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고륵성과의 싸움은 단 하루만에 끝났다. 잔양이 붉게 물든 성채 곳곳에 고륵성 군사들의 시신이 높게 걸렸다.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자 아타이는 난군속에서 목을 찔러 자결했고, 이성량은 군사를 거둔후 위풍당당하게 고륵성으로 입성했다.
방문을 내붙여 백성들을 위로하라 이른후 이성량은 친히 군사들을 이끌고 아타이의 부중을 샅샅이 훑었다. 이여백과 함께 이성량의 뒤를 따르던 서은은 이성량의 그런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형님, 아타이가 죽고 우리가 입성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 부중에 누가 남아있겠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이여백은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탐마의 소식에 따르면 아타이는 집식구를 빼돌릴 틈이 없었다는군."
"그래서 지금 총병님께선 아타이의 남은 식구마저 낱낱이 찾아 조정에 공을 청하시려 하십니까."
그녀의 말에는 은근히 가시가 돋쳐있었다. 이여백이 그녀를 흘낏 바라보았고 그녀는 잔뜩 볼을 부풀렸다.
"아니면 왜 이렇게 아타이의 부중을 훑으라 하겠습니까."
"아버님은 누르하치의 누이동생, 타쿠시의 조카딸을 찾고 있어."
이여백의 대답에 그녀는 아차 싶었다. 아타이의 부인이 타쿠시의 조카딸이였고, 보아하니 이성량은 조카를 만나려다 고륵성에서 죽음을 당한 타쿠시와 교행가를 대신하여 그 생사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녀는 혀를 홀랑 내밀어보이고 묵묵히 이성량의 뒤를 따랐다. 잠시후 여러 갈래 군사들이 이성량의 앞에 부복했다.
"찾지 못했느냐."
"네. 부중이 텅 비었습니다."
이성량이 손을 젓자 군사들이 물러갔고 그 군사들 사이를 누군가가 비집고 다가왔다. 니칸외란이었다. 나치야가 사라졌는데 니칸외란이 아직도 고륵성을 떠나지 않고있었다니...서은은 고개를 돌려버렸고 니칸외란은 이성량에게 허리를 굽혔다.
"총병님, 저는 어찌하오리까."
"무엇을 말이오."
이성량의 냉랭한 대답에 니칸외란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치야가…나치야가 아침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이성량은 아무 말 없이 니칸외란을 보았다. 이여백 역시 자신에게 향한 니칸외란의 시선을 맞받아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성주께서 언제부터 이렇게 딸걱정을 하셨습니까."
"도련님, 혼담이 오간 사람이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도련님께서 어찌 그런 태평한 말씀을 하실 수가 있단말이요. 아무리 어째도 나치야는…"
"나치야는 건주좌위에 가있습니다."
이여백이 니칸외란의 말을 자르자, 니칸외란은 두눈을 흡떴다.
"건주…좌위라니요?"
"어제밤 영채를 습격한 이들이 건주좌위 군사들이었소. 그 이후로 누르하치와 나치야가 보이지 않았소."
이성량이 이여백대신 니칸외란의 말을 받았다. 니칸외란은 여전히 아연한 기색이였다.
"네? 건주좌위가 영채를 습격하다니요? 어떻게 그런 일이..."
"오늘이 본격적인 싸움이라 어제밤 일로 굳이 군사들을 경동하지 않았소. 이제 싸움이 끝났으니 이젠 사람을 보내 건주좌위에 그 죄를 물으려 하던 참이오."
"부디 총병님께서 이 일을 엄히 다스려 주십시오."
니칸외란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성량은 입꼬리를 비틀며 빙그레 웃었다.
"이는 남여사이 일인데 어찌 엄히 다스리겠소."
"아니, 절대 그런 것이 아니외다!"
니칸외란은 그제야 이성량의 말뜻을 알아듣고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 딸이 비록 미천하오나 그래도 여자로서의 부덕은 가르쳤으니 절대 그런 낯간지러운 일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외다. 총병님께서 나서주시지 않으신다면 제가 직접 가법으로 이 일을 엄히 다스리겠습니다."
니칸외란은 자리를 차고 분연히 일어나서 그대로 성밖쪽으로 향했다. 셋은 그런 니칸외란을 뒤로 하고 텅 빈 아타이의 부중으로 들어갔다. 이성량은 앞채의 대청에 좌정해 앉자 문득 기색을 일변하고 이여백에게 호통쳤다.
"네 이놈…어찌 그리 경망된 일을 저지른단 말이냐!"
"송구합니다. 그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여백이 머리를 숙였다. 서은은 이성량이 어제밤 누르하치를 놓아준 일로 그런다는 것을 알고 초조한 마음으로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성량은 한참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놈이 웬일이더냐."
"..."
"어인 일로 이렇게 빨리 잘못을 시인하느냐 말이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로다."
이여백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알릴듯말 듯 옅은 웃음기가 스쳤다.
"아버님께서도 오랜만에 제게 이렇게 호통치셨지요."
이성량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친 후 다시 굳은 표정을 회복하고 말했다.
"네 성정에 어울리지 않게 어찌 그런 일을 벌였느냐. 누르하치를 놓아주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네, 잘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버님께서 이 일로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수 있다는 것을..."
이여백은 잠깐 말을 끊은후 이성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듣고 더이상 가만있을수 없었습니다. 하여..."
그의 말에 이성량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여 네가 나를 대신해 이 세상의 신의라도 얻겠다는 거냐? 세상 사람들이 뭘 안다고 그러느냐. 그리고 너 또한 뭘 안다고 그러느냐."
"적어도 요동 총병이 누구나 함부로 바라보지 못하는 중요한 자리인줄은 알고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중요한 자리는 아직 아버님을 제외하고는 적임자가 없어서 조정에서도 각별히 조심한다는 것도 알고있지 않겠습니까."
이여백의 말에 이성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사이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후 이성량은 뭔가 생각난 듯 한쪽에 서있는 서은에게 머리를 돌렸다.
"연며칠 싸움 때문에 접대가 소홀하여 미안하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형님의 아버님이자 곧 저의 아버님입니다. 총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히려 저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급히 응수하자 이성량은 호탕하게 웃었다.
"좋소. 여백이 모셔온 분이라면 나 또한 식구로 대할터이니...총병부에 가더라도 집처럼 편하게 있어야 할 것이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이성량의 얼굴을 주시했다.
"미천한 이 몸이 이미 형님을 따라왔은즉 총병님께서 휘하에 거두어주신다면 견마지로를 다할까 하옵니다."
"어허, 그대 말을 빌자면 이 총병님이라는 호칭도 오히려 나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오."
이성량이 빙그레 웃자 그녀는 다시 그를 깊이 응시했다. 아버지…도 그랬다. 평소에는 항상 냉정한 모습이다가도 일단 마음을 열 때에는 망설임 없이 한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 배포도 완벽하게 닮아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 이성량에게 깊숙히 허리를 굽혔다.
"소자 아버님께 고쳐 문안 드립니다. 국사 다망하시더라도 부디 귀체 보존하옵소서."
"내게 아들이 여럿 있으나 아직도 이리 아들욕심을 내니 이상한 일이요."
"아버님께서 아직 제게 하대를 안하시는 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그녀의 말에 이성량은 큰소리로 웃었고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이여백도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이성량의 다음 말에 그녀는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그래 알았다. 내 앞으로는 내 아들을 대하듯 편하게 대하마. 이생엔 이러하거니와 다음생에는 딸이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노라. 하하하…"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이성량의 이런 말과 웃음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전율케 했다. 그리고 뭔가...굉장히 익숙하면서도 아리숭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끝내 알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
총병부로 온 서은에게는 한동안 평온하고 한적한 날들이 이어졌다. 고륵성의 싸움이 끝난 후 그녀는 누르하치가 건주여진 추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수 있었다. 예상중의 일이었지만, 그와중에 놀라운 것은 명조정에 누르하치를 추장으로 추천한 사람은 바로 이성량이였다는 사실이었다. 이성량은 누르하치를 놓아준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조정에 상소를 올렸고, 그 소식을 들은 서은은 머리를 끄덕이며 감복했다.
이성량은 타쿠시가 남긴 13벌의 갑옷을 누르하치에게 보내주었고, 타쿠시와 아타이가 가지고있던 요동에서 피육과 산삼무역을 허락하는 칙서 50부까지 누르하치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추장 자리는 명조정의 승인을 받은 기성사실로 되었다.
역사대로라면 누르하치는 건주여진 추장이 된 후 해서여진의 예허와 분분한 왕래를 하면서 놀라운 속도로 세력 확장을 할 것이다. 해서여진의 예허는 만주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히는 나린부루추장의 여동생 맹고를 누르하치에게 바칠 것이고, 그로부터 건주여진과 예허여진은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면서 요동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다툴 만단의 준비를 할 것이다.
"이러면 요동의 세력구도가 당분간은 건주, 예허, 광녕으로 나뉘겠군."
"예로부터 삼족정립이 제일 확고한 법입니다. 이로서 요동도 짧은 평화를 맞아오겠지요."
몇일전 이여백과 연못가 정자에서 나눴던 말들이었다. 총병부 후원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은 연꽃으로 무성하게 덮여있었다. 그녀의 침소는 연못가와 멀지 않은 후원의 한적한 별당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여백은 가끔 후원에 들리긴 했지만 무슨 일에 서두르는 듯 잠시 들렸다가 얼마 안지나 바로 밖으로 나가군 했다. 후원에서 호젓하게 지내던 그녀는 번민이 있을 때마다 습관처럼 연못가로 와서 앉아있다가 침소로 돌아가군 했다. 그녀가 금방 왔을때까지만 해도 연못을 뒤덮은 연꽃은 가을비에 몇번 허리를 꺽이더니 어느새 누렇게 시들어 있었다.
그동안 서은은 건주여진으로 간 나치야의 소식을 알길이 없어 걱정이었다. 그녀는 현대에서 온 자신이 오랜 세월 요동 만주땅에서 살아온, 숙명처럼 모든 것을 수용할줄 하는 고대 여인의 운명을 걱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친을 닮은 나치야에 대해서 그녀는 줄곧 신경이 씌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총병부에서의 날들이 이어질수록 그녀는 자신의 입장이 곤혹스러워졌다. 그녀의 입장이라면 명 만력황제의 여동생 서안공주의 몸을 빌어 전생여행을 하게 되었으니, 신분으로 보면 으레 명나라 황족의 이익을 지키고 대변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역사의 결과를 알고 순리를 깨달은 현대의 사람으로서, 그녀의 마음 한편으로는 누르하치가 자신의 계획과 포부를 실현할수 있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이런 고민들속에서 그녀가 총병부에 온지도 어느새 두달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령이는 총병부가 쓸쓸하고 한적하다고 그녀에게 외출을 권하다가 몇번 거절을 당했다. 이날도 령이가 뿌루퉁해서 혼자 놀러 나간 후 그녀는 후원을 산책하다가 또 연못가에 이르렀다. 소매를 걷어올리고 시든 연잎을 몇장 거둔 후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숙여보니 연못속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시름없이 헤염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에 이끌려 그대로 연못가에 쭈크리고 앉았다.
"나도 너희들처럼 시름 없었으면 좋겠구나…여기에 온지도 꽤 되는거 같고 돌아갈 일은 막막하기만 하고…윤아는 도륜성으로 가버렸고 아버진 전혀 날 몰라보고…나 이젠 어떻하면 좋냐?"
그녀의 손에 든 연잎이 스르르 물위에 떨어지자, 물고기들이 먹이인가 해서 우르르 몰려들다가 바로 헤쳐져버렸다. 그녀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그만 풋 하고 웃어버렸다.
물위에 흰 그림자 하나가 더 나타나자 그녀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언제 다가왔는지 이여백이 그녀의 등뒤에 서서 어딘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사내대장부가 어찌 한낱 아녀자의 풍정을 희롱하는가."
그의 무심한 듯한 말에 그녀는 그만 뜨끔해졌다.
"송구합니다."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마른 연잎을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요동지역 태생이라 하니 혹 철령을 잘 아는가."
"듣기는 하였으나 익숙치는 못합니다."
"아버님의 고향이다."
"그러셨군요."
그녀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고 그는 눈을 들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내일 철령으로 가려 하는데 동행하지 않겠는가."
"네? 저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총병부로 온 후엔 자신이 한번도 외출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머리를 끄덕였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먼 길은 아니나 혼자 가자니 족히 무료해서 그런다."
방금전의 착잡한 표정을 거둔 그의 뒤늦은 변명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빙긋 미소를 지었다.
"형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저 역시 연일 부중에 박혀있어 무료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이여백은 미소를 지었다. 왠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그 미소에 그녀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불안은 적중한 것이였다. 철령으로 가는 길에는 울창한 수림들이 줄줄히 이어졌고, 앞으로 갈수록 적어지는 인가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고삐를 조였다. 그녀를 불안하게 한 것은 결코 이것뿐만이 아니였다. 총병부를 떠날 때부터 무표정하던 이여백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더 냉랭해졌고, 그녀는 그런 그의 차가운 모습에서 이유모를 위험한 신호를 느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그녀의 질문에 굳어있던 그의 미간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그 싸늘한 표정변화에 그녀는 주눅이 들어 낮게 웅얼거렸다.
"연일 형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기에..."
"아무것도 아니다."
낮게 깐 목소리로 부정을 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거웠다.
"철령은, 어떤 곳입니까."
더이상의 침묵은 견디지 못하고 그녀가 다른 화제를 찾았다. 그는 말의 속도를 늦추고 그녀를 주시했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버님의 고향이라 했다."
"..."
"내 고향이기도 하고."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를 보았다.
"그뿐입니까?"
"전에는 무인지대였지만, 지금은 경계라고 할수도 있지. 조선인, 달단인, 여진인 등 여러 민족이 섞여사는 땅이기도 하고."
그는 그녀를 일별한후 다시 한마디 설명을 가했다.
”조정에서 철령위(鐵嶺衛)라는 병참군영을 설치한 곳이기도 하지. 아버님의 분부를 받들어 한번 둘러보고 가야 한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다 왔구나."
그녀는 그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
"형님…!"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의혹이 섞였다. 그는 그녀에게 얼굴을 돌렸고, 그녀는 채찍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팔간…기와집이 아닙니까."
"..."
"어찌 이곳에...이런 기와집이 다 있는 것입니까."
그녀의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반응에, 그는 빙긋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뭘 그리 놀라는가. 저긴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거늘."
그녀는 한동안 마을을 내려다 보다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형님의 고향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내 고향이지.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구나."
그는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요동 정세와 인물에 대해 그리 다 알고 있는 네가, 정작 아버님의 고조부가 조선인인줄 모르다니."
......
요동총병 이성량의 차자 이여백은 임진왜란때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 원군총병 이여송과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운 명나라 중군 부총병이었다. 그는 여러번 요동총병으로 출세할 기회가 있었으나 명리에 담백한 성정때문에 사르후전역에서 누르하치에게 패한 뒤 파면되었고 그후 은둔생활을 하다가 몰[殁]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
서은이 알고있는 이여백의 정보는 여기까지였다. 굳이 한가지 더 붙이자면 염라대왕이 알려준 터무니없는 이유, 즉 자신은 이런 이여백의 온전한 마음을 가져야만 현시대로 돌아갈수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조건이었다.
"조선인…"
그녀의 눈빛에 곤혹이 스쳤다. 그녀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염라대왕은 왜 하필 그를 점찍었을까.
"그래. 정확히 말하면 조선인의 후손이지. 아버님의 고조부는 고려출신인 이영(李英)으로서, 아버님은 요동 철령위(鐵嶺衛) 지휘첨사(指揮僉事)의 직위를 세습해서 출사하신후 집안을 일으키셨다."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임진왜란때 출병하셨군요…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니."
"임진? 출병?"
그의 의아한 표정에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아닙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량은 요동총병에 이어 영원백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으니 명나라 200여년 역사에서 가히 최고의 자리에 오른 요동 명장이라고 볼수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원군을 통솔한 총병 이여송과 부총병 이여백도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친 명장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적은 왜 그토록 명조정에 소외되고 역사에 의해 사장되고 말았을까. 전란이 빈번한 요동의 땅에서 만주 여러 민족 분란을 막고 요동의 안정을 도모하던 이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만력황제의 명에 따라 원군을 이끌고 임진왜란때 출병한 이여송과 이여백 형제를 기리기 위해 심은 소나무와 잣나무는 지금에도 여전히 푸르건만...어찌하여 그의 성정은 이토록 담백하고 초연했던 것인가.
"출병? 누가 출병한단 말이냐."
그는 그녀의 침묵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아까보다도 한결 냉랭한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전에도 물은적 있었다. 누구냐, 넌."
"형님..."
그녀는 그의 의심이 내심 서운해졌다. 뭔가 말하고 싶었으나 끝내 말을 못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전…형님의 적이 아닙니다."
"하지만 난 네 정체를 알아야겠다."
그의 말투가 싸늘해지는 느낌에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때를 맞추어 갑자기 목에 선뜩한 느낌이 들어와서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언제 꺼냈는지 그의 접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접선에서 빠져나온 차거운 검이었다. 이제야 알수 있었다. 그가 왜 접선을 무기처럼 가지고 다니는지. 그것이 그의 무기였다.
그의 검은 그녀의 목에서 좁은 간격을 사이두고 차거운 빛을 내뿜고 있었고, 그녀는 그 하얀 검날을 내려다 보다가 다시 쓸쓸히 시선을 들었다.
"형님..."
가슴 깊은 곳에서 이유모를 슬픔이 밀려와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해당하고 의심당하는 기분이 서러워서가 아니였다. 눈앞의 남자의 눈에서 깊은 상처 비슷한 것이 보이는 순간, 뭔가 또렷한 통증이 그녀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눈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절…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평화로운 기운으로 가득차있던 마을 어구에서 서서히 이름못할 살기가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슬픈 것은 자신을 향한 그의 불신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녀를 엄습하는 살기속에서 그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알아버린 탓이리라.
"내가 왜 널…믿어야 하느냐."
"베십시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로 그를 주시했다. 그들 사이의 신뢰가 이토록 취약하게, 이토록 순식간에 부서진 것이라 생각하니 회의 비슷한 느낌도 들었다. 어쩌면 철령으로 올 때부터 그는 그녀를 이렇게 취조하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그의 냉담한 표정들, 왜 그것을 일찍 알지 못했던가.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차츰 가라앉는 감을 느꼈다.
"정녕 이리도 저를 믿지 못하신다면…전 그동안 헛되이 형님이라고 불렀군요."
"..."
"베십시오. 이대로 형님 손에서 죽겠습니다. 그리고 죽어도 형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내가...감히 베지 못할 것 같으냐."
이여백의 검이 한치 더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그런 그의 검날을 주시하면서 조용히 웃었다.
"벨수 있다는걸 압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마십시오."
"..."
"다만...제가 의도적으로 형님을 접근하여 해하려 했다는, 나쁜 일 당했다는 생각만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
"사람과 사람사이...꼭 뭔가를 목적한 만남이라면...그래서 누군가를 해하려 하는 마음이라면...이 세상은 너무 무섭고 삭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전...맹세코 형님의 적이 아닙니다. 말로는 믿기 어려우신 듯 하니, 만일 죽음으로 증명이 된다면...그래서 그 믿음을 얻을수 있다면...이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니까요...제가 아는 형님이, 결국은 저보단 형님 자신의 마음을 선택하셨으니...저는 그에 따르고자 합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눈을 들었다. 그런 그녀의 단단한 시선을 마주한 그의 눈빛이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
"그만하거라."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둘은 소리나는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차거운 검이 자신의 목앞에서 거두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강하게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눈앞의 할머니었다. 이런 고령의 할머니가 이토록 비범한 기품을 가지고 있는 것에 그녀는 은근히 감탄했다. 단정하게 쪽진 은빛머리, 옥색 한복차림의 할머니는 담담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하면 되었다. 그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너라."
이여백은 그녀를 잠깐 바라보다가 접선안으로 검을 갈무리했다. 그녀는 한참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다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마을어구의 한 집문앞에 이르러 빗장을 지른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담한 기와처마와 정갈한 툇마루, 그리고 섬돌까지 갖춘 한옥이 보였다.
할머니는 마루로 올라가자 이여백을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들어오지 말고 넌 볼일을 보거라."
"그래도 인사는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그런 예는 전부터 그만두라 하였느니."
이여백은 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잠시 일보러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서찰은 잘 받았다. 내 저 아이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되느니라."
"네, 한식경후 다시 오겠습니다."
이여백은 그녀에게 눈길을 준 후 몸을 돌려 대문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할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할머니의 일거수 일투족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서려 있었고, 그 눈빛은 꼭 마치 세상만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듯한 초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는 할머니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선 후 자신을 바라보는 할머니를 향해 조신하게 예를 올렸다. 할머니는 그녀가 고개를 들기 기다려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절이 틀렸구나."
"..."
"너는 오른손이 위로 가야 하는 것이렷다."
그녀는 놀란 시선을 들었다.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는 그녀를 향해 할머니가 말했다.
"아니면 차라리 만복의 절을 하려무나."
만복이란 명나라 여자들만 하는 절의 명칭이었다. 그녀는 당황해졌다. 그렇게도 여자라는 티가 났을까. 그녀는 할머니의 시선을 피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할...할머니..."
"명의 말도 너무 편해보이진 않는구나. 편하게 조선말을 하든지."
그녀는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이런 반응이 예상되었다는 듯 할머니는 담담하게 웃었다.
"여자아이가 남복을 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다니...여백이 의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거늘."
그녀는 맥이 풀렸다. 그동안 공을 들여 쌓아왔던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허한 시선을 들어 할머니를 보았다.
"송구하옵니다. 할머니는 어떤 분이시기에…이렇게 모든 걸 소상히 아십니까."
"나 말이냐?"
할머니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 할머니의 미소가 왠지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제 어디서 봤던지는 딱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가 멍해있는 사이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저 한때 무당을 한적 있는 할미라고 기억하고 있거라."
그녀는 눈앞의 할머니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자상한 얼굴에 기품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한때 무당을 한적 있다는 과거와는 어쩐지 매치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의혹을 읽어냈는지 할머니는 또 한번 빙그레 웃었다.
"그래...한때는 잘나가는 무당이였지. 이 동네에선 쪽집게 무당할미라는 소리도 들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예지능력을 잃어서 무당을 관두게 된 거란다."
"그렇군요."
그녀의 대답에 할머니는 조용히 차잔을 들었다.
"허나 여자아이가 남장을 한 것쯤은 아직 알아볼만 하느니라."
"송구합니다. 할머니..."
그녀가 고개를 떨구자, 할머니는 계속해서 말했다.
"여백 저 아이가 서찰을 보내왔더구나. 서찰에서 그 아인 너에 대해 곤혹스럽다 하였다."
이미 의심을 샀을줄은 알고 있었던터라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할머니는 잠시 말을 끊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 할머니의 눈빛이 문득 날카로와졌다.
"누구냐, 넌."
그녀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요즘들어 부쩍 듣는 한마디었다. 난 누구일까, 누구라고 말해야 사람들이 납득이 갈까. 천기를 누설하면 난 어떻게 될까. 그녀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그만 허구프게 웃고 말았다.
"제가 누구란 걸 알아서…무엇이 바뀌겠습니까."
"네가 누구란 걸 숨겨서…무엇이 지켜지겠느냐."
머리속이 윙…하고 울렸다. 이런 잠언같은 말을 할수 있는 할머니야말로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저 익숙한 미소는 대체 어디에서 봤던 것일까...머리속으로 한가닥 청량한 바람이 불어들어오는 것만 같아서 그녀는 한껏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잠시 할머니가 한 말의 의미를 되새기다가 그녀는 금세 포기한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되옵니다. 저는 말할수 없습니다."
"천기를 누설하면 안된다고 염라 그 영감탱이가 그러더냐."
그녀는 몸을 흠칫하며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시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있는 듯한 담담한 시선이 그녀의 슬픈 얼굴에 조용히 머물러있었다.
할머니의 그런 초연한 눈빛에, 그녀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