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낮에 밤을 이어 요동으로 향했다. 도저히 말을 타지 못하겠다고 아우성 치는 령이를 뒤에 따라오는 수레에 앉혀버린 서은은 성밖의 대로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자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많은 곳은 위험했다. 자금성도, 망강루도, 그리고 번화한 경성까지도 보이지 않는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 듯 했다. 이런 느낌은 점점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불안을 눈치챘는지 이여백은 말고삐를 당긴후 그녀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집은 요동 어디냐."
"네?"
아무리 역사에 대해 알고 있다고는 하나, 요동 각 지역의 지명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는 그녀였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그녀는 적당한 대답을 생각해냈다.
"집이라고 어디 있겠습니까...조실부모하고 사해를 집삼아 떠돌아다닌지 이십해가 넘습니다."
"그렇군."
머리를 끄덕여 그녀의 말을 동조한 그는 다시 고개를 들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괜한 것을 물어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이 넓은 땅이 다 제 집이니 그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이여백은 그녀의 얼굴을 주의깊게 보았다.
"과거는 어찌 보려 한 것이냐. 어제 보니 솜씨는 괜찮은데 어찌 급제하지 못하였는지."
"그러는 사형은 왜 요동에 돌아가십니까. 무과장원 급제라면 금상폐하께서 부마라도 삼자고 하셨을텐데요."
이여백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오르는것을 보며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왜 가끔 이런 실수를 범하는지, 그녀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버지의 말을 빈다면, 가끔 주체하지 못하고 마음속 생각을 말해버리는 것은 그녀의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그에 대해 이처럼 아는 티를 냈다면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그를 접근한 것도 언젠가는 발각될 것이다. 마침 누르하치가 말을 재쳐 그들을 따라왔고, 이여백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누르하치에게 머리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총병부에서 보내온 기별입니다."
누르하치가 그녀쪽을 힐끔 보았다. 이여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으니 말하거라."
"고륵성(古勒城) 아타이(阿台)가 반란의 기미가 보인다고 합니다. 총병님께서 고륵성에 탐마를 보내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여백은 쌀쌀하게 웃었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의 살림이 유족하다면 누가 반란을 일으키겠느냐."
"도련님, 부디 그런 말씀은…지금은 태평성세입니다."
누르하치는 또 한번 서은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못들은 척 말고삐를 당겨 몇걸음 앞장섰다. 누르하치는 바싹 목소리를 낮추어 이여백에게 말했다.
"도륜성(圖倫城) 추장(酋長) 니칸외란(尼堪外蘭)이 아타이가 반란을 꾀한다는 상소를 올렸답니다. 폐하께서 총병님께 아타이를 벌하라는 칙서를 내리셨으니 총병님도 어쩔수 없는 상황입니다."
"공연한 짓을."
이여백은 나지막하게 내뱉고 누르하치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아까부터 무엇을 찾고있느냐."
누르하치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분명 여기 수림속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만나다니?누굴 말이냐."
"나치야아가씨 말입니다."
"뭐?"
"소인을 벌하여주시옵소서."
그녀는 귀가 솔깃해졌다. 나치야는 누구일까…대체 누구이기에 항상 차분하던 이여백이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일까. 그녀가 더 생각하기도전에 문득 앞에서 휫파람 소리가 들렸다. 잠시후 수림을 뚫고 한 기마행렬이 그들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급히 말을 멈춰세웠고 이여백은 누르하치를 돌아보았다.
"누르하치, 네가 담이 커졌구나."
"송구하옵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느냐."
"도저히 막을수가 없었습니다. 소인을 벌하여주십시오..."
누르하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여백은 더이상 추궁하지 않고 말에서 내렸고 일행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 기마행렬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행렬이 가까이 오기도전에 먼저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앞장선 말에서 몸을 날려 뛰어내린 한 여인의 요염한 자태가 점차 그들앞으로 가까워졌다. 눈앞에 다가온 여인을 주시하던 서은은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내뱉었다.
"윤아…"
윤아가 틀림없었다. 주렁주렁 장신구가 화려한 여진의 옷차림을 하고있었지만 눈앞의 여인은 분명 그녀의 절친 윤아였다. 아무리 400여년을 뛰어넘는 다른 세상이라 해도 그 윤아를 그녀가 못알아볼리 없었다.
하지만 오감독을 닮은 만력처럼, 눈앞의 여인 또한 윤아를 닮은 다른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있었다. 윤아를 닮은 여인은 일행의 앞에 도착하자 붉은 입술을 열어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장원급제 감축 드리옵니다. 도련님…제가 여기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여긴 웬 일이시오."
이여백은 찬바람 일듯 냉랭한 태도로 여인을 대했다. 여인은 그의 반응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방긋 웃었다.
"아버지와 함께 총병부로 갔다가 총병님께서 누르하치에게 도련님 마중을 가라고 분부하시는 걸 듣고 누르하치를 졸라 뒤따라 왔지요."
"성주께서 걱정하시겠소."
"괜찮아요. 서찰을 남겼으니까요. 총병부에 박혀 허구한 날 해결도 보지 못하는 요동 정세를 귀아프게 듣느니 차라리 이렇게 산천경개를 구경하면서 장원급제한 도련님 마중을 하는 것이 더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에겐 부담이 된다고 생각지 않으셨소."
"부담이 되다니요? 누르하치, 어디 한번 말해보세요. 내가 당신에게 부담이 되었었나요?"
여인이 고개를 돌려 살짝 눈웃음을 치자, 누르하치는 급히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가씨를 이리 뫼시는 것은 소인의 영광인줄 아옵니다."
여인은 보란듯이 이여백을 향해 도발적인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모습에 서은은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웃었다. 아무리 봐도 윤아였다. 목소리도, 성정도…그리고 윤아 특유의 그 눈웃음까지도. 하지만 여인의 시선이 곧 자신에게 향하자 그녀는 급히 미소를 거두었다. 윤아는 이런 자신을 알아볼수 있을런지...
"이분은…"
여인의 의문에 누르하치가 이여백 대신 대답했다.
"경성에서 요동까지 동행하시게 될 임씨 도련님입니다."
"오오, 임도련님…"
여인은 또 한번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서은의 아래위를 보다가 다시 그녀에게 명랑하게 말했다.
"저희 도련님과 동행해주셨다니 고마운 일이오나, 이젠 저희가 왔으니 임도련님은 이만 갈길을 가보시는 건..."
"아가씨…"
"나치야."
누르하치와 이여백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누르하치는 서은을 바라보았고, 이여백은 미간을 구긴채 나치야를 보았다.
"무엄하오."
"제가요?"
나치야의 원망섞인 눈빛이 이여백을 향했다.
"뭐가 무엄하죠? 이는 도련님 처사답지 않습니다."
"..."
"어찌 신분을 모르는 사람과 동행하려 하시는지...도련님이나 총병부에 위험한 인물이 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내 벗이요."
이여백의 단호한 대답이 잠깐 서은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치야는 흥 하고 코웃음을 웃었다.
"벗이라니요...지금이 어느때라고 그렇게 방심하십니까. 중원은 개혁으로 정세가 흉흉하고 요동은 반란으로 민심이 황황한데 도련님께서는 국가대사나 요동정세는 상관하지 않고 한낱 정체 불분명한 사람과 벗을 운운하다니요...설마 그동안 항간에서 떠도는 그 소문이 과연 사실이란 말입니까."
"말씀을 삼가하시오."
이여백은 냉랭하게 한마디를 던지고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서은의 말고삐를 감아쥐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뭔가 착잡한 기색이 어렸다. 그리고는 나치야와 누르하치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 한사람을 향한 그의 목소리가 귀전에 작게 울렸다.
"미안하다."
"송구하옵니다…"
누르하치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 되기라도 하듯 그녀와 나치야에게 깊숙히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작게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나치야가 냉랭하게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서은은 다시 허하게 웃었다. 어쩌면 나치야가 바로 이여백으로 하여금 공주를 거절하게 한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여백의 태도로 보면 두 사람사이는 아직 그리 애틋한 남여사이는 아닌 듯 보였다. 나치야의 시선이 다시 서은에게 향했고, 서은은 친구의 모습을 닮은 그녀에게 몇번이나 눈길을 주었다.
정오의 태양이 그들의 정수리에 따가운 불볕을 내리퍼붓고 있었다.
......
숲속에서 이따금씩 들려오는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간간히 깊은 산길의 정적을 깨뜨렸다. 낮의 일이 불쾌했는지 나치야는 내내 얼굴이 굳어있었고, 일행은 무거운 침묵속에서 밤길을 재촉했다. 자정이 지나 밤이슬이 말발굽을 적실무렵 뒤에서 따라오던 누르하치가 말을 재쳐 앞으로 다가왔다.
"두분 도련님, 그리고 나치야아가씨…밤길이 서늘하긴 하오나 오랫동안 길을 재촉했으니 잠시 쉬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행이 말을 멈춰세우자 누르하치는 이여백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저 앞의 숲속에 장막을 치고 행장을 풀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누르하치가 몸을 돌리기 바쁘게 나치야가 그를 불러세웠다.
"누르하치, 혹시 수렵을 가는 것입니까."
"네, 불을 지피고 찬거리를 마련해야지요. 다들 시장도 하셨을터이니 말입니다."
누르하치가 빙그레 웃자 나치야는 말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바싹 다가갔다.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수렵이라면 그 누구도 우리 도륜성 사람들을 따르지 못할테지요."
"그건..."
누르하치가 이여백의 눈치를 살피자 이여백은 그에게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잘 뫼시거라. 너무 멀리 가진 말고."
그들 둘의 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지자 서은은 말에서 내려 옷자락에 묻은 밤이슬을 털었다.
"요양(遼陽)까지 얼마나 가야 합니까."
"요양?"
이여백도 말에서 내려 말고삐들을 나무에 매놓았다.
"우리가 가는 길은 금주로 향하는 길이거늘."
"네에?"
"우리 목적지는 광녕(廣寧)이다. 요동 총병부가 거기 있지 않느냐."
광녕이라...뭔가…첫시작부터 엇갈리는 느낌이다. 당연히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에 총병부가 설치되어 있을줄로 알았다. 아니 그렇게 줄곧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요양도, 금주도 아닌 그 작은 광녕이라니…그녀는 자신이 알고있는 역사지식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사란 무엇일까. 기억해주고, 지켜주는 것으로 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 바로 역사가 아닌가. 하지만 그 기억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지켜주려는 노력 또한 무의미하게 되지 않을까.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이여백의 시선을 느끼자 빙긋 웃어보였다.
"요동을 떠난지 하도 오래되어서...총병부가 광녕에 있는 것조차 알지 못했군요."
그녀의 민망함을 그 역시 가벼운 미소로 넘겨주었다.
"총병부가 광녕부인 것을 누구나 다 알아야 할 일은 아닐터."
"그러니까요. 그래도 이쯤되면 사형께선 제가 왜 과거에서 떨어졌는지 이해 되실겁니다."
그녀는 너스레를 떤 후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누르하치는…총병부에 있은지 오래되었습니까."
"6년철이지."
이여백은 마른 나무가지를 꺽어 불을 지필 준비를 했다.
"눈에 쓰러진 걸 아버님께서 우연히 발견하시고 구하신 것이 벌써 6년전의 일이군.그때는 그렇게 여리고 약한 아이였는데 어느새 저렇게 장성했으니."
"친부모가 찾지 않던가요?"
"계모의 학대를 받아 가출했다 들었다. 그런 아이를 친부모가 찾아올리 있겠느냐."
이여백은 말을 마치고 잠깐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르하치에게 관심이 많구나."
"아유, 사형도 별 농담을 다하십니다."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관심이라니요. 제가 어찌."
"네가 왜. 내 벗이면 누르하치에게도 벗인 것을."
또 그놈의 벗타령...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는 잠시 숲속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누르하치는, 어릴때부터 외로운 아이였다. 그러니 너도 저 아이를 심복이 아니라 친한 벗으로 봐줬으면 좋겠구나. 벗에 대한 관심, 그것이 어떻다고 그러는가."
그녀는 자신이 다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머리를 한번 흔든 후 다시 화제를 돌렸다.
"고륵성 아타이 말입니다."
이번 화제에는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보았다.
"반란이라 하기엔 아직 이른 듯 합니다만."
그가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 한가닥 복잡한 빛이 스쳐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대가 어찌 아는가."
"만일 아타이가 요양성 주변 주민들을 약탈한 죄행을 따지고 싶으시다면, 그 일은 단지 변방 민족간의 불협화음이지 반란의 모자는 너무 큰 것 같아서요."
"..."
"전에 왕고(아타이의 부친)가 진압당했다 해서 그 아들도 꼭 반란을 일으키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총병님이 요동을 지키시는 이때…만일 그렇다면 아타이는 너무 머리가 나쁘지 않겠습니까."
"..."
"지금 이 시점에 조정에서 아타이의 반란 죄를 묻게 된다면 불필요한 희생을 낳게 될것 같아서요."
"불필요한 희생이라...그건 어째서."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을 천천히 되살렸다.
"건주좌위도독 (建州左衛都督) 타쿠시(塔克世)의 조카딸이 바로 아타이의 부인입니다. 지금 아타이를 공격한다면 명에 충성했던 건주좌위의 충심도 흔들리게 될 것이고,이로서 결국 요동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총병님의 노력은 허사가 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수 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분석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타쿠시는 바로 누르하치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역사 그대로라면 타쿠시는 이번 아타이의 반란 사건에 휘말려 비참한 죽음을 당할 것이다.
타쿠시의 죽음은 명과 이성량에 대한 누르하치의 증오의 감정을 유발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누르하치는 13벌의 갑옷으로 기병하고 곧 건주 여진을 통일하며 머지 않아 요동의 넓은 땅을 차지하고 중원까지 치고 들어갈 것이다.
그녀의 일장설화에 그는 잠깐 끌린 듯 듣다가 금세 무표정한 얼굴을 회복했다.
"그건 아버님의 일이다. 아버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판단하시겠지."
"총병님의 일이자 곧 사형의 일입니다. 과거까지 보셨으면서 왜 정국에 그렇듯 관심이 없으십니까."
찌릿…그의 눈빛이 갑자기 차거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잠시 그의 눈을 응시했다.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게 하는 차가운 눈빛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단정하던 그 눈빛에서 영문 모를 허무감을 발견할수 있었다.
무엇일까, 겉보기엔 냉정한 이 남자로 하여금 이렇 듯 공허를 느끼게 하는 것은. 문득 주체할수 없을만큼 크다란 궁금증이 일었다. 그 궁금증은 그녀로 하여금 그 다음 말을 내뱉게 했다.
"과거에 급제는 하였으나 관직은 싫고, 공주의 마음은 얻었으나 부마는 싫다 이겁니까. 참으로 대단한 은사(隐士)나셨습니다."
"뭐?"
"사형의 일은 경성에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저같은 범부속자(凡夫俗子)들도 모를래야 모르기 어려울 정도로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는 왠지 힘이 빠졌다. 손자병법에도 일렀거늘,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할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를 접근한지 몇일이 지났지만 그녀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여전히 아무 것도 없었다.
지어는 그가 자신을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낼수 있는 동아줄이 맞는지, 그에 대한 판단조차 제대로 서지 않았다. 그녀는 저으기 답답해났다. 그를 더 알려면 그를 자극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용하기만 했다. 지금처럼.
숨막힐 듯한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가 더 말하려는 순간, 문득 그의 등뒤로 한 검은 그림자가 언뜰하는 게 보였다. 그녀가 미처 반응할 사이 없이 검은 그림자는 손을 한번 번뜩하더니 곧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조심…"
그녀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덮쳤다. 하지만 그녀는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언제 피했는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그 대신 그 자리에 덮친 그녀는 왼팔이 따끔해 나는 감을 느꼈다. 별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왠지 서서히 팔이 마비되는 느낌이였다. 그가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독침이군."
그녀는 문득 화가 치밀었다. 염라대왕이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천기를 누설하지 말도록 자신을 경고한다 쳐도 이렇게 두번씩이나 다치게 하다니.
"독침이라니, 어떤자입니까."
"그대와는 상관이 없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별로 힘을 쓰는 게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잠시후 그의 손바닥에는 실낱같은 가는 침이 놓여져있었다. 그제야 왼팔에 무거운 통증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극심한 고통에 몸을 움찔했다.
"가만있어. 독이 퍼질라."
그는 그녀를 제지시킨후 단화에서 작은 칼을 꺼내들었다. 시퍼렇게 날이 서있는 칼을 본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뭐하자는 겁니까."
"가만있어. 피를 빼고 독을 제거해야 하니까."
"네, 네?"
그녀는 눈앞이 아찔해났다. 고금중외에 뼈를 긁어 화살의 독을 다스린 관운장이 아닌 이상, 칼로 생살을 찢는 모진 아픔을 견딜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녀가 망연해있는 틈을 타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팔은 어느새 퉁퉁 부어서 움직이기조차 버거웠다.
"사형..."
그녀는 오른팔로 그의 소매를 움켜잡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왈칵 눈물도 나올 것만 같았다. 목숨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눈앞에 닥친 극심한 고통이 그녀는 더 두려웠다.
"제발...칼은 거두어주세요...사형..."
"독이 퍼진다. 더 지체하면 안돼."
그녀는 급히 두눈을 꼭 감았다. 곧바로 상처자리에 뭔가가 닿는 느낌이 오롯이 전해왔다.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극심한 고통이 뒤따르지는 않았다.
뭔가 굉장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피부에 전해졌다. 그리고 그 또렷한 느낌에, 그녀는 문득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눈을 크게 뜬 그녀의 앞에서, 칼로 그녀의 옷소매를 찢은 이여백이 그녀의 상처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 왔는지 누르하치와 나치야도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산해관을 지나 연일 말을 달리자 요동의 넓은 땅이 서은의 눈앞에 펼쳐졌다. 바람도 한결 시원해졌고 하늘은 티없이 청정하였다. 그녀는 만주의 넓은 벌을 향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요동…중국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 현대의 요녕성(遼寧省) 동남부 일대로서 예로부터 외교 사절과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바로 오래전부터 전해온 그 중요한 지리위치 때문에 중국 북방 민족간의 전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기도 했던 불멸의 땅...그 넓은 만주의 땅을 지금 그녀가 밟고 서있다.
현대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 혼자 베이징에 남겨두고 오랜 세월 만주의 이 넓은 땅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녀가 궐안에서 요동에 오기로 결심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던 걸까.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고삐를 잡은 팔이 초여름의 저녁바람이 스칠 때마다 조금씩 쑤셨다. 상처가 낫기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임도련님, 팔은 괜찮습니까."
언제 다가왔는지 누르하치가 그녀의 등뒤에 서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돌려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처음 봤을때 느꼈던 것이지만 그는 당당하고 영특한 모습이였다. 가끔씩 주위를 살피는 눈길이 날카롭긴 했지만 어딘가 침울한 기색도 어려있었고, 그녀는 그 눈빛에서 약간 슬프면서도 고독한 그림자를 발견할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계모의 반간계에 친아버지와 생리별하고 이성량에게 몸을 붙여온 누르하치는, 이여백과는 비슷하면서도 구분이 되는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이여백보다도 총병부와 이성량에 대한 애착이 더 짙은듯 했지만, 그 애착의 배후에는 어딘가 모르게 순종적이면서도 역반적인 모순된 심리가 깔려있는 듯 보였다. 만일 누르하치가 이성량의 실수와 니칸외란의 음모로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고륵성에서 허무하게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그녀는 급히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고맙습니다. 작은 상처니 과념치 마십시오."
"총병부에 가면 약이 있어 독을 완전히 제거할수 있을 것입니다."
누르하치의 말에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어찌 총병부에까지 페를 끼치겠습니까. 저는 금주까지만 동행할까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등뒤에서 이여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머리를 돌려 그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실은 언녕부터 여쭙고 싶었습니다만. 금주에 도착하면 사형께 하직을 고할까 하구요."
그녀의 말에 그는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나 때문에 상한 것이다. 어찌 널 이대로 보내겠느냐."
"어찌 사형때문이라고 하십니까. 제 재주가 변변치 못하여 그리 된 것이지요."
그녀의 태도는 은근히 고집스러웠다. 수림에서 자객을 만난 후 생각해왔던 일이었다. 비록 염라대왕의 말에서 단서를 잡아 이여백을 접근했지만, 망강루에 이어 연달아 자객을 만나자 그녀는 더럭 불안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객들은 만력이 보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만일 자신때문에 이여백이 그 어떤 피해를 입는다면...
현대로 돌아갈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천천히 모색할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숨막히는 궁궐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그리고 아버지가 머물러있던 이 요동땅을 밟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호의를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다른 한가지 이유때문이기도 했다. 바로 나치야...그녀가 불편을 느낄만큼 나치야의 차거운 시선은 항상 그녀를 뒤따르고 있었고, 나치야의 그런 시선은 이여백이 그녀의 독을 치료해주려고 그녀와 스킨십이 있은 다음부터 더 예리해졌다.
나치야와 이여백이 혼담이 오고가는 사이라는 것도 오는 길에 누르하치에게 들어서 알고있는 일이었다. 짐작했던 일이긴 했지만 가슴 한켠이 시려오는 건 어쩔수 없었다. 그녀는 절친을 닮은 한 여인의 행복을 빼앗을 권리가 자신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자 그들과 광녕까지 동행할 이유가 더 없어져 버렸다.
"저희 도련님의 호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총병부로 가시면 약뿐만아니라 제일 좋은 의원을 불러드리겠습니다."
누르하치가 이여백을 대신하여 그녀에게 권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총병부와 아무련 관련이 없는 사람이니 그건..."
문득 이여백이 손을 들었다. 그녀가 머리를 들자 그는 그녀를 주시하다가 누르하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가서 화살을 가져오너라."
누르하치가 화살 한대를 가져와서 바치자 그는 화살을 받아들고 다시 그녀를 응시했다.
"조실부모하고 거칠 것 없는 신분이라 했던가."
"..."
"아우의 얼굴이 앳되어 보여 짐작하건데 내가 헛되이 몇살 더 먹은 듯 하니 형으로 자처해도 되겠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말씀도 낮추셨으면서."
그녀의 불퉁한 말에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던 그의 눈길이 문득 깊고 진한 빛을 띄었다. 그녀가 멍해있는 사이, 그는 한손으로 화살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사형..."
드넓은 벌판이 보이는 둔덕으로 끌려온 그녀는 영문을 알수 없어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담담한 기색이었다. 다만 무연한 벌을 향해 두손을 맞잡은 그의 행동에 단 한치의 가벼움도 보이지 않아 그녀도 진중한 표정으로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이러십니까."
"일월신명은 내려다보시오."
"..."
"요동 이여백과 임서안이 오늘 이 시각 뜻이 맞고 의가 맞아 의형제를 맺으려 하오니, 앞으로 우리 둘중 누가 형제간의 정의를 저버리고 상대방을 기만하거나 배신을 한다면 하늘땅이 함께 주살할 것이오. 맹세를 어기는자는 이 화살과 같을 것이요."
뿌직...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단번에 꺽여 둔덕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싫은가."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왜 생면부지인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지 알수 없었지만, 그의 성의에 그녀는 이름 모를 감동까지 느꼈다. 나지막한 탄식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녀는 그를 향해 두손을 맞잡고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못난 저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기꺼이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듣자 그의 눈에는 옅은 웃음기가 스쳤다.
"이젠 갈수 있겠지."
"네…네?"
그녀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채 떨떠름한 기색으로 그녀가 물었다.
"갈수 있다니요? 어딜 말입니까."
"총병부 말이다. 이제부터 너는 총병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아닐터."
"..."
"총병부로 가자꾸나. 내 아우 신분으로 말이다.”
그녀는 억이 막혀 한참 멍해있다가 그제야 영문을 알아차리고 피씩 웃어버렸다. 결국 자신을 총병부로 데려가기 위해 급히 맺은 형제의 결의였던가. 그녀의 웃음에 그도 얼굴에 보기 드문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둘이 원자리로 돌아오자 그들을 주시하고있던 나치야의 표정도 한결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도련님이 어느 누구에게 이토록 관심을 보인적이 있습니까. 그러고도 그 소문이 억측이라고..."
이여백의 눈썹이 살짝 찌푸러졌다. 서은은 급히 나치야에게 두손을 맞잡았다.
"본의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저한테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치야는 그녀의 인사도 받지 않은 채 쌀쌀하게 말했다.
"저 역시 총병부에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사람일테니까요. 그런 인사는 도련님한테 했으면 그걸로 됐어요."
서은은 머리를 숙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윤아도 그랬었다. 윤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서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둘사이의 그런 기싸움은 일년이 지나서야 겨우 끝을 맺었던 일이 생각났다. 정확히 언제부터 였을까, 윤아의 그런 쌀쌀한 태도가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은.
"너 같은 애는 공부보단 여우짓이 어울려. 선배도 네가 먼저 꼬리 쳤다던데?"
어느날 그녀들의 숙소로 쳐들어온 같은 학과 선배 언니의 횡포에 윤아가 변명 한마디 없이 묵묵히 서있기만 하는 것을 자신이 참지 못하고 나섰을 때부터였었나.
"선배 자신이 지키지 못한 거지 윤아가 빼앗은 건 아니잖아요?"
그녀가 윤아대신 나서자 그 선배는 펄쩍 뛰었다.
"넌 뭐야? 니가 감히 이 일에 껴들어? 어디 내 주먹맛 한번 볼래?"
"정말 한번 보고 싶네요, 그 주먹맛. 차라리 오늘이 어때요?”
후에 알았지만 그 선배는 H대에서 무예에 능하다고 소문난 인물이었다. 윤아가 아무런 변명없이 가만히 있은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물론 그날 서은이 화려한 무예로 그녀를 손쉽게 제압한 후론, 그 선배가 다시는 무예로 후배들을 괴롭히지 못했다는 H대의 후문이 있다.
"넌 그날 왜 바보같이 가만있었냐?"
"뺏은 게 맞아."
"뭐?"
"선배남친, 내가 뺏은게 맞다구. 그러고는 차버렸어."
“왜?”
”그남자 소문난 바람둥이야. 저 선배는 그것도 모르고.”
"풉..."
윤아와는 그렇게 절친이 되었던 것 같다. 막상 친하고보니 단순하고 명랑한 아이였다. 둘은 어디서나 그림자처럼 붙어다녔고 심지어 어떤 비밀은 공유하기도 했다.
엄하기로 소문난 서은의 아버지에 대해서 윤아는 잘 알고 있었고, 윤아 역시 딸의 진로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버리는 자신의 아빠와 오랜 시간 냉전중에 있었다. 어쩌면 이런 비슷한 처지때문에 둘의 사이가 더 가까워졌는지도 몰랐다. 그런 윤아는 지금쯤 병원 침대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를 자신을 지키며 눈물만 흘리고 있겠지…
"금주에 도착했습니다."
누르하치가 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깊은 상념에서 깨어나 앞을 바라보았다. 요동의 정치, 군사 중심지인 광녕위의 중심, 그 광녕위 총병부를 지키는 금주(錦州)성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눈앞의 거대하고 웅위로운 성세에 그녀는 속으로 탄복을 금치 못했다.
......
금주의 거리에 들어선후 서은은 왠지 시름이 놓였다. 되돌이켜보니 어쩌면 산해관을 지난 후부터 자신을 뒤따르는 위험에 대한 불안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듯 보였다. 금주성에 들어선 후론 심지어 안온하고 편안한 느낌까지 들어서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여긴 마치 언제 한번 와본 것 같군."
현대 도심은 물론, 경성의 번화가와도 거리가 멀었지만 금주성안 길거리에 이리저리 벌려놓은 난전과 시전잡화상들의 모습은 오래전에 보았던 어느 한 장면처럼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시전거리를 지나 주점거리에 들어서자 이여백이 말에서 내렸다. 그뒤로 누르하치가 따랐다.
"오늘안으로 광녕까진 어려우니 잠시 쉬어가자."
이렇게 말한 이여백이 걸음을 멈춘 곳은 높은 누각을 갖춘 어느 한 주점이였다. 경성의 망강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정갈하게 꾸며진 누각은 나름대로 주인의 담정한 운치가 보였다. 일행이 주점앞에 이르자 누군가가 손벽을 마주치며 안으로부터 그들을 마중나왔다.
"이게 웬 일이십니까. 총병부의 도련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왕림하시다니…"
"오랜만이오."
이여백은 주점주인인 듯한 그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이번은 인마가 좀 많은데 하루밤만 쉬어갈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주점주인은 실눈을 지으면서 여럿을 안으로 안내했다.
"평소에는 청해도 오시지 않은 귀객들이라…하루가 아니라 일년이라도 뫼쉴수 있습지요."
일행이 주점안으로 들어가자 이여백은 머리를 돌려 주인에게 말했다.
"내 손님들이니 접대를 부탁하겠소."
주인은 주보를 불러 여럿을 뒤뜰의 방으로 안내하게 한후 이여백만을 앞채의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주보를 따라와 자신이 묶게 될 방에 행장을 내려놓은 후 서은은 잠시 방안을 서성였다. 보통 경우라면 집이 눈앞이고 그것도 요동의 정세가 불안정한 이때라면 하루라도 빨리 길을 재촉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왜 이여백은 금주에 들어서자 속도를 늦추고, 왜 하필 이런 주점에 행장을 풀어 시간을 지체하는 걸까.
"도련님…먼 길을 들썽이었더니 힘들어 죽겠사옵니다."
오래동안 수레를 타고온 령이의 불평소리도 그녀의 주의를 불러일으키진 못하였다. 그녀는 한참 뭔가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려 령이에게 말했다.
"예서 쉬고있거라. 잠시 나갔다 오겠다."
"상처도 낫지 않으셨는데 또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령이의 지청구를 뒤에 남긴 채 그녀는 방문을 나선 후 곧추 앞채쪽으로 향했다. 때마침 이여백이 뒤뜰로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여 그녀는 다짜고짜 그 앞을 막아나섰다.
"형님!"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그가 무심히 대꾸하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총병부가 눈앞인데 어찌 굳이 여기에서 지체하시는 겁니까. 전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어서 광녕으로 가셔야지요."
"항상 그러는가?"
"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바로 입밖에 내는 것 말이다."
그의 담담한 말에 그녀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면...안됩니까."
"안된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이 험한 세상에 그런 곧은 성정으로 살아가는 게 염려되어 하는 말이니."
그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네 말대로 전란을 앞두고 지금쯤은 총병부가 비었을터. 아버님께서 고륵성으로 출전하셨다고 하니 괜히 서두를 필요가 없어. 잠시 볼일이 있어 지체하는 것이니 괘념치 말거라."
"네? 총병님께서 벌써 고륵성으로요? 안됩니다. 고륵성 아타이는 반란이 아닙니다, 형님."
그녀의 어조에 다급함이 실렸다. 이성량이 벌써 고륵성으로 출전을 했다면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을 막을수 없는 것이 아닌가. 단지 염라대왕에 대한 반발심 때문은 아니였다. 어쩌면 이여백과 누르하치를 만나서부터, 역사에 기재된 그들의 운명은 역사 그대로 흘러가서는 안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얘기라면 저번에도 했었지."
이여백이 무심히 대꾸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섰다. 그의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보자, 그녀의 의분이 슬슬 넘쳐오르기 시작했다.
"틀리다고 생각되는 일은 바로잡을수 있을때 바로잡아야 합니다. 아타이의 반란은 증거가 불충분한데 총병님께서 도륜성 니칸외란의 반간계에 드셔서 혜안이 흐려진 듯 합니다. 니칸외란은 위인이 졸렬하여 아타이 뿐만 아니라 여러 부족 추장들과 분란이 끊이지 않고 또 몽고와는 각별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오니 절대 그의 말을 믿으시면 안됩니다."
"금상께서 칙서를 내리셨다면 아버님도 출전을 지체할수는 없을터."
"그러면 한가지만은 막으셔야 합니다."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건주좌위도독 타쿠시를 고륵성으로 들여보내지 마십시오. 그렇게만 하시면 됩니다."
이여백은 아무 말없이 차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그리고는 차물이 식기를 기다려 그녀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의 의연한 모습에 그녀는 점점 조급해졌다. 자신 혼자의 힘으로 명조말년 요동지역의 이 비사를 막을수 있을지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차잔을 들어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나서 그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여백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어떻게 총병님께 기별을 넣어 니칸외란의 꼬임에 들지 말도록 할순 없겠습니까. 니칸외란은 고륵성 아타이가 반란을 꾀한다는 거짓 상소를 올려, 총병님의 힘을 빌어 건주좌위와 고륵성을 제거하고 그 틈을 타서 자신이 건주여진을 독차지하려는 야망을 품고있는 자입니다."
"..."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건주좌위도독 타쿠시와 아타이는 사돈지간입니다. 그러니 이번에 타쿠시는 아타이를 설득하려 고륵성으로 들어갈 것이며 그로 인해 건주좌위와 고륵성, 그리고 총병님께도 불이익이 닥칠 것이란건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이번 일에서 오로지 니칸외란만 어부지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
"명나라에 대한 불신으로 아타이는 타쿠시를 경계하고 있으나, 타쿠시는 아타이의 부인인 자신의 조카딸을 구하기 위해 총병님께서 고륵성을 공격하기전 설객으로 들어가기를 자청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타쿠시는 니칸외란이 바라는대로 고륵성 출전의 희생품이 되는 것입니다."
"전쟁이란 희생이 동반하는 법이다. 무릇 요동 사람이라면 이 점은 감안해야 하지."
이여백이 차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그의 무심한 말에 그녀는 더욱 초조해졌다.
"하지만…이런 희생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으로 요동의 다른 큰 분란을 일으킬수도 있습니다."
그는 차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반듯한 미간에 약간의 구김이 잡혔다.
"지금 네 말은…내가 니 말을 듣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고륵성까지 가서 아버님의 뜻을 막으라는 것인가."
"네, 그리 하시기를 간청 드리옵니다. 형님께서 형님이 아껴왔던 한 사람의 불행을 막으시려면."
그녀는 말하기로 결심했다. 염라대왕의 경고가 떠올랐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타쿠시는, 누르하치의 아버지입니다."
방안은 물뿌린듯 조용했다. 그가 한번 더 미간을 구겼고 그녀는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누르하치가…심복이 아니라 벗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
"정녕 벗의 불행을 그대로 방관하실 생각이십니까. 형님께선…그런 분이셨습니까."
"그만."
이여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 다음 말을 이었다.
"넌 참…사람을 난감하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형님..."
그녀는 이름못할 실의를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염라대왕의 경고...천기를 누설하면, 이 한단락의 역사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염라대왕이 말하던 감당하지 못할 후과는 대체 어떤 것일까. 그녀로서 전혀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기재된 역사대로 간다면 누르하치는 분명 아버지를 잃고 기병을 할 것이고, 요동은 각 부족지간의 전란으로 한시도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다. 요동의 전란을 막으려면 누르하치의 기병을 막아야 했고, 누르하치의 기병을 막으려면 그 기병의 원인을 제공하지 말아야 했다. 그것이 누르하치를 대처해야 하는 이성량의 돕는 것이자, 그 아들인 이여백을 돕는 길이기도 했다. 역사에 기재된 이여백과 누르하치의 운명은, 결코 역사 그대로 흘러가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형님이야말로 사람을 난감하게 하십니다. 혹 정녕 모르시는지요."
그녀는 시선을 들었다. 눈앞의 남자의 냉혹함에 그녀는 차라리 단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고싶은 말은 결코 참을수 없었다. 그를 만나서부터 품어왔던, 그에 대한 짙은 의혹을.
"저는, 제게 누르하치를 벗이라 말해주던 형님의 모습이 좋았습니다. 아무리 나랏 일에 관심이 없는 형님이라지만...저는 형님께선 적어도 자신의 벗 누르하치와 총병님에 관한 일에는 관심을 가질 줄 알았습니다."
"..."
"하지만 저는 지금 헷갈립니다. 대체 무엇이 형님으로 하여금 이다지도 모든 일에 무관심하게 만들었습니까. 벗이라 하면서도 벗을 구하려고는 하지 않고, 아버지라면서 아버지의 안위에 관심도 없는...대체 형님의 진심은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진정한 형님의 모습입니까.”
방금전까지도 담백한 그의 눈빛에 뭔가 작은 실낱 같은것이 스쳐지나며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곧 흥미로운 기색이 그 실낱을 대체했다. 그는 그런 미묘한 눈빛으로 한참동안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일 무렵,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 진정한 모습이라…"
그의 입꼬리에 얼핏 미소 같은 것이 걸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무 말없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잠시후 그는 그 냉소를 거두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도 알지 못하는데 그대가 어찌 알겠는가."
그는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시켰다. 그리고 후자의 얼굴에 얽혀있는 단단한 고집과 열정이, 그로 하여금 뭔가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한것 같은 모양으로,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결연한 눈빛으로 그녀의 팔을 보았다.
"밤길에 말을 달려야겠는데 상처가 괜찮겠느냐."
"형님..."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서서히 작은 감동이 밀려왔다.그 감동은 그녀로 하여금, 단호히, 큰소리로 그에게 대답하게 만들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