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이야기 구조입니다.
앞 부분에 조연처럼 등장했던 나왔던 인물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요 인물이 되는가 하면 인물과 인물의 관계가 거미줄처럼 엮어 전체적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조입니다.
또한 앞 부분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나중에 일어날 일의 복선이 되기도 하는 등 전체적으로 이야기 구조를 짜임새 있게 엮었습니다.
또한 남자의 시선과 여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나누어서 진행되며 중간에 교차되기도 하는 구성을 통해 마치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극적 구성을 더하였습니다.
따라서 항상 회차별 제목을 꼭 확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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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저쪽 집에 이사온 젊은 여자 있지? 글쎄 그 여자가 미혼모라네.”
“그래? 근데 어쩌다 그 나이에 그렇게 됐대?”
“그럼 그 여자 아들 아빠는 누군지도 모르는 거야?”
골목길 구멍 가게 앞에서 효진이 동네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낸들 아나?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여자 아들이 어디 회장님 자식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효진은 짐짓 자기만 아는 정보를 흘리는 척 얘기했다.
“그래? 그럼 그 회장님이 저 집도 해준 건가?”
“글쎄 그건 본인만 알겠지. 그나저나 우리 동네에 미혼모가 웬말이야, 미혼모가.”
“그러게. 세상이 참 말세야, 말세. 요즘은 다 큰 처녀가 혼자 애를 낳아 키우지 않나.”
그 때 한 젊은 여자가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그래서 그 젊은 여자가 아줌마들한테 뭐 피해준 거 있어요?”
갑자기 끼어든 여자 때문에 수다를 떨던 아줌마들은 ‘엄마, 깜짝이야’를 외치며 서로 눈치를 주며 하나 둘씩 자리를 떴고 효진도 천천히 자리를 뜨려고 할 때 젊은 여자가 효진을 붙들고 물었다.
“그리고, 아줌마.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마치 사실처럼 소문을 내고 다니시는 거에요?”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효진은 어깨를 움츠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다 들었거든요? 이거 명예훼손인 거 모르시죠? 녹음도 다 해뒀고요.”
“명…명예훼손?”
효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제가 변호사인 거 모르셨죠? 법적으로 처벌받게 해드릴 수 있어요.”
젊은 여자가 팔짱을 낀 채 한 손으로 핸드폰을 좌우로 흔들며 말하자 효진은 어찌할 줄 몰랐다.
“컷!”
그 때 감독의 외침이 들렸다.
“효진 씨, 다 좋은데 거기서 안절부절한 걸 조금만 강조해 줘.”
“네, 알겠습니다.”
“그럼 명예훼손으로 놀란 다음부터 갑니다-“
“언니, 차분하게 해.”
진경이 효진에게 작은 말로 힘을 북돋아줬다.
“알았어. 오랜만에 영화라 그런지 좀 긴장했나…?”
효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감독의 액션 소리와 함께 다시 연기를 이어나갔다.
“컷, 좋습니다. 와서들 보시죠!”
감독의 오케이 사인과 함께 배우들이 카메라 앞으로 모여 방금 촬영한 장면을 모니터링 하기 시작했다.
“효진씨, 오랜만인데도 안 죽었네.”
“그럼요, 이렇게 창창하게 살아 있는데.”
감독이 효진을 보며 칭찬을 하자 효진은 농담으로 받아 넘겼다.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감독의 얘기에 배우들은 다들 곳곳으로 흩어졌고 스태프들은 현장 정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진희가 얼른 모포를 두 장 들고 나타나 진경의 어깨에 씌워줬고 효진에게도 하나 건네줬다.
“진희씨, 고마워.”
효진은 진경의 차로 함께 이동하면서 진희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별말씀을요. 선배님 연기 짱이세요.”
진희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짱은 무슨. 어우~따뜻해. 나이 들면 이런 날씨에도 온 몸이 쑤실 정도로 춥다니까. 홍구씨 고마워요.”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효진이 차 안으로 들어가며 홍구에게 고마워하자 홍구의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진경이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다 찍네.”
“언니는 무슨. 그게 내 덕인가. 언니가 연기를 잘 하니까 그렇지.”
“그런가. 흐흐흐. 그나저나 진경이 너 요즘 좋아 보인다. 뭐 좋은 일 있어?”
“좋은 일은. 그냥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는 거지.”
“이거 왜 이래? 내가 널 안 게 몇 년인데. 얼굴에 좋은 일 있다고 크게 써 있구만.”
“그래? 그것 때문인가?”
진경이 짐짓 잘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뭔데? 궁금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와 얼마 전에 우연히 다시 만났거든. 고등학교 때 굉장히 친하게 지냈던 친구라 엄청 반가웠던 거 있지.”
“그래, 친구가 좋긴 하지. 그것도 여고시절 친구면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나저나 그 친구랑 왜 연락이 끊어졌어?”
효진의 질문을 받은 진경은 순간 멈칫했다. 효진은 모르는 친구인데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지만 본인이 싫어할 수도 있을 얘기를 함부로 말하는 게 좀 꺼림직해서였다. 자신이 그 날 들은 얘기도 충격적이었으니까.
“사실은 내가 아는 오래 된 마담 뚜 할머니가 있거든. 그 할머니가 어느 날 얘를 만나보라고 하더라고.”
“너보다 어린 얘를?”
미향의 얘기에 진경은 의외라는 듯 물었고 일우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 근데 내가 바빠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 참, 근데 그 할머니 연예계 쪽에서 유명했다던데 너도 어쩌면 알 수 있겠다.”
그 때 진경의 머리 속엔 효진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연예계 쪽 전설의 마담 뚜라고 불렸단 남궁시연이라는 여자.
“남궁시연이라고 워낙 마당발이라 너도 알 거야.”
“남궁시연?”
역시나 자신이 생각했던 이름이 나오자 진경은 사뭇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너도 알지?”
“그럼, 이 바닥에서 유명했던 사람이라던데.”
일우는 예전 박본주 형사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얘기를 떠 올리며 물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유명해요?”
“그럼, 연예계 쪽에서 마담 뚜로는 쌍두마차였다던데.”
진경이 대답하자 일우는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할머니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나…”
“너도 그 할머니 알아?”
일우의 얘기를 들은 진경이 물었다.
“그럼요. 저 살던 동네에서 구멍가게 하는 할머닌데. 가끔 아이스크림 사먹으러 갈 때마다 말을 붙여보긴 했는데, 그 할머니 진짜 말이 없어요.”
“그 할머니가 구멍가게를 하고 있다고?”
진경의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네. 그 동네에 좀 오래 살았던 모양이던데.”
“그렇구나. 그 분 어느 날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고 하더니 그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하면서 살고 있었네. 참, 사람 일 모르는 거야.”
진경이 안타깝다는 듯 말하더니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언제 한 번 그 분한테 같이 안 가볼래?”
진경의 얘기를 들은 일우는 뜬금없다는 듯 미향을 바라보다가 다시 진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왜요?”
“그야 뭐, 재미 삼아 한 번 가보는 거지. 전설적인 인물이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요 뭐. 그 할머니가 아직도 거기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다면 한 번 가 보는 것도 재밌겠네요.”
일우가 재미있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그 때 미향이 분위기를 갑자기 바꾸며 말했다.
“너네 두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순간 진경과 일우는 당황스러웠다. 특히 진경은 호스트 바를 다녔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했던 동창생한테,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여배우가 호스트 바를 다녔다는 얘기는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 할지도 말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제가 한 때 팬클럽 회장이었어요.”
그 때 일우가 끼어들어 거짓말을 했다.
“팬클럽 회장? 너 얌전한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했어?”
“예. 누님이 신인 때부터 크게 될 줄 알고 팬클럽을 만들어 회장을 했었어요. 근데 이상하게 팬클럽이 커져서 누님 소속사에서도 관리해줬고, 누님도 모임 할 때 이따금씩 나와줬었거든요. 빵 뜬 후에는 못나왔었지만. 그 때 회장 자격으로 가끔 연락하곤 했어요.”
일우는 거짓말을 막기 위해 없던 얘기를 지어내며 더 큰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거짓말이란 그런 것이다. 한 번 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져서 마치 사실처럼 만들 수 밖에 없는 그런 것. 그리고 최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 그것이 거짓말이다.
“진경이가 스타가 될 수 밖에 없었네. 신인 때부터 팬클럽이 있었다니.”
“그러게 말이야. 다 팬들 덕분이지.”
진경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연예인라면 누구나 할 수 밖에 없는 뻔한 거짓말을 했다.
“진짜, 언제 같이 그 할머니한테 한 번 가봐요. 재미있겠다.”
일우가 대화 주제를 바뀌기 위해 다시 남궁시연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이 상태로는 좀 어렵겠는데.”
진경과 일우가 만날 때 차에서 사진을 찍던 남자는 테이블 위에 사진 여러 장을 올려 놓으며 아쉽다는 듯 말했고, 지영은 사진들을 한 장씩 들춰보다가 사진 몇 장을 골라 추려내며 물었다.
“그래도 이렇게 둘이서만 있는 사진으로 하면 괜찮지 않아요?”
“뭐 그럴 수도 있긴 한데 그 자리에 두 사람만 있던 건 아니라서.”
남자는 사진을 흘낏 보고는 대답했다.
“그 날 그 자리로만 봤을 때 두 사람이 연애한다는 증거는 없다고 봐야지. 만약 이 사진들로 열애기사 냈다가 같이 있던 여자가 아니라고 하면 우리도 곤란해지거든.”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필터부분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난데없이 이상한 여자 하나가 끼어 들어서.”
지영은 뭔가 분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말하고는 테이블 위로 보던 사진을 툭 던졌다.
“정보 준 거는 고마운데, 다음에 다시 한 번 알려줘. 이번 거는 아무래도…”
“기자님, 그럼 이건 어때요?”
기자라고 불린 남자의 말을 자른 지영은 가방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남자에게 넘겼다.
“이게 뭐야?”
남자는 뜬금없다는 지영을 보며 물었다.
“한 번 보세요.”
남자가 봉투를 거꾸로 들고 테이블 위에서 흔들자 여러 장의 사진들이 쏟아졌고 남자는 한 장씩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몇 달 전에 찍은 거에요. 도진경과 그 남자 둘이서 놀이공원에 갔었을 때.”
지영이 간단히 설명을 했지만 남자는 그 얘기에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고 사진만 계속 훑어 보다가 잠시 후 지영에게 물었다.
“이건 어떻게 얻은 사진이야?”
“그건 비밀이에요. 아무튼 두 사람이 놀이공원에서 데이트까지 했으니 믿어도 되지 않겠어요?”
남자는 다시 한 번 사진들을 훑어보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는 물었다.
“그런데 이 남자 누구야? 그리고 왜 이렇게 도진경의 연애 사실을 알리고 싶은 건데?”
“그런 건 굳이 아실 필요 없잔아요? 기자님은 특종이 필요하신 거고 거는 그 소스가 있고. 이해 관계만 맞아 떨어지면 되는 거 아니네요?”
지영은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냉정하게 대답하며 선글라스 너머로 남자를 유심히 살펴 봤다. 표정이 미세하게 변한 걸 보니 분명 지금 전달한 예전 사진들이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남자는 짧게 대답하더니 잠시 생각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사진 나한테 줄 수 있어?”
“물론 드릴 수 있죠. 다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
“뭔데요?”
“기사를 내보내기 전에 나랑 반드시 협의할 것. 내가 하자고 하는 대로 해 주시면 되요.”
남자는 등을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기댄 채 뭔가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이내 짧게 대답했다.
“데스크와 상의해 보고 연락 할게.”
“그래서 그 남궁이는 언제 보러 가기로 했어?”
촬영이 끝나고 숙소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 입으며 효진이 진경에게 물었다. 지방촬영이라 숙소를 촬영장 근처에 잡아 두었고 진경은 효진과 같이 쓰고 있었다.
“응. 친구하고 한 번 가기로 했어. 일우가 가게 위치를 잘 안다고 하니까.”
“근데 난 걱정이다.”
효진의 목소리가 갑자기 조금 무거워졌다.
“뭐가?”
“그저 노인네 한 번 보러 가는 거라지만 일우랑 다시 얼굴 보는 것도 그렇고, 네 친구가 일우를 아는 것도 그렇고. 네 친구도 일우랑 그 호스트 바에서 만난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 남궁 할머니가 소개해줬다잖아.”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그 할머니가 뭐 한다고 그런 잘나가는 여자랑 호빠에 다니는 놈이랑 연결시켜주냐고. 원래 그런 할매가 아닌데.”
“글쎄. 뭔 사정이 있었겠지.”
사실 진경도 그 혹시나 하는 사정이 궁금했다. 그때 셋이 처음 함께 만난 날, 미향은 학교 다닐 때 갑자기 연락이 끊어질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을 얘기했었고 그 긴 얘기를 다 듣고 난 진경은 그런 상황에서도 착실하게 버텨 온 미향이 친구지만 대견했고 대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경이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일본 야쿠자 두목의 현지처와 호스트 바에서 일하는 남자를 그 할머니가 왜 연결시켜줬느냐 하는 점이다. 혹시 미향과 일우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진경은 그 속사정을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고 말 하기 싫은 일이 있는데, 심지어 자신조차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그런 것까지 꼬치꼬치 묻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니도 같이 갈래?”
“됐다. 이 나이에 내가 그 할매 만나서 뭐 하겠냐. 네 덕분에 이렇게 이렇게 영화 찍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언니는. 그게 왜 자꾸 내 덕이야.”
진경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럼 내 덕인가? 네 말대로 내가 연기 잘하는 덕?”
효진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한 잔 하러 가자.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홍구씨랑 진희랑 같이 가자.”
“내일도 촬영 해야 하는데 술 마신다고?”
“걱정 마. 어차피 내일이면 촬영 끝인데다가 많이 안 마실 테니까. 난 딱 소주 한 병만 먹을 거야.”
“글쎄, 그게 뜻대로 될까?”
“이년이.”
효진이 장난치듯 손바닥으로 진경의 등을 툭 쳤다.
“알았어. 홍구 오빠랑 진희한테 물어볼게.”
다음 날 모든 영화 촬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온 진경은 미향과 일우에게 연락해서 남궁시연을 보러 갈 날짜를 정했다. 셋이 처음 만난 이후로는 진경의 영화 촬영 때문에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미향은 일우가 알려주는 대로 자신의 차를 조심스레 운전하며 일우가 살던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 앞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진경과 미향의 수다는 끊이지 않았고 그 덕분에 일우는 방향만 알려주고는 계속 창 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할머니 아직 장사 하시는 모양이네. 가게가 그대로 있는 걸 보니.”
일우가 차에서 내리면서 두 사람에게 고개 짓으로 가게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예전처럼 가게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골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은 일우의 뒤를 따라 들어섰다. 세 사람이 들어서자 꽉 찰 정도로 좁은 가게였다.
“할매, 오랜만이에요.”
시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TV를 보다가 일우의 목소리에 일우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TV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시연의 행동에 일우는 두 사람을 보며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할매, 오랜만인데 안 반가워요? 거기다 손님도 데려왔는데.”
시연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일우 뒤에 서 있던 진경과 미향을 보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리고는 본인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매, 여기 아이스크림 값이요.”
일우는 예전처럼 지폐를 매대 위에 올려 놓고는 돌아서며 진경과 미향에 이제 가자는 눈짓을 했다. 그 때 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아가씨, 잠깐만 있어 봐봐.”
시연의 얘기를 들은 세 사람은 동시에 시연을 돌아봤다.
“어? 할매가 어쩐 일이야? 먼저 말도 하고?”
일우가 의외라는 듯 말했고 뒤이어 미향이 시연에게 물었다.
“할머니, 저요?”
“아니, 그 옆에 아가씨.”
시연은 여전히 TV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요? 왜요?”
나가려던 진경은 돌아서서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시연이 다른 두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 둘은 나가 있어.”
“할매, 왜요?”
일우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지만 시연은 TV를 쳐다보며 평소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할매, 우리도 같이 있으면 안 돼?”
일우가 계속 칭얼거렸지만 시연이 여전히 미동도 없자 진경은 일우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일우는 할 수 없다는 미향과 가게를 나섰고, 잠시 후 시연이 계속 TV를 보면서 진경에게 말했다.
“아가씨, 저 남자 만나지마.”
“네? 왜요?”
시연의 얘기에 갑자기 당황스러워진 진경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아가씨 때문에 쟤가 힘들어져. 아가씨도 힘들어지고. 벌써 사단이 났어도 크게 났어야 했는데 억지로 막고 있네. 근데 얼마 못 갈 거야.”
“얼마 못 간다니…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진경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대체 오늘 처음 봤는데 무슨 사단이 난다는 건지 어떻게 아는 것일까? 그 때 진경의 머리 속에 효진의 얘기가 떠 올랐다.
‘무당이었다는 소문이 있어’
“큰 일이 난다는 얘기야. 아무튼 같이 힘들어지니까 만나지마. 내가 저 두 사람을 왜 연결해줬는지 알아?”
시연의 연이은 알 수 없는 질문에 진경은 뭔가 붕 뜬 기분이 들었다. 너무도 느닷없는 질문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머리 속이 복잡해질 뿐이었다.
“두 사람이 잘 맞아. 저 남자가 어려도 두 사람이 잘 맞아서 소개해준 거야.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나게 돼 있고,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만나면 안 돼. 그게 세상의 이치야.”
“그럼…제가 일우와…아니 저 남자와 만나면 안 된다는 말씀이신 거에요?”
진경이 조심스레 물었지만 시연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TV만 바라 볼 뿐이었다. 잠시 동안 시연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원하는 얘기를 해주지 않자 진경은 포기했다는 듯 힘 없이 돌아서 가게를 나왔다.
“저 할매가 뭐래요?”
가게 밖에서 기다리던 일우가 물었지만 진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너 근데 갑자기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얘길 들었길래?”
그러자 이번엔 미향이 물었다.
“응? 아니야, 아무 것도. 아, 배고프다. 어디 가서 밥이나 먹자.”
진경은 정신을 차린 듯 배고픈 척을 하며 가운데서 두 사람의 팔짱을 끼고는 차로 이동했다. 진경의 머리 속에는 남궁시연이 한 말이 떠나지 않았다.
‘아가씨 때문에 쟤가 힘들어져’
‘사단이 났어도 벌써 크게 났어야 했는데 억지로 막고 있네’
‘큰 일이 난다는 얘기야. 아무튼 같이 힘들어지니까 만나지마’
그리고 얼마 후 진경에게 큰 일이 일어났다. 정확히는 진경과 일우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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