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우리 고양이들은 왜 이렇게 말썽이 많은 걸까. 개들을 보라. 항상 즐거운 듯 꼬리를 흔들고 주인이 오면 반색하고 충성하는 모습이 애완동물로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고양이들은 사람의 손에서 음식을 받아먹으면서도 왜 항상 매정하고 냉혹하다는 말을 들을까. 여자와 남자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나는 줄곡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서 침식을 잊어버렸다.
여행을 다녀온 여자는 행장을 풀면서 나를 살펴보았다.
“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 거냐? 투투…엄마가 왔다.”
“…”
“투투!”
“응?”
깊은 상념에 잠겨있던 나는 저도 모르게 여자에게 응대해버렸고 여자는 내 대답에 깜짝 놀란 듯 남자를 돌아보았다.
“투투 얘를 봐. 묘하게 자기 이름은 알아듣는단 말야. 대답도 사람처럼 하면서. 방금 대답하는 거 들었지?”
“우연히 대답하는 것처럼 들렸겠지. 고양이가 어떻게 사람말을 하냐?”
남자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면서 트렁크를 정리했고 여자는 여행전보다 퍽 활기띤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사진 찍은거 블로그에 올리자. 특히 그 민속촌에서 찍은거 넘 잼있잖아.”
“잠깐, 그전에 한가지 할 것이 있어.”
“뭔데?”
“배고프지 않냐?”
남자가 빙그레 웃었고 여자는 눈을 깜빡거렸다.
“음…”
“무슨 얘기할 건지 다 알어. 피곤해서 밥하기 싫지?”
“응, 우리 그냥 시켜먹자.”
“내가 해줄께.”
“피곤하지 않겠어?”
“괜찮아. 먹고싶은거 말해. 오늘은 내가 다 해줄께.”
“그럼 간단하게 된장찌개 해먹자.”
“그래. 알았어.”
남자와 여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썅썅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여자와 남자는 아직 썅썅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주방에서 구수한 소고기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고 썅썅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주방으로 향했다. 하루종일 내 눈치만 살피던 포포도 씽하니 달려나갔고 나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포포…포포…너는 도대체 어느 얼굴이 진심인 거니…
쨍그랑…
주방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눈을 번쩍 떴고 뒷이어 들려오는 다툼소리에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했다. 금방까지도 다정하던 여자와 남자가 지금까지 들은적 없는 격앙된 어조로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한정아! 넌 어쩌면 매번 고양이가 1순위냐?”
“썅썅 얼굴이…”
“언제까지 얘네한테 집착할 거야? 우리 생활도 이게 어디 정상생활이냐. 꼭 이래야 하겠니?”
“당신...고양이 이뻐하는 게 아니였어? 왜 지금 나한테 이러는데?”
“난 너처럼 병적으로 집착하지 않아.”
“뭐라고? 병...적?”
“내가 말을 잘못했냐? 너처럼 무슨 일에 집착이 지나치면 화를 불러. 그게 고양이든 뭐든. 알겠어?”
“말 참 심하다...”
“나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
“...”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우리는 숨을 죽이고 쏘파밑에 숨어들어갔다. 잠시후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지긋지긋해?”
나는 이름못할 불길한 예감에 천천히 주방쪽으로 걸어갔다. 주방에선 눈살이 꼿꼿해진 남자와 눈에 눈물이 글썽해진 여자가 서로 막 싸우려는 고양이처럼 등을 빳빳하게 펴고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
“대답해봐. 언제부터 내가 싫어진 거야? 그렇게도 내가…지긋지긋했어?...”
여자는 천천히 이사이로 말을 내뱉었고 남자는 굳어진 얼굴로 거실로 향했다. 여자가 두팔을 벌려 남자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턱을 치켜들었다.
“말해. 이젠 내가 싫어졌지? 요즘 들어 부쩍 짜증이 많아진 건 분명 내가 싫어져서 그러는 거잖아. 이럴거면 우리…”
“…”
“우리…차라리 헤어져.”
“…”
“그게 좋지 않겠어? 우리 서로 지칠대로 지친 거 같어. 그동안 내가 힘들게 한거 미안해. 그러니 이젠 당신을 놓아줄께.”
“진심이냐?”
남자가 드디여 입을 열었고 여자는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너만 힘든줄 알어? 너만 지긋지긋해? 나도 지금 상황이 싫다고...이렇게 무기력한 내 자신이 싫어졌어. 내가 좋아하는 동물 하나 지키지 못하고...내가 좋아하는 사람 하나 잡지 못하는.”
“그래. 그래서 사실 이번 여행은...”
남자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뒤의 내용은 결코 차분한 것이 아니었다.
“이별 여행이라고 할수도 있어.”
“뭐?”
“그래…그랬어. 난 더이상 니가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척 너한테 맞춰주기도 싫어졌고...온 집안에 고양이 냄새가 풍기는 여기도 싫어졌어. 그래서 여행 다녀온 다음 마지막 음식 너한테 해주면서 얘기하려고 했어.”
“허...”
여자는 억이 막힌듯 그 자리에 멍해 서있었다.
“그동안 참 미안했다. 아버님께도 미안하다는 말 전해드려. 나한테 기대가 크셨을 텐데.”
“뭐가...미안한데.”
남자는 얼굴을 돌리고 허구픈 표정을 지었다.
“글쎄...다.”
“…미안하단 말 하지 말아. 미안한줄 알면, 미안한 일을 하지 말아야지.”
“...”
“그랬구나...그랬었구나...이별...여행이었구나. 난 바보같이 그런줄도 모르고.”
여자는 허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기에도 위태롭고 안쓰러운 미소였다. 남자는 얼굴을 돌렸다.
“일찍 얘기해주지 그랬어. 난 아무것도 몰랐는데...뭐가 힘든줄도, 뭘 싫어하는지도 몰랐는데. 얘기해주지 않았으니까...이제라도 얘기해주니...이젠 답답한게 많이 가셔졌어.”
여자는 내가 보기에도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있었고 남자는 여자의 말이 견디기 어렵다는 듯 시선을 내렸다.
“내가 얘기하면 들어줬을까?”
“그래도 얘기하지 않았잖아. 날 믿지도 않고, 멋대로 날 판단하고 정리했어. 당신은.”
“그래…얘기할께. 저번 출장때 내가 고양이를 와보지 못한 것부터 짚고 넘어가자.”
“…”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
“그래서 급히 고향으로 들어갔고, 장례를 치렀어. 고양이들은 내 룸메이트한테 부탁했는데, 걔가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고.”
“…왜 이제야…”
“널 믿지 못한 건 맞아. 니가 믿음을 주지 않았으니까.”
“…”
“잘 지내. 짐정리는 저 트렁크 그대로 갖고 가면 되니까 차라리 잘 되었네.”
여자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남자는 한참 여자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문소리가 나자 여자는 쌩하니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컵을 치켜들었고 나는 애들이 놀랄가봐 급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뒤미처 여자가 컵을 바닥에 메치는 소리가 쨍그랑 하고 주방에 울려퍼졌다. 썅썅과 포포가 산산쪼각이 난 유리쪼각을 피해 방안으로 슬금슬금 기여들어오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어? 어떻게!!!”
방안으로 들어온 여자는 무너지 듯 침대에 주저앉더니 여자의 무릎에 기여드는 썅썅을 주먹으로 쥐여박으면서 흐느껴 울었다. 썅썅은 꼬리를 끼고 뒤로 몸을 움츠렸다.
“사는 건…구차한거야! 투투…썅썅…너도 나도…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다 구차한 존재일뿐이야!”
여자는 마치 우리가 남자를 가버리게 한 장본인이라도 되는 듯 우리를 향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더니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무너져 내렸다. 잠시후 베개틈사이로 여자의 깊은 오열이 터져나왔다.
토미, 버미, 제리는 집안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벌벌 떨면서 조금씩 내 품을 파고들었다.
......
남자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는 사흘동안 눈을 붙이지 못하고 울기만 했고 사흩날 아침이 되어서야 어렴풋이 잠이 든 듯 했다. 여자의 눈초리에 맺혀있는 눈물방울을 일별한후 나는 잠든 세 아이를 떼어놓고 거실로 나와 숨을 돌렸다. 썅썅의 무거운 한숨소리가 등뒤에서 울렸다.
“이제는 드디여 우리 모두가 헤어질 때가 되었어.”
“반쪽 주인은 돌아올거야.”
“돌아오지 않아.”
“썅썅…넌 너무 소극적이야. 어떻게 아무런 노력도 안해보고 그런 부정적인 생각만 할 수가 있어?”
나는 꼬리를 홱 저어 발위에 올려놓았고 썅썅은 앞발을 가지런히 하고 식빵 자세로 앉았다.
“뻔하지 않니? 주인 엄마 말이 생각안나? 우리 존재가…궁극적으로는 주인들의 생활에 영향을 주고있어. 어제 여주인이 하는 얘기 못들었어? 우린 구차한거라고…너나 나나 다 구차한 존재라고.”
“그건 화김에 한 말이야.”
“뭐 암튼...주인이나 너나 어쩜 그렇게 똑같니? 세상은 몰라보게 변하고 있는데, 꼭 변해야 하는 것을 잡고 아둥바둥 자기 고집을 피우고있어.”
“그러는 넌 주인에 대한 믿음도 없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가짐도 없어.”
내 공격에 썅썅이 눈살을 찌푸리고 머라 말하려는데 문득 문소리가 들렸다. 나는 썅썅을 노려보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어디서 몇일 밤을 지새운 듯한 남자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집에 들어섰다. 나와 썅썅은 슬금슬금 방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기척소리에 여자가 잠에서 깨어났고 남자는 방안을 들여다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냐옹~~~”
침묵을 깨뜨린 것은 그래도 썅썅이였다. 썅썅은 남자의 곁에 다가가 자기를 봐달라는 듯 울음소리를 냈고 남자는 그런 썅썅을 돌아보다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썅썅...”
“어디 갔댔어?”
썅썅의 울음소리는 여자를 불어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냉랭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두고 간게 있어서 들렸어.”
남자는 무표정하게 대답한후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때를 같이하여 여자는 나는듯이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잠시만.”
여자는 목소리는 더이상 얼굴처럼 냉랭하지 않았다.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서있었고 여자는 달려가서 남자의 허리를 껴안았다.
“내 말 좀 들어봐.”
“냥!”
나는 나지막하게 울음소리를 냈고 때를 같이하여 썅썅도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남자의 한숨과 여자의 눈물이 터진 것도 바로 이때였다.
“한정아.”
“엄마 말이 맞았어...”
“...”
“여자들에겐 고양이가 독이라고. 결혼, 출산에 미치는 영향 겁나지 않는다면 그냥 기르라고...왜 이 말을 한줄 알겠어. 하지만 그땐 내가 미처 몰랐어.”
여자는 눈물범벅이 되어 말했고 남자는 여자에게 몸을 돌리고 쓸쓸하게 웃었다.
“넌, 이게 고양이때문이라고 생각하냐?”
“그래…아닐수도 있겠지. 고양이때문이라기보단, 내 집착과 고집이 당신 힘들게 한거겠지. 그동안 다 맞춰주고 참아준 걸 내가 알아. 하지만 그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어…모든게 내 오만이였어. 미안해.”
“니가 미안할 거 뭐 있냐.”
남자의 목소리가 수그러들었고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든후 남자의 시선을 마주했다.
“미안해. 그동안 힘들게 해서…앞으론…나 같은 여자 만나지 말고 좋은 여자 만나.”
“진심이니?”
여자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그게 알고싶지? 저번부터 왜? 진심인지 아닌지 그게 뭐가 중요한데?”
“중요해.”
“...진심...이었으면 좋겠는데, 진심 아니야.”
남자의 눈동자가 깊은 빛을 띄였고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남자는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머리를 돌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정아, 내가 널...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남자의 말에 여자는 또 한번 울컥 눈물을 쏟았다. 남자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여자의 눈물을 훔쳐주었다. 여자는 시선을 들더니 팔을 내밀어 남자의 와락 목을 감았다.
“가지마.”
“…”
“나혼자 어떡하라고…그리고 우리 천사들도…나혼자 남겨놓고 어떡하라고…절대 날 두고 가지마…”
“…”
“미안한줄 알아. 내가 당신 힘들게 하는줄도 알아. 하지만 이런 날…그대로 봐주면 안될까? 있는 그대로…그대로 사랑해주면 안될까…”
여자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한채 남자의 품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리고 남자는 고개를 숙여 여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내렸다.
여자의 눈물이 남자의 입술속으로 사라졌고, 썅썅과 나는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우리의 생활은 드디여 정상궤도에 들어섰다. 또 한해가 무난히 지나고 있었지만 우리에 대한 여자의 사랑과 집착은 여전했고 그런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는 전과는 달리 느긋한 여유 같은 것이 스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세상의 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관적인 것이 아니였다. 상처가 곪으면 터져야 낫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 사이도 그 어떤 간격을 뚫어버리자 오히려 서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1년만 같이 이러고 있자. 우리가 결혼하는 그때까지…그때까지만 우리 천사들이랑 같이 있을 거야. 그리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분양주면 돼. 엄마한테도 그렇게 말했고, 이젠 누구도 더 이상 잔소리 안할 거야.”
“그래.”
“…분양주는 집들도 내가 한집한집 고를 거야. 진정 고양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만 골라서 애들을 보낼 거야. 우리 천사들인데…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던 애들인데…”
여자는 짐짓 홀가분하게 말을 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속에 담겨져있는 처연함을 가려들을수 있었다. 썅썅의 말대로 진정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란 없는 걸까. 그러고보니 썅썅과 꽤 오랫동안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은 생각이 났고 어느 깊은 밤중에 나는 거실에 나가 조용히 썅썅과 마주앉았다.
“아직도 변함 없는거니?”
내 질문에 썅썅은 뜬금없다는듯 귀를 쫑긋했다.
“뭐가.”
“여길 떠나려는 생각. 어차피 일년만 더 있으면 주인은 우릴 다 분양준대. 그 일년을 못참아 여길 떠날 거야?”
“후…”
썅썅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은연중 여자의 말을 빌었다.
“가지마.”
“…”
“나혼자 어떡하라고. 우리 애기들은 어떡하라고.”
“애기들?”
썅썅은 허구픈 웃음을 지으면서 턱짓으로 포포가 자고 있는쪽을 가리켰다.
“저게 아직도 애기냐?”
“내 눈엔 애기야.”
“넌 애기라고 생각하지만 쟤는 날 라이벌로 생각할 걸.”
“그렇게 생각 못하도록 만들어야지. 주인들이 화해하고 지내는 것처럼, 우리도 충분히 잘 지낼수 있어.”
“넌 아직 모르는게 있어.”
썅썅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사람과 고양인…이래서 틀린 거야. 사람들은 가족 개념이 있고 천륜이란 게 있지만 우리는 아니야.”
“난 우리도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해. 솔직히 포포가 너에게 달려들 때, 니가 왜 매번마다 상처를 더 입는지 내가 잘 알어.”
나는 썅썅의 얼굴에 남은 상처자국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수컷들끼리 싸움은 불가피한거라 쳐. 하지만 이 영역을 포포에게 넘겨준다면 우리는 잘 지낼수 있지 않을까? 이젠 그까짓 서열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잖아?”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썅썅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서열에 연연해하는 것으로 보였니? 애초부터 난 서열 따위엔 관심이 없고 이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서도 아니야.”
“그럼 왜...”
“널 만난후로 영역, 서열 이런건 다 중요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안돼. 절대 이걸 포포에게 넘겨줄수 없어.”
“그러니까 왜? 매일 투닥거리면서 싸우는 거 질리지도 않아? 주인이 언젠가는 발견하게 될거야. 그러자나도 저번에 니 얼굴에 난 상처자국을 의아해했었잖아. 언제까지 들키지 않을거라고 장담해?”
“투투…내가 어떻게 말해야 알아듣겠니.”
“내가 뭘 못알아들었는데?”
나는 들을수록 오리무중에 빠졌고 썅썅은 나를 주시하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고양이과 수컷들은 영역싸움이 치열해. 제일 대표적인 예로는 사자를 들수 있어. 언젠가 내가 이런 얘기 한적 있지?”
“응…”
“그날부터 나는 또 새로운 영역싸움을 해야 하는거라고 말한건 기억 나지? 여자를 지키기 위한 싸움…그러기 위해선 내가 강해져야 하고…그래서 그때 한번 더 니 마음을 확인했었잖아.“
“그런데는?”
“영역싸움이란, 바로 여자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야. 즉 너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고.”
“무슨 말인지…당췌 이해 못하겠어.”
썅썅의 말을 듣자 왠지 불안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쳤지만 나는 그래도 얼떠름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썅썅은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결심이라도 내린듯 말을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서…나와 포포는 지금 너를 쟁탈하기 위한 싸움을 하고있다는 얘기야.”
“뭐?”
나는 썅썅의 말에 내 귀를 의심했다.
“포포? 왜? 포포가 나를? 그럴수 없어! 난 포포 엄마라고.”
“이것이 바로 우리 고양이의 동물근성이야. 우리는 가족 개념이 없고, 천륜 개념도 없어. 포포에게 넌…한낱 여자일뿐이야.”
“세상에...”
“포포의 생활권내에서 접촉할수 있는 유일한 여자, 내 손에서 빼앗고 싶은 여자일뿐이라고.”
“...”
“네가 여기 있는 한…우리 싸움은 지속될거고…결국은 우리 둘중 어느 하나가 죽게 될거야. 넌 내가 도피자라고 했지?그동안 내가 피하고싶은 건 줄곧 이거였던 거야.”
“아니, 그럴수 없어!”
나는 문득 큰 목소리로 썅썅을 반박했다.
“이건…불륜이야. 포포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수 있어? 그건 안되는 거야! 썅썅…그렇게 말을 지어내지 마. 날 빼앗으려고 부자간이 목숨을 내건 전쟁을 해야 한다니? 아니, 이건 분명 니가 잘못 안거라구!”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고 썅썅의 눈에는 서글픈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바로 그때, 방구석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고 나는 머리털이 쭈볏 일어서는감을 느꼈다.
“내가 말한적 있지...”
“포포!”
“엄만 그래서 안되는 거야. 우리는 분명 미천한 동물인데, 이렇게 여러모로 동물의 본성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엄만 스스로 우리 자신한테 사람처럼 인격을 부여하고있어.”
“...”
“차라리 오늘 밤에 아주 결판을 내고, 이참에 엄마도 그 무지한 꿈에서 헤어나오는 게 좋지 않을까.”
포포는 말을 마치자 몸을 한번 턴후 유유히 거실 한복판으로 걸어나왔다. 썅썅도 눈에 힘을 주면서 뒤로 물러서더니 활등처럼 천천히 몸을 구부렸다.
두 숫코양이의 거친 숨소리가 방안의 팽팽한 공기를 가르고 있었고, 나는 눈앞의 상황에 억이 막힌 나머지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