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멀리서 자그마한 초롱불이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멍하니 서있던 서은은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앞을 바라보았다. 앞쪽에서 들려오는 령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맥이 탁 풀려 문에 기댔다. 염라대왕이 남긴 말이 줄곧 그녀의 귀전을 맴돌았다.
"천기를 누설하면, 죽는다."
“공주님! 공주님…”
령이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그녀는 앞으로 몇발자국 나섰다. 멀리 문화전 쪽에서 령이의 뒤에 총망히 따라오는 또 한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령이가 든 초롱불이 그 사람의 황색 용포를 희미하게 비춰주고 있었고, 그녀는 한숨을 내쉰후 그들을 마중해 나갔다.
“오라버니…”
“별일 없는 것이냐.”
만력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어려있었다. 그녀는 대답대신 머리를 흔들었다. 만력은 령이의 손에서 초롱을 넘겨받아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비쳐보았다.
“얼굴색이 심상치 않구나. 많이 놀란 것이냐.”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하옵니다.”
서은은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였다.
“오라버니께서 어찌…이곳으로 오셨습니까.”
“령이가 네가 없어졌다고 해서 급히 왔느니라.”
만력의 대답에 그녀는 령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옆에서 눈물이 글썽해 있던 령이가 드디어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웬 일로 이리 호들갑이냐.”
“공주님…저는 진짜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령이는 눈물범벅이 되어 그녀의 옷소매를 부여잡았다.
“어찌하여 아무런 기척도 없이 그렇게 흔적없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것입니까. 대체 어딜 가신 겁니까.”
“어딜 가다니?”
그녀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녀는 령이가 횡설수설 한다고 생각했다.
“난 줄곧 여기에 있었느니. 너야말로 옷을 가지러 간다던 애가 왜 이리 난리법석이냐.”
“제가 옷을 가지고 오니 공주님께서 보이지 않기에…저기 옷을 두고 양심전으로 폐하를 뫼시러 간 것입니다.”
령이가 가리키는 곳을 돌아본 그녀는 온몸에 찬물을 끼얹는 듯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과연 문옆의 장농위에 령이가 가져왔다는 옷가지들이 고스란히 놓여져 있었다. 그렇다면 방금전 령이가 왔을 때 자신은 문밖에서 염라대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은 것인데...그녀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괜히 놀랐구나. 잠깐 밖에 서있어서 문에 가려졌거늘, 이리 큰 사람을 찾지 못해 오라버니께 달려가다니.”
그녀의 무심한 듯한 말에 령이의 의혹어린 기색을 지었다.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만력을 향해 돌아섰다.
“저는 아무 일 없사오니 오라버니께선 과도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령이는 금의위 지휘사를 불러, 오늘밤부터 문화전을 단단히 수비하라 이르거라.”
만력은 머리를 돌려 령이에게 분부한 후, 령이가 명을 받고 간 후에야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고육계는, 성공했느냐.”
“모든 것이 오라버니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대답한 후,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하오나 아직 완전히 넘어온 것은 아닙니다. 제게 시간을 하루 더 주시옵소서.”
“시간이 없다. 네가 나를 도와준다 하지 않았느냐.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너를 통해 행하라 하지 않았더냐.”
“그랬었지요. 다만…”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만력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직 확실한 답을 드릴수 없습니다. 내일이 되어야만 소상히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그래…알았다.”
만력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멀리서 령이와 함께 다가오는 한무리 금의위 무사들을 보며 몸을 돌렸다.
“내일까지 기다리겠다. 하지만 내일까지 결과가 없다면, 이 일은 짐의 뜻대로 밀고 나갈테니 그리 알거라.”
그녀는 말없이 머리를 숙여보였다. 만력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머리속에 그날 만력과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만일 그때 만력의 제의에, 자신이 대답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
"그럴진데 짐의 동복 동생인 너는, 짐을 위해 조금이라도 희생할 생각이 없는 것이냐."
…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다스리는 방법에, 네가 할 일이 있다면 도와줄수 있겠느냐."
만력의 물음에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가 오라버니를 돕는 조건도, 오로지 그 사람의 안전이 목적일 것입니다.”
“좋다. 내 동생답지는 못하지만, 너다운 대답이다.”
만력은 크게 웃으며 그 뒷말을 이었다.
“짐 또한 이런 너를 앞에 두고 다시 이여백에게 혼사를 거론할 것이니라. 우린 이러이러해서 고육계를 쓸 것이니라..."
"..."
"연후에 네게 재주가 있어 이여백이 이번 기회에 명황실에 대한 원한을 접고 멀리 요동으로 돌아가서 더이상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면…이 역시 네선에서 할수 있는, 그동안 너를 길러준 황실에 대한 보답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오라버니께서…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만력은 쌀쌀하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는, 다스리지 못할 사람은 일찍 포기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느니.”
만력의 냉혹한 말에,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만일…그 사람이 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어찌 하오리까.”
그녀의 말에 만력은 한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너 또한 짐이 하는 일을 막지 못하리라. 포기해도 안되는 것이면, 짐에게 마지막 방법이 남아있으니.”
그녀의 눈안에 물기가 함초롬히 차올랐다.
“어찌하여 오라버니께선…그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 사람이 오라버니의 정체를 안 것이…그게 그렇게 대역무도의 죄였다면…차라리 저까지 죽여 입을 막으시는 것이…”
그녀의 뒷말은 만력의 날카로운 눈빛에 삼켜져 버렸다. 만력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피씩 쓴웃음을 지었다.
“그 아이의 죄는…짐의 정체를 알아서가 아니다.”
“그럼…공주를 거절하여 황실을 모독한 죄입니까.”
“그도 아니다.”
“그럼 대체 무엇입니까…오라버니께서 이토록 집착하는 그 사람의 죄라는 것이…”
만력이 고개를 들어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한참후 만력은 그녀에게 알쏭달쏭한 한마디를 남겼다.
“그 연유는…어마마마께서 알 것이다.”
......
“참 이상해…”
서은은 령이가 정성들여 정리한 침상에 누워서 그날 만력이 간 후 중얼거렸던 말을 한번 더 되뇌이고 있었다.
“언제는 황실의 원수라더니...지금은 또 이태후가 그 연유을 안다고...그런데 이태후가 직접 그 사람을 해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융경제가 그 사람 아버지를 탄핵했었다 해도 그것이 이태후와 무슨 상관이지...그 사람 그렇게 사리분별을 못할만큼 누구한테 원한을 품는 성정이었나..."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오후 해가 기울고 있었다. 인기척을 듣고 세수물을 떠온 령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가볍게 혀를 찼다.
"여러날 꼬박 밤을 지새우고 하도 곤하게 주무셔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잘 잤어."
"그러다 옥같은 얼굴이 반쪽이 되겠습니다."
그녀는 령이의 잔소리 속에서 세수를 마치고 문을 나서려다가, 문가에 줄느런히 늘어선 금의위 무사들을 보자 그만 한걸음 물러섰다.
“무엇이냐.”
“공주님을 놀래켜서 송구합니다.”
누군가 무사들을 제치고 늠름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 저도 모르게 반색을 했다.
"지휘사님."
“황명을 받들어 공주님을 보호하러 왔사옵니다.”
우사는 그녀를 향해 살짝 허리를 굽혀보였고,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다가 뭔가 머리에 떠올라서 말했다.
“지휘사님…죄송하지만 지금 무슨 시각입니까.”
“유시입니다. 령이가 진지상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배고파서 그런 게 아니고..."
그녀는 잠깐 주위를 살펴보다가, 가만히 우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저어…지휘사님께서 오늘밤 축시 저를 몰래 자금성 동화문까지 데려다 줄순 없을까요.”
“무슨 일이십니까.”
그녀가 소리를 낮추어 말하는 바람에, 우사 역시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우사의 얼굴을 보다가, 금세 시선을 내리며 자신의 치마자락을 매만졌다.
“솔직히 말씀드리면…그날 못다한 월색구경을 오늘밤 축시에 정했습니다.”
“…”
우사는 아무 말 없었고, 그녀는 우사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만일 지휘사 님께서 이 일을 발설하신다면, 저희가 상경할때 약속했던 비밀은 바로 오라버니 귀에 들어가게...”
“존귀한 공주님께선 어찌 허구한 날 사람 협박만 하고 계십니까."
우사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동화문까지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뒤의 일은...”
“염려 마십시오. 따로 작별인사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도와주신 일 가슴에 새겨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머리숙여 감사의 뜻을 전하자, 그녀를 주시하는 우사의 눈에는 이유모를 착잡한 기색이 스쳤다.
……
자금성 동화문.
동화문에서 좀 떨어진 어느 구석에서 한 그림자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축시를 알리는 목탁소리가 울린 후, 한 작은 그림자가 동화문을 향해 다가오자, 그동안 기다리던 검은 그림자가 재빨리 그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미처 반응할 사이 없이 검은 그림자는 그 사람의 팔을 끌고 옆의 담벽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 모든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누구…”
서은은 자신의 팔을 잡은 검은 그림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검은 그림자가 급히 손을 입에 가져다 댔고, 둘은 궐내의 순라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다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서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형님…”
“용케 빠져 나왔구나.”
그의 목소리에는 작은 한숨이 섞였고,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지휘사님이 도와주셨어요.”
“…”
“그분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기 어려웠을거에요…”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의 말에, 그녀는 수줍은 미소로 답했다.
“제가 오면, 형님께서 황실에 대한 원한을 내려놓는다고 하셨는데…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도 황실을 위하고 싶으냐.”
“황실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한을 품는 건…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또 저의 신분을 황실과 분리할수 없기에 고통스러워하는 형님의 모습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팔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그녀도 말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호수같이 그윽한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그가 결심이라도 내린 듯 말했다.
“그 원한은, 사실 이미 내려놓기로 하였다.”
그녀는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띄웠다. 그녀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그날 양심전에서 그와 만력과의 독대가 바로 그로 하여금 그 원한을 묻어버리게 한 것임을.
......
"우린 이러이러해서 고육계를 쓸 것이니라..."
"..."
만력의 계획은 적중한 것이었다. 그날 양심전에서 그녀를 내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감이 들어와 아뢰었다.
"폐하...어명을 받잡아 서안공주를 문화전 서각에..."
"모두 물러가거라."
"네에?"
"뭣들 하느냐. 좌우를 물리라 하였다. 문밖의 금의위도 물러가고 문을 닫거라."
"폐하...하오나 아직 알현이 끝나지 않았사온데..."
"못들었느냐. 짐의 말을."
만력이 목소리를 깔자 태감은 급히 좌우를 물리고 양심전 문을 닫았다. 이여백은 만력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양심전이 조용해지자 만력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지금부터인가."
이여백의 의혹어린 표정에 만력은 소리없이 웃었다.
"너와 나의 진실한 말들을 나눌 시간 말이다. 듣는 귀가 없으니 이젠 실말을 할수 있겠지."
"무엇을 말씀입니까."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만력을 보았다. 만력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너의 상경 목적 말이다. 단순히 나를 만나기 위함은 아닐터. 그렇다고 냉궁에 내쳐진 저 아이는 더욱 아닐터."
그가 고개를 숙이자 만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을 것이다."
"..."
"어마마마를 만나는 일 말이다."
그가 놀란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가 묻기도 전에 만력이 먼저 말했다.
"저그만치 수년을 함께 지냈고, 젊음을 같이 보냈다. 네가 나를 단번에 알아본 것처럼, 나 역시 네가 애초에 명교에 온 이유를 알고 있거늘."
"그래서 절 막으시려는 겁니까."
그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만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오랜 붕우로서의 조언이고 충고일뿐이다. 그 원한이 얼마나 깊던간에, 이젠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분은...제 어머니와의 약조를 어기고, 배신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단 한마디 힐문조차 할수 없단 말입니까."
"어떤 약조와 배신인지 난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누구는 기억조차 없는 일에 너는 십여년을 허무하게 증오하는 것이니 보기에 안타까울뿐."
"무슨 말씀입니까...기억조차 없다니요."
그는 놀란 듯 되물었다. 만력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마마마께선 가끔 요동 정세를 거론했는데, 그때 유왕부에 계실 때 요동에 갔었던 일을 까맣게 잊고 계시더군. 항상 요동을 한번도 다녀오지 않았다고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네. 당시 어렸었던 나도 분명히 기억하던 일이었거늘."
"..."
양심전 안이 물뿌린 듯 조용해졌다. 하도 조용해서 바람이 종이장을 스치는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그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얼굴로 서있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렇군요...황실의 존귀하신 신분이라 그런 일쯤은 잊어도 되는 일이군요."
"..."
"누구는 약조를 어기고 기억조차 없는 일에, 누구는 졸지에 삶의 의미를 잃고 복수마저도 허무해지는 군요."
"..."
"이것이 바로 폐하께서 펼치고자 하는 밝은 세상입니까."
그가 쓸쓸한 미소를 짓자 만력은 얼핏 미간을 구겼다.
"너의 마음을 모르는바 아니나, 그 아이로서도 안되는 것이냐."
"..."
"너를 따라 요동으로 가겠다 하더구나. 황실의 이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
"십수년의 원한이라 해도, 이곳으로 보상받을수 없는 것이냐."
"..."
양심전 안에는 또 한번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만력의 시선이 그의 단단히 틀어쥔 주먹에 가 닿았다. 하지만 잠시후 그 주먹이 천천히 풀리는 것을 본 만력의 눈에 얼핏 미소가 스쳤다.
"보상이라...그 사람이, 또 누군가의 희생품이 되어서는 안되지요."
드디어 긴 침묵을 끝낸 그가 고개를 들고 만력을 응시했다. 만력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한결 깊어졌다.
"이젠...그만하겠습니다. 제가 원한을 가지고 있는 한, 명황실은 끊임없이 그 사람을 이용해 저를 포섭하겠지요."
"..."
"저는 그 사람이 황실에 이용당하는 것을 더이상 볼수 없습니다."
"네가 한 선택이다..."
"네, 제가 한 선택에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러니 번복할가봐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무엇이냐."
만력의 표정은 한가지 부탁이 아니라 백가지 부탁이라도 당장 들어줄 태세였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자객을 보내지 마십시오. 원한을 내려놓겠다는 약조 지키겠습니다. 하오니 더이상 무의미한 감시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못믿겠지만, 그 자객은 내가 보낸 것이 아니다."
만력의 말에 그는 입가에 차거운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냈든간에...이젠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한번만 더 자객이 오면 그땐 오늘의 선택은 번복할수도 있습니다."
"필히 단속하여 더이상 그런 일이 없게 하겠느니."
그는만력을 깊이 주시한 후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작별을 고겠습니다."
"퇴궐하는 길 오른편에 문화전이 있느니라."
물러가는 그의 등뒤에 대고 만력이 소리높여 말했다.
양심전을 나선 그는 머리를 돌려 궁궐 깊은 곳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에 한가닥 체념이 짧게 스쳐지나갔다. 잠시 그렇게 서있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문화전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
자금성 동화문을 환히 비치는 달빛이 담벽 뒤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그림자를 가볍게 스쳤다. 잠시후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그중 한 그림자가 탄식조로 말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서은은 한없이 안쓰러운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오라버니께선 다 아셨으면서도."
"그분을 뭐라 할수는 없다."
이여백은 담담한 얼굴로 바람에 움직이는 달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분 역시 자신의 어머니를 지키고 싶었을테니까."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오늘 너를 만나고자 함은, 네게 자초지종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나는 이런 사람이거늘...어찌 너로 하여금 요동으로 따라가게 하겠느냐. 이태후마마와 악연..."
그녀가 손을 올려 그의 입을 막았다. 그녀의 눈에는 그에 대한 무한한 연민이 고스란히 담겼다.
"무슨 바보같은 말씀인가요."
"..."
"이제와서 이런 말씀 하시기엔, 너무 늦지 않을까요."
그녀의 눈에 찰랑이는 미소에 그도 짧게 미소지었다.
"아직 자금성을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자금성안까지 들어와 기다리고 계셨군요."
"동화문을 지키는 군사를 매수했다. 그들의 교대시간을 기다려서 나가면 된다. 네가 나가는 것보단 위험하지 않으니 그리 하였다."
그녀는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눈앞의 이 절륜한 남자가 드디어 자신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이 어쩌면 약간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일단 이 상황을 원없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눈빛에 용기를 얻은 듯, 그가 뒷말을 이었다.
“그래도 가겠느냐…나를 따라서.”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에 환희의 빛이 스쳤다. 그녀의 내민 손을 맞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둘의 시선이 조용히 엉켜붙었다. 둘 사이에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문득 그녀를 보던 그의 시선이 그녀 뒤의 허공에 멎었다. 그녀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하게 굳었다. 자금성 뒤쪽의 자녕궁 창공을 붉게 물들이며, 삼단같은 불길이 높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뒤이어 궁안 여러곳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왁작 떠드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녀는 망연한 기색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어서 가세요!”
“너는.”
“저긴...이태후마마의 침전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그의 표정도 서서히 굳어졌다. 그리고 불이 붙는 곳으로 달려가려는 그녀의 팔을 잡아채면서, 그 역시 흔들림 없는 태도로 그녀에게 말했다.
“너 혼자 가게 둘순 없다.”
“형님은 이틈을 타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같이 나가.”
"같이 가면...오늘의 이 화재는 저희가 일으킨 것이 되고맙니다."
그녀의 말에 그는 멈칫했다. 혼잡한 가운데서 그녀의 맑은 눈빛을 보며 그는 그녀의 말에 수긍할수밖에 없었다. 만일 지금 같이 도주하게 되면 그들은 제일 유력한 방화범 용의자 선상에 오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자녕궁에 불을 일으킨 사람도 이 점을 노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화광속에서 그가 다시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그는 어딘가 비장한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혼자 가게 되면, 나 또한 방화범으로 몰릴 것이다."
"그래도..."
"내가 매수한 군사들, 너를 데려다준 지휘사...내가 온 것을 아는 사람이 이 궁에 한둘이 아닐터."
"그럼 어떡합니까..."
그녀는 당황해졌고, 그는 한결 침착한 태도로 그녀에게 말했다.
"폐하를 뵈어야겠다."
......
“겁도 없이 여길 감히..."
누군가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서은의 귀전에 울렸다. 머리가 어지러운감을 느끼며 그녀는 천천히 의식을 회복했다. 어렴풋한 가운데 누군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잠시 눈여겨 봐서야 그 사람이 바로 이태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여긴…”
“깨었구나.”
이태후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냉담한 얼굴로 그녀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여긴 내 임시 처소다.”
“제가 어떻게 여길...”
“많이 놀랐나보구나.”
“…”
“그럴만하지. 궁에 이같은 괴변이 생기리라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
“괴변...”
서은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녕궁을 휩싸고 있던 삼단같은 불길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동화문에서 이여백과 자녕궁쪽으로 오던중 맞닥드린 한무리 군사들도 머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뒤가 생각나지 않았고 이유 모르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바로 이태후의 임시 처소라는 것에 그녀는 당황해졌다. 그녀는 이불을 젖히고 침상에서 내려섰다. 아직도 머리가 핑핑 도는 것으로 보아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닌 듯 했다.
“그 사람은요.”
“누굴 말이냐.”
"이여백공자 말이에요."
이여백이란 세글자에 이태후의 얼굴이 순간 훅 하고 흐려졌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셈이냐.”
“그게 무슨…말씀이십니까.”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이태후를 바라보았다.
“왜 아직 그 방화범을 운운하느냐 말이다.”
“방화범이라니요?”
“그 시각에 퇴궐하지 않았고 또 그 시각 자녕궁이 불에 탔다.”
“그건…”
그녀는 왠지 입술이 바짝 말라드는 감을 느꼈다.
“그 일은 오라버니께서 아시는 일입니다. 아니, 이미 오라버니와 상의를 마친 일이었습니다. 어디 오라버니께 한번 물어보심이...”
이태후의 눈에 얼핏 냉소가 스쳤다.
“그런 것이냐? 허나 너의 그 오라버니가 이미 크게 노하여, 그 아이를 잡아가두고 문초한다는구나. 듣자니 곧 형부(刑部)에 넘길 것이니라.”
그녀는 놀란 기색으로 이태후를 보았다. 무예가 출중한 그가 왜 그토록 쉬이 만력에게 포박을 당했을까. 더 생각할 겨를 없이 그녀는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오라버니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제가 뵙고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네 오라비는 지금 자녕궁을 불태운 죄인들을 처리하느라 눈코뜰새 없느니라."
"그럼 저는 어찌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제발로 찾아온 것을. 지금 와서 그리 묻는다면 내가 어찌 대답해야 좋겠느냐?"
설마 하는 생각으로 이태후를 보자, 이태후가 곧바로 그녀의 의심을 확인시켜 주었다.
"네 절로 자녕궁으로 찾아온 것을, 화마에 취해 쓰러져 있는 듯 하여 궁인들이 이리로 데려왔다. 다행이 방화범이 미처 궁을 빠져나가지 못해 잡혔으니 내 한시름 덜었구나."
머리가 핑 도는감을 느끼며 그녀는 침상에 주저앉고 말았다.
……
“음모였어…이 모든 것이 다…”
서은은 자리에 누운 채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았다. 궁궐의 소란이 일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력은 이태후에게 지금 그녀가 누워있는 영화전(荣华殿)을 임시 거처로 마련해 주었고, 이태후는 좌우 궁녀들에게 그녀를 잘 지키라 당부를 한후 어디론가 총망히 가버렸다.
그녀는 자리에 누운 채 꼼짝달싹 하지 않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중간에 령이가 두세번 들어왔지만 그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몸이 개운해진 것으로 보아 이제는 좀 움직여도 될 듯 했다.
“가서 오라버니께 여쭙거라. 잠깐 뵙고자 하니 이곳으로 오실수 있냐고.”
그녀의 명을 받은 령이는 갔다가 한식경도 못되어 되돌아왔다.
“송구하옵니다. 공주님…폐하께서 양심전에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시기에 뵙지도 못하고 왔사옵니다…”
서은의 입꼬리가 씁쓸하게 올라갔다. 그녀는 한참 머리를 숙이고 뭔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께서 오시면 내가 답답하여 외출했다 하거라."
서은이 방문을 나서자 이태후의 명을 받은 궁녀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뒤따라나온 령이가 목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지금 감히 누구를 막는 것입니까."
"태후마마께서 아시면 진노하실텐데 장공주마마께선 그만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이태후의 궁녀들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지나쳐 발걸음을 옮겼다. 등뒤에서 령이와 궁녀들이 크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자신을 막은 궁녀들을 지나칠때 물흐르는듯한 유려한 동작으로 경공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령이는 미처 따라오지 못한 듯 했고 그녀는 그대로 양심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양심전을 지키는 금의위 무사들은 이태후의 궁녀들이 아니었다. 그녀를 막아선 무사들은 딱딱한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송구하오나 폐하께서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사옵니다. 이만 발길을 돌려주시옵소서.”
“나는 공주다. 바로 이 나라의 장공주, 금상의 친여동생이란 말이다. 썩 비키지 못할까.”
그녀가 호통을 쳤지만 무사들도 쉬이 동하지 않았다.
“장공주마마가 아니라 자성태후마마께서 친히 오신다 해도 저희는 어쩔수 없사옵니다. 이것은 어명입니다.”
그녀는 눈앞의 무사들을 보다가 갑자기 빠르게 몸을 움직여 그중 한 무사의 옆구리에서 검을 빼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무사들은 멍해 서있었고, 그녀는 검을 가로 들어 자신의 목에 갖다대었다.
“어명이 두렵다 한들, 공주가 상하게 하는 것보다 두렵느냐. 그것도 하필 너희들의 검날에 상한다면.”
무사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뒤로 몇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검을 팽개친 후 양심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서안을 의지해 골똘히 책을 읽고있던 만력이 기척소리에 놀라 책을 덮고 머리를 들었다.
“웬일이냐!”
만력의 질문에 그녀는 곧바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온 이유를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서안아.”
“그 사람을 놓아주십시오. 오라버니…”
그녀가 풀썩 무릎을 꿇자 만력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그 얘기더냐…”
만력을 보는 그녀의 눈빛에 간절한 념원이 담겼다.
“오라버니께서도 다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저희는 고육계로 그 사람을 농락했지만…그 사람은…황실에 대한 원한을 내려놓겠다고 약조했습니다…어찌 이런 사람에게…터무니없는 죄를 들씌운단 말입니까…”
“터무니 없다니…”
만력은 그녀의 말을 중단했다.
“황실에 대한 미움을 내려놓는 사람이 자녕궁을 불태운단 말이냐. 아무리 인명피해가 없었다고 하나, 자녕궁에 불을 저지른 일은 그 누가 되었더라도 절대로 용서할수 없다.”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녕궁을 불태운 사람은 절대 그 사람이 아닙니다. 자녕궁에 불이 일어났을 때, 그 사람…저와 함께 동화문에 있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만력은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동화문?”
“네, 그러하옵니다.”
그녀는 머리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그뒤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께 이 모든 자초지종을 아뢰지 못한 점 송구하오나, 저는 그 사람의 확답을 얻으려 그날의 만남을 기약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궁을 떠나려 하였습니다. 만일 그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저의 간청을 못이겨 그 시간에 동화문에 머물러 있은것 뿐입니다. 하오니 부디…이 억울함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어마마마께서 그가 범인이라 굳게 믿고 계시고, 또 궁안엔 달리 의심갈만한 자가 없느니.”
만력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뒷말을 이었다.
"짐이 지금 할수 있는 일이란, 이 일이 형부에 넘어가기전에 비밀히 조사하여 억울함이 없게 하는 것뿐이니라."
“하오면 오라버니께서도…알아주시는 겁니까.그 사람이 억울한 것을…”
그녀는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만력은 미타한 기색으로 말했다.
“설령 억울하다고 치자. 그렇다고 공주가 궁에서 외간 사내를 만난 것을, 온 세상이 다 알게 해야 하겠느냐.”
“그래서 저희를 막으신 것입니까."
만력은 당최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막다니?"
"동화문에서 자녕궁으로 가던중 한무리 군사를 만났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그 사람이 이미 잡혔다 하더이다. 이건 다 오라버니께서 수를 쓰신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어찌 그리 쉽게 그 사람을 포박했겠습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만력은 서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 아이 스스로 양심전으로 찾아와 자수한 것을."
"네?"
"아마도 너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날 밤, 만일 너희가 같이 있었다면 그가 널 데려다놓고 찾아와서 자수한 것이렷다."
"그럴리가..."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만력을 주시했다.
"그 사람...한번 만나게 해주십시오."
"어허! 근신하지 않고 뛰쳐나온 것도 아직 네 죄를 묻지 않았거늘."
"저 그 사람...꼭 만날 겁니다."
"명황실의 장공주가 한낱 사내때문에, 영화전과 양심전을 발칵 뒤집었다는 소문이 궁에 돌게 하고싶으냐?"
만력의 말에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한참동안 만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드디어 입밖으로 내뱉었다.
“공주…공주…이젠 참으로 지긋지긋 합니다.”
만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언제부터 버리고싶은 신분이었습니다. 제겐 아무 상관도 없는 신분이구요…제가 왜 하필 이런 신분 껍대기 때문에 그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게 되는 겁니까. 싫습니다.”
그녀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자신의 전생인 서안공주가 왜 목숨을 버리고 환생을 거부했는지, 그녀는 어렴풋이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음모와 궤계가 창궐하는 황궁 이 깊은 곳에서, 공주라는 신분은 오히려 자유와 사랑을 추구하는 길에 걸림돌이 되기만 할뿐이었다. 그녀는 원망섞인 눈길로 만력을 주시했다.
“참으로 지긋지긋 합니다. 애초에 오라버니께서 저를 죽은 것으로 반포하였으면 이런 일도 없었던 것을. 왜 제게 이런 허명을 남겨두어, 저를 이처럼 고달프게 하는 것입니까…”
“네겐 아무 상관도 없는 신분이라니…”
만력의 의아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와 꽂혔다.
“그것이 짐의 동생으로서, 또 이 나라의 장공주로서 입밖에 낼 말이더냐."
"..."
"장거정이 죽고 친정을 하기까지, 친정을 해서 어마마마와 대립할때까지…짐 또한 황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느니라…"
"..."
"허나 짐은 한번도 황제라는 신분이 짐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 네가 이 신분을 초개같이 버린다 해도, 넌 어디까지나 명황실의 공주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영영 황궁을 떠나더라도 네 성은 주(朱)씨이고,네 몸에는 황실의 피가 흐르고있느니.”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그녀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만력을 바라보았다.
“만일 제가 주씨 성이 아니라면요…그리고 제 몸에 황실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면요? 제가 애초부터 이 나라의 공주가 아니였다면…저를,그리고 그 사람을 놓아주시겠습니까.”
만력의 시선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는 머리를 쳐들고 한껏 입술을 깨물었다. 양심전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만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만력의 의심을 자아냈다는것을 분명히 알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 한가득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천기를 누설하지 말라는 염라대왕의 말을, 그녀는 처음으로 거역하려는 오기가 생겼다.
죽음…죽음이 뭐가 두려운가. 오히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람의 생사를 좌우지하고 사랑의 자유를 속박하는, 명부나 명황실같은 기득권층의 횡포가 아니었던가.
“어찌 대답을 안하시옵니까. 만일 제가 공주가 아니라면, 지금 제가 그 사람을 따라가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녀가 당돌히 묻는 말에, 만력은 헛기침을 했다.
"자녕궁에 불을 지른 진범을 밝혀내기 전까진…이여백은 혐의를 벗지 못할 것이니 궁안에 감금되어 있을 것이다."
"허나..."
"허나 일이 밝혀지기 전까진 섣불리 형부에 넘기지 않을것이니, 너도 그리 알고 돌아가거라."
그녀의 억이 막힌 표정에 만력이 덧붙이는 말이었다.
“그 사람을…정녕 만날수는 없사옵니까.”
그녀의 순해진 말투에, 만력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말타면 경마를 잡히고 싶어 하는구나. 이 일이 금의위의 손에 떨어졌은즉, 궐밖을 놀래키진 않았으니 아직은 만회할 기회가 있는 것이다. 이때 네가 사사로이 이여백을 만난다면 오히려 소문이 나기 쉽지 않겠느냐.”
만력의 설득에 그녀는 겨우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연연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던 그녀의 눈길이 문득 한곳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잠깐, 아주 잠깐 멈칫한 후 그녀는 가만히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그녀는 만력을 향해 만복의 인사를 올린 후,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채 양심전을 물러나왔다.
……
그날 저녁, 서은은 자신의 원래 처소로 거처를 옮겼다. 이태후는 낮의 일을 전해들었는지 굳이 그녀를 막지 않았다. 처소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령이를 시켜 우사를 불러들였다.
우사가 들어와서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그녀는 손을 저어 령이를 나가게 한 후 가만히 우사를 바라보았다. 우사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이같은 시간에 소직을 불러 무슨 분부가 있으십니까.”
그녀의 시선이 우사의 얼굴을 꿰뚫 듯 주시하자, 우사는 바로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혹시 소직에게 이여백이 감금된 곳을 탐문하려 하시옵니까…그런 일이라면, 부디 소직의 난감함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피씩 미소를 지었다.
“오늘 양심전에서 오라버니를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일도 들어 알고있고 만나려는 생각도 접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
“오라버니께서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시려는지, 지휘사님은 아십니까.”
그녀가 우사의 말을 끊자, 우사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소직은 다만 어명만 받들뿐입니다.”
“오라버니께선 자녕궁에 불을 지른 사람이 따로 있을터이니, 범인이 밝혀지기만 하면 그 사람의 혐의를 벗겨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말에 우사는 시선을 들어 담담하게 말했다.
“소직 또한 이 일이 하루빨리 빛을 봐서, 이여백공자의 무고함이 속히 밝혀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냥 기다릴수는 없는 일이지요."
우사는 의혹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결 차분한 얼굴로 우사를 마주한채 말을 이었다.
"우리가 밝혀내야지요."
"우리가요?"
“네, 지휘사님과 저, 바로 우리가 말입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금의위가 이번 일을 맡아 처리한다 들었습니다. 지휘사님도 그 어깨, 마냥 가볍지만은 않을테지요."
"그야...물론입니다."
그녀는 천천히 방안을 가로질러 우사의 앞에 다가섰다.
"오라버니께선 제가 그 사람을 만나선 안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라버니의 성정으로 결코 그 사람의 일에 힘을 쓰시진 않을겁니다. 어쩌면 이참에 눈안의 가시를 제거하는 일이 될지도 모를터인데, 어찌 그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려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 일을 밝혀낼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가 어찌…”
“제가 오늘 하루 생각을 해보았는데, 이태후 마마께옵선 그동안 사찰을 전전하시면서 환궁하신지도 얼마 안되었고, 또 정무에 마음을 비우신 상태라 범인이 결코 그분을 해하려 자녕궁을 불지르진 않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범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사의 질문에 서은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일이 발생하기전 이 몇일동안 오라버니께서는 양심전에 상주하시면서 독서에만 집념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랬었지요."
"이태후 마마님의 처소에 불이 났다면, 제일 먼저 비우게 되는 곳은 바로 양심전이 아니겠습니까."
"..."
"비록 지금은 서로 대립관계에 있다 하지만, 오라버니께서 효를 중히 여기시는 일을 천하 사람들이 결코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범인도 이 점을 잘 알고있구요.”
“…”
“범인의 목적은 바로 양심전입니다.”
그녀의 또렷한 말에 우사는 믿을수 없다는듯 말했다.
“공주님의 말씀은…자객이 시군(弑君)의 목적으로 양심전을 노렸다는 것이 아닙니까.”
“시군은 아니고…양심전을 노렸다는 말입니다.”
그녀가 여전히 알쏭달쏭한 말만 하자, 우사는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소직 우매하여 공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오니 부디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말로만 해서는 정녕 모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서은은 또 한번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우사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후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다시 나왔을 때는 그녀의 옷차림이 어느새 간편한 야행복으로 변해있었다.
우사는 그녀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었고, 그녀는 우사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도적을 잡으려면 먼저 도적의 길을 알아야지요. 그러니 이번 사건을 밝히려면 우선 양심전부터 방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말입니까."
그녀는 우사의 의혹을 아랑곳하지 않은채 처소를 나섰다. 우사는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황급히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