 나오면서 그녀는 오디션이 많아져서 학원에서 알게 된 친구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 이후로는 연예계 쪽에 미련을 끊고 야쿠자 두목이 차려 준 회사를 운영하게 됐다는 것이다.
“꽤 슬프네요.”
그녀의 하소연 같은 넋두리를 듣던 일우가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힘든 건 뭐였는지 알아?”
“뭔데요?”
“가장 친했던 친구랑 연락조차 끊긴 일. 도저히 연락할 수가 없었거든.”
그녀는 고등학교 때 2년이나 같은 반을 했던 가장 친했던 친구, 공부는 늘 전교 1등을 하던 친구와 연락을 할 수 없었던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지금 들어서 알겠지만 내 처지가 연락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그 분풀이랄까, 미친 듯이 쇼핑을 했어. 그 노인네 같은 야쿠자 두목을 졸라서 명품을 신나게 사고 다녔지. 수입차도 사달라고 해서 운전하고 다녔어. 꽤나 어린 나이에 말이야.”
일우는 미향의 얘기를 들으며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얘기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확히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이야, 이런 얘기.”
그녀는 담담하게 자기가 살아온 얘기를 끝냈다.
“사실 미치도록 말하고 싶었거든. 그런데 얘기할 사람이 없더라. 전부다 나의 현재 모습이나 외모만 보고 접근 해오거나 뭐라도 하나 건질까 싶어했던 사람들 뿐이었거든. 그런데 그거 알아? 사람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고 살면 오래 못산다는 거.”
“그게 무슨 얘기에요?”
“그게 화병이란 거거든. 밖으로 빼내지 않고 가슴에 담아 놓으면 그게 화병이 되는 거지. 말로든 술로든 혹은 쇼핑으로든 어떻게든 그걸 풀어야 해. 그런데 그렇게 오래도록 참고 있었던 얘기를 오늘 너한테 했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더욱 화려한 거짓으로 치장을 하거나 침묵을 하게 된다. 그것이 슬픈 현실이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슬픈 현실.
“죄송한데 내가 그 얘기를 처음 들은 사람이라고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그녀의 얘기를 들은 일우는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스스로 생각해도 냉정한 얘기를 했고 그녀는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봤다.
“누군가에는 특별한 것이 어떤 사람에게 특별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잖아요. 미향 씨에겐 내가 특별할 지 몰라도 나에게 미향 씨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오히려 안 좋은 경험만 또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만 생길 뿐이에요.”
일우의 얘기를 들은 그녀는 무슨 얘긴질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쉽네. 나에겐 특별한 사람인데. 특별한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니, 그게 마음대로 될까 모르겠네.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겠지. 특별한 사람이 그렇게 원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 헤어졌다. 악수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잘 가라는 인사말만 남기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택시를 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다시 한 번은 그녀와 마주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게다가 오늘 도진경이 미리 예약까지 하고는 또 나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비벼대기 시작했다. 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걸까? 그리고 김미향이 했던 얘기는 어디서 들었던 것일까?
“어서 오세요, 누님.”
일우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도진경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오늘도 혼자 오셨네요.”
얼굴 한 가득 영업용 미소를 띄운 채 그녀의 옆에 앉아 술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너, 말이야…”
도진경의 얘기에 내가 쳐다보자 그녀는 주저하는 듯 말을 삼켰다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말을 이었다.
“나랑 데이트 좀 하자.”
“네? 데이트요?”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당황스러워 일우는 들고 있던 술병을 테이블 위에 놀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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