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전생에서 만난 그대
작가 : 판도라
작품등록일 : 201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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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교
작성일 : 19-10-08     조회 : 55     추천 : 0     분량 : 13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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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총병부 대청을 들어서는 누르하치의 태도는 당당했다. 서은은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는 서서히 화가 치밀었다. 잠시나마 누르하치를 영웅으로 생각하고, 또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주리라 믿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제야 알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노력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역사에서의 인물은 결국은 역사에 기재된대로 움직이게 되는 걸까.

 

 이성량은 누르하치가 대청에 들어설 때부터 그를 주시했고, 누르하치는 이성량을 향해 담담히 머리를 숙여보였다.

 

 "총병님, 그동안 무강하십니까."

 "흠...덕분에."

 

 이성량이 조용히 웃었다. 서은은 긴장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가 누르하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성량의 반응에 그녀의 가슴은 은은히 저려오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도 그랬다. 화가 날때면 오히려 조용히 웃는 모습이 오히려 화를 낼 때보다 더 두려웠다. 그 웃음 뒤에는 그녀를 제압할수 있는 방법이 있었고, 그런 방법은 항상 자신으로 하여금 패배감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되돌이켜보면 현대의 그녀는 그런 아버지에게 반항하면서도 이름못할 경외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너도 잘 지냈느냐."

 

 이성량의 의연한 태도에 그녀는 또 한번 가슴이 저렸다. 이성량과 이여백, 겉보기에는 냉냉해보이는 부자지간이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누구도 끼어들수 없는 단단한 감정이 있는 듯 보였다. 지금 이성량의 마음도 결코 평온하진 못하다는 것을 그녀는 보아낼수 있었다.

 

 "저야말로 총병님 덕분에 제 자리를 찾게 되어 감읍할따름입니다."

 

 누르하치는 머리를 한번 숙여보인 후 입을 열었다.

 

 "오늘은 총병님께 외람되이 한마디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이성량은 꿈틀하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나 역시 너를 찾으려던 참이였다."

 "그럼 총병님과 제가 마음이 통한 것이라 봐도 되겠습니까."

 

 누르하치는 슬며시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이성량도 여전히 웃는 얼굴이였다.

 

 "어쩌면 우리 목적도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

 

 누르하치가 웃음을 거두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를 따라온 군사 하나가 앞으로 둬걸음 나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두손으로 쟁반을 받쳐올렸다. 쟁반위의 물건을 확인하는 순간 서은은 깜짝 놀라 이성량을 돌아보았다.

 

 "아버님…"

 

 이성량의 입귀가 푸뜰 움직였다. 그는 시선을 쟁반위에 고정시킨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아이의 옥적이구나."

 "이것이 어찌 저한테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누르하치에 말에 이성량은 말없이 그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중에서 단단히 부딪치고 있었다. 대청에는 한참동안 숨막힐 듯한 침묵만 흘렀다. 서은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누르하치…"

 

 그녀는 누르하치를 보면서 입술을 사려물었다.

 

 "형님께 만일이 있다면, 전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누르하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길을 마주했고,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원하는게 뭐냐."

 "역시 총병님은 현명하십니다."

 

 누르하치는 두손을 맞잡았다.

 

 "부디 폐하께 상소를 올려주셔서, 제가 도륜성을 치게 허락해주시옵소서."

 

 이성량은 무거운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넌, 아직도 그 생각을 버리지 않는 거냐."

 "당연합니다."

 

 누르하치의 눈에는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건주좌위와 저희 집안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비를 죽인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저희 아이신죠우르 가문은 건주 여진에서 모든 위망을 잃을 것입니다."

 

 누르하치는 잠시 말을 멈춘 후 주먹을 틀어쥐었다.

 

 "총병님께서 상소만 올려주신다면 저는 이참에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고 도륜성을 초토로 만들 것입니다."

 

 이성량은 고개를 들고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그렇게도 인내심이 없는 아이였더냐? 넌, 건주여진의 실권보다도 너희 집안 명예가 더 소중한 거냐?"

 "집안의 명예를 탐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누르하치의 어조가 차거워졌다.

 

 "도륜성 성주가 요동의 민심을 어지럽히고 몽고와 결탁한 일은 요동의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이성량은 안색을 풀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도륜성은..."

 

 이성량은 잠깐 말을 멈추고 누르하치를 바라보았다.

 

 "네가 굳이 이러지 않더라도 내가 언젠가는 그 죄를 물을 것이다. 그때 고륵성 영채에서 널 투옥했을 때에도, 난 언젠가 니칸외란을 내 손으로 처리하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성량은 뒷짐을 지고 누르하치에게서 몸을 돌렸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지금이 때가 아니라면…언제가 그 때입니까? 저는 언제가야 이 원수를 제 손으로 갚을수 있는 겁니까!"

 

 누르하치는 절규하듯 내뱉었고 이성량은 냉랭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만일 상소를 올리지 않는다면."

 

 누르하치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정녕 도련님의 안위를 괘념치 않으시렵니까. 도련님이 어떻게 되어도 걱정이 안되신다는 말씀입니까."

 "어찌 걱정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넌 한가지를 잊었다."

 "무엇입니까."

 

 이성량이 손을 들자 문밖의 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을 데리고 대청으로 들어섰다. 머리를 돌리던 누르하치는 그 두 사람을 보자 몸을 흠칫하면서 뒤로 둬발자국 물러섰다.

 

 서은도 누르하치의 시선을 따라 대청에 들어선 두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 젊은 여인과 어린 남자아이였다. 명의 옷차림을 한 여인은 강인한 기색으로 머리를 쳐들고 있었고, 어린 남자애도 전혀 겁먹지 않은 듯 반짝이는 눈빛으로 대청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동가…추잉…"

 

 누르하치의 입에서 이 두 이름을 듣는 순간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사에서 누르하치가 거병을 하기전 무순에 두었던 아내와 아들…동가는 누르하치가 관례를 치른 후 맞이한 한인출신의 아내였고 추잉은 그들사이에 태어난, 누르하치의 제일 첫번째 아들이었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첫 거점인 헤투알라성에 군사를 주둔시키느라 이 둘을 임시 무순에 거처하게 했었다. 하지만 이성량은 어느새 이들을 광녕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이렇게 빨리 이 두 사람을 대령시킨 것을 보면, 이성량은 애초에 누르하치가 군사를 모집하느라 한창 바쁠때 미리 이들을 총병부에 데려다 놓은 것이 분명했다.

 

 대청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누르하치는 이성량을 향해 털썩 무릎을 꿇었다.

 

 ......

 

 "일어나거라."

 

 이성량의 쌀쌀하게 입을 열었다. 눈앞의 역전된 상황에 서은은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는 머리를 숙인채 그대로 움직일줄 몰랐다.

 

 "일어나거라. 일어나서 다시 협상할 것이니라."

 "총병님…"

 

 누르하치의 목소리가 갈려있었다. 이성량은 소리없이 웃었다.

 

 "그 아이의 안위는 네게 묻지 않겠다. 고작 옥적 하나를 가져와서 무엇을 증명할수 있다더냐. 나처럼 눈앞에 사람을 대령해야 협상조건이 되지 않겠느냐."

 "송구합니다."

 

 누르하치는 고개를 들지 못했고 이성량은 씻은 듯 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둬걸음 다가선후 다른 사람들이 들을수 없을 정도로 누르하치의 귀가에 대고 목소리를 바싹 낮추었다.

 

 "여백은 네 손에 없다."

 "어떻게…그걸..."

 

 누르하치는 놀란 기색이였고 서은은 눈을 크게 뜨고 이성량을 보았다. 이성량은 또 한번 소리없이 웃었다.

 

 "그 아이가 큰 뜻은 없어도 고집은 있는 편이니 그리 호락호락하게 네게 끌려가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총병부로 너무 빨리 찾아왔다는 생각은 안해봤느냐."

 "..."

 "급할수록 천천히 가라고, 평소에 내가 가르치던 것을 그동안 다 잊었더냐."

 "..."

 "넌 성격이 급한 것이 제일 큰 흠이였다. 그런 조급정서를 가진 네가, 도륜성 니칸외란을 상대로 싸울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

 "지금의 넌 아직 니칸외란의 상대가 아니다. 내가 시기상조라고 했던 것 바로 이때문이다."

 "그러면 이 원수놈을 그냥 두어야 한단 말입니까?"

 

 머리만 푹 숙이고 있던 누르하치가 드디어 얼굴을 들며 이를 악물었다. 이성량은 한참동안 그를 주시했다. 그리고는 뒤로 물러서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돌아가거라."

 "네?"

 "돌아가서 우선 건주여진의 부족들을 통일하거라. 부족의 힘을 합치다보면, 도륜성을 제어할 세력이 생길것이다. 그리고 명심하거라. 처음부터 네가 직접 나서진 말아야 한다. 너에겐 아직 도륜성을 칠 명분이 없다."

 "저더러 칼을 빌려서…살인을 하라는 말입니까."

 

 누르하치의 의문에 이성량은 머리를 끄덕였다.

 

 "너는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연후에 해서여진의 예허와 손을 잡아야 한다. 도륜성은 몽고와 움직임이 있으니 너는 서둘러 예허와 친목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

 "그다음 각 부족간의 불협화음을 이용하여 손을 써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전에는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니칸외란은 교활한 놈이여서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 나도 저어하거늘 네가 지금부터 그놈을 상대한다면 오히려 네 힘만 잃을 것이다. 군사는 모름지기 때와 장소를 가려 기회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젠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르하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성량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풀었다.

 

 "그러니 가거라. 네 처와 아들은 때가 되면 헤투알라성으로 보내주겠다."

 "총병님…"

 "지금 저 둘에겐 총병부가 더 안전할터이니."

 

 누르하치는 이성량을 주시하다가 다시 한번 깊숙히 고개를 숙여보인 후 몸을 일으켜 대청밖으로 향했다. 서은은 문득 정신이 들어 급히 누르하치를 불러세웠다.

 

 "누르하치, 형님을 어디로 가신 겁니까!"

 

 누르하치는 몸을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복잡한 빛이 내비쳤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누르하치의 앞으로 몇걸음 다가섰다. 그녀의 초조한 얼굴에 누르하치는 시선을 내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도 잘은 모르겠으나...혼전중에 복면을 한 사람들이 나타나서…도련님을 놓쳤습니다."

 "복면?"

 

 서은은 크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원망어린 시선으로 누르하치를 노려보았다.

 

 "그날 당신이 그렇게 막지만 않았어도…형님께선 지금쯤 총병부에 편안히 앉아계실 겁니다."

 "송구합니다. 이 길로 군사를 풀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누르하치는 고개를 떨구었고 서은은 몸을 돌려 이성량을 보았다.

 

 "아버님…죄송하지만 저도 같이 가보겠습니다."

 "네가 어딜 간다고 그러느냐."

 

 그녀는 자신과 이여백이 몇번 조우했던, 독침을 쓰는 복면의 자객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형님을 찾아내겠습니다. 누르하치를 믿고 기다리고만 있을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나중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성량은 미간을 구겼고 서은은 머리를 숙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이 어떻게 되든 돌아와서 복명하겠습니다."

 

 이성량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끄덕였다.

 

 ……

 

 몇일째 수림속을 헤매고 다녔는지 모른다.

 

 장마비가 구질구질 내렸고 적막한 수림도 비에 젖었다.

 

 하지만 서은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녀는 얼굴로 흘러내리는 비줄기를 훔친 후 머리를 돌려 누르하치를 바라보았다. 누르하치의 얼굴에도 초조함이 어려있었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신의보다 원수가 더 중요했던 누르하치, 목숨보다 존엄이 더 중요했던 이여백, 아들보다 대의가 더 중요했던 이성량...그렇다면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바로 이여백의 생존소식이라는 것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예지능력을 가진 할머니를 떠올렸을 때는 이미 총병부를 떠난지 아흐레 되는 날이였다. 그녀는 자신의 소홀함에 발을 구르면서 급히 말잔등에 뛰어올랐다. 왜 애초부터 할머니를 찾아뵙고 조언을 구할 생각을 못했을까…말고삐를 바싹 당기자 말은 그대로 네굽을 안고 뛰기 시작했고, 누르하치의 의아한 시선을 뒤로 한 채 그녀는 멀리 한적한 마을을 향해 곧추 말을 내몰았다.

 

 마을입구에 거의 이르렀을 때 언뜻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녀는 은근히 불안해졌다. 입구에 들어서니 마을 중간에 검은 연기가 타래쳐 오르고 있었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부랴부랴 그 연기나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 그쪽으로 종종걸음을 치는 한 여인의 옷자락을 잡고 물었다.

 

 "아주머니, 말 좀 물읍시다. 지금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젊은이, 그러지 말고 가서 불이나 같이 끄시구려. 그 유명한 무당할머니 댁입니다요."

 

 여인의 말에 그녀는 머리가 뗑해나서 황급히 연기나는쪽으로 줄달음쳤다.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기와집을 통채로 삼켜버린 불길은 그녀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마지막 불씨를 내보내며 조금씩 숙어들고 있었다. 불을 끄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뒤로 물러섰고, 그동안 자신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할머니와의 마지막 대화가 어렴풋이 그녀의 머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다음에 내려올때도 찾아뵙고 인사 드리겠습니다."

 "다음은 없다. 너와 나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이다. 이 세상과의 인연도…이젠 끝이려니."

 

 끝까지 놀라운 예지능력을 보여주신 할머니…결국은 이렇게 이생의 연을 다하다니...그녀의 눈에 차츰 눈물이 고였다. 불끄러 들어갔던 사람들이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말이 들려오자 그녀는 맥이 풀려 뒤로 몇걸음 물러섰다. 어쩌면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 시공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고뇌를 알아주던 할머니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이렇게 범상치 않은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마을을 나선후 말을 끌고 터덜터덜 숲속으로 향했다. 이제는 더이상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아 그녀는 한참동안 망연히 걷기만 했다.

 

 숲속에 거의 도착할 무렵, 문득 눈앞이 언뜰하더니 복면의 검은 그림자들이 그녀 앞을 막아나섰다. 그녀는 급히 검을 뽑아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제일 앞에 선 자가 몸을 날려 그녀를 제압했고, 그녀가 소리지르려는 순간 낮게 깐 복면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도련님을 만나려면 조용히 따라오시오."

 

 ......

 

 철령의 깊은 숲속을 빠져나가자 이름모를 큰 산이 눈앞에 보였고, 복면을 한 사람들의 안내로 서은은 드디어 산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녀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산길입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의심을 알아챘는지 복면의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가 당신을 해치려면 지금껏 가만히 있었겠소."

 

 그녀는 고개를 돌려 복면남자를 바라보았다.

 

 "형님은…대체 어디 계십니까."

 

 복면의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한결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것을 착용해야겠소. 이도련님을 만나려면 순순히 내 말을 따르시오."

 

 복면남자의 손에는 검은 천으로 된 안대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허탈하게 웃으며 복면남자에게 말했다.

 

 "나는 한사람이고 당신들은 여럿인데 굳이 이래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사내대장부라면 통쾌하게 손을 쓰십시오. 허나 그 안대는 착용하지 못하겠습니다." "

 

 복면남자는 복면뒤로 허구픈 웃음소리를 냈다.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하는 무리들인데 그 무슨 통쾌함을 바라시오."

 

 복면남자의 말이 어쩐지 자조섞인 말투여서 서은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복면남자는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태도를 고쳐 말했다.

 

 "비밀히 해야 하는 곳이어서 이해해주시오. 이도련님이 계신데까지 안내하겠으니 잠깐만 눈을 가려주시오."

 

 그녀는 하는 수없이 안대를 받아 눈을 가렸다. 기나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 한참 후 복면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안대를 벗겨주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어떤 깊숙한 동굴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개를 들자 동굴안에 실실이 피여오르는 몽롱한 안개에 그녀는 잠깐 넋을 잃었다.

 

 무릉도원이란 바로 이런 곳이였던가. 눈앞에 펼쳐진 수려한 풍경은 순식간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이한 종석이 내리드리운 가운데 은은히 향기를 풍기는 화초가 만발해 있었고, 눈을 들어보니 화초밭 저쪽에 바위에 둘러싸인 비취색 호수가 얼른거렸다.

 

 북방 한랭한 기후에 걸맞지 않게 어느 명문가의 후원도 따르지 못하는 아름다운 정원이 이런 동굴안에 있다니...그녀는 눈앞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다시 복면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형님은, 어디 계십니까."

 

 복면남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그녀의 시선도 뒤따랐다. 화초밭을 지난 호수가의 어느 한 바위곁에 그토록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형님!"

 

 그녀가 앞으로 달려나가가려는 순간 복면남자가 팔을 내밀어 그녀를 가로막았다.

 

 "부르지 마시오. 기를 동하여 독을 빼는중이오. 지금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오."

 "독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복면남자를 돌아보았다. 복면남자는 그녀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말을 이었다.

 

 "그날 이도련님을 노린자가 누르하치뿐만이 아니었소. 혼전중에 이도련님은 독침을 피하지 못했소. 우리가 나서지 않았다면 건주여진이 아닌 그들에게 끌려갔을수도 있소."

 "...!"

 

 서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경성에서부터 뒤따르던 자객...그들이 틀림없었다. 정말 그녀의 추측대로 만력이 보낸 자객들일까. 그들은 왜 꼭 이여백의 목숨을 해하려 들까.

 

 "여기서 기다리시오. 원기를 회복하기까진 시간이 꽤 걸릴 것이요."

 

 복면남자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자 서은은 문득 고개를 들고 그를 불렀다.

 

 "잠시만요."

 

 복면남자는 멈춰섰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녀는 천천히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누굽니까."

 "알아서 이로울게 없소."

 

 복면남자가 다시 걸음을 떼려고 하자 그녀는 몸을 날려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남자의 얼굴은 복면에 가리어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그녀는 그가 무척 화가 나있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복면뒤에서 거칠게 울려나왔다.

 

 "비키시오."

 "형님을 구해주신 일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형님이 깨어나기전엔 이대로 보내지 못합니다. 누가 압니까. 독침은 당신들이 써놓고 이러고 있을지."

 

 그녀의 말에 복면남자가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복면남자의 싸늘한 눈길에 금세 태도를 바꾸었다.

 

 "만일 자객들이 이곳을 찾아오면 어떡하겠습니까. 형님이 저 상태라면 저 혼자만으론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곳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요."

 "제가 알고 당신도 알고…당신의 수하들도 압니다."

 

 그녀의 대답에 복면남자는 일시 말문이 막힌 듯 했다. 그는 잠깐 망설이는 듯 하다가 고개를 돌려 이여백을 보았다. 그리고는 결심이라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그럼…이도련님이 깨어날 때까지만 여기 있겠소."

 

 그녀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는 작은 바위 하나를 찾아 앉은 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이여백을 바라보았다. 그러느라고 복면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한가닥 이채가 섞여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말았다.

 

 ……

 

 동굴안이라 낮과 밤을 가릴수는 없지만 복면남자의 수하들이 먹을 것을 몇번 가져온 것으로 보아 시간이 퍼그나 지난 듯 했다. 문득 눈앞에 뭔가 반짝이는게 보여서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꼬리에 불빛을 단 날벌레들이 동굴안을 헤집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눈여겨보니 동굴의 종석사이로 같은 날벌레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녀는 눈앞의 정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반딧불…여기에 어떻게 저런 벌레들이 있을까..."

 "화초가 있으니 저런 꽃벌레들이 있기 마련이오."

 

 혼잣말이었는데 줄곧 침묵을 지키고있던 복면남자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후 몸을 일으켜 앞으로 둬걸음 다가섰다.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남자의 반응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형님은 언제야 완쾌될수 있을까요."

 "깨기만 한다면…빠르면 사흘, 늦어도 닷새면 독기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오."

 

 서은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느닷없이 손을 내밀어 남자의 복면을 잡아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였지만 그녀가 애초부터 계획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녀의 행동도 빨랐지만 복면남자의 반응은 더 빨랐다. 복면남자는 몸을 뒤로 피하면서 눈깜짝할새에 한마장 거리 뒤로 이동했다. 그녀는 흠칫하면서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내뱉었다.

 

 "건곤대나이(乾坤大挪移)…"

 

 ......

 

 "그대가 어찌 이 보법(步法)의 이름을 아시오."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진 남자가 싸늘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녀는 놀라움이 가득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마디 더 내뱉었다.

 

 "명교(明教)…"

 

 찌릿…

 

 복면남자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그녀는 작게 숨을 들이킨후 복면남자의 시선을 마주했다. 무거운 공기가 그들사이에 침묵으로 내려앉았고, 한참 지나서야 복면남자는 못믿겠다는 듯 말했다.

 

 "명교…를 아시오?"

 

 그녀는 남자를 응시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북송 방랍이 설립한…페르시아에서 기원해서 당나라때 중원에 들어와서 선한 일을 행하고 악한자를 징벌하는, 중생은 평등하다는 교리를 지키면서 성화를 표징으로 하는 조직...바로 그 조직이 명교 아닙니까."

 

 복면남자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차분히 그 뒤를 이었다.

 

 "장무기가 34대 교주, 주원장…명 태조폐하가 제 35대 교주라고 강호에 전해지고 있던데요."

 "그만하면 잘 아시는군."

 

 남자는 쌀쌀하게 말했고 서은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우연하게 의천도룡기(倚天屠龙记)나 소호강호(笑傲江湖)같은 무협소설에 끌린 뒤로 항상 밤을 지새면서 읽었던 소설의 내용들이었는데 막상 그 내용들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자 그녀는 허구픈 웃음이 나왔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명교의 힘으로 황위에 오른후 명교와 백련교를 포함한 여러 교파들을 진압했고, 명조정의 진압을 피해 명교는 겉으로는 해체를 고했으나 사실은 여러 작은 파로 나뉘어 각 지역에서 비밀히 활동했다는 것은 강호에 퍼진 공공연한 비밀이였다.

 

 그 후 만력 년간에는 명교가 부활하여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재물을 흩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의교로 부상했지만, 조정에서 진압하는 교파이기도 했고 명교의 피해를 입은 청렴한 관원들도 적지 않았기에 강호에서의 그 이름도 별로 의롭지 못했다는 설도 있었다. 명교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후세에서도 엄청 엇갈렸고, 그녀는 자신이 즐겨 읽었던 무협소설 내용의 진위여부를 가려낼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지금 눈앞에 둔 셈이었다.

 

 "알고보니 형장께선 명교 출신이였군요."

 

 그녀의 말에 복면남자의 눈빛은 한결 더 싸늘해졌다. 남자가 가만히 있자 그녀는 한수 더 떴다.

 

 "어쩌면 경성 주막에서의 자객, 금주로 들어서기전 자객, 그리고 고륵성에서의 자객까지 다 명교가 보낸 거겠죠."

 

 복면남자는 흥 하고 냉소를 했고 그녀는 이해 안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명교에서 노리는 것은 형님인듯 한데, 당신은 왜 형님을 구하신 겁니까. 이유가 뭡니까."

 "내가…"

 

 복면남자의 차거운 눈빛에 문득 미묘한 웃음기가 스쳤다.

 

 "왜 댁에게 알려줘야 하는 건지?"

 "…"

 "힘으로도 안되고 나한테 인정빚까지 진 사람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요?"

 

 복면남자의 말에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고 남자를 주시하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명교의 앞날을 알려준다는 자격은 어떻습니까."

 

 복면남자가 못믿겠다는 듯 허구픈 웃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명교에서 건곤대나이 보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교주(教主)를 내놓고는 좌우사(左右使)두사람뿐입니다. 당신이 이 셋중 그 누구든간에, 지금 명교의 전성기를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추운 이 요동지역까지 명교의 자객이 빈번히 출몰하는걸 보면 명교의 세력도 어느정도 커져있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으니까요."

 "…"

 "하지만…명교는 바로 해체될 겁니다."

 

 복면남자는 몸을 흠칫했고 서은은 쌀쌀하게 웃었다.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무리라…그 말씀을 하시기전에 한번쯤은, 단 한번쯤은 명교가 왜 빛을 보지 못하는지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복면남자의 눈빛에 의혹이 섞였고 그녀는 그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 빛이…너무 강한 빛이기때문이죠."

 "…"

 

 복면남자는 여전히 침묵했고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명교가 빛을 보려면 명조정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 그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복면남자가 몸을 흠칫했다. 그녀는 차분하게 그 뒤를 이었다.

 

 "까놓고 말하면…명교는 줄곧 명조정에 이용만 당하고있는 조직이 아닙니까. 그러고보니 그 이름 자체도 문제가 많군요. 왜 하필 명나라 명자를 범했는지…어차피 이름이 명교인 한, 명조정과의 존속관계를 벗어나기 힘들지도 모르겠군요."

 "참으로 허황하군."

 

 복면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서 한결 차거운 빛이 스쳤다. 그를 자극하여 좀 더 뭔가를 알아내려던 그녀는 문득 등뒤의 기척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동굴안에서 짧은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복면남자와 그 수하들은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돌위에 좌선하고 있는 이여백의 곁으로 다가왔다. 긴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여백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형님..."

 

 이여백은 그녀를 발견하자 바로 반듯한 미간을 구겼다.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

 "자초지종을 말하자면 꽤 깁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딱딱히 굳은 얼굴이었다.

 

 "누가 널 여기 데려왔느냐."

 "그러니까 그 복면..."

 

 그녀는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보니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그자는 건곤대나이 보법을 쓰고 있었습니다."

 "건곤..."

 

 이여백이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그의 반응을 놀란 것이라 이해하고 의기양양해서 말을 덧붙였다.

 

 "놀랍지 않습니까. 강호에선 거의 전수가 안된 그 보법을 제가 알아봤다는 것이...아, 그리고 제가 한가지 더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

 "그 사람, 명교의 좌사나 우사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예지능력보다 더 빛나는 놀라운 통찰력과 분석력...이것이 바로 이 아우가 강호에서 몸을 보전하는 방법이지요..."

 

 그녀는 문득 말을 중단했다. 명교를 언급하는 순간 이여백의 눈빛에 섬뜩하리만치 차거운 기색이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동굴안에는 공기를 얼어붙게 하는 냉기가 흘렀고 그녀는 우물우물 입안으로 말을 이었다.

 

 "하여간 치밀한 놈입니다. 아무리 말을 유도해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더이상은 알아내지..."

 "더이상 뭘 알고싶은가."

 

 그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를 알아서부터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명교에서 왜 형님을 노리는지 그 사람은 왜 또 형님을 구했는지…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암튼 저는 꼭 알아내고 말 것입니다."

 

 그는 동굴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차거운 산바람이 불어들어오고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그보다 더 차거운 미소가 걸렸다.

 

 "그래...재간껏 알아보도록."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부터 느낀 것이지만 아무리 봐도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원기는 회복하셨는지요? 여기가 좋지만 제집보다 못합니다. 이제 그만 총병부로 가시지요."

 "그래, 가야지."

 

 그는 움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녀를 내려다 보면서 조용히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넌 이젠 그만 총병부를 떠나야겠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냉랭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잠시 멍해있다가 믿기 어렵다는 듯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형님, 무슨…말씀이신지…총병부를 떠나라니요? 혹시 제가 무엇을…잘못했는지요."

 

 그녀의 말에 그가 시선을 들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짙게 가라앉은 그의 냉혹한 눈빛에 저도 몰래 몸을 흠칫했다. 뒤이어 귀전에 들려오는 그의 말에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네가…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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