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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서 만난 그대
작가 : 판도라
작품등록일 : 201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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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
작성일 : 19-10-16     조회 : 287     추천 : 0     분량 : 1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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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양심전 문밖에서 서있던 무사들이 우사를 발견하자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우사가 뭐라고 몇마디 말하자 그들은 다시 머리를 숙여보인 후 제각기 흩어졌고, 우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두운 곳을 향해 입을 열었다.

 

 “되었습니다. 나오십시오.”

 

 어둠속에서 야행복 차림의 서은이 걸어나오자, 우사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매일 이 시각에 정귀비마마 처소에 가신다고 합니다…”

 “저도 이미 령이를 보내어 탐문케 하였습니다.”

 

 그녀는 앞장서서 양심전안으로 들어갔고, 우사는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 재차 그녀에게 물었다.

 

 “정녕 범인의 목적이 양심전에 있다고 하셨습니까.”

 “네.”

 “만일 아니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금의위 무사들도 제가 다 보냈는데…”

 “뭣이 그렇게도 두려우십니까.”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우사를 돌아보았다.

 

 “이번 사건의 진실만 밝혀진다면, 양심전으로 잠복한 일이 무슨 큰 죄가 되겠습니까. 설사 오늘 아무런 수확도 없고 나중에 오라버니께서 이 일을 아신다 해도,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저희 열정을 높이 봐주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그녀의 당찬 말에 우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전부터 말씀 드리고 싶었지만…공주님께선 참으로 명료한 성정이십니다.”

 “제가요?”

 

 서은은 우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여 웃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가끔 작은 일에 고민하기도 합니다."

 

 우사의 눈빛에 잠깐 아련한 추억이 스치는 듯 보였다.

 

 “제가 아는 한 사람도, 그런 성정이었는데...그 사람이 공주님 절반만한 용기만 있었더라면…”

 “정혼자…얘기인가요?”

 

 그녀가 무심한 듯 묻자 우사는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가만히 입꼬리를 올려 웃은 후 용좌앞으로 다가섰다. 우사도 그녀를 따라 다가가다가 그제야 서안위의 책을 발견했는지 크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저도 아까 낮에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서은은 그의 시선을 따라 서안위를 보며 말했다.

 

 “규화보전(葵花宝典)…강호의 무림 고수들이 오매불망 찾고있는 최고 무공(武功)의 비급(秘笈)이지요. 저 비급이 명황실의 궁궐에 있다는 소문만 강호에서 들었을 뿐인데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게 될줄이야…”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사 역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녀의 말을 받았다.

 

 “설마 폐하께서 저것을 읽고 계실줄은…”

 “오라버니께서 워낙 서예와 무공에 전념하시니…”

 “하지만 저건…위험한 비급입니다. 강호의 수많은 고수들이 저 비급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고, 또 수많은 고수들은 저 비급이 영영 세상에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사는 말을 마친 후 표정을 일변했다.

 

 "게다가 저 비급은…저걸 이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사는 말을 마치기 바쁘게 책에게로 손을 뻗었다. 하도 동작이 빨라서 그녀가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 대신 우사를 가로막는 한 그림자가 있었다. 휘익 소리와 함께 그 그림자는 바로 우사의 눈앞에서 책을 가로채어 사라졌고, 그 순간 양심전안에서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으하하하하…이게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오다니...”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웃음소리의 임자는 강한 내공을 지닌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내공은 웃음소리를 통해 그들의 귀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사는 미동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두손으로 귀를 막을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여전히 날카롭게 그녀의 귀속을 파고들었다.

 

 “이것이 바로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라 하는 것이다.자녕궁이 헛되이 불타진 않았으니…으하하하하…”

 “호교법왕!”

 

 우사의 침착한 목소리가 그 음산한 웃음소리를 갈랐다.

 

 “교주께서 아시면 이런 너를 가만두지 않을터.”

 

 웃음소리는 잠깐 멎었다가 다시 요란하게 실내에 울려펴졌다.

 

 “교주? 교주의 명을 직접 받고 움직이는 사람은 나인데 우사는 대체 어느 교주를 말하는가.”

 

 우사는 고개를 돌렸고 웃음소리는 방위를 바꿔 여전히 기분 나쁘게 들려왔다.

 

 “하긴 자리에서 거의 밀려난 우사가 뭘 어떻게 알겠나. 전교주께서 새 교주께 명교를 인수해주신지 오랜데 우사는 북방에 있다보니 그 소식을 듣지 못했는가 보군."

 

 우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주위를 살폈다. 아마 호교법왕이 몸을 숨긴 곳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교주를 대하듯 정중한 예를 올린다면, 오늘 나를 몰라본 죄는 용서할 것이려니.”

 “광명우사가 호교법왕에게 예를 올려…”

 

 우사는 냉소를 지으며 드디어 용좌가 있는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렇게 된다면…나는 이 우사자리를 내놓아야 하겠군.”

 "광명좌우사는 교주대신 결정권이 많긴 해도, 이 호교법왕을 직접 건드리진 못하느니."

 

 호교법왕은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양심전을 진동시키는 그 웃음소리에 서은은 거의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우사는 자신의 내공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그 내공을 저항할만한 힘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문가로 움직였다. 우사가 있는 한 호교법왕을 쉽게 놓치지는 않을 듯 했고, 그녀가 여기 남아있어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문을 등진 그녀의 등뒤로부터 그녀의 귀를 막아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숨이 틔이는 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형님…”

 

 그녀를 내려다보며 작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남자는 바로 이여백이었다. 그의 한결 단단해진 표정과 선연한 눈빛에 그녀는 그만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어디서부터 말했으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그녀는 문득 눈앞의 상황이 그들이 회포를 풀기에 그리 적합하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귀를 막아준 그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기(气)를 그녀는 어렴풋이 느낄수 있었다. 그녀가 금세 안정을 되찾고 머리를 돌려 우사를 바라보자, 우사 역시 이여백의 등장에 놀란 눈치였다.

 

 “네가 어떻게…”

 “교주께서 보내셨습니다.”

 

 이여백은 우사를 향해 대답한 후 그녀를 내려다 보며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먼저 나가 있거라.”

 

 그녀는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이여백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는 사이 호교법왕의 웃음소리가 다시 울렸다.

 

 "교주께서 보내셨다니? 그 무슨 터무니없는..."

 

 호교법왕의 웃음소리가 문득 낮아졌다. 이여백이 손안의 옥패를 높이 들어보였기 때문이다.

 

 “내겐 이 명패가 있소. 다만 자칭 교주의 명으로 움직인다는 댁은 무엇을 근거로 그 말을 증명하겠는가."

 

 호교법왕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드디어 멎었다. 이여백은 우사를 바라보았고, 우사는 그를 향하여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여백이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기고 검을 뽑은 것, 그리고 그와 우사가 함께 정확히 호교법왕의 위치를 공격한 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나고 갈무리 되었다. 병장기 소리 하나 없이 순식간에 종료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이 왜 명교의 좌우사가 되었는지 납득될만한 깔끔한 솜씨었다. 그들에게 끌려나온 호교법왕은 못믿겠다는 얼굴로 이여백을 보았다.

 

 "건곤대나이 2단..."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던가."

 

 우사가 피씩 웃자 호교법왕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그게...1단만 해도 7년의 수련시간이 걸리는 것을."

 "본디 무예라는 건 사람의 자질에 따라 틀린 게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명교에 있은 시간이 얼만데."

 "그래도 벌써 2단이라니..."

 "그런 댁은 건곤대나이 1단도 못넘겼으면서 이 규화보전을 욕심냈구먼."

 

 우사가 시까스르자 호교법왕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깊숙히 고개를 떨구었다.

 

 같은 시각.

 

 양심전 밖에서 안의 동정을 지켜보고 있던 한 황색의 그림자가 입가를 들어올리며 조용히 한마디 말했다.

 

 “이젠 온전히 끝낼수 있겠구나.”

 

 ……

 

 “정말 너무들 하십니다.”

 

 원상복귀된 양심전안에서 서은은 만력과 이여백, 그리고 우사를 번갈아보며 불퉁한 표정으로 잔뜩 볼을 부풀렸다.

 

 “어찌 이렇게 감쪽같이 저만 속인단 말입니까.”

 “속인 것이 아니다.”

 

 이여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만 이 일에서 제외시키려고 애썼건만 끝내 참지 못하고 오다니...무서운 집념이군."

 “참으로 무서운 분이지요.”

 

 우사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허구프게 웃었다.

 

 “게다가 공주마마께선 아주 저를 대놓고 하인 취급 하시던데요. 그리고 제가 책에 손을 댈때 꼭 마치 책을 빼앗기라도 할까봐 의심하고 경계하는 눈치셨지요.”

 “그건…”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바로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동화문에서 저희가 만난다는 걸 지휘사님이 알고 계셨고…또 전에 요동에서 하신 일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걸 언제까지 기억하실 작정이십니까.”

 

 우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피씩 웃다가 만력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오라버니께서 바로 그 웅뎅이를 판 사람이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당랑포선, 황작재후(螳螂捕蝉,黄雀在后)의 이야기는 아시죠. 그 이야기의 연장인데 황새의 뒤에는 사냥꾼이 있고 사냥꾼은 황새를 잡으려다 옆에 있는 물웅뎅이에 빠지게 되는 결말입니다."

 

 민력은 실눈을 지으면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짐도 고작 사냥꾼에 불과하거늘."

 "뭐, 일단은 그렇다고 치죠. 그래도 이렇게 셋이 작당을 하다니..."

 "어허...작당이 아니라 모의래두."

 

 만력이 헛기침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자녕궁이 불탄 그날, 여백이 짐을 찾아와 계책을 말했느니라. 알고보니 그전날 독대를 할때 이미 짐에게 규화보전이 있다는 사실을 안터, 해서 범인이 자녕궁이 아닌 양심전을 노렸을 가능성을 짐에게 얘기했었지."

 "그러면서 저더러 바로 이여백공자를 포박하라 하셨지요."

 

 우사의 말을 이여백이 받았다.

 

 "그렇게 해야만 범인이 자신이 폭로되지 않은 것을 안심하고 다음 단계로 움직일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범인이 겁도 없이 양심전으로 잠입했군..."

 "그때 폐하께서도 양심전을 비우셨고, 금의위 무사들도 지휘사님 명으로 다 물러갔으니 말입니다."

 "그건 공주마마 부탁으로..."

 

 우사가 그녀를 힐끔 쳐다보자 그녀는 만력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께선 제일 먼저 누구를 의심했는가요?"

 "짐은...공정하게 본다면 여백의 혐의가 제일 컸지만, 황궁 구조를 잘 안다는 사실로 볼때엔 지휘사 혐의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짐이 오랜 시간 이 두 사람을 지내온 바로는, 이 둘은 절대 무공비급에 목숨을 걸 위인들은 못되느니라.”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사옵니다. 폐하…”

 

 우사가 너스레를 떨었고, 이여백은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소인의 억울함을 살펴주시니 황공하옵니다.”

 “네가 양심전으로 찾아와 계획을 말해주기전에, 짐은 호교법왕이 오랜 시간 이 책을 욕심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호교법왕은 건곤대나이 1단을 수련하면서도 2단의 경지를 가르쳐 달라고 항상 졸랐으니까.”

 

 만력은 말을 마친후 복잡한 시선으로 우사를 보았다.

 

 "그동안 짐의 신분을 알고도 모르는 척 해준 게 정말 고맙구나."

 "황공하옵니다. 폐하..."

 

 우사는 급히 고개를 숙였고 만력은 이여백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호교법왕에 대한 너의 의심과 계획은 적중했다. 그 배후가 있을 거라는 너의 말에도 짐은 공감한다.”

 “네, 폐하.”

 “전에도 네게 일을 맡기면 항상 이렇게 차질이 없었지.”

 “황공하옵니다.”

 “짐은 다만, 네가 시기를 가려 가끔은 머리 숙일줄 알면 좋겠구나.”

 

 이여백은 예의 담담한 얼굴 그대로 만력에게 말했다.

 

 “저 역시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폐하.”

 “그래…사람이 어디 그리 쉽게 변하겠느냐.”

 

 만력은 피씩 미소를 지은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좌우사가 합치니 저리 쉽게 호교법왕을 사로잡는 것을. 이참에 다시 짐의 곁에 있을 생각은 정녕 없느냐.”

 “명교를 떠난지 한참은 되었습니다. 복귀 생각이 없는 것은 물론, 설사 복귀한다 해도 각지 당주들이 불복할 것입니다. 소인은 다만 요동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이여백의 말을 이어, 서은이 큰소리로 만력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명교를 해체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아직 복귀를 운운하시는 겁니까!”

 “허 참. 성격도 급하구려. 짐의 말을 곡해하다니.”

 

 만력은 허한 웃음을 지은 후 정색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짐의 곁에 있는 방법이 꼭 명교더냐. 금의위에도 충분히 자리가 있느니.”

 

 만력의 말에 우사는 아무 말 없었고 그녀는 뜻밖의 제안에 이여백을 쳐다보았다. 이여백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만력에게 말했다.

 

 “명교엔 광명사자 한사람이면 족한 것처럼, 황궁의 금의위 지휘사도 단 한사람이면 족합니다.”

 

 만력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이여백을 깊이 주시했다.

 

 “또 거절인 게냐.”

 “송구하옵니다.”

 

 이여백은 머리를 숙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형님은 궁궐을 지키고, 저는 변방을 지키겠습니다.”

 “그 뜻인즉, 요동의 관작은 받겠다는 뜻이냐.”

 “성은이 망극하오나 관작은 필요치 않사옵니다. 그저 남은 생은 아버님의 한팔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광녕부 일개 무장으로 있게 해주시옵소서.”

 

 이여백의 대답에 만력은 또 한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녕 네 뜻이 그렇다면 그리하거라. 다만 서안이 걱정이구나. 경성은 한번도 떠난 적이 없는 아이가 그 험한 만주땅에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냐. 저번에 다녀왔을 때도 그렇게 심하게 다쳐서 오더니…”

 “저는 괜찮습니다. 오라버니…”

 

 그녀는 듣고있다가 급히 만력의 말에 대답했다.

 

 “요동의 넓은 땅에 어찌 제 한몸 의탁하지 못하오리까. 오라버니께선 부디 과도한 걱정은 거두어주시옵소서.”

 “네 뜻이 그러하다면 더이상 말리진 않겠다."

 

 만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주시했다.

 

 "여백은 출궁하지 말고 잠시 문화전에 머물러 있거라."

 

 뒤이어 만력은 서은을 바라보면서 다소 무거운 표정을 보였다.

 

 "둘은 이만 가보거라. 짐은 금의위 지휘사와 잠시 나눌 말들이 있느니."

 "네, 오라버니."

 "어마마마껜 짐이 말을 하겠다. 너도 작별인사는 하고 가거라. 저번처럼 몰래 궐을 빠져나가느라 하지 말고.”

 

 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사는 양심전에 남았고 그녀는 이여백과 함께 전각에서 물러나왔다.

 

 이여백과 함께 문화전 서각의 임시 처소에 이른 서은은, 궁인들이 정리해놓은 방안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좌우를 물리쳤다. 궁인들이 물러가자 그녀는 몸을 돌려 그를 한참동안 보았다. 둘의 시선이 조용히 얽히자 그녀가 앞으로 다가가 그의 허리를 껴안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돌발행동에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그대로 미동하고 있다가 고개도 들지 않고 중얼거렸다.

 

 "꿈이 아니겠지요."

 

 이여백은 빙그레 웃었다.

 

 “꿈을 많이 꿨나보구나.”

 “형님께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그녀는 얼굴을 들고 정색했다. 그가 그녀를 응시하자 그녀는 힘주어 말했다.

 

 “두번 다시는…이번처럼 혼자 획책하지 마세요.”

 “그건…”

 “이제 황궁을 떠나면 저는 공주가 아닌 어엿한 형님의 사람입니다. 어찌 저를 따돌리고 제게도 감쪽같이 속일수 있습니까.”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자,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자녕궁으로 가는 길에 매복한 군사를 만났을 때, 형님이 절 기혼시켜서 어머마마께 데려다 놓은 걸 저는 알고있어요. 제가 기혼하기전 맡은 향기를, 형님께서 지니고 다니는 향낭에서 맡은 적 있거든요. ”

 

 그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두손을 올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팔에 힘을 주어 조금 그를 끌어당겼다.

 

 “그러니 대답해주세요. 앞으론 꼭 뭐든 같이 상의해서 행동하겠다고…”

 

 그녀가 살짝 몸을 비틀며 간청하자, 그는 대답대신 얼굴을 내렸다.

 

 “읍...”

 

 그녀의 채 못다한 말들이 그의 뜨거운 숨결 사이로 녹아들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그의 입술에 뜨겁게 반응했다. 한참 지나 숨을 고르느라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보았고, 그는 그녀의 머리결을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입을 열었다.

 

 “명황실의 공주가 이렇듯 외간남자의 처소에 오래 머물러도 괜찮은가…”

 “그럼...저 이만 갈까요.”

 "누구 마음대로."

 

 그가 단호하게 말하며 두팔로 그녀를 든든히 감아오자, 그녀는 만족어린 한숨을 내쉬며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었다.

 

 “눈치가 빨라지신 것 같군요.”

 

 그가 말없이 그녀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가슴 그들먹히 차오르는 행복에 취해 작게 중얼거렸다.

 

 "이태후마마께 작별인사를 드리고…저는 영영 이 궐을 벗어나 요동으로 따라가겠습니다."

 "그래…"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어찌 그런 말을..."

 "죽으면...죽으면 어때요.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데...이렇게 당신 곁에서 살고 당신과 같이 있을수만 있다면, 이젠 죽음도 그 이상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가 잠시 몸을 굳혔고, 그녀는 그를 향해 찬연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의 약조를 믿고있었다. 그와 이태후 사이에 그 어떤 악연이 가로놓였다 하더라도, 그녀에 대한 마음으로 극복할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믿고싶었다. 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긴 해도 가능하지 않은 일은 아니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마음이 온전히 그녀 한사람을 담고있음을, 그래서 미친듯이 불안하고 행복한 것을, 그녀는 슬프지만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

 

 “간밤에…잠자리가 편치 못했나 봅니다.”

 

 어화원의 꽃들이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반겨 맞고있었다. 서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의 남자를 보았다.

 

 보기 드물게 화창한 날씨었다. 그러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여백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아마도 아침에 불시로 들이닥친 영화전의 궁녀들 때문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잡았다.

 

 “어마마마께선, 자녕궁이 불탄 이후로 많이 놀라셨는지 사람을 만나지 않았어요…이번엔 아마 저때문에 형님을 부른 것 같은데요.”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영문을 알수 없는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그녀는 그의 팔을 놓았다. 문득 그동안 줄곧 기피하고 싶었던, 그러나 궁금해서 견딜수 없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만일...만일 말이죠. 제가 이태후마마의 소생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고로 선택할수 없는 인연이 바로 천륜이거늘.”

 “그 천륜이, 변할수 있으면요?”

 

 그는 눈을 들어 조용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역시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려니.”

 “형님께서 원하시든 원하시지 않든, 세상일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그의 표정에 한결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혹 나때문인가.”

 “글쎄요. 단지 형님때문...만은 아니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방금전만 해도 다정하게 반겨맞던 꽃들이 금세 축 처져있었다. 몸을 감싸던 따뜻한 봄바람도 왠지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명부의 감시가 항상 지척에 있음을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녀는 눈을 들어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언젠가는 소상히 말씀드릴께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그녀의 말에,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저에 대해 궁금하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일텐데요.”

 

 그녀가 방긋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이젠 널 있는 그대로 믿고싶어서.”

 "절 말씀이신가요? 그러면 지금까진 절 믿지 않았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둘의 다정한 대화가 끝나기 바쁘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공주님…공주님…”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령이였다. 아침에 산책하러 나간다고 처소를 빠져나왔는데 용케도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령이의 급한 모습에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

 

 “불과 반나절 떨어져 있었는데 그렇게도 내가 그리운 게냐.”

 “이태후마마님께서 이공자님을 지금 영화전으로 오시랍니다.”

 

 서은의 미간이 살짝 찌푸러졌다. 그녀는 곤혹어린 표정으로 령이를 바라보았다.

 

 “아침에 영화전의 궁녀들이 어마마마께서 사람 만나는 일을 당분간 미룬다 했는데, 그래서 이공자님도 몇일 뒤 본다 하셨는데 어찌 지금 갑자기 오라고 한다더냐.”

 “네, 근간에 옥체 미령하시어 내명부 모든 일을 이틀 미루시겠다고 말씀하셨사옵니다. 하지만 지금 영화전에서 궁인을 보내와서 이같은 명을 전했으니 어서 그리로 가셔야 하옵니다.”

 

 그녀는 힐끗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아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영화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나고자 하는 분이 부르시는데, 왜 저를 보십니까.”

 “…”

 

 그의 침묵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담담히 그를 보았다.

 

 "가보십시오. 기다려왔던 순간이지 않습니까."

 "...약조를 하였다."

 "원한을 내려놓겠다는 약조였지, 만남을 포기하겠다는 약조는 아니지 않습니까."

 “혹여 내가 태후의 심기를 거슬러, 지금까지 힘써준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어떡하겠느냐.”

 

 그녀는 가만히 눈을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후자의 눈동자에 비친 걱정이 그녀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설사 일이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저는 형님이 지금 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아픈 마음을 치유하겠습니다."

 "..."

 "정녕 어마마마와 원한이 있다면, 어찌 그러셨냐는 질문정도는 할수 있지 않을까요.”

 “…”

 “만일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어찌 그 의혹을 풀겠습니까.”

 

 그녀의 담담한 말에, 그의 눈빛에는 번민에 모대기는 고통 같은 것이 얼핏 스쳤다. 그녀는 안온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번민이 무엇때문인지 잘 아는 그녀는 고마우면서도 한편 죄스러운 느낌이었다.

 

 만일 그녀가 이태후와, 그리고 이 명황실과 실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라는 것을 그가 안다면, 그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녀의 사색을 중단하며 그가 살짝 구겨진 표정으로 말했다.

 

 “넌 나로 하여금…가끔씩 할말을 잃게 만드는구나.”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잠시 처소로 돌아가 준비를 하겠습니다. 한시진후 영화전 문앞에서 뵙겠습니다.”

 “그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만 불렀다.”

 “어차피 저도 작별인사를 드리려던 참이어서."

 

 그녀가 뭔가 더 말하려는데 령이가 앞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분...이태후마마님을 뵙고나서 말씀을 하셔도 될터인데…궁인이 다녀간지 한식경도 더 되었습니다.”

 

 그녀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를 응시하다가, 그가 몸을 돌려 궁인을 따라가는 것을 본 후에야 령이를 따라 처소로 향했다.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영화전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좀전의 이여백의 표정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러게 왜 하필 나는 이태후의 소생으로 환생했을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영화전 대문에 이르자, 호위무사들이 문득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성태후마마님의 명이십니다. 지금 중요한 사람을 만나고 있는 중이니 그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않으신다 하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그만 처소로 돌아가십시오.”

 

 서은은 머리를 돌려 령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령이에게 말했다.

 

 “너는 먼저 돌아가 있거라.”

 “하오나…”

 “듣지 못했느냐, 어마마마의 명이시다.”

 

 령이가 불안한듯 머리를 끄덕였고, 서은은 고개를 돌려 호위무사들을 보았다.

 

 “난 어마마마께 하직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공주마마...”

 “이리 막는다면 우리 모녀는 영영 생리별을 할터인데, 너희들이 그걸 감당할수 있겠는가.”

 “그...건...”

 “비켜라.”

 

 그녀의 추상같은 호령에 호위무사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령이에게 머리를 끄덕여 보인 후 천천히 영화전으로 걸어들어갔다.

 

 영화전 마당은 물뿌린듯 조용했다. 서번(西番)의 불상(佛像)을 모신 영화전은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두터운 이태후가 자녕궁에 있을 때 자주 가서 거주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녀가 영화전 안뜰에 이르자 크다란 보리나무 두그루가 유표하게 눈에 띄였다. 그리고 그 보리나무 사이에 탑상을 놓고 단정하게 앉아있는 이태후와, 이미 그녀 먼저 당도하여 그 앞에 서있는 이여백의 모습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서은은 다가가서 머리를 숙였다.

 

 “어마마마…”

 

 이태후가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왔다. 찌릿…하고 온몸이 전율할 정도로 냉혹한 눈빛이었다. 서은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이여백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녀는 이태후를 향해 만복을 했다.

 

 “소녀 자성태후 마마를 뵙고 인사 드립니다.”

 

 이태후는 얼굴을 흐렸다. 그녀가 이태후의 호를 부른 것은 명백한 도발이었고, 이태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태후는 그녀를 보다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영화전 마당에 무사들이 몰려들어 금세 그들을 에워쌌다.

 

 “이 무슨 무엄한...!”

 

 자신들을 철통같이 에워싼 무사들을 둘러본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태후를 보았다. 이젠 어느정도 황궁 생활이 익숙해진 그녀는 화가 치밀수록 냉정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마마마.”

 

 그녀는 이태후를 향해 허리를 폈다. 이태후가 궁궐에서 무사를 동원했다는 사실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문죄하겠다는 이태후의 굳은 의지이기도 했다.

 

 "어찌 이러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비록 손에 아무런 무기도 없었지만, 그의 건곤대나이 보법으로 포위를 빠져나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터. 하지만 그는 아까부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형님은 어서 가십시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속삭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발견했다. 에워싼 무사들 사이로 반짝이면서 날아오는 털끝같이 가느다란 그것…순간 그녀의 머리속이 하얗게 비었다.

 

 독침…저 독침이 어떻게 궁궐에 나타날수 있을까…미처 정신 차릴 사이 없이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독침이 그들의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고, 이태후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바보 같으니.”

 

 누구를 향한 욕인지 알수 없었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한 그림자가 휙 스쳐지나는가 싶더니 언제 다가왔는지 이태후가 탑상옆을 떠나 그들앞에 서있었다.

 

 서은은 눈을 크게 뜨고 이태후를 보았다. 만력이 무예에 능한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대궐 깊은 곳에서 어린 황제를 키우느라 노심초사한 이태후가 지금 만력이나 이여백 처럼 탁월한 경공(轻功)을 펼쳐 보이는데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태후의 손이 번뜩하자 두번째 독침이 그들을 꼿꼿이 향해 날아왔다. 눈깜짝할 사이었다.

 

 그 순간 서은은 보았다. 그들을 보는 이태후의 입꼬리가 비정하게 말려올라가 있음을. 뒤미처 그녀는 누군가의 힘에 의해 한쪽으로 멀리 튕겨나갔다. 그녀는 머리를 돌리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형님!”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쓸쓸한 기색이 스쳤다. 어느샌가 그의 목앞에 서슬 푸른 검날이 가로놓였다. 뒤이어 이태후가 손을 들자 검이 그의 목으로 바싹 다가가 붉은 피자국을 검날에 묻혔다.

 

 무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그를 나꿔챘다. 쟁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품속으로부터 은잠 두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태후는 입꼬리를 올리며 또 한번 싸늘하게 웃었다.

 

 “감히 공주를 이용하여 이 나라 태후를 해하려 들다니. 내 만일 준비가 없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어떤 참담한 일이 벌어졌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어마마마…”

 

 그녀는 이태후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검으로 제압된 그는 잠시 시선을 내려 은잠을 보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이태후를 보는 그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스쳤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지만...”

 “뭣이?”

 “참으로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

 

 그제야 땅에 떨어진 것이 은잠임을 확인한 이태후의 시선에 잠시 의혹이 스쳤다. 그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태후의 뒤에 서있는 보리나무쪽에 시선을 주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은 또한 받침대가 없느니…”

 “...”

 “...본디 없는 사물에, 티끌 먼지 있을까.”

 

 이태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보았다. 그런 이태후를 바라보며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또한 기억하지 못하시겠지요."

 "..."

 "어머님이 평소 즐겨 읊으시던 혜능스님의 계(戒)입니다. 불교에 심취하신 마마님도 유왕부에 계실때 이 계를 좋아하셨구요."

 "..."

 "이것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

 "어머님의 유언입니다."

 

 이태후는 천천히 검을 내렸다. 그녀가 하도 망연한 기색으로 서있자 서은은 이여백의 곁으로 다가가 비단 명주수건을 꺼낸 후 그의 목언저리 상처에 대었다.

 

 "불교 사찰을 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보리나무를 심은들 그 마음이 평안을 찾을수 있겠습니까..."

 

 이태후를 향한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돌려 얼핏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이태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무릇 수행(修行)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맑은 마음으로 바른 습관을 기르는 것인데, 혜능스님의 계처럼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먼지낄수 없고, 오염된 마음은 아무리 갈고 닦는다 한들 정화될수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태후의 경직된 얼굴은 얼마 안지나 금세 평온을 회복했다. 그녀는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네가 본 것과 생각한 걸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단정짓지 말거라.”

 “네?”

 “자고로 독선과 오해는, 자신의 눈과 머리를 너무 믿는데서 생기는 것이니.”

 “오해라니요…”

 

 그녀는 허탈한 마음으로 이태후를 바라보았다.

 

 “독침을 쓰는 자객…전 그동안 줄곧 오라버니께서 보낸줄로 오해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어마마마셨군요."

 "..."

 "어쩐지...고륵성에서 누르하치의 가족이 독침에 목숨을 잃은 일을 오라버니께서 모르신다 했습니다."

 "..."

 "오라버니의 친정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동안 어마마마께서 노고가 크신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손에 피를 묻히는 일도 서슴치 않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

 “하긴...예나 제나 정치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하오나 어마마마께선…제가 그 독침에 맞을 수도 있었다는 걸 알고 계시옵니까. 또한 이 일이 제게 얼마나 큰 타격을 줄 것인지 단 일순간이라도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

 "이것이 바로 황실이겠지요. 이것이 바로 이미 수중에 들어있는 것을 지키려는 황실 어른들의 처사겠지요…"

 

 그녀는 말을 중단했다. 그녀의 전생인 서안공주가 애초에 왜 수은을 삼켜 자결을 해야 했는지, 그리고 왜 이생과 황궁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거부했는지...그녀는 비로소 알수 있을 것 같았다.

 

 이태후가 시선을 들었다. 이태후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무표정했고, 그 무정함이 그녀의 가슴을 살짝 아프게 했다.

 

 구경 무엇일까, 이태후를 이토록 냉혹하게 만든 것은. 심지어 자신의 소생인 서안공주에 대해서도 꼬물만치도 긍휼의 마음이 없는 것은 대체 어떤 이유때문일까. 머리를 쳐드는 그녀의 의혹을 뭉개버리며 이태후가 불현듯 호령했다.

 

 “뭣들 하느냐. 죄인을 끌어내지 않고.”

 

 “뭣들 하느냐. 짐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고.”

 

 문득 울리는 호통소리에 다들 문쪽을 바라보았다. 영화전 문안으로 수많은 금의위 무사들을 대동한채, 황포차림의 젊은 황제가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서은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차분히 떴다. 영화전을 들어서기전 처소에서 령이에게 미리 시켜놓은대로 만력에게 소식을 전한 그녀의 계책이 효험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이태후를 바라보니, 그동안 쉬이 감정을 보이지 않는 이태후의 얼굴이 만력을 보는 순간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석양이 보리나무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이태후의 얼굴에는 마지막 노을 한점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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