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이야기 구조입니다.
앞 부분에 조연처럼 등장했던 나왔던 인물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요 인물이 되는가 하면 인물과 인물의 관계가 거미줄처럼 엮어 전체적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조입니다.
또한 앞 부분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나중에 일어날 일의 복선이 되기도 하는 등 전체적으로 이야기 구조를 짜임새 있게 엮었습니다.
또한 남자의 시선과 여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나누어서 진행되며 중간에 교차되기도 하는 구성을 통해 마치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극적 구성을 더하였습니다.
따라서 항상 회차별 제목을 꼭 확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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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아, 너 이사람 한 번 만나 봐라.”
드라마 촬영 중 잠시 쉬고 있는 진경을 이수련 선생이 부르더니 다짜고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사람이 누군데요?”
진경은 사진과 이수련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너, 헤어진 지도 좀 됐고 아무래도 연애를 하는 게 연기에 도움도 되니 내가 수소문해서 한 명 알아봤다. 호원 그룹 알지? 거기 막내 아들이야.”
호원 그룹이라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의류 브랜드를 보유한 기업이었다.
“호원 그룹이요? 거기서 절 왜…?”
진경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거기서 널 보자고 한 게 아니라, 좀 전에 말했듯이 너 연애 좀 시키려고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마침 그 친구가 사람도 괜찮다고 해서 너 소개시켜주려고 사진 좀 얻어 온 거야.”
이수련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자상하게 진경에 설명해 줬고 진경은 아무 말 없이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가 최대한 정중하게 얘기했다.
“선생님, 신경 써주시는 마음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누굴 만나거나 할 마음이 없어서요. 당분간은 그냥 연기만 할 계획이거든요. 소속사와도 그렇게 얘기했고요.”
그 때 진경은 아주 잠깐이지만 날카롭게 변한 이수련의 표정과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자기 말에 토를 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기분 나쁜 일이라는 듯한 표정과 눈빛이었다.
“그래, 사람 마음을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널 걱정해준 날 생각해서 한 번만 만나보면 안 되겠니? 어렵게 만든 자린데.”
다시 원래의 자상한 목소리로 수련은 진경에게 되물었다. 그 때 진경은 효진이 예전에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너랑 같이 드라마 하는 이수련 선생 있지? 그 분 조심해.’
“네, 알겠습니다. 한 번 만나는 볼게요. 그래도 너무 기대는 안 하시는 게…아무래도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제가 아직 경황이 없어서요.”
“당연하지. 사람의 연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이어지나. 일단 한 번 만나 보고 좋은 사람이다 싶으면 계속 만나면 되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 보면 되지 뭐.”
이수련은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고, 도진경은 알았다고 하고는 이수련의 대기실을 나와서 문을 닫자마자 길게 한 숨을 내 쉬었다.
“와, 언니. 잘 하면 거기 모델도 되는 거 아니에요?”
진경의 얘기를 들은 진희는 마치 자기 일처럼 신나 해하며 물었다.
“모델은 무슨. 그게 내 마음대로 되니? 다 회사하고 얘기가 먼저 돼야지. 그치, 홍구 오빠?”
진경의 질문을 받은 홍구는 평소처럼 그렇다, 아니다라는 말 없이 그냥 듣기만 했다.
“그래도 사귀게 되면 혹시 또 알아요? 주머니 돈이 쌈짓돈이라고. 모델 시켜주겠죠.”
진희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렇게 좋으면 네가 대신 만나 볼래?”
“에이, 언니. 언니랑 나랑은 레벨이 다른데 그 사람이 절 만나겠어요? 또, 이수련 선생님 체면도 있는데.”
진경의 물음에 진희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농담이야, 농담.”
진희의 모습에 즐거워하던 진경은 문득 효진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빠, 오늘 촬영 끝나고 나 효진 언니 집에 데려다 줘. 잠시 할 얘기가 있거든.”
“또? 혹시 지난 번처럼 떡 될 때까지 술 마시려는 거 아니야?”
홍구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이제 시청률이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진경이 술 때문에 피해를 끼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오빠는 내가 무슨 술고랜 줄 알아. 그냥 뭐 좀 얘기할 게 있어서 그래.”
대답을 하면서 진경은 자기도 모르게 일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일우를 안 본지가 꽤 됐다. 지난 본 놀이공원 데이트 이후 못 봤으니 벌써 여러 달이 됐는데 보는 것은 고사하고 연락도 서로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럭저럭할 걸 고르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실패하기 십상이거든요. 항상 꼼꼼하게 고르고 비교도 해보고 그리고 나서 골라야 관계가 오래 간다고요. 사람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꼼꼼히 골라야 한다는 그의 말이 이수련 선생과 오버랩 되면서 진경의 머리 속은 복잡해졌다.
“그나저나 약속 잡히면 알려줘. 회사에 보고 해야 하니까.”
홍구가 평소처럼 낮은 목소리로 진경에게 말했다.
“보고? 아니 뭐 이런 개인적인 것까지 보고를 하려고 그래?”
“넌 좀 특별한 경우잖아. 우리 회사에서 제일 나가기도 하고 제일 비싸기도 하고. 그러니까 회사에서 관리 해야지.”
진경이 애교를 부리면서 회사에 보고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홍구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진경에게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그 양반 예전에 마담 뚜로 유명했었어.”
이수련이 했던 말을 전하자 효진의 입에서 처음 나온 얘기는 전혀 예상 외였다. ‘여긴 내 집이야’를 온 몸으로 뿜어내듯이 편안한 트레이닝 바지와 목 늘어난 티셔츠,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묶은 채 한 손에는 캔 맥주를 들고 소파에 꾸부정하게 앉은 채 효진이 진경의 상담을 하고 있는 중이다.
“마담 뚜? 이수련 선생님이?”
“선생은 무슨. 그 양반 겉으로는 굉장히 다정해 보이고 푸근해 보이잖아. 그런데 그거 다 연기야, 연기. 연기를 드라마 안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실 생활에서도 하는 사람이라니까.”
뜻 밖의 얘기에 진경은 어리둥절했다. 드라마를 함께 촬영하는 동안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무슨 일? 말도 마. 그 양반 옛날부터 재벌하고 여자 연예인하고 만나게 해주는 걸로 재벌들한테 돈 받는 걸로 유명했거든. 처음 말할 때는 너한테 했듯이 한 번 만나 보기만 해라, 사람 인연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냐, 라고 하지만 한 번 만나게 해줄 때마다 작게는 몇 백, 크게는 몇 천씩 받는다는 얘기가 있었어. 너 김혜주 선배 알지?”
“혜주 선배? 당연히 알지.”
“그 선배 오래 전에 주말 아침 드라마에 나오면서 잘나갔었는데 갑자기 한두 달 못 나온 적이 있었어. 왜 그런지 알아?”
“글쎄? 왜 그랬는데?”
효진은 손에 들고 있던 캔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이수련이 재벌 3세한테 소개시켜 줬잖아. 그런데 만나러 나간 자리에 원래 만나기로 한 남자 혼자 있었던 게 아니고 몰려다니는 다른 친구들 몇 명이 같이 있었대. 그런데 그 놈이 혜주 선배한테 억지로 술 먹이고 약도 먹였다지, 아마? 게다가 폭력까지 썼고. 그 후유증으로 그 선배 잠시 쉰 거잖아. 멍도 빼야 되고. 약 기운도 빼야 되고 해서.”
“정말? 그럼 그 인간들 고소하면 되지 않아?”
효진의 얘기를 들은 진경은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야, 재벌이 왜 재벌이겠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다 검찰하고 경찰하고 연결되어 있는데 고소하면 혜주 선배만 피해보는 거지. 그런 일 당한 게 세상에 알려지면 어디 방송에 나올 수나 있겠어?”
“하긴 그렇네. 그나저나 난 어떻게 하지? 일단 만나는 보겠다고 했는데.”
진경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자 효진은 상체를 진경 쪽으로 들이 밀며 진지하게 말했다.
“우선, 장소를 네가 정해. 무조건. 그것도 사람이 많은 공개적인 곳으로. 절대 무슨 식당 룸 같은 곳 말고 커피나 마실 수 있는 곳 같은 데. 그리고 약속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해서 주변에 숨어서 같이 온 다른 사람들이 있나 잘 살펴 봐.”
“공개적인 곳이면 소문 다 날 텐데? 호원 그룹 아들하고 연애 한다고. 우리나라 기자들 확인도 안 하고 기사 쓰는 건 유명 하잖아.”
“안 좋은 일 당하는 것보단 소문 나는 게 나을 걸? 기사야 사실 아니라고 부인하면 되니까.”
진경은 효진의 얘기를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소속사도 나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적극 방어해 주겠지, 라고 진경은 생각했다.
“말이 난 김에 말하자면 예전에 이 업계에 전설적인 마담 뚜가 한 명 더 있었어.”
“그게 누군데?”
진경은 호기심 어린 눈 빛으로 효진에게 물었다.
“남궁시연이라는 여잔데 보통 ‘남궁이’라고 불렀대. 연예계 쪽에 일하던 사람은 아니고. 그런데 그 여자는 이수련처럼 돈 때문에 재벌하고 연예인하고 연결시켜주는 게 아니라 신기가 있다는 소문도 있었어. 신 내림을 받아서 원래 무당이었다는 얘기도 있었고. 그래서 사람을 함부로 연결시켜 준 게 아니라 사진 같은 걸 보거나 사주 같은 걸 봐서 연결해 줬다나? 그래서 연결해준 사람들이 실제로 결혼도 많이 하고 잘 살았거든. 그래서 평판이 되게 좋았어. 그 왜 얼마 전에 사망보험 보상금으로 떠들썩했던 이주희 알지? 걔도 남궁이가 연결시켜 준 거잖아.”
“난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런데 그 분은 어떻게 되셨는데?”
“그 사람이 엄청 마당발이라서 영향력이 커지니까 이수련이 가만 있겠냐? 같이 몰려다니는 동년배 할매 배우들이 뭉쳐서 남궁이를 찾아가서 행패부리면서 협박도 하고 그랬나 봐. 자기네들이 돈 받고 연결해준 재벌들이 깡패도 붙여주고 했다고 하더라. 그 뒤로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는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벌써 할매가 됐을 나이긴 했던데.”
효진의 얘기를 들은 진경은 평소에 전혀 알 수 없었던 이수련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언니, 정말 사람이란 겉으로 봐선 모르겠다.”
“맞아. 그래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잖냐. 다시 얘기하지만 이수련 그 인간 조심해. 너 소개해주고 벌써 기본 몇 백은 받아 먹었을 거야. 참 그나저나.”
얘기를 하던 효진은 손에 묻은 맥주 캔의 물기를 트레이닝 복 바지에 쓱쓱 닦고는 다시 맥주를 꿀떡꿀떡 마셨다. 진경은 그 모습을 보며 이 언니가 또 무슨 얘기를 하려나라는 생각을 했다.
“너 그 놈 아직 만나냐?”
“그 놈? 누구?”
“오지영인지 육지영인지한테 빌미를 제공해줄 뻔 했던 말근이 말이야.”
“아, 일우? 안 만나. 안 만난 지 꽤 됐어.”
진경은 약간 허탈해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잘했다. 한 번은 어떻게 막았지만 같은 사건이 또 터지면 그 땐 어떻게 막을지 감도 안 서니까 다시는 만나지 마. 너 정도면 좋은 사람 얼마든지 만날 수 있잖아.”
예상외로 단호한 효진의 얘기에 진경은 속으로 살짝 움찔했다. 만나지는 않았어도 이따금씩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서일우였기 때문이었다.
“걔네들 하는 일이 원래 남 얘기 들어주는 거야. 그런 곳에 가는 사람들은 또 그렇게 얘기하면서 스트레스 풀리니까 가는 거고. 그 비싼 돈 주면서. 그러니까 괜히 어설픈 감성에 휘둘리지 말고 인연 끊어.”
“알았어, 언니.”
“그리고 이수련이 소개해 준 남자 만날 때 시간 되면 나도 같이 가자. 내가 주변에 있다가 무슨 일 생기면 도와 줄게.”
“진짜? 너무 고마워, 언니.”
진경은 효진의 목덜미를 끌어 안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평일의 장충동 신라호텔 커피 숍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투숙객으로 보이는 외국인과 비즈니스 미팅을 하는 듯한 사람들, 그리고 돈 많은 아줌마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언니, 너무 튀는 거 아니야?”
약속 장소로 오기 전 먼저 만난 효진을 본 진경은 걱정스레 물었다. 면 티셔츠와 청바지, 운동화에 야구 모자를 쓴 모습이 너무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왜, 이 정도면 지극히 평범한 건데. 평범해야 눈에 안 띄지.”
“언니, 그 호텔 커피 숍은 너무 평범하면 오히려 눈에 띈다고.”
“상관없어. 누가 날 신경이나 쓰겠어?”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는 효진과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한 두 사람은 주변을 살펴 보았다. 혹시나 졸부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들이 무리를 지어 있거나 하는 모습이 보이면 바로 약속을 깨고 돌아가려는 계획이었는데 다행히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커피 숍에 따로 들어가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았다. 진경은 창가 쪽으로, 효진은 진경의 테이블이 잘 보이는 쪽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약속시간 5분쯤에 훤칠한 남자가 커피 숍으로 들어서서는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진경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도진경 씨.”
인사를 받은 진경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목례를 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도진경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소매를 걷은 감색 긴 팔 셔츠와 베이지 색 면바지, 갈색 로퍼를 신고 있었고 향수 냄새도 은근히 나는 듯 했다.
“저는 오지운이라고 해요. 앉으시죠.”
남자도 자기를 소개하면서 앉을 것을 권했다.
“혹시 뭐 주문하셨어요?”
남자는 앉자마자 진경에게 물었다.
“아니요. 아직.”
“그럼, 주문부터 하죠.”
남자는 일사천리로 웨이트리스를 불러서 아이스커피를 주문했고 진경에게도 주문하기를 권했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웨이트리스는 주문을 받아 적고 확인하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아무 말없이 그냥 창 밖을 바라보는 어색한 시간을 가지다가 잠시 후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운이 없으시네요. 오늘처럼 좋은 날씨에 이런 곳에서 저를 만나시다니.”
빙긋 웃으며 말하는 남자의 얘기가 뜻밖이라 진경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요즘은 미세먼지 없이 이렇게 맑은 날이 흔하지 않은데 말이죠. 진경씨야 워낙 유명한 분이신데다 아름다우시니까 좋은 남자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짙은 눈썹의 남자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진경과 창 밖을 번갈아 보며 계속 말했다.
“진경 씨도 그랬겠지만 사실 저도 이 자리가 좀 불편하거든요.”
“오늘처럼 좋은 날 이런 곳에서 절 만나게 돼서요?”
진경이 처음으로 입을 떼고 한 얘기는 남자의 얘기를 응용한 것이었다.
“아니요.”
남자는 웃으며 두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면서 지내는 친구 놈들이 있는데 가끔씩 만나면 연예인 누구 만났다, 누구랑 소개팅 했다 이런 얘기하는 걸 보면 좀 한심해 보였거든요. 제가 워낙 연예인에 관심이 없어서. 직업적으로는 빼고요.”
“직업적으로요?”
“아, 제가 광고 기획을 하고 있거든요. 보통 업계에서는 A.E라고 부르는데 광고주들한테 모델 제안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아예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고 업무적으로 적당한 관심만 갖고 있어요.”
호원그룹 아들이 광고 기획을 한다니 진경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계열사 중에 광고 회사가 있나? 그런데 ‘광고주들한테 모델 제안을 한다’고 하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왜…”
“하도 어머니가 한 번 만나보라고 하셔서요.”
남자는 짧게 대답했고, 그 때 웨이트리스가 아이스 커피 두 잔을 들고 와서는 테이블에 올려 놓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혹시 계열사 중에 광고 회사가 있나 봐요?”
“아니요, 없어요. 할아버지 때부터 고단수의 경영을 하신 거죠.”
“고단수라고 하시면…”
“광고를 외부에 맡겨야 광고비만큼 물건을 팔 수 있으니까요. 계절이 바뀌면 옷 사라, 명절 같은 때도 옷 사라, 행사 같은 거 하면 옷 사라, 뭐 그런 거죠. 대한민국에서의 갑을 관계란 게.”
남자는 커피잔을 한 손에 들고는 빨대로 커피를 한 모금 빨아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친구 놈들 중에 광고 할 거면 자기네 계열사에 와서 하라고 하는 놈들도 있는데 그 놈들 하고는 체질이 안 맞아서 그냥 소규모 대행사에 취직했어요. 물론 집안 배경은 완전히 숨기고요. 그런데 큰데 보다는 확실히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것 같아요. 직접 이것저것 다양한 것들을 해볼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큰 규모는 완전히 부서별, 팀 별로 나눠져서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남자의 얘기를 들은 진경은 ‘이 남자, 정체가 상당히 흥미롭네’라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일이 재미있으신가 봐요.”
“그럼요, 진경 씨는 하시는 일 재미 없으세요?”
남자의 기습적인 질문을 받은 진경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과연 내 일이 재미있어서 하는 건가? 아니면 해오던 거니까 익숙해져서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 남자 대체 뭔데 이렇게 짧은 순간에 내 속을 들어 왔다 나갔다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짧게 대답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와, 이거 실망인데요. 대한민국 탑 여배우가 연기가 재미있어서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니.”
남자는 일부러 오버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나저나 저희 회사 모델 좀 돼 주세요.”
남자는 다시 한 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고 진경은 무슨 뜻으로 하는 질문인지 몰라 되물었다.
“어떤 회사요? 광고 회사? 아니면 호원 그룹?”
“당연히 호원 그룹이죠. 요즘에 경기가 안 좋아서 대행사들 경쟁이 엄청 치열하거든요. 이 참에 회사, 아 광고 회사요, 매출에 기여도 할 겸 인맥 활용 한 번 해보려고요. 티 안 나게 하려면 쉽지야 않겠지만.”
“아…그런데 그런 일은 소속사에서 관리를 해서요. 제가 지금 뭐라고…”
“당연하죠.”
남자는 진경의 얘기를 자르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업계 불문율대로 해야죠. 저도 모델 에이전시에 정식으로 의뢰할 거고요. 다만 제안을 뿌리쳐주지 마십사 하는 것과 기왕이면 모델비를 조금 깎아주시면 제가 체면이 좀 서지 않을까 해서요.”
남자는 말을 하는 내내 표정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굵은 눈썹과 은근히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예, 한 번 적극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진경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 동안 억지로 몇 번 소개 받았던 혹은 소문으로 들었던 재벌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드는 남자였고, 그래서인지 알 수 없는 묘한 호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원래 사람이란 익숙한 것과 다른 것을 경험했을 때, 특히 그 익숙한 것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는데 정 반대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호감을 가질 수 밖에 없으니까. 오지운, 이 남자 대체 뭐지? 그 때 진경의 눈에 한 쌍의 남녀가 커피숍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들어와 시선을 옮겨 자세히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
지영과 일우였다. 두 사람은 진경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들어서자마자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한 쪽 자리에 마주보고 앉았다. 그런 진경의 모습에 지운도 함께 그녀의 시선을 따라 이제 막 자리에 앉은 지영과 일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요, 아는 사람이에요?”
진경의 시선을 따라 지영과 일우를 본 지운이 진경에게 물었다.
“아, 아니에요.”
진경은 다급히 표정을 숨기고는 대답했지만 한 쪽에서 자신을 보며 X자를 크게 만들고 있는 효진을 보자 갑자기 긴장감이 차 올랐다. 저 두 사람은 왜 이곳에 왔을까? 아니, 그것보다 저 두 사람은 어떤 사이며 어떻게 만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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