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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서 만난 그대
작가 : 판도라
작품등록일 : 201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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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
작성일 : 19-10-14     조회 : 41     추천 : 0     분량 : 15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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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칠흙같이 어두운 밤.

 

 황궁 깊숙한 어느 처소앞에 야행복차림의 두 그림자가 언뜰 움직였다. 해시를 지난 자금성은 한낮의 위풍과는 달리 몇몇 처소에만 어렴풋한 등불들이 밝혀져 있어 전체적으로 어두운 장막을 촘촘히 내리드리운 듯 했다.

 

 자금성의 후궁을 꿰뚫어 지나가던 두 그림자는 문득 자녕궁(慈寧宮) 부근에 이르러 걸음을 주춤했다. 등불이 휘황한 자녕궁 마당을 가로지르자면 행색이 발각될 위험이 있어 발길을 멈춘 모양이었다.

 

 "대체 이시간까지 취침하지 않고 뭘 하시는지…"

 

 앞장선 그림자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뒤의 좀 작은 그림자가 그에게 바싹 다가섰다.

 

 "여기가 이태후마마의 처소입니까."

 

 앞장선 그림자가 힐끗 뒤를 돌아보자, 작은 그림자는 머리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궁궐이 떠난지 오래 되고 몇달 갇혀있기까지 하다니 방향을 헷갈려 그럽니다."

 

 앞장선 그림자는 작은 그림자를 이끌고 담장을 에돌아 몸을 숨겼다. 그가 복면을 반쯤 내리자 윤곽 뚜렷한 청수한 외모가 달빛아래 드러났다. 동행하던 작은 그림자도 뒤따라 복면을 내려 옥같은 얼굴을 달빛아래 완연히 드러냈다. 누가 봐도 여인이 분명한 그녀는 자녕궁 쪽을 기웃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저 불이 꺼지길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지휘사님."

 "기다리다가 사람들 눈에 띄일수 있습니다. 번을 바꾸는 틈을 타서 공주님을 뫼시고 저리로 빠져나가야 합니다."

 

 우사는 서은을 데리고 만력에게로 가는 길이었다. 아무래도 만력이 그녀의 근신을 풀어줄수 있을 거라는 그녀의 믿음 때문이었다. 우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자녕궁 앞의 긴 통로를 보았다. 서은은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엉뚱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 궁금증은 바로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혼인은 하셨습니까."

 "네?"

 

 우사는 그녀의 느닷없는 질문에 잠시 당황한 듯한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바로 얼굴색을 가다듬었다.

 

 "거의 할뻔 했지요. 하지만 집안이 그리 되다보니…"

 "정혼자는 있다는 얘기네요."

 

 그녀의 말에 우사는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지금은 정혼자라고 말할수도 없는 사람이지요."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그녀의 질문을 피하려는 듯 복면을 올려 얼굴을 감췄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자기를 뒤따르라는 손짓을 한 후 허리를 굽히고 통로를 가로질러 움직였다. 서은도 재빠르게 우사를 따라 움직였고, 둘이 통로를 거의 벗어나려는 찰나 문득 앞쪽에서 인기척소리가 들렸다. 우사는 황급히 담장에 붙어섰고 그녀도 숨을 죽이면서 그 옆에 붙어섰다.

 

 어스름한 달빛을 빌어 그녀는 앞쪽에 궁녀 두명이 뭐라 수근덕 거리는 것을 보았다. 잠시후 두 궁녀의 말소리가 바람을 타고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이걸 정귀비마마 드시는 탕약에 넣으라고? 아니…난 못하겠어."

 "감히 이태후마마 명을 거부한다면 너한테 어떤 후과가 차려지겠는지 난 생각하기조차 두려워. 그러니 이번만 내 말을 들어. 우린 같이 입궁한 동무야. 니가 위험에 처한 걸 보고만 있을순 없어."

 "그렇다고 어찌 이런 금수도 못할 짓을…"

 "기껏해야 회임을 못하게 하는 처방이야. 듣는 말에 의하면 보통 궁실에서 이미 회임해서 배속에 있는 아이 죽이는 일들도 비일비재하다는데."

 "그래도 이런 걸 잘못 썼다간 평생 회임을 못할수도 있어. 게다가 금상께서 아시는 날엔 우린…우린…"

 "걱정 마. 설사 그런 날이 온다 해도 내가 이태후마마께 잘 말씀드려 널 자녕궁으로 오게 할테니까."

 

 말을 마친 궁녀가 뭔가를 넘겨주고 자녕궁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 자리에 남은 궁녀는 맥이 풀린 듯 풍덩 주저앉아 버렸다. 우사와 서은은 잠깐 서로를 마주보다가, 그 궁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을 때에야 겨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둘의 한숨은 같은 이유때문이 아니었다.

 

 "다행이 들키지 않았군요."

 

 안도의 숨을 내쉬는 우사의 표정과는 반대로 그녀는 믿기 어렵다는 듯 도리머리를 저었다.

 

 "어쩌면 한 나라의 국모가 저런 수법을 쓴단 말입니까."

 "후궁들사이 서로 견제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금상께서는 황후 자리를 비워두시고 이미 왕귀비가 생남 했으니 자연 그 아들이 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정귀비가 새로이 총애를 입으니 태후마마께옵서 이 나라의 국본이 흔들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아주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같은 여인인데 이런 잔인한 수단은 너무한 게 아닙니까."

 "지금은 그것보다도 우선 여기를 빠져나가시는 게…"

 

 우사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서은이 움직일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달빛아래 그녀의 청정한 눈빛엔 고집스러운 기색이 어렸고, 그녀는 잠시 우사를 주시하다가 또박또박 말했다.

 

 "황후가 되어야 합니다. 정귀비는…"

 

 우사는 당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의아한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결코 죽어서 봉해진 것이 아닌, 살아서 황후가 되어야 합니다. 어마마마는 왜 기어이…서로 연모하는 사람들을 떼어놓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저는 이 일을 이리 방치해두지 않을 것입니다."

 "공주님..."

 "지금 막아야 합니다. 또 그것이 정녕 오라버니가…앞으로 태정을 하지 않게 돕는 길이구요."

 "공주님, 대체 무슨 말씀이시온지…"

 

 우사의 의혹어린 말에 그녀는 더 답하지 않고 몸을 홱 돌려 정귀비의 궁녀가 사라진쪽을 향해 재빨리 움직였다. 우사가 급히 그녀를 뒤따라왔고 그녀는 분노로 가슴이 꽉 막히는 감을 느꼈다.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명나라 역사상 최고의 미스테리-만력황제의 30년 태정의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하나 지키지 못하는 황제 자리, 그 여인을 미워하는 태후와 대신들의 압력에 끝내는 그 자리를 내어놓고 정귀비와 후궁 깊숙히 숨어 살았던 만력황제의 태정...강산을 버리고 미인을 취하는 길을 택한, 자신의 30년을 그 여인에게 바친 최고의 정인이자 혼군…그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결코 후세사람들이 질책했던 정귀비가 아니라, 만력의 생모--황권의 충실한 수호자 이태후였던 것이다.

 

 "결국은 태후자리를 보존하려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자식들의 행복은 안중에도 없는 거야."

 

 그녀는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얼마 안가서 앞서 가던 궁녀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바싹 따라가려는데 뒤따라온 우사가 그녀의 소매자락을 잡아당겼다.

 

 "어떻게 막으시렵니까."

 "저걸 정귀비 탕약에 못넣게 해야지요."

 

 그녀의 말에 우사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방법은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녀는 말문이 막혔고 우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정녕 그리 하시겠다면 이 일은 소직에게 맡기십시오. 저 궁녀의 얼굴을 기억해 두었으니 틈을 타서 약을 바꿔놓겠습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우사의 눈을 보았다.

 

 "정말입니까?"

 "네."

 "궁녀는 추궁하지 말아주십시오. 착한 아이 같으니."

 "알겠습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말뜻을 알아챈 듯 우사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번만은 믿으셔도 됩니다."

 "미안...합니다."

 

 그녀 역시 시선을 내렸다. 생각해보니 오늘밤 그의 호위가 없었다면 처소를 벗어나는 일조차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청탁을 했는데 그가 청탁을 들어줄줄은 생각지 못했고, 또 무난히 빠져나오게 되어 마음속으로는 그에게 감격하던 차였다. 그녀가 뭐라 더 말하려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안하셔도 됩니다."

 "뭘요?"

 "미안하다, 고맙다 그런 인사 말입니다."

 "..."

 "비밀을 공유한 사이에 그런 인사는 필요없지 않겠습니까."

 

 그가 일전에 자신이 한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고 있었다. 그녀가 떨떠름해 있자 우사는 피씩 웃었다. 그리고 그의 웃음을 보고 그녀도 눈꼬리를 휘었다. 바로 그 순간 우사가 웃음을 거두었다.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눈빛이 일순 당황한 빛을 띄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햐안 달빛아래 표연히 서있는 그림자는 분명 황색 옷차림의 젊고 준수한 얼굴이었다. 그 황색 옷이 용포라는 것을 일아본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우사가 급히 무릎을 꿇었고, 그녀는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만력의 냉정한 눈빛은 의혹을 담은 채 그녀의 복면에 한참 머물렀다. 그녀가 복면을 아래로 내리자, 만력은 어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후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밤 달빛이…유난히 밝다는 생각이 안드십니까."

 

 만력이 다시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우사의 앞을 막아나섰다.

 

 "지휘사님을 뭐라 하지 마십시오. 제가 협박하여..."

 "누구의 협박이 먹히는 사람이더냐."

 

 만력의 냉랭한 말에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쉰 후 만력을 향해 살짝 만복의 예를 올렸다.

 

 "소매 오라버니께 문안 드리옵니다. 경망되게 굴어 죄송하오나 꼭 한번 뵙고 긴한 말씀 드리고 싶어서..."

 "몸은…회복되었느냐."

 

 만력의 말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시름 놓으라는 듯 웃어보인 후 주먹을 쥐고 자기 팔을 들어보였다.

 

 "보시다싶이 아주 튼튼합니다. 야밤에 이렇게 산책까지 다닐 정도로요."

 "근신령이 내려졌다 하지 않았느냐."

 "아…근신령…이 있었지요. 하지만 뭐, 지휘사님 협박하여 이런 산책정도는 할수 있는 거 아닙니까."

 "날 찾아왔다면서 왜 하필 정귀비의 처소 근처더냐. 그것도 야행복 차림으로. 너답지 않구나."

 

 그녀는 만력의 말에서 한가닥 의심을 가려들었다. 순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름모를 허탈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여동생을 관심해주는 황제인가 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명교 교주임을 상징하는 옥패를 내주는 그 순간부터, 만력은 그녀를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포섭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만력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다소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하오면 구경 어떤 모습이 저 다운겁니까, 오라버니."

 "…"

 "그 사람때문에 비상을 삼키고, 황궁을 떠났던 저입니다. 그 사람때문에 남장을 하고 요동전장을 누볐던 저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사람때문에 야행복을 입고 폐하를 알현하러 온 저입니다."

 "서안아."

 "저는 줄곧 이런 사람이었는데, 어찌 저답지 않다고 하십니까. 허면 오라버니께서 생각하는 저는 대체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그래…그럴만도 하겠지."

 

 만력의 어조가 살짝 누그러들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쉰후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황실의 숨막히는 법규 때문에 제 정신인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느냐. 너는 이리 탈출이라도 할수 있지만, 나는 그마저도 할수 없구나."

 

 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만력이 지금 정귀비와 이태후의 갈등속에서 번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나라의 황제도 필경은 친 동생 앞에서였던지, 어미와 여자 사이에서 번민하는 자신의 치부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서도 힘이 빠졌다.

 

 "오라버니는 오라버니의 일에만 전념하시옵소서. 그리고 귀비마마의 안전도 신경 써주십시오. 오라버니가 여기 계시니 저도 한시름 놓겠습니다."

 "잠깐."

 

 만력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중단했다.

 

 "안전이라니...누가…정귀비를 해치려고 한다는 거냐?"

 "자초지종은 지휘사님께 들으시옵소서. 물론 관련된 사람을 벌하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같이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무릎을 꿇고있던 우사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우선 소직은 급히 처리할 일이 있사오니, 그 일을 마치고 돌아와 전후시말을 아뢰게 해주시옵소서."

 

 만력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사는 서은에게 머리를 숙여보인후 물러나갔다. 서은은 그가 앞서간 궁녀의 뒤를 쫓아가려 한다는 것을 알고 만력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는, 본래는 근신령을 풀어줍시사 오라버니를 찾아왔지만, 만일 오라버니께서 방법이 없다면 이길로 요동으로 갈까 합니다. 부디 용체 보중하시옵소서."

 

 그녀는 말을 마치고 만복의 예를 하다가 뭔가 생각나서 머리를 들었다. 그동안 만력을 만나면 줄곧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오늘이 지나면 더이상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만력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드디어 결심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이젠 마감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라버니."

 "뭘 말이냐."

 

 만력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고 그녀는 정색하고 말했다.

 

 "명교 말입니다."

 

 만력의 얼굴이 순간 작게 균열이 일었다.

 

 "서안아."

 "어떻게 알았는가 하는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제게 옥패를 주셨을 때부터…오라버니의 이 일은 제게 들킬수 있다는 것도 감안하신 것이 아닙니까."

 "..."

 "장무기, 태조폐하의 뒤를 이어, 오라버니께서 바로 명교 제 36대 교주라는 것을요."

 

 만력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처음엔 모든것이 헷갈리고 이해가 안되었지만…지난 석달 저도 차분하게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를 말씀 드린다면, 태조폐하께서 해체시킨 명교를 다시 부흥시킨 이유가, 단지 오라버니의 친정(亲政)을 위해서라면…장재상의 죽음으로 명교는 강호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녀의 말에 만력의 눈빛은 또 한번 의혹에 휩싸였다.

 

 "네가…"

 "네, 저답지 않게 조정과 강호 일에 관심을 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제 말을 참고하시어 명교를 해체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강호엔 새로운 피바람이 불어오게 될 것이며, 그것이 오라버니께서 애써 갖춘 조정의 세력 구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오라버니께선, 이젠 명교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막을 능력을 충분히 갖고 계십니다."

 "…"

 "방울을 매단 사람이, 방울을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력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차츰 냉정을 회복한 그의 얼굴에는 작게 냉소가 스쳐지나갔다.

 

 "이여백을 위해서냐."

 "오라버니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이젠 이쯤에서 끝내십시오. 그 사람에 대한 추적도, 명교에 대한 집착도. 굳이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지금 오라버니께서 당면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녀는 만력을 깊이 주시한 후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만력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채 더이상 움직일줄 몰랐다. 만력의 목소리는 무심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그 조용한 어조에는 그만의 단단한 집념이 느껴져서 그녀는 몸을 떨었다. 구름이 달을 가려 주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여백이 상경했다."

 

 ......

 

 처소로 돌아온 서은을 보고 령이가 눈을 화등잔 만하게 떴다. 서은은 아무말 없이 야행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령이는 한참 멍하니 서있다가 그녀에게 다가와 벗어둔 야행복을 챙겨들었다.

 

 "어찌…돌아오셨습니까."

 

 서은은 몸을 돌려 령이의 부어오른 눈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내가 간다고 울고불고 하지 않았더냐. 왜…돌아온 것이 기쁘지 않느냐."

 "행색을 들키셨습니까."

 

 령이의 간단한 한마디에 서은은 어깨에서 힘을 뺀 후 한숨을 내쉬면서 침상에 주저앉았다. 령이는 아무 내색도 내지 않고 몸을 돌려 세수물을 뜨러 나갔다. 하지만 얼마 안지나 물을 떠온 그녀의 입꼬리는 알릴락말락 올라가 있었다. 령이는 서은의 소매를 올려준 후 그녀가 세수를 마치는 것을 시중 들면서도 줄곧 그렇게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은은 머리를 들었다.

 

 "웃어도 돼."

 "송구하옵니다."

 

 령이가 고개를 숙이자 서은은 두번째로 한숨을 내쉬었다.

 

 "들킨 것보단,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네?"

 "그 사람이 상경했고, 오라버니께서 그 사람을 내일 입궐케 했으니까."

 

 그녀의 담담한 말에 령이는 입을 크게 벌렸다.

 

 "네에? 그…그러니까…폐하께서 이도련님을 입궐케 하셨단 말씀입니까."

 

 서은이 작게 머리를 끄덕여보이자, 령이는 한참 멍해있다가 그녀에게 만복을 했다.

 

 "공주님…감축 드리옵니다. 이젠 드디어 해볕을 보게 되었습니다."

 

 령이의 얼굴에 넘쳤던 미소는 서은의 무덤덤한 표정에 바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서은의 눈치를 살피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찌 공주님께선…기쁜 기색이 없으시옵니까."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니요."

 "아무런 소식도 없이 갑자기 상경한 것도 그렇고, 또 오라버니께서 그 사람을 입궐하라 하는 것도…"

 "폐하께 직접 물어보시지 그러셨습니까."

 

 령이의 말에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정귀비만 아니었다면 더 물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오라버니께서 내일 말씀해주신다고 했어."

 

 령이는 정귀비라는 말에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서은의 머리속에는 아까 만력과 자신의 대화를 중단한, 절세의 미모를 가진 정귀비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이태후가 왜 그녀를 경계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미인이었다. 그 미인이 사뿐히 나타나자, 달도 부끄러운듯 구름뒤로 얼굴을 감춰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찌 이렇듯 오래 서계시옵니까. 궁중의 이목이 두렵사옵니다. 두분 다 제 방으로 드시지요."

 

 미인이 방싯 입술을 열자 만력의 엄정한 얼굴은 씻은 듯 바뀌어버렸다.

 

 "바람이 찬데 왜 밖으로 나오는 것이요. 어서 처소로 들어가시오."

 "폐하께옵선 신첩의 몸만 걱정하시옵고, 정작 신첩이 폐하의 용체를 걱정하는 마음은 헤아려 주시지 않으시옵니다."

 

 미인의 목소리는 가벼운 봄바람처럼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터치하는 매력이 차넘쳤다. 그녀를 바라보는 만력의 시선이 금세 부드러워 졌고, 서은 역시 미인의 사람 녹이는 듯한 눈웃음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미인이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자, 그녀도 예의상 담담한 미소로 미인을 마주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귀비마마."

 "신첩을…아시옵니까."

 

 정귀비가 예쁘게 눈을 휘자, 서은은 살짝 고개를 기웃했다.

 

 "제가…몰라야 하는 것입니까. 설사 저희가 초면이라 해도, 이런 미모가 황궁에 어찌 둘이 있겠습니까."

 "폐하…이건 모두 폐하 탓이옵니다."

 

 미인이 고개를 돌려 애교섞인 목소리로 만력을 불렀다.

 

 "어찌 이리도 고우신 공주님을 그동안 한번도 뵙게 안하셨습니까. 공주님은 신첩을 아시나 신첩이 공주님을 몰라본다니 이 얼마나 황공한 일입니까. 폐하께서 이리 신첩의 죄를 더해주시니 신첩 망극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나이다."

 "그래그래…다 짐의 잘못이오."

 

 만력은 웃음섞인 어조로 정귀비의 말을 받았다.

 

 "그동안 공주가 몸이 허약하고 귀비 또한 어마마마의 명으로 처소밖은 일보도 나가지 못한 것이 아니오. 지금 공주도 건강을 회복했고 귀비도 근신이 풀렸으니 이렇게 알고 지내는 것도 너무 늦은 건 아니잖소. 공주도 귀비를 탓하지 않을 것이오."

 

 만력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정귀비는 서은을 향해 정중히 만복의 예를 올렸다.

 

 "신첩 정씨 삼가 장공주마마님을 뵙고 문안 드리옵니다. 옥체 무강하시다 하오니 신첩은 시름을 덜었사옵니다."

 

 정귀비의 일거수 일투족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서은은 그녀가 왜 이태후의 환심을 사지 못하는지 안타까웠다.

 

 "아닙니다. 귀비마마께서 이런 예는 부적절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응당 서안이 귀비마마께 인사를 올려야 하는 것이지요. 다만 예복을 갖추지 못하고 오늘 이런 모습으로 뵙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서은의 깍듯한 대답에 정귀비는 머리를 쳐들었다.

 

 "장공주마마…마마께선 폐하의 친여동생입니다. 후궁들 감히 그 누가 장공주마마께 인사를 받겠습니까."

 "그래도 품계를 따지면 귀비마마가 더 높으신데..."

 

 둘이 서로 겸양하자 만력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되었다. 서안은 차림이 심히 걱정스러우니 눈에 띄이지 않게 처소로 들어가거라. 짐이 사람을 보내어 내일 이여백을 입궐케 하였노라. 자세한 것은 내일 알려주마."

 

 ......

 

 령이가 잠자리 시중을 마치고 휘장을 내리고 물러간 뒤에도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태후, 정귀비, 그리고 명교 교주인 만력, 지휘사 우사와 궁녀 령이까지…하지만 이 모든 사람들을 제치고 아까부터 머리속에 가장 또렷이 떠오르는 한사람때문에 그녀는 몸을 뒤척이며 원망섞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들만 떠올리고 있는데...왜 상경을 하고도 날 찾지 않는 거지? 그동안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데…그정도로 내가 미웠었나...내 설명도 듣고싶지 않을 정도로?...나쁜 사람…"

 

 날이 희붐히 밝을 때까지 그에 대한 생각은 이렇게 줄곧 그녀의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밤을 꼬박 지새우고 겨우 쪽잠이 들었는데 령이가 들어와서 만력이 왔다고 연통했다. 그녀는 멍한 기색으로 일어나 령이가 시키주는대로 간단히 단장을 마치고 만력을 맞이했다.

 

 만력은 개운한 얼굴로 그녀의 처소에 들어섰다. 아침햇살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던 만력이 피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여백이 입궐한다는 소리에 잠을 설친 듯 하구나."

 

 서은은 령이에게 밖으로 물러가 있게 한 후, 손수 차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그리고 만력이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는 것을 본 다음, 차분히 만력의 말에 응했다.

 

 "그 사람의 입궐소식에 잠을 설친 것이 아닙니다."

 

 만력이 시선을 들자, 그녀는 웃는듯마는듯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이번 입궐이, 자칫 목숨을 잃을수도 있기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뿐입니다."

 

 만력은 찻잔을 내려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짐이 네겐…고작 그런 오라비였더냐."

 

 만력이 조용히 시선을 마주쳐왔다. 그런 만력의 표정이 예사롭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이여백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 밤새워 정리하고 준비한 말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만력을 주시했다.

 

 "어찌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

 "제가 남장을 하고 망강루 주막으로 갔을 때부터, 그 사람의 주위에는 항상 그 사람을 노리는 자객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 사람이 원수가 많아서 찾아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

 "하지만 이런 일이 거듭할수록 저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때 찾아왔던 자객들은, 후에 그 사람의 명교 신분이 확인되고 우사, 즉 지휘사님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와는 왠지 다른 조직인 감이 들었으니까요."

 "다른 조직...무엇이 다르냐."

 "그러니까…독침…제가 알기론 지휘사님은 독침을 한번도 쓰지 않으셨습니다."

 

 만력의 시선이 주춤하는게 느껴졌다. 자신의 추측이 사실로 확인되자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 독침은…아타이가 반란을 일으킨 고륵성채 안에서 심지어 누르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목숨까지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언젠가 철령 수림속에서 독침을 맞은적 있구요. 지휘사님이 구해주시고 독기를 제거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사람도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독침은 지휘사님이 쓴 것이라 의심하더군요. 하지만 전 그 독침을 쓴 사람이 지휘사님이나 그 수하라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

 "만일 누르하치가 독침을 썼다면, 누르하치는 일찍 명교와 인연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헤투알라성을 한번도 침입하지 않았을 정도로 명교는 누르하치를 멀리 했었고, 누르하치 역시 명교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시선은 아니었습니다. 지휘사님 또한 독침을 썼더라면, 그렇게 여러번 저희와 조우해서 치열하게 싸우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말이죠."

 "…"

 "여기서 잠깐, 누르하치의 아버지가 독침에 맞아 세상을 뜰 때, 제가 목격한바로는…타쿠시는 자기들의 원수는 명이라고 지목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타쿠시는 어쩌면 명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명이라는 한글자만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타쿠시도 일찍부터 명교의 존재를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

 "하긴 오라버니께서 명교 교주이시니, 누르하치의 원수 또한 명, 혹은 명교가 맞고, 그의 아버지 또한 원수를 정확하게 지목한 셈이지요."

 

 만력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자객이 독침을 쓴적이 몇번 있는데, 처음 한번은 공교롭게도 제가 맞았습니다. 다행이 그 사람이 빠른 처치를 해주어 목숨을 잃진 않았지요. 두번째 저희가 고륵성으로 갈 때 독침으로 말이 죽었습니다. 그때 보내진 자객은 아마도 고륵성안의 타쿠시, 교행가를 제거하려고 가던 길에 우리 길을 막으려고 했었겠죠. 세번째 독침에서 타쿠시와 교행가가 목숨을 잃었고, 네번째 수림에서 누르하치와 조우했을 때 그 사람도 독침에 목숨을 잃을뻔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헤투알라성에 침입해서 누르하치의 넷째푸진 맹고까지 해치려 했었지요."

 "..."

 "이건 모두 오라버니께서 보내신 자객들이 아닙니까 ."

 

 만력은 고개를 들고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하느냐."

 "오라버니께서 인정하시지 않으신다면 저 또한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지금의 저에겐 다만 심증만 있을뿐입니다. 다만 그 사람을 해하려 자객을 보낸 것은 오라버니 빼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

 "한때는 명교 좌사였던 그 사람이 명교를 탈퇴하자 오라버니께선 명교의 많은 비밀을 알고있는 그 사람을 죽이고 싶었을테지요. 그러다 그 사람이 무과 장원이 되어, 오라버니의 용안을 뵙고 알아보게 되자 드디어 그 살의가 구체적인 계획으로 되었을 테구요. 공주를 위한 부마 간택이, 바로 그 올가미가 아니었던지요."

 "이여백은 거절을 했다."

 "그건 오라버니께서도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거절을 하면, 감히 어명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죽을 죄를 씌우기 쉬울테니까요. 다만 오라버니께서 미처 헤아리지 못하신 건, 서안이 그 사람을 마음에 두고,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는 청원까지 오라버니께 드린 것입니다."

 "..."

 "여기서 오라버니께서 미처 아시지 못한 또 한가지는…보화전에서 그 사람을 대면할 때, 서안은 이미 그 사람을 마음에 담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중단했다. 서안공주에 대한 그녀의 3인칭은 만력과의 대화중에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듯 하여 크게 위화감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아닌 원래의 서안공주가 보화전에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녀는 문득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전생…그녀이기도 하고 그녀가 아니기도 한 비운의 여인에게, 그녀는 지금 이름못할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만력은 그런 그녀에게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한낱 출사도 하지 않은 백신이 어명을 받들지 않는다는 것은, 짐을 무시하는 일이고 황실을 모독하는 일이다. 그가 공주와의 혼사를 거절한다는 것은, 진정 짐의 사람이 되길 원치 않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오라버니께선 이해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서은은 만력을 바라보면서 쓸쓸히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는…세상 사람들은 부모와 가장들의 뜻에 매이지 않고 권세와 지위를 벗어난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할 것이며…오라버니께서 이토록 연연해하시는 군주전제정치가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그게…무슨 말이냐?"

 "지금은 모르셔도 됩니다. 다만…"

 

 그녀는 만력을 주시하다가 그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이젠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명교를 파하시고, 친정(亲政)이 아닌 선정(善政)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감히 일개 아녀자가 정사에 참여할소냐."

 

 만력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은은 고개를 들어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정사를 운운해서는 안된다는 법이 따로 있습니까. 멀리로는 측천황제, 가까이로는 어마마마까지 말입니다…사실 오라버니께서 친정을 하시기전엔 어마마마께서 수렴청정을 하신 걸로 저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

 "이참에 여자가 정치에 어둡지 않은 예를 더 말씀 드릴까요. 선황께서 붕어하신 후 오라버니께서 즉위하실 때엔 겨우 열살이였지요. 오라버니께선 장재상에게 모든 정사를 일임했지만, 그분이 유일하게 조언을 구한 분이 바로 어마마마란 걸 오라버니는 정녕 모르시옵니까."

 "장재상…"

 

 만력이 신음하듯 말을 내뱉자 서은은 그를 바라보았다.

 

 "내친김에 장재상님에 대해서도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라버니께선 일조편법같은 세금 합병의 업적은 있었지만, 황실의 인척이나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처벌한 장재상의 가혹한 정치를 못마땅해 하셨고, 명나라 건국이후로 줄곧 이어온 성리학적 사상과는 달리 양명학의 길을 걷는 그를 언녕부터 제거하고 싶었을테지요."

 "..."

 "어쩌면 어마마마와 자주 접촉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오라버니께서 죽이고 싶은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라버니께서 부활시킨 명교는, 장재상을 없애기 위해 지금껏 그 많은 시간을 버텨온 것이 아닙니까. 하여 장재상의 죽음으로 명교는 이젠 끝이 나야 한다고 일전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너의 생각은 여자의 짧은 식견에 불과하다."

 

 만력은 고개를 쳐들고 작게 냉소했다. 그의 차거운 얼굴에는 이름못할 서글픈 기색이 스쳤다.

 

 "후세사람들은 장거정이 일조편법을 실행하여 백성들의 세금이 줄고 민생이 안정되었다고 할테지. 허나 그가 관리들을 처벌하고 관리들에게 세금을 부담시키면, 그 관리들은 또 다른 방법을 대어 그 세금들을 백성들에게서 짜내게 되어있다. 장거정의 정치가 결과적으론 백성들에게 더 가혹한 세금징수로 변해버린 것을."

 "..."

 "그리고 그자신 또한 부화사치로 관리들에게 탄핵을 받아, 종국에는 가산 청산의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더냐. 내가 명교를 해체했더라면, 장재상같은 그 많은 탐관오리들은 누가 제거할 것이냐."

 "장재상이 부화사치라니요…"

 "세간에선 다들 그가 청렴하다고 믿고있으나, 그가 척계광의 군사로 자택 호위를 하고 사후에 그의 이름으로 된 땅문서가 얼마나 많았던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

 "어마마마와의 일은 단지 소문 뿐이다. 세상이 뭐라 해도 짐이 덮으면 그만일터. 하지만 그가 짐의 친정에 걸림돌이 된 죄는 결코 사할수 없었다. 짐이 그가 남긴 혼암한 정치들을 바로잡느라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느냐."

 "후세에서는 보다 공정한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장재상이 남긴 업적은 결코 무시하지 못합니다."

 "후세가 무얼 안다고 그러느냐. 공정한 평가라, 업적의 기준은 그가 현존 정치와 민생에 얼마만한 피해를 주었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더냐."

 

 서은은 침묵했다. 만력의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장재상은 세상을 떴으니 이젠 오라버니의 친정에 아무 영향이 없는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왜 아직 명교를 해체하지 않는지 저는 그것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짐이 알려줄수 있다. 장거정은 죽었으나 그 잔여세력이 남아있다. 장거정에게 불만을 가졌던 황친귀족 관리들의 탄핵이 끊이지 않고 조정은 성리학과 양명학의 당파싸움이 시작되고 있다. 이 당파들을 견제하는 진정한 탕평책을 쓰려면 우선은 황친들의 말에 따라 장거정의 개혁조치를 페지하고 그의 재산을 청산하는 것이 바로 그 첫번째 일이거늘."

 "…"

 "명교를 해체시키지 않은건 바로 이런 당파의 거두들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만력은 한숨을 내쉰후 다시 말을 이었다.

 

 "태조께서 이 나라를 세울 때 명교와 백련교는 사악한 교파로 지정하고 폐지를 하셨다. 허나 짐이 그 명교를 다시 부활시켜 양파의 거두들을 노린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이것이야말로 나라의 기강이 송두리채 흔들리는 일일터. 짐이 어찌 명교 정체를 아는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할수 있겠느냐."

 "..."

 "짐의 심복이 아니면 짐의 적이 되는 것만이 그 사람들이 선택할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만력의 마지막 한마디에는 왠지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다. 서은은 올곧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의 정치를 위해서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한낱 순수한 열정을 가진 목숨을 거두지 못해 그리 애를 쓰셨군요."

 

 그녀의 비꼬는 말에 만력의 눈길이 금세 싸늘해졌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만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사람의 목숨을 거두시려거든 저도 같이 죽여주십시오. 저 역시 지금 이 순간부턴 오라버니의 적이 되기를 택하었으니."

 

 방안은 물뿌린 듯 조용했다. 그런 상태로 한참동안 긴 침묵이 지속되자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잠시후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만력이 드디어 말했다. 낮지만 의혹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넌,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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