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이야기 구조입니다.
앞 부분에 조연처럼 등장했던 나왔던 인물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요 인물이 되는가 하면 인물과 인물의 관계가 거미줄처럼 엮어 전체적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조입니다.
또한 앞 부분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나중에 일어날 일의 복선이 되기도 하는 등 전체적으로 이야기 구조를 짜임새 있게 엮었습니다.
또한 남자의 시선과 여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나누어서 진행되며 중간에 교차되기도 하는 구성을 통해 마치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극적 구성을 더하였습니다.
따라서 항상 회차별 제목을 꼭 확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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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저희는 내일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련한 남자 앵커와 함께 뉴스 끝 인사를 전한 지영은 가식적인 웃음을 띠며 원고를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 때 아나운서 후배 한 명이 다가와 말을 전했다.
“선배, 부장님이 찾으시는데요.”
“부장님이? 왜?”
“글쎄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알았어.”
지영은 무슨 일인가 싶어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을 하다 얼마 전 부장이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지영씨. 혹시 기자 해볼 생각 없어?”
부장은 책상 앞에 서 있는 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기자요? 갑자기 왜 기자를…”
“정확히 얘기하자면 기자라기 보단 특파원인데 파리 특파원 자리가 났거든. 그런데 혹시 아나운서 쪽에서 관심 있는 사람 있으면 좀 알려달라고 하더라고. 아무래도 생판 초짜 보다는 이 바닥 생리를 잘 알고 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파리는 아무래도 여자들의 로망인 도시니까 지영씨가 가면 어떨까 하고.”
“아…네.”
지영은 부장의 뜬금없는 얘기에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티를 낼 수가 없어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생각해보겠다고 얘기를 하고는 바로 건물 밖으로 나가 아빠한테 전화했다.
“아빠, 이게 뭐야?”
“우리 딸, 왜 그래? 아빠 지금 바쁜데.”
어리광 부리듯 투정하는 지영에게 지철은 다정하게 물었다.
“아, 부장이 갑자기 나보고 파리 특파원 가면 어떻겠냐고 하잖아. 내가 왜 갑자기 거길 가야 되냐고.”
“그래? 확정이야?”
“아니, 확정은 아닌데 갔으면 하는 눈치더라고. 아빠는 딸이 그렇게 먼 곳에 가서 혼자 살아도 괜찮아?”
“글쎄, 회사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아빠!”
“알았어, 가기 싫다 이거지. 그럼 안 가면 되지.”
“아빠가 잘 좀 얘기해 줘, 알았지?”
“에휴. 내가 이 나이에 다 큰 딸 시중들 줄 누가 알았겠냐. 알았다.”
“아빠, 고마워.”
미련 곰탱이 같은 부장 자식. 나보고 가라 그러면 내가 얼씨구나 하고 갈 줄 알았어? 이 좋은 곳을 두고 내가 왜 가, 라며 혼잣말을 하고는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날 이후 특별한 얘기가 없었는데 아마 그 얘기를 다시 하려는 모양이다. 여전히 미련 곰탱이 같은 부장에게 어떻게 하면 내가 낙하산이라는 걸 직접적이지 않게 알려줄 수 있을까?
“부장님 부르셨어요?”
“어, 지영씨. 어서 와. 뉴스 잘 봤어. 많이 늘었던데.”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저를…”
부장이 지영의 말을 자르고는 물었다.
“지난 번에 얘기했던 특파원 건 말이야, 혹시 생각해 봤어?”
역시 그 얘기가 맞았군. 지영은 속으로 혀를 끌끌차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네, 생각해 봤는데요, 아직 전 특파원 하기엔 여러 가지로 많이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또…”
그 때 부장이 다시 지영의 말을 잘랐다.
“그래? 알았어. 마침 위에서도 좀 더 숙련된 사람이나 아예 신입을 뽑자고 하시더군. 혹시 내가 괜히 바람을 집어 넣은 건 아닌가 싶어서.”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영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는 속으로 오만 욕설을 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부장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모르긴 몰라도 아빠가 신경을 써 준 덕분에 특파원으로 가는 건 피했다. 그리고 그 주의 금요일, 뉴스를 마친 지영은 그토록 기다려왔던 동창회에 참석했다.
“난 가기 싫은데.”
“왜? 같이 가자.”
진경은 미향의 사무실에서 동창회에 같이 가자고 조르는 중이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연락 안하고 지내던 애들을 이 나이에 동창회 한다고 보는 게 좀 그렇잖아. 친한 애들도 아니고. 아니 거의 모르는 애들일 텐데.”
“그래도 오랜만에 보면 좀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잘 알지도 못하는 애들, 괜찮을 것도 없네요. 걔네들도 나 기억 못할걸?”
미향의 서류철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그럼 나 혼자 가서 지영이를 상대하라고?”
“그게 무슨 얘기야?”
진경은 얼마 전 준서로부터 들은 내용을 들려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준서가 해 준 얘기는 오지영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까지 더해서.
“그러니까 지영이가 네가 오든 안 오던 너한테 해가 될만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거지?”
“뭐 꼭 그렇게 확신한다기 보단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아무튼. 그래서 너는 직접 그 현장에 가보고 싶은 거고.”
“그렇지.”
“내 생각에는 너도 안 갔으면 좋겠는데.”
“왜?”
미향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경이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가서 맞은 편에 앉아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너한테 들은 걸 종합해보면 지영이가 꾸미고 있는 거라곤 유언비어 정도일 거야. 아마 얼마 전 터졌던 열애설 관련 정도겠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는 게 아니라 추측이지. 지난 번에도 그랬다며?”
“하긴.”
“내 생각엔 네가 오면 공개적으로 망신 주려는 거고 네가 안 오면 유언비어 퍼트리는 정도일 걸. 그러니까 네가 거길 안 가면 유언비어 퍼트리는 정도로 끝날 거야. 직접 가면 괜히 낯 붉어질 생기는 거고.”
미향의 얘기를 들은 진경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일리 있는 얘기였다. 지영이 꾸미고 있는지 뭔진 몰라도 단순한 유언비어 이상은 아닐 것이다.
준서와 있었던 일처럼 시간을 들여 뭔가를 꾸민 것도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면 어떤 유언비어를 퍼트릴 것인가가 문제다. 지영이 퍼트릴 수 있을만한 유언비어라면…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진경은 결정했다.
“아무래도 난 거기에 가봐야겠어.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지영이가 어떤 얘기를 하는지.”
진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미향을 보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너 정말 안 갈 거야?”
“아직 할 일도 남고 해서. 그나저나 너야말로 진짜로 가게?”
“응. 그럼 나중에 봐.”
진경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는 부리나케 미향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벌서 동창회는 시작했을 것이고 도착할 때쯤이면 지영이 이미 무슨 얘기를 해놨는지 모를 일이다. 마음이 급했다. 그런 진경을 보며 미향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젓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야, 오지영. 너 도진경 열애설에 대해 뭐 더 아는 거 없어? 너 방송국에 있으니까 오다가다 들은 거 있을 거 아니야.”
동창회에 모인 친구들이 지영을 중심으로 여럿 모여 도진경의 열애설에 대해 물었다. 강남에 있는 한 호텔의 연회장에서 진행되는 동창회는 스탠딩 파티 형식이었고 곳곳에 스탠딩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었다.
“얘들은, 내가 아나운서지 연애부 기자니? 하지만 뭐, 오다가다 들은 게 있긴 하지.”
“그게 뭔데, 어서 풀어 봐.”
“그래, 야. 궁금하다.”
다들 한 손에는 샴페인 잔을 든 채로 누군가는 그 샴페인으로 입을 적시면서 또 누군가는 다른 손에 든 다쿠아즈를 베어 먹으며 지영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그 왜 도진경이랑 열애설 난 남자애 있잖아, 걔가 뭐 하는 앤지 알아?”
“뭐 하는 앤데?”
“야, 감질나게 하지 말고 빨리 얘기 좀 해.”
한껏 멋을 부린 이제 30대에 접어든 남녀들이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지영을 졸랐다.
“이건 연예부 기자한테 들은 건데, 글쎄 그 애가…호빠에 다니던 애래.”
“호빠?”
“정말?”
“도진경이 호빠 호스트랑 만났다고? 어떻게?”
다시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고 지영은 자신이 동창회의 주인공이 된 듯이 우쭐해졌다.
“그거야 난 모르지. 그 남자가 일하던 호빠에서 만났을지도 모르고.”
“에이, 설마. 진경이가 그런데 갈 리가 없지.”
“그래, 좀 이상해. 진경이 성격이 어떤 앤데 그런 델 가겠어?”
갑자기 자신의 의도와 다른 의견들이 나오자 지영은 황급히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 거기를 꼭 갔다는 게 아니라 거기서 만났을 수도 있었다는 거지. 뭐 어디서 만났는지는 중요하진 않지만.”
“하긴 그것도 그래. 근데 확실한 증거도 없잖아?”
“맞아, 요즘 기자들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네, 라는 생각을 하며 지영은 전화기를 꺼냈다. 시간을 들여 스캔한 사진을 다시 전화기 속에 저장해 둔 것이다.
“이 얘기해 준 기자가 나한테 보여준 사진인데 내가 막 달라고 우겼거든.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다고 하고. 그러니까 너네도 어디 가서 얘기하지마.”
지영은 한 장씩 넘겨가며 보여주는 사진에는 일우가 어느 집에 들어가는 사진, 진경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들이 있었다.
“이게 뭐야? 이걸로 호빠 출신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
“너네 이 남자가 들어가는 집 보이지? 여기가 일반 집처럼 위장하고 영업하는 호빠래. 기자가 직접 찾아가서 여기 상문가 하는 사람하고 얘기하다가 카메라 메모리 카드도 뺏겼다고 하더라고.”
“그래? 거기 위치가 어딘데?”
“왜, 너도 한 번 가보려고?”
“얘는 내가 그런 델 왜 가니? 그냥 진짠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예상했던 친구들의 반응에 지영은 미소를 지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매장 시키는 것, 그것이 지영이 생각한 계획이었다. 이렇게 이 친구들에게 얘기해 놓으면 언젠가는 이 사실이 퍼지게 되어 있다. 세상 모든 일엔 비밀이 없으니까.
게다가 이 친구들은 우리나라에서 난다긴다 하는 집안의 자식들 아닌가. 내가 직접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빨리 퍼지게 하는 방법은 입 소문 밖에 없다. 그 때였다.
“오지영,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며 자신을 불러 돌아 본 지영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진경이라는 것을 알고 옅은 한숨을 쉬며 아쉬워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으면 완전 범죄가 될 수 있었는데 진경이 보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친구들이 다 알아버렸으니까.
“진경아, 왔어? 좀 늦었네.”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인사하는 지영을 보며 진경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고 표정은 그와는 반대로 굉장히 차갑고 냉정하게 변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지영에게 다가가 물었다.
“내가 물었잖아, 너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분노로 가득한 눈으로 지영을 바라보며 진경이 다시 물었다.
“아니, 난 애들이 네 열애설에 대해 궁금해 하길래. 그냥 아는 거 얘기해줬을 뿐이야.”
지영은 여전히 태연하게 대답했고 그 때 진경이 지영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이 사진들 뭐냐고.”
진경은 뺏은 지영의 전화기를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 그 때 동창 중 한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야, 네 소식 궁금해서 지영이한테 물을 수도 있지. 아무래도 방송국에 있으니까 네 소식을 우리보다 더 잘 알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나 오늘 충격 받았다. 네 열애설 상대가 호빠 출신이라는 게.”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그 친구의 행동에 진경은 화가 나서 따졌다.
“그래? 그럼 네 여자친구가 룸싸롱 다닌다는 얘기를 지영이가 퍼트려도 괜찮다는 거지?”
“뭐야?”
진경의 얘기에 남자가 화가 나서 진경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주변에서 말렸다.
“진경이 얘가 이상한 남자랑 열애설 나더니 이상한 소리까지 하네. 그래서 사람은 수준 맞는 사람이랑 만나야 한다니까.”
지영의 계속되는 비꼬는 말투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지영은 자신의 전화기를 스탠딩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자, 잘 들어. 이게 오지영의 진실이라고.”
진경은 녹음 파일을 하나 찾아서 플레이 했다. 예전에 효진과 연예프로 PD가 지영에 대해 나눈 대화가 녹음된 파일이었다. 파일이 재생되는 동안 연회장 안은 파일에서 재생되는 대화 내용 외에는 정적이 흘렀고 지영의 표정은 기묘하게 변해갔다.
판단 착오였다. 지영의 계산으로는 진경이 이 자리에 오지 않았어야 했다. 열애설이 잠잠 해진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자리가 부담스러웠을 거란 생각이었다. 거기다 준서에게 부탁까지 했다. 진경에게 연락해서 동창회에 오지 말라고 얘기하라고. 사람이란 호기심보다 자기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 거란 예감이 들면 그 위험을 피하는 게 먼저인 것이 기본적인 심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 자리에 오더라도 진경이 그 녹음 파일을 갖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좀 지난 일이라 컴퓨터 같은 곳에 보관 하고 전화기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지영의 판단은 모든 것이 빗나갔다.
진경은 현재 이 자리에 있고 그 녹음 파일은 여전히 진경이 전화기에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녹음 파일의 재생이 끝나자 연회장 안은 말 그대로 적막에 휩싸였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가 그 적막을 깼다.
“지영아, 이 얘기 진짜야?”
“그래, 지영아. 이거 어떻게 된 일이야?”
여기저기서 녹음 파일의 내용에 대해 수근거렸고 지영은 어찌할 줄 말라 당황했다. 하지만 잠시 후 지영은 반격했다.
“이 파일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들이 누구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험담을 늘어 놨네. 넌 남의 험담을 녹음하고 다니는 게 취미인가 봐?”
지영의 얘기에 또 다시 주변에서 ‘맞아’, ‘하긴 그러네’, ‘그 사람들이 진짠지 어떻게 알아? 거짓말일 수도 있잖아?’라며 수근거렸다. 그 때 그들 뒤에서 어떤 여자의 힘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녹음 파일 진짜야. 내가 PD를 찾아가서 직접 나눈 얘기니까.”
효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지운이 서 있었고 그들을 본 진경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랄 뿐이었다.
“어, 형. 형이 여기 어쩐 일이에요?”
그 때 무리들 중 한 명이 지운을 보고는 다가가며 물었다.
“어, 그래. 너 이 학교 나왔구나. 오랜만이야.”
“너희들 호원 그룹 알지? 거기 지운이 형이야. 오지운.”
남자가 주변 친구들에게 지운을 소개하자 친구들이 하나 둘씩 인사를 하거나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형님.”
“어머, 저 사람이 베일 싸여 있던 호원 그룹 오지운?”
그러자 지운도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어, 그래. 다들 반가워.”
“그나저나 형, 진짜 여긴 어쩐 일이에요?”
처음 지운을 알아본 남자가 물었다.
“나? 여자 친구 데리러 왔지.”
“여자 친구요? 누구요? 혹시…진경이?”
남자는 깜짝 놀라며 진경과 지운을 번갈아 보며 되물었다.
“그래.”
그러자 수군거리는 소리는 더 켜졌다.
“세상에 진경이가?”
“어쩜 이렇게 비밀스럽게 만날 수가 있냐?”
“호원 그룹 집안하고 진경이가 사귄다고?”
그 때 지운이 수군대기 바쁜 친구들에게 한 마디 했다.
“그런데 다 큰 어른들이 오랜만에 만나서 뭐 하는 짓이니? 다른 사람 험담이나 하고. 좀 건설적인 대화를 해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는 지영에게 천천히 다가가 한 마디 했다.
“오지영씨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참 나쁘네요. 없는 사실 만들어서 친구들한테 다른 사람 뒷담화나 하고. 정말 실망스럽네요.”
지운의 얘기를 들은 지영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듯 그저 멍하니 지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지영을 지나치며 지운은 진경의 한쪽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
“진경씨, 이제 그만 가요.”
진경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혼란스러웠지만 지운이 이끄는 대로 자기도 모르게 따라갔고, 효진도 지영을 한껏 노려보다가 한 마디 했다.
“착하게 살자, 응?”
그리고는 뒤돌아서 바로 지운과 진경을 따라 나갔다. 그들이 연회장을 빠져나가자 모두들 소리 높여 한 마디씩 떠들었다.
“아니 지운이 형과 진경이가 사귀는 거면 열애설 자체가 뻥이라는 거잖아?”
“그렇지. 둘이 사귄 지 얼마나 됐는지는 몰라도 열애설 난지가 얼마 안 됐으니까 열애설 자체가 잘못 된 거란 얘기지.”
“그런데 두 사람이 사귄다는 걸 어떻게 알아? 그 사람 말만 믿고?”
“사귀는 게 아니면 진경이가 지금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왔겠어? 미리 얘기했겠지. 나 오늘 동창회 간다~라고.”
“그런데 아까 그 여자는 누구야?”
“송효진이라고 잠시 뜸하다가 요즘에 다시 나오는 배우 있잖아. 거의 조연만 하지만.”
“그래, 아까 녹음 파일 들을 때 뭐했니? 그거 안 듣고.”
“진짜, 그 녹음 파일이 진짜면 지영이 쟤 다시 봐야겠다. 아무리 열등감이 있어도 그렇지 어쩌면 사람을 그렇게 농락할 수가 있니?”
“그것보다 쟤가 왜 진경이한테 열등감이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돈도 많지, 집안도 좋지, 직업도 아나운서지. 공부야 좀 뒤졌지만 뭐 그런 걸로 열등감 느꼈으면 우리는 백 번은 더 느꼈어야 되는데.”
“그래도 무슨 사정이 있지 않을까?”
“아무리 사정이 있어도 그렇지. 사람의 감정을 갖고 그러면 안 되지.”
“하긴. 근데 그러면 아까 지영이가 보여준 사진들은 뭐야? 호빠는 또 뭐고?”
“글쎄 그거야 뭐…”
얘기가 여기까지 이어지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지영에게로 쏠렸다. 지영은 여전히 그들이 사라진 연회장 입구 쪽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아니야, 아니라고!”
열등감이 그리고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한 번 사실이라고 믿게 된 것에 대한 태도를 잘 바꾸지 않는다. 이미 자신은 거짓말쟁이, 사람의 감정을 이용한 나쁜 사람이 되어 있었고, 진경이 재생했던 녹음 파일의 내용은 진실로 믿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그들의 태도를 바꾸려면 뭔가 확실한 증거가 바탕이 된 더 큰 사건을 만들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언니가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그리고 지운씨는 또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진경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두 사람에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운은 여전히 진경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니, 나한테 좀 설명을…”
“가면서 얘기해요.”
지운이 부드러운 눈으로 진경을 바라보며 말하자 진경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후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그들은 차에 올라탔고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진경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미향아, 넌 또 왜 여기에…?”
“일단 얼른 타. 가면서 얘기하자.”
진경은 도무지 무슨 상황이 어떻게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어 궁금해했다.
“사실은 네가 사무실을 나가고 나서 도저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내가 효진 언니한테 전화 했거든.”
미향은 효진에게 전화를 해서 진경이 동창회에 갔다는 것과 준서란 사람이 진경에게 며칠 전 전화 했다는 내용까지 설명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안하다는 얘기를 전했다.
“그래, 알았어. 장소가 어딘데? 응, 알아. 그럼 너도 지금 그리로 와. 나도 바로 갈게.”
그리고는 통화를 마친 효진에게 진수가 물었다. 두 사람은 저녁을 함께 먹으며 데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진경이한테 일이 생겼어요.”
그리고는 상황을 설명해주고 진수에게 오늘은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다고 미안해했다.
“미안하긴요. 얼른 가 봐야죠. 그런데 지운이한테 연락 안 해도 될까요?”
“지운씨요?”
“네. 아무래도 제가 보기엔 두 사람이 썸을 타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네요. 연락처 아시죠?”
“그럼요, 저희 직원인데. 제가 지금 전화해 볼게요. 아마 사무실에 있을 텐데.”
진수는 곧바로 지운에게 전화를 했고 효진이 전화를 넘겨 받아 동창회 장으로 지금 올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럼요, 당연히 가야죠.”
지운은 하던 일을 급하게 마무리 하고는 택시를 타고 최대한 빨리 진경이 동창회 장소로 이동했고 그 곳에서 효진과 미향을 만난 것이었다.
“그런데 넌 왜 차에 있었어?”
얘기를 전해 들은 진경이 미향에게 궁금한 듯 물었다.
“얘기했잖아. 난 걔네들 보고 싶지 않다고. 내가 좀 낯을 많이 가리잖아.”
미향의 농담에 진경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그 때 효진이 불쑥 끼어들며 뒷자리에 앉은 진경에게 말했다.
“너 때문에 내 데이트 깨졌으니 네가 책임져.”
“데이트? 언니, 지운씨 회사 사장님하고 데이트 하고 있었어? 완전 축하해!”
진경은 아까 일은 벌써 잊은 듯 반색하며 효진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지운은 여전히 진경의 손을 잡고 있었다.
“잘 되긴 뭐. 저녁 같이 먹는 건데. 그나저나 너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이게 뭐니?”
“밥? 그거 내가 살게. 미향아, 우리 지금 뭐 먹으러 가자. 너 알고 있는 맛있는 곳으로 부탁해.”
그리고는 손에 힘을 주며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지운의 온기를 느꼈다. 생애 처음으로 든든한 남지 지원군을 얻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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