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전생에서 만난 그대
작가 : 판도라
작품등록일 : 201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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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합
작성일 : 19-10-10     조회 : 35     추천 : 0     분량 : 1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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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조용한 연회석에서 신충일의 목소리가 다시 또렷하게 울렸다.

 

 "소인은 올해 명의 신과 무과 장원이 총병부 둘째도련님이라는 소문을 듣고 꼭 한번 가르침을 청하고 싶었습니다. 오늘같은 기회는 더 없을지니 외람되지만 이 자리에서 둘째도련님과 한번 무예를 겨루고 싶습니다."

 

 이여백은 이성량에게 시선을 주었고 신충일은 계속 말을 이었다.

 

 "소인이 지면 조선에 돌아가서 요동 총병 자제분의 위망을 널리 알릴 것이나, 만일 소인이 이기면 둘째도련님께서 저의 부탁 한가지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

 "절대 무리한 부탁은 아닙니다."

 "흠…"

 

 이성량은 수염을 내리쓸었다. 신충일은 좌석에서 일어나 이성량에게 깊숙히 허리를 굽혔다.

 

 "소인의 이번 여행이 산수를 구경하는 것보다 명의 유능한 인물을 사귀는데 그 목적이 있으니, 부디 총병님께서는 소인의 청을 들어주시어 귀국후에 유감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이성량이 이여백을 바라보자 이여백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전 싫습니다."

 

 이성량의 난감한 표정에 신충일은 이여백을 보았다.

 

 "둘째도련님께서 이처럼 재주를 아끼시어 멀리 고국에서 온 사람을 박대하시니 이 어찌 대국의 손님접대라 할수 있겠습니까. 소인 총병님께서 꼭 윤허해주시리라 믿고 말을 꺼냈으니 총병님의 허락만 기다리겠습니다."

 

 이성량은 신충일을 향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하시오."

 "아버님..!"

 

 이여백이 더 말하려 하자 이성량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신공자가 모처럼 청을 해오신터에 어찌 차마 거절하겠느냐. 어서 내려가거라. 이런 작은 경합으로 우정을 돈둑히 한다면 이 역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

 

 이여백은 무가내한 듯 이성량에게 머리를 숙여보인 후 천천히 정자밑으로 내려갔다. 서은은 그런 이여백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신충일을 바라보았다. 신충일의 목적이 누르하치라면 그가 이여백에게 부탁할 것은 단 한가지, 누르하치에게 연줄을 대어달라는 것이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만일 이여백이 경합에서 그에게 진다면 총병부의 명예실추는 물론, 그와 약속한 부탁까지 들어주어야 할판이었다. 그리고 그 부탁이 누르하치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구라면 그것이 지금의 이여백에게는 무리한 일일수도 있었다.

 

 정자밑 작은 뜰에서 마주보고 서있던 신충일과 이여백은, 서로 간단한 인사를 마친후 곧바로 허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바람을 가르는 유려한 동작들이 순식간에 허공을 덮었고, 몇합을 나누는 과중에 둘의 행동은 똑같이 민첩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술과 찬을 나르던 하인들이 발걸음을 멈추었고 나무가지 사이에 잠든 새들이 놀라서 푸드득거리며 하늘높이 날아올랐다.

 

 신충일의 무예는 퍼그나 공격적이였다. 몇합이 지난후에도 이여백이 거의 방어태세만 취하고 있자, 신충일은 보다 맹렬한 발공격으로 이여백의 급소들을 노렸다. 등불이 휘황한 가운데 둘의 그림자는 한데 엉켰다가 바로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또다시 몇합을 나누었다.

 

 서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보기엔 이여백의 무예가 한수 위였지만, 그의 담정한 성정으로 보아 전혀 이길 타산이 없어보였다. 그렇다고 일부러 경합에서 져준다면 신충일이 자신을 놀린다고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여러번 기회를 노린 신충일은 마침내 크게 몸을 날려 이여백의 가슴을 강타했다. 바로 그 순간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휘익 하는 바람소리가 들리고 어렴풋한 아우라와 함께 이여백은 몸을 피해 한마장 거리 밖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바로 일초전 그가 있던 자리에 신충일의 묵직한 일격이 가해졌다.

 

 헛탕을 친 신충일이 맹랑한 기색으로 자세를 바로하자 이여백은 그를 향해 두손을 맞잡았다.

 

 "신공자의 무예는 그야말로 백문불여일견입니다. 제가 졌습니다."

 "지다니요?"

 "뜰을 벗어났으니 제가 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여백이 담담히 말하자 신충일은 흥 하고 냉소했다.

 

 "일단은 제 전립의 공작미를 돌려주시지요."

 

 이여백은 잠시 침묵하다가 소매안에 갈무리한 보라색 공작미를 꺼냈다. 신충일의 전립에 있던 공작끈이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합니다."

 

 이여백이 머리를 숙여보이자, 신충일은 그를 주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둘째도련님의 무예는 과연 명불허전이십니다. 제가 졌습니다."

 "아닙니다. 먼저 경합의 장소를 벗어난 건 접니다."

 

 "어흠...신공자의 무예가 한결 뛰어난 듯 하나 이처럼 겸양하시니 서로 비긴 걸로 하시오."

 

 이성량이 입을 열자 둘은 조용해졌다. 이여백은 신충일에게 한번 더 머리를 숙여보인 후 몸을 돌렸다.

 

 "어찌 그리 급히 들어가십니까."

 

 신충일이 그를 불러세웠다.

 

 "달이 높고 별이 찬 오늘같은 밤에 어찌 어지러운 칼과 주먹으로 이 아름다운 경치를 저버리겠습니까."

 

 정자위에서 서은은 살짝 미간을 구겼다. 신충일의 집요함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자기가 무예경합을 하자 해놓고..."

 

 그녀의 중얼거림은 신충일의 격앙된 목소리에 묻혔다.

 

 "제가 알기로는 둘째도련님이 무예 말고도 능한 것이 또 있다 들었으니, 오늘밤 그 재주를 아끼지 마시고 한번 보여주신다면 무예경합에 진 소인의 여한을 풀까 합니다."

 

 이여백은 고개를 들어 차분한 눈빛으로 신충일을 보았다.

 

 "제가 별로 갖춘 재능이 없으니 신공자께서 저의 재주를 보시려면 아마 크게 실망을 시켜드릴 듯 합니다."

 "도련님께선 어찌 그리 겸양하십니까. 총병부 둘째도련님께서 옥적이 하나 있어 능히 장자방을 능가하는 소리를 낼수 있다고 조선에서도 소문이 자자합니다."

 

 한낱 요동총병의 아들이 피리를 조금 분다 하여 조선까지 소문이 갈리는 없을 터였다. 신충일의 다소 과장된 말에 이여백은 살짝 입꼬리를 휘였다.

 

 "송구하오나 일전에 옥적을 잃어 그 행방이 묘연합니다. 재주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한 상황이 되었으니 오늘 신공자가 원하시는바를 보여드리지 못하는 점 용서하십시오."

 "그럴줄 알고 제가 본국에서 옥적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둘째도련님의 옥적에는 비하지 못하오나 소리는 맑고 아름다와서 제가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물건입니다. 어디 한번 보시겠습니까."

 

 신충일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품속에서 푸른 빛이 도는 옥적을 꺼냈다. 이여백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체념조로 입을 열었다.

 

 "외람되오나 우선 신공자의 곡조를 청해 듣겠습니다."

 

 신충일은 슬쩍 입꼬리를 치켜올린 후 옥적을 들어 흔연히 한곡조 불었다. 맑고 청아한 소리가 은은히 울려퍼졌고, 잠시후 그는 옥적을 내리고 웃으면서 옛시를 한마디 읊었다.

 

 "정자에 꽃이 떨어져 향기 가득하니 그 모습 찬연하다."

 

 이여백은 신충일의 손에서 옥적을 받아들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곧 은연하고 청정한 옥적소리가 울렸고 잠시후 곡조를 마무리한 이여백은 담담히 화답을 했다.

 

 "청학의 그림자 연못을 스치니 연꽃이 피어 만발하다."

 

 좌중은 크게 갈채했고 이성량은 흐뭇한 얼굴로 한마디 던졌다.

 

 "신공자의 시어가 화려하고 호방하니 오늘의 자리에 어울리는구려."

 "과찬이십니다. 둘째도련님의 시어가 우아하고 참신한 뜻이 있으니 능히 소인을 능가하리다."

 

 신충일은 아쉬운 눈빛으로 이여백을 보다가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듯 다시 정자위의 이성량을 보았다.

 

 "오늘밤 이처럼 흥이 도도하니 이어서 다른 경합을 허락하여주시옵소서."

 

 이성량은 미소를 거두었고 좌중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젊은 혈기가 치솟는 사람이라 해도 신충일의 요구는 과분한 것이었다. 모두 이성량의 눈치를 살폈고 신충일은 고개를 들고 당당한 얼굴로 정자위를 보았다.

 

 서은은 눈앞의 상황을 차분히 정리해보았다. 신충일의 성정으로 봐서는 오늘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끝까지 저돌적으로 밀고 나갈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성량과 이여백은 최대한 화평한 태도로 이를 무마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잠깐 사색을 더듬다가 뭔가 결심이라도 내린 듯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정자위에서 몸을 일으키고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신충일의 시선이 정자위로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의 간섭이 의외였는지 신충일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공평하지 않습니까."

 "애초부터 신공자께서 경합의 종목을 정하시고 저희는 거기에 따르기만 했으니 말입니다."

 "그건…"

 

 신충일은 말문이 막힌 듯 했고 서은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신공자께서 손님접대를 운운하시니 저희가 접대를 책임진 입장에서 두번을 양보했으나 이제 더이상은 안됩니다.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저희가 종목을 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충일은 눈썹을 꿈틀했다. 그는 다소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임공자께선 어떤 경합을 원하시는 겁니까."

 "무예와 음률을 다루었으니 이번엔 화법이 어떻겠습니까."

 

 그녀는 침착하게 신충일을 보았고, 신충일의 눈길에 살짝 안도의 빛이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뒤이어 모두의 의혹어린 시선이 그녀를 향하자 그녀는 정자밑의 신충일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화법은 저랑 겨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신공자님."

 

 ......

 

 서은의 말은 좌중을 놀래키기에 충분한 것이였다. 이성량까지 얼핏 그녀를 돌아보았고 이여백은 그녀가 무슨 일을 벌리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의 그런 시선을 외면하면서 신충일을 향해 또 한번 도전장을 던졌다.

 

 "제가 비록 한미하오나 감히 신공자께 화법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옵니다."

 

 그녀의 말에 신충일은 얼굴에서 안도의 기색을 거둔 후 곧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화법이라…좋습니다. 임공자와 화법을 겨룬다면 저 또한 한가지 약속을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신충일은 머리를 들어 그녀를 주시하면서 말했다.

 

 "제가 이기면 둘째도련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 하지만, 만일 임공자가 이기면 당신도 제게 아무 부탁이나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부탁이든지 그대로 행할 것을 약속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신충일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한테는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겁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해야 서로에게 공평한 것 같아서입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 곧 정자밑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녀가 이여백을 스쳐지나려는 순간 이여백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그녀는 잠깐 머리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고,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길에는 의혹의 빛이 짙게 깔렸다.

 

 "네가 어찌…괜찮겠느냐."

 "걱정 마십시오.형님…"

 "화법이다. 신충일이 화법에 조예가 깊은 듯 싶은데…"

 "절 믿어주십시오."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그는 잠깐 침묵하다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가 다시 신충일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이성량은 머리를 돌려 좌우에 분부를 했다.

 

 "화필을 가져오너라."

 "아버님…"

 

 서은이 머리를 들어 이성량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다른 붓은 필요 없사옵고 낭호(이리의 털로 된 붓)만 가져오라고 하시옵소서."

 

 이성량은 머리를 끄덕인 후 하인들을 돌아보았다.

 

 "말을 못들었느냐. 곧 낭호를 갖추거라."

 

 하인들이 지필묵을 갖추는 사이, 신충일과 마주선 서은은 조용히 생각을 더듬었다. 유난히 죽화를 잘 그리기로 유명한 신충일, 화법에서 그에게 지지 않을 방법은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낭호 한가지로 묵죽을 그리는 방법이었다.그녀는 지금 눈앞의 사람들에겐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 독특한 화법을 대중앞에 선보일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신충일이 그녀를 깊이 주시하자 그녀는 그에게 머리를 숙여보였다.

 

 "화법에 능한 신공자와의 겨룸은 계란에 바위를 부딪치는 격이오나, 저 또한 화법에 다소 흥취가 있어 이참에 가르침을 청하고자 감히 응했사오니 신공자께선 웃지 말아주십시오."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다만…임공자께서 낭호를 가져오라 하셨으니 혹시 묵죽(墨竹)을 비기고자 함입니까?"

 

 신충일의 질문은 역시 전문가 다웠고 그녀는 의연한 태도로 그의 말에 대답했다.

 

 "네, 신공자께서 화법에 능하다 들었사오니 이참에 감히 본받고자 합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먼저 그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신충일의 눈에서 문득 한가닥 흥미로운 빛이 스쳐지나갔고, 그녀는 조용히 붓을 들었다. 그녀가 낭호에 먹을 듬뿍 묻혀 화지에 대려고 하자, 신충일은 뭔가를 생각해낸 듯 그녀에게 한마디 내뱉었다.

 

 "묵죽도라면…그에 대응되는 글도 같이 써주십시오. 서법과 화법을 같이 구경코자 합니다."

 

 그녀는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화지에 붓을 대었다. 검은 먹물이 화지에 확 퍼지고 있었고, 이어지는 그녀의 현란한 붓놀림에 좌중은 일제히 탄식을 뿜어냈다. 용트림을 하는 듯, 뱀이 도사리는 듯한 붓놀림이 사람들의 시야를 흐릿하게 하고 있었고, 잠시후 그녀가 붓을 멈추자 완연한 죽화가 화지에 고스란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붓을 내려놓고 신충일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감히 노반의 면전에서 도끼를 휘둘러서 죄송합니다."

 

 신충일은 아연한 표정으로 그녀의 그림을 집어들었다.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던 신충일은 문득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한참동안 주시했다. 그녀는 조용히 그 시선을 마주했고, 잠시후 신충일은 약간 격앙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이 대나무밑 바위는 어떻게 그렸는지 임공자께서 알려주실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붓을 든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보시다싶이 낭호 뒷부분으로 찍은것입니다. 붓끝으로는 부드러운 느낌밖에 줄수 없어, 바위의 견고함이 표현되지 않습니다."

 "역시…"

 

 신충일은 놀랍다는 듯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래위로 그림을 뜯어보다가 문득 뭔가를 발견한 듯 다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경외심보다는 경악에 가까웠다. 그는 그런 눈으로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깊숙히 머리를 떨구었다.

 

 "제가 졌습니다. 이 경합,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좌중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성량의 목소리가 정자위에서 들려왔다.

 

 "신공자는 겸양치 말고 한번 재주를 빛내도록 하시오."

 "아닙니다. 총병님…"

 

 신충일은 참괴한 표정으로 정자위를 항해 머리를 숙였다.

 

 "부디 오늘밤 제 무례함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소인이 졌습니다."

 "신공자는 재간을 펴보지도 않고 어찌 진 것이라고 단언하시오."

 

 이성량의 의문은 여럿의 의문이기도 했다. 신충일은 무거운 표정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임공자의 화법은 그야말로 신들린 경지입니다. 소인 지금까지 서법에 화법을 곁들인 화공은 단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임공자께선 오늘 제게 산너머 산이 있고 재주위에 재주가 있다는 도리를 화법으로 가르쳤습니다. 오늘 이런 눈구경을 했으니 소인 더이상 원이 없습니다."

 "서법에 화법을 곁들이다니? 그게 어떤 것인지..."

 

 이성량의 물음에 신충일은 서은의 그림을 펼쳤다. 거기에는 한수의 시가 같이 적혀있었다.

 

 "咬定青山不放松, (청산을 우르러 마음을 굳히고)

 立根原在破岩中,(부서진 바위에 뿌리를 내린다)

 千磨万击仍坚劲,(천만번의 시련도 두렵지 않다)

 任你东西南北风。(동서남북 바람이 제 어이하리)

 

 신충일이 설명했다.

 

 “행해(行楷)에 전예(篆隸)를 섞은 후 그 사이에 화법을 넣었습니다. 그림속에 시를 써서 서법을 보이다니 이건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신기하기 그지없는 화법입니다."

 

 다들 크게 탄복을 했다. 하지만 서은은 신충일이 자신의 그림을 알아본다는 사실보다 그가 이토록 명의 시를 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그녀는 정중한 태도로 신충일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옛성현의 그림과 서법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서 독창적이지 못합니다. 경합의 기준이 옛시를 제한하지 않았기에 감히 옮겨드렸으니 그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신충일은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옛사람을 본땄다 하더라도 이런 화법이라면…저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합니다. 그게 맞는 것입니다."

 

 이성량은 정자위에서 껄껄 웃었다. 그는 수염을 내리쓸면서 호탕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자리는 단지 회포를 풀고 즐거움을 나누려 함이라. 애초부터 무슨 경합이 있었겠는가. 서안의 재주로 신공자의 흥을 돋구었다면 이 또한 오늘의 다행인가 하오."

 

 이성량이 손을 들자 풍악이 다시 울려퍼지기 시작했고, 연회석의 분위기는 한결 무르익어 고조에로 치달았다. 흥성거리는 가운데 그녀의 얼굴을 따갑게 주시하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까부터 자신을 응시하는 이여백을 향해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그녀의 청순한 얼굴은 달빛아래 수려하게 빛나고 있었고, 이여백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들고있던 술잔의 술을 단숨에 들이켜버렸다.

 

 ……

 

 서은이 아주 어렸을 때, 아니 정확히 정체모를 그 스님이 왔다 간 후로부터 아버지는 무예뿐만이 아닌 금, 기, 시, 서, 화를 모조리 익히고 연습하도록 그녀에게 가르쳤고 특히는 시, 서, 화에 능통한 중국 청나라 양주팔괴 정판교(鄭板橋)의 서법과 그림을 능숙하게 익히라고 그녀에게 요구를 했었다.

 

 그녀가 오늘 선보인 것이 바로, 그녀가 와있는 만력 년간으로부터 백여년후 청나라가 되었을 때 난죽도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정판교의 죽석도(竹石圖)를 임모한 것이였다.

 

 정판교의 시는 다른 그림과는 달리 그림속의 여백에 씌여져있으나 그 교묘함이 전체 그림의 입체감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아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냈으며, 어릴때부터 딸에게 정판교의 그런 화법을 숙지하도록 강요한 아버지는 그녀에게 오늘의 이 날이 있을 거라고 미리 짐작을 했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아버지는 애초에 그 스님에게서 딸의 훗날 사고에 관한 예언을 들었을지도 몰랐다. 바로 그런 이유로 아버지는 한쪽으로는 그 스님의 말을 따르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그녀가 연기학과를 선택한 것을 그토록 반대한 것이 아니였을까.

 

 술자리를 거의 파할 때까지 그녀는 이런 생각으로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밤이슬이 차거워지자 이성량은 먼저 자리를 비웠고, 신충일은 이여백을 돌아보면서 슬쩍 한마디 건넸다.

 

 "잠깐 자리를 이동해서 한잔 더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녀는 상념에서 깨어나 풋 하고 웃어버렸다. 고대의 술자리에도 2차가 있는가. 신충일은 그녀의 웃음을 다른 의미로 오해한 듯 했다. 그녀가 미처 웃음을 거두기전에 신충일은 그녀를 돌아보면서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술을 좋아한다고 웃지 말아주십시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급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둘을 향해 머리를 숙여보였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할 얘기가 있으니 아직은 들어가지 말아."

 

 이여백이 그녀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신충일도 그녀가 먼저 들어가는 건 말도 안된다는 듯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안됩니다. 저는 둘째도련님뿐만아니라 임공자도 저희와 자리를 같이하길 원합니다. 가긴 어딜 간다고 그럽니까."

 "그건…"

 

 그녀는 난감했다. 젊은 남자들이 따로 자리를 이동해 술을 더 마신다면 어디로 갈 것인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아무리 남장을 하고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았다 해도 이렇게 남자들과 늦은 밤시간까지 자리를 같이한다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신충일은 그녀의 침묵을 또 한번 오해한 듯 했다.

 

 "조선의 사신들이 요동에 오면 필히 들리는 곳이 한군데 있습니다. 외람된줄 아오나 오늘 특별히 두분께 그곳으로 같이 동행하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둘째도련님께 아직 부탁말도 꺼내지 못했는데 임공자께서 이렇듯 저어하시면 어찌 대국의 사신접대라 하겠습니까."

 

 툭하면 대국의 사신접대를 운운하는 신충일이 살짝 귀찮아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금세 표정관리를 하고 덤덤히 신충일을 바라보았다.

 

 "사신들이 필히 들리는…곳이라니요?"

 "신공자께선…봉선각(凤仙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여백의 말에 신충일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는 또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봉선각이라면 언젠가 령이한테서 얼핏 들은적 있는, 광녕에 있는 요동 최고의 기방이 아닌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신충일은 얼굴에 은근한 미소를 떠올리고 말했다.

 

 "봉선의 높은 지조와 이름이 조선에까지 퍼졌는데 제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칠수 있겠습니까. 이참에 두분께 같이 동행하기를 바라는바입니다."

 "송구하오나…봉선각이라면…"

 

 이여백이 얼굴빛을 흐리자 신충일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도련님께선 왜 또 이러십니까. 총병부 둘째도련님께서 봉선각을 가보지 못했다면 천하에 그 누가 믿겠습니까. 하물며 봉선각은 사신접대에 빼놓을수 없는 절차가 아닙니까."

 "평일엔 아버님께서 사신단을 접대하셨습니다."

 

 이여백이 무가내한 듯 대답했지만 신충일은 절대 물러설수 없다는 태도였다.

 

 "제가 오늘 몇번이나 경합에서 졌는데 도련님께서 이정도 요구도 들어주지 못하십니까."

 

 서은은 이여백의 소매를 가만히 잡아당겼다.

 

 "형님…봉선각이 어떤 곳인지는 저도 대충 들어서 아니 신공자께서 이토록 원하신다면 뫼시고 한번 가시지요. 이참에 저도 구경 한번 해보구요."

 "너까지 왜 이러느냐."

 

 이여백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그녀는 그를 주시하면서 말했다.

 

 "저도 사내라 어디 한번 요동 최고의 기루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집니다. 어차피 가서 구경만 하는 건 괜찮지 않겠습니까."

 

 이여백은 못말린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가 다시 신충일을 돌아보았다.

 

 "가보는 건 어렵지 않지만 신공자께서 한가지를 약속해주셔야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한가지가 아니라 열가지라도 약속드릴수 있습니다."

 

 신충일의 호언장담에 이여백은 머리를 끄덕였다.

 

 "가서 봉선을 따로 보시겠다는 말씀을 마시고 그냥 대청에 잠깐 앉았다 오는 것입니다. 어차피 봉선은 그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신들에게도 알려져있을 것입니다. 신공자께서 이를 대답해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동행하지 못하겠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그리 하시지요. 어차피 봉선이 기다리는 사람은 제가 아닐터이니…"

 

 둘은 서은이 듣기에는 알쏭달쏭한 말을 주고받으며 총병부를 나서서 저자거리 한쪽에 있는 봉선각으로 향했다. 셋의 그림자가 달빛에 길게 내리비쳤고 그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이여백에게 가만히 물었다.

 

 "형님…봉선이란 누굽니까."

 

 이여백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직히 대답했다.

 

 "봉선각 제1기녀다. 광녕뿐만 아니라 요동에서도 최고 기녀로 손꼽히고 있지."

 "요동에서 최고라면 그 자색이 뛰어났겠군요."

 "최고의 기녀라면 자색보다는 그 지조를 본다. 봉선이 정한 원칙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것때문에 요동 최고의 기녀가 되었다."

 "원칙이라뇨?"

 

 서은은 머리를 갸웃했고 옆에서 신충일이 끼어들었다.

 

 "바로 언제든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야만 자신의 얼굴을 보인다고 말입니다. 다들 봉선이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싶어 하지만, 지금까지 그 누가 가도 봉선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요동에 그런 기녀자(奇女子)도 있군요."

 

 그녀가 감탄하자 신충일이 그 말을 받았다.

 

 "요동에 그런 기인이 어디 한둘입니까. 여긴 와호장룡(臥虎藏龍)한 곳이여서 언제 누구를 만날지 모를때가 많습니다."

 

 그녀는 신충일의 그 한마디가 불과 잠시후에 현실로 다가올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봉선각의 화려한 대청에는 요동의 한다하는 명문 자제들과 한량들이 빼곡히 모여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2층 누각위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들이 들어서는 것을 발견하자 잠깐 셋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사람들속에서 눈에 익숙한 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우사…"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우사는 아는척 말라는듯 찡긋 눈짓을 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이여백과 신충일을 따라 한쪽 구석에 좌정하고 앉았다. 신충일은 이런 장소가 신기한 듯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고, 사람들은 다시 누각을 향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봉선아씨 나오십니다..."

 

 누군가가 목청을 돋우자 방금까지 웅성거리던 대청은 물뿌린듯 조용해졌다. 뒤이어 가벼운 휘장소리와 더불어 검은 옷차림의 한 여인이 누각위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누각위를 보던 서은은 여인의 황홀하고 신비스러운 모습에 정신이 팔렸다.

 

 검은 옷차림의 여인은 검은색 망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두드러지는 백옥같은 살결이며 낭창한 몸매, 우아한 거동과 정교하게 반짝이는 머리위의 장신구들이 여인의 몽롱한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주고 있었다. 그런 여인의 모습에 신충일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러니 조선 사신들도 애간장이 탈수밖에…애초에 얼굴을 볼수 없게 가렸을 줄이야…"

 "원래 저렇게 가려진 모습이 더 유혹적일수 있지요."

 

 그녀가 동조하듯 신충일의 말을 받았다. 여인이 나타나자 대청에서 숨죽였던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봉선! 녹기! 봉선! 녹기!"

 "녹기가 무엇입니까."

 

 신충일의 의문에 이여백이 즉각 대답을 해주었다.

 

 "녹기는 거문고를 따로 이름하는 것입니다."

 

 서은은 머리를 들었다. 언제 준비해두었는지 누각위의 여인은 어느새 거문고를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곁에 시립하던 어린 시녀가 손을 들어보이자 사람들은 즉시 잠잠해졌다. 여인의 손이 허공중에서 가볍게 선을 긋더니 곧 맑고 낭랑한 거문고 소리가 대청에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눈을 지긋이 감고 귀를 기울였고, 곡이 채 끝나기 바쁘게 환호를 하며 박수를 보냈다. 서은은 빙그레 웃었다.

 

 "참으로 천상의 거문고 곡조입니다."

 

 신충일의 찬탄에 이여백은 잠자코 있었고, 서은은 그를 보면서 또 한번 피씩 웃었다. 이여백이 그녀를 보았다.

 

 "왜 웃느냐."

 "음률에 능한 형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초반부터 아주 버젓이 나와서 얼마나 대단한 연주를 하는가 했더니 하필이면 그 흔한 봉구황(鳳求凰,중국 전한시기 문인 사마상여가 탁문군에게 연주한 곡조)입니까…"

 "네가 봉구황도 아는구나."

 

 이여백이 중얼거리는 말에 그녀는 잠깐 미소를 지었다.

 

 "하도 흔한 곡조이기에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여인이 얼마나 기인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저정도에서 야단하는 저 사내들도 너무한 것이 아닙니까. 아직 얼굴도 보지 않았는데 저러는데 만일 얼굴이라도 보여준다면 아주 이 봉선각을 통채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신충일이 냉큼 받았다.

 

 "저는 봉구황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나 봉선의 얼굴만은 한번 보고싶습니다. 이 또한 요동을 거쳐간 사신들이 오매불망 원하던 일이 아닙니까."

 

 신충일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누각위의 여인은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봉선이 비록 기루에 적을 두었지만 그동안 지켜온 철칙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옛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마음을 통할수 있는 사람을 지음이라 하였으되 이 봉선 또한 비록 천한 몸이지만 진정한 백아절현(伯牙絶絃)을 만나 마음을 허하기로 맹세한바 있으니, 오늘 이 자리에 음률을 아는 분이 계신다면 부디 재주를 아끼지 말고 나서시어 긴긴 밤의 정취를 위로할까 하옵니다."

 

 대청은 잠잠했고 신충일은 다소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봉선이 기다리는 사람이 생각밖으로 음률을 아는 사람이군요. 제가 가져온 옥적이 혹시 빛을 발할수 있을지."

 "신공자께선 여기로 오기전 저와의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이여백이 살짝 뚱겨주자 신충일은 점직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바로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대청에서 울려퍼졌다.

 

 "내가 알기론 총병부의 둘째도련님이 음률에 정통하였다 하니 가히 봉선의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하오."

 

 서은은 머리를 돌려 소리나는쪽을 주시했다. 그리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신경 씌이던 우사가 끝내는 작정하고 이여백을 궁지로 빠뜨혀 재미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셋의 좌석으로 쏠렸고 이여백은 담담한 얼굴로 우사의 도발적인 시선을 마주했다. 삽시에 냉각된 대청의 분위기를 뚫고 봉선의 웃음섞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오늘 모처럼 귀객이 온줄 모르고 영접을 못해 송구하옵니다. 총병님은 가끔 들리시나 도련님을 뵈올수 없어 궁금했었는데 무과 장원인 도련님께서 음률까지 정통하실줄이야…놀랍고 경이로운 마음 금할수 없사오니 미천한 몸이 한번 가르침을 청할까 하옵니다."

 

 이여백은 고개를 들고 누각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조선에서 온 사신을 뫼시고 여기를 잠깐 구경코자 왔소. 봉선이 지나가던 행인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봉선각의 최고 자리가 헛된 것임을 알리는터라 부디 재고하시길 바라겠소."

 

 봉선은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낭랑한 웃음소리를 냈다.

 

 "부마자리도 마다하신 도련님이라 과연 소문 그대로 냉심냉면이십니다. 다만 소첩 또한 약간의 명성을 얻어 전부터 정한 기루의 규정이 있사오니 이미 봉선각으로 들어오신즉 이 봉선의 말에 따라야 하는 것이 원칙이옵니다. 오늘밤 일은 도련님 마음대로는 안되오리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옳소!"

 "봉선의 말을 따르시오!"

 "총병부 도련님이 아니라 금상께서 오신다 해도 기루에는 기루의 법이 따로 있는 것이요!"

 

 서은은 이여백을 대신해 손에 땀을 쥐었다. 어쩌면 오늘밤 신충일의 청을 들어주고 함께 여기로 온 자체가 무모한 일이였다.

 

 만일 봉선의 명대로 이여백이 기방에서 음률의 재주를 선보인다면, 그 자신은 물론 총병부까지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봉선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역시 운치를 모르는 고루한 선비의 성정으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우사가 원망스러웠지만, 우사는 눈앞에 벌어진 일이 흥미롭다는듯 한쪽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옥물었다.

 

 "송구하오나, 지음을 운운하고 백아절현을 추구하시는 봉선이 어찌 봉과 황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십니까."

 

 불쑥 내던진 서은의 말에 사람들은 입들을 다물었다. 우사는 눈썹을 꿈틀했고 봉선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은은 자리에서 일어난후 접선을 쫙 펴서 흔들었다.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입니다. 봉구황은 자고로 남자가 여자에게 구애할때 연주하는 곡조로써 애초에 탁문군이 사마상여의 이 곡조를 듣고 부귀영화를 버리고 그를 따라 야밤도주를 했던 것이 아닙니까."

 "..."

 "하지만 그대의 곡조는 사랑을 구걸하는 간절한 마음도, 자유를 추구하는 절박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고도 지음을 찾길 원한다면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가 땅속에서 통곡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봉선의 얼굴은 망사로 가려져서 확인할수 있지만 그녀의 꽉 틀어쥔 손을 보면 그녀가 상당히 화가 나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이여백은 고개를 들어 서은을 보았고, 우사의 눈에도 한가닥 흥미로운 빛이 스쳐지나갔다. 봉선은 심호흡을 한후 천천히 한마디 내뱉었다.

 

 "그러면 그렇게 봉구황을 잘 아는 도련님께서 어디 그 곡조를 한번 들려주시면 어떻습니까."

 "봉선의 뜻이 내 생각과 심히 같습니다만, 내가 만일 그 곡조를 지금 연주한다면, 총병부 도련님께 음률을 부탁하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겠습니까."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의 목적은. 그녀는 봉선을 바라보며 정중히 말했고, 봉선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하지요. 대신 도련님이 금방 말씀하신 구애의 간절함과 자유를 추구하는 절박한 감정이 연주에서 느껴지지 않는다면, 저 또한 생각을 달리할수도 있습니다."

 

 봉선이 손을 들자 어린 시녀가 재빨리 거문고를 서은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서은은 심호흡을 길게 하고 천천히 두 손을 들었다. 잠시후 한가닥 청정하고 투명한 거문고 가락소리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고, 그녀는 눈을 들어 봉선을 바라보면서 곡조에 따라 맑은 목소리로 가사를 읊조렸다.

 

 봉(鳳)아, 봉아, 고향에 돌아왔구나!

 너를 찾아 사해에서 찾기를 원하였지만

 이제까지 그 원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오늘밤에야 이 마루에 올라 만나게 되었구나

 아름다운 낭자가 규방에 있으나

 방은 가까워도 사람은 멀어 비통하게 하는가

 그녀와 함께 한 쌍의 원앙이 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함께 저 높은 하늘을 날 수 있을 텐데

 봉(鳳)아, 봉아, 나를 따라 머무르렴!

 부지런히 여신님을 위해 뒤를 밀어주렴

 정이 흐르고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나니

 깊은 밤 서로 의지하길 알아주는 이 누구이던가

 두 날개 활짝 펴고 하늘위로 날아오르니

 나는 더 이상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도다...

 

 거문고 연주가 끝나자 대청은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잠시후, 환호소리와 함께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서은이 거문고에서 손을 내리자 봉선은 흠칫 몸을 떨더니 그만 휘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대청의 박수갈채는 오래도록 끊기지 않았고, 서은은 시선을 내리고 누구도 듣지 못하게 나직히 중얼거렸다.

 

 "이 모든 걸 미리 알고 준비하게 해주셔서…고마워요, 아버지."

 

 사람들은 여전히 떠들었다. 그녀를 향한 찬사와 갈채가 대청을 가득 메웠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위 사람들과 일일히 겸양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느라고 한참전부터 짙게 가라앉은 한 사람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꽃처럼 청초한 그녀의 얼굴을 이윽토록 보다가, 이여백은 고개를 젖혀 수중의 잔을 깡그리 비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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