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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서 만난 그대
작가 : 판도라
작품등록일 : 201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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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병
작성일 : 19-10-18     조회 : 327     추천 : 0     분량 : 14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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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서은의 말을 듣고 이여백이 말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잔뜩 노기가 어렸다.

 

 “설마 방금 아버님께서 무슨 말을 한 것인가. 그래서 지금 이러는 건가.”

 “아버님이 아니에요. 제 생각일뿐이에요.”

 

 그녀는 차마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말했다. 그가 잠깐 한숨을 내쉰 후,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다정함이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껏 보지 못한 냉정한 표정으로, 그는 그녀를 이윽토록 보다가 말했다.

 

 “난 네가…적어도 네가 내 종자기쯤은 되어줄줄 알았는데.”

 “…”

 “어떻게 네가 내 마음을 모를수가 있는지…나치야를 거절한 것, 공주를 거절한 것…이 모든 것이 단순히 복수라는 일념에 남여의 일을 멀리한 것이라 생각하느냐.”

 “…”

 “기억하느냐, 언젠가 말했던 적이 있었지. 익수가 삼천이라도 난 그중 한바가지만 취한다고.”

 “…”

 “내게 소중한 건 너 한사람뿐이다. 이미 네가 있는데 다른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건 있을수 없는 일이거늘.”

 

 지금 제게 이런 말을 하면 저는 어찌해야 할까요. 어찌해야 당신이 제 말을 듣고 따를수 있을까요...

 

 “그런 허황한 생각을 버려. 아황과 녀영은 신화일뿐이다. 나는 네가 아니면 아니 된다. 아니, 너 하나만으로 내 생은 족하다.”

 “제발…”

 

 그만...그녀는 입속말로 웅얼거렸다. 그녀의 눈에 잔뜩 물기가 어렸다. 그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가슴 한가득 불안과 감동이 몰려들었고 그것은 곧 뜨거운 것이 되어 그녀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잠시후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우선 제 말을 먼저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부터 싸늘하게만 느껴지는 바람이 그녀의 몸을 엄습했다. 그녀는 한참 그를 주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요동 총병인 아버님의 처경은 둘째 치고라도, 요동의 전란과 나치야의 운명, 이건 꼭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저희 일만 생각하실수 있단 말입니까.”

 “그게 우리 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그는 여전히 의혹이 가셔지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또 한번 한숨을 내쉰후 그를 똑바로 보았다.

 

 “어찌 상관이 없겠습니까.”

 “…”

 “저는 형님께서 이 세상 선비들이 감히 따를수 없는 충효인의(忠孝仁义)를 갖추고 있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로 당신을 설득해야 하는 제자신이 너무 싫습니다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형님.”

 

 저는...어쩔수 없습니다.

 

 “그래, 어디 말해보아라.”

 

 그가 이마를 구기며 하는 재촉에, 그녀는 서글픈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형님께서 나치야를 취하지 않으시면, 누르하치에게 일가 도륙을 당한 니칸외란은 몽고에 서찰을 띄워 만주를 침입하게 할 것이며, 그리 되면 형님 부자에게 요동 방위를 맡긴 폐하의 뜻을 저버리는 것으로 이는 불충의 죄입니다.”

 “…”

 “니칸외란은 몽고에 서찰을 띄운후 폐하께 장계를 올려 아버님이 건주 방위에 힘쓰지 않고 누르하치를 방치하여 요동의 안정을 깨뜨렸다고 모함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 아버님을 노리는 세력에게 아버님이 그 어떤 탄핵이라도 받으신다면 이는 형님의 불효입니다.”

 “…”

 “나치야는 일찍 형님과 혼담이 오간 사이로서 설사 지금 그 혼담을 파기했다 해도 피차 붕우(朋友)의 감정은 남아있을 것이며, 이런 나치야를 거절해서 나치야가 그 아비에게 죽임이라도 당하거나 남은 생을 고통에서 허덕이게 된다면 이는 형님의 인자하지 못함입니다.”

 “…”

 "민일 일이 여의치 않아 요동의 전란이 시작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면, 이 또한 형님께서 한몸을 사려 형님의 소신만 지키려 하고 요동 백성들의 고난을 헤아리지 않은 것이니 어찌 감히 의롭다 하겠습니까."

 "..."

 "저는 형님께서 불충, 불효, 불인, 불의를 감수하면서 그 혼인을 거절하는 것은, 한낱 작은 것을 위해 큰 것을 잃는 지극히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 사료되옵니다.”

 

 그녀의 일장설화가 끝나자 그는 머리를 들어 조용히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흔들림 없는 표정에 한가닥 야릇한 기색이 스쳤다. 그렇게 웃는듯 마는듯 미묘한 표정을 하고 그가 그녀를 깊이 주시했다.

 

 "우리 감정이, 네겐 한낱 작은 것이었구나."

 

 이게 아닌데...살짝 당황해진 그녀를 보며 그가 말했다.

 

 “나는, 나치야가 누르하치를 연모하는 것을 알고 고륵성 성밖 영채에서 그녀를 누르하치에게 보내주었다. 붕우로서 그녀에 대한 인의가 충분했다.”

 “…”

 “만일 몽고가 침입하면 우리는 사력을 다해 막을 것이고, 아버님이 탄핵을 받지 않도록 조정에 전후시말을 아뢰는 장계를 올릴 것이다. 폐하께서는 도륜성 성주보다 요동 총병을 믿을 것이다.”

 “…”

 “니칸외란의 협박이 아버님한테 먹힐지는 몰라도, 아직 출사하지 않은, 그리고 공명에 뜻을 두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아야 하거늘.”

 “…”

 “소위 대의를 위해 소신을 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于人)는 말을 모르느냐.”

 

 할말을 잃은 그녀는 불퉁한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형님께서도 말씀 하다싶이 천하에 유백아는 한사람뿐이 아니고, 종자기 또한 한사람뿐이 아닙니다. 유백아는 종자기 말고도 고산유수를 연주할줄 아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죽은 종자기에겐, 유백아가 한사람뿐이지 않는가.”

 

 덜컥…가슴이 내려앉는 감을 느끼며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죽다니…하필이면 또 죽음을 거론하다니…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는 그녀를 깊이 주시했다.

 

 “불안하느냐.”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달빛아래 그의 눈빛이 유난히 투명하게 빛났다.

 

 “아직 날 믿지 못해서…그래서 불안하냐 말이다.”

 

 그녀는 다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그제야 시름을 놓은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되었다. 그래도 너의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형님…”

 

 무슨 말을 더 하려는 그녀에게,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제지시켰다.

 

 "먼길의 노곤도 풀리지 않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 지체하고 있었으니…이리 허황한 말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터."

 "..."

 "오늘은 일단 쉬고 내일 다시 얘기하는 건 어떠냐."

 "알겠습니다. 먼저 쉬십시오. 저는 좀 더 앉았다 들어가려구요."

 

 설득이 쉽지 않은 건, 알고 있었습니다...시간을 좀 더 갖도록 하죠. 저는 꼭...당신을 설득해야만 합니다.

 

 그런 그녀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인 후 그가 정자를 내려갔다. 그의 절륜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보다 더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서 그녀의 몸을 스쳤다.그녀는 오싹 몸을 떨었다.

 

 “얼마 안지나 초복일텐데 무슨 바람이 이렇게도 찰까…”

 

 옷섶을 여미는 그녀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 바쁘게 누군가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아까부터 바람을 일으켰는데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는군.”

 

 음산한 어조였다. 머리카락이 쭈볏 일어설 정도로 냉혹하기조차 했다.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 목소리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릴수 있었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올 거라는 생각도 했던 그녀였지만 의외로 빠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벌써 된 것일까.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땅에서 솟은 듯 홀연히 그녀 뒤에 서있는 염라대왕은 그녀를 보자 빙긋이 웃었다.

 

 “절, 데리러 온 것입니까.”

 “나를 기다렸더냐.”

 

 염라대왕은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며 염라대왕을 주시했다.

 

 “한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염라대왕은 미간을 구겼고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제게 준 마음을 거두어갈수 있겠습니까.”

 

 염라대왕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는 뭔가 사색하는 듯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건 왜 묻는 것이냐.”

 “왜 묻는지 아실 거 아닙니까. 그러니 알려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그런 비참한 결말을 피할수 있는 겁니까.”

 “넌 네가 무슨 말을 하고있는지 알고는 있는 것이냐.”

 

 염라대왕의 말이 바람을 타고 냉랭하게 들려왔다.

 

 “네 목적을 잊었느냐. 넌 네가 살던 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네, 그랬었지요…하지만 지금은 제가 원하는 것보다, 제가 원하지 않는 바램이 더 커져버렸습니다. 저는 저 사람이 그런 삶을 사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발...도와주십시오.”

 

 그녀의 간절한 어조에, 염라대왕은 한참동안 침묵했다.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저는 그리 했고, 또 그리 할것입니다. 그러니 제게 방도를 대어주십시오. 저는 저 사람을 그리 살게 하고, 그리 죽게 할수 없습니다.”

 

 차라리 제가 돌아갈수 없거나, 그것이 안된다면 제가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못다한 말이 그녀의 눈빛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윽고 고요한 밤장막을 깨뜨리며, 염라대왕이 물었다.

 

 "만일 내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명부는 저의 적이 되어야지요. 역시 눈빛으로 그녀는 말했다.

 

 “네 감히 명부와 대항하여 역사를 바꿀 생각이냐.”

 “필요하다면 그리해야지요.”

 

 그녀의 서슴없는 대답에, 염라대왕은 딱딱하게 말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겠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천기를 누설해서는 안된다, 역사를 바꿔서도 안된다…이렇듯 모든 것을 구속하는 삶인데 더이상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녀가 드디어 불만을 터뜨리자, 염라대왕의 목소리는 한결 더 냉정해졌다.

 

 "내가 왜 천기를 누설하거나 역사를 바꾸면 안된다고 하는지 아느냐?"

 "..."

 “천기를 누설하면 한사람이 죽지만, 기재된 역사를 바꾸면 모두가 죽을수도 있다.”

 “네?”

 

 염라대왕의 말을 듣자 뭔가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바로 그것인가. 말로만 전해듣던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한단 말인가. 그녀의 그런 의혹을 증명하는 듯, 염라대왕이 그 뒷말을 이었다.

 

 "나비효과라고...들어봤느냐."

 “네…카오스 이론의 나비효과…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이어, 염라대왕이 천천히 말했다.

 

 "비록 타인의 몸을 빌어 재생한 것이지만, 그래도 넌 분명 시간여행자다."

 "..."

 "자고로 시간여행자로서 가장 기피해야 하는 일이 바로 역사에 변화를 주는 일이지 않느냐. 예를 들어 과거로 온 시간여행자가 자신의 조상을 죽인다면, 현세에 있는 본인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

 "역사에 영향을 줘서 이에 의한 모든 사회관계가 변화를 가져올수도 있고, 혹은 그 어떤 역사사실이 일어나지 않아 현세의 모든 것이 사라질수도 있지."

 "..."

 "내가 너더러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는 것은, 바로 역사의 흐름을 알고 역사에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 한사람이라도 적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허나 평행우주 이론이 있지 않습니까.”

 

 염라대왕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하던 그녀는 자신이 아는 천체물리학 지식을 떠올렸다.

 

 "바로 시간여행의 결과로 생기는 모순은 모두 평행우주에 의해 해결되고 있다는 이론이지요."

 "..."

 "예를 들어, 과거에 온 시간여행자가 자신의 부모를 죽여도, 자신이 있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다른 미래가 생길 뿐이며, 현세의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명부에 나비효과의 이론이 적용된다면, 평행우주의 이론도 분명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지금 제가 누르하치를 죽이면, 제가 있는 현시대에는 누르하치가 청태조로 기록이 되어있겠지만, 저의 영향으로 인한 또 다른 차원의 우주에는 누르하치도, 청나라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녀의 차분한 말에 염라대왕은 흥 하고 냉소했다.

 

 “네 말대로 평행우주가 생긴다고 가정을 하자. 너의 영향으로 평행우주가 생기면 네가 되돌아가는 그 현세는 너의 영향으로 변화된 그 우주일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너의 지인, 너의 부모들까지 다 지금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를터이니 과연 네가 그것을 감당할수 있겠느냐."

 "..."

 "또한 평행우주의 생성으로 인간세상 뿐만아니라 천상과 명부 역시 대혼란을 겪게 될 것이니 나는 결코 이를 허용할수 없노라.”

 “대왕님께서 허용할수 없다 하여…”

 

 그녀는 꼿꼿이 머리를 들고 말했다. 조금 냉정해진 그녀의 두뇌가 그녀의 음성을 한결 침착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염라대왕에게 시선을 주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이대로 물러설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

 "단지 역사 그대로를 완성시키기 위해, 명부에서는 죽은 서안공주 대신 현세에서의 저의 사고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작위적인 역사에 제가 조금 더 변화를 준다 한들 그 무엇이 잘못이겠습니까.”

 “뭣이?”

 

 염라대왕의 노기띈 목소리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정녕 나비효과가 있다면 현세에서의 제 운명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병원 어딘가에서 혼수상태에 빠져있을 저와 제 주위 사람들의 운명은 어떤 변화가 있게 되는 것입니까."

 "그건..."

 "어찌 과거의 변화는 두려워 하시면서 미래에 주는 영향은 생각지 않으시는 겁니까. 제가 살던 그 시대 또한 미래로 놓고 말하면 또 하나의 과거가 아니겠습니까. 어찌하여 명부는 과거의 기록에만 집착하고 현재와 미래의 일은 전혀 념두에 두지 않으십니까."

 “그…그건...”

 

 어쩐지 당황한 듯한 염라대왕의 말을 자르며, 그녀가 냉정한 어조로 그 뒷말을 이었다.

 

 "그건 명부의 소관이 아니고 대왕님의 능력범위밖의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즉 대왕님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있는 분께서 이 모든 것을 좌우지 하는 것이겠죠."

 "..."

 "어쩌면 제가 두려워하는 것보다, 대왕님께서 두려워하는것이 바로 제가 선택해야 할 길인듯 합니다. 명부는 명부대로 기존의 역사를 완성시키는데 최선을 다하십시오. 저는 저대로 역사를 바꾸어 대체 어떤 평행우주가 열리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네 정녕..."

 "네, 그렇습니다. 정녕 제가 정해진 팔자를 거스르겠습니다. 이젠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새로운 제 운명을 열어가겠습니다."

 

 여기까지 말하자 그 어떤 무거운 짐을 부려놓기라도 한듯, 그녀는 마음이 개운해졌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역사의 흐름대로 완성되어가는 이유는, 명부나 그 이상의 세력이 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기때문이란 걸 그녀는 깨달을수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그녀는 명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그래서 2년의 시간을 채우기 전까지는 그녀가 앞당겨 돌아가는 일도 애당초 없었는지도 몰랐다. 이 기간동안 그녀가 어떻게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든지 명부와 그 이상의 세력은 그것을 수습할 능력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염라대왕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하거라. 영영 돌아가지 못할수도 있다. 아니 언제라도 죽을수도 있다. 정녕 그래도 후회하지 말거라."

 "..."

 "천리를 거스르고 명부를 능멸한 죄, 내 따로 기회를 타 네게 톡톡히 물을 것이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녀가 조용히 응수하는 가운데, 염라대왕의 탄식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휘익 하는 소리가 들렸고 염라대왕의 모습은 싸늘한 바람 한줄기와 함께 밤장막으로 사라졌다.

 

 ......

 

 “큰일이야…나치야아가씨가 목을 메었대.”

 

 밖에서 나는 떠들썩한 소리에 서은은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밤 피곤해서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도 온밤 염라대왕과 설전을 하느라 아직도 정신이 흐려있던 참이었다. 그래서인지 문밖에서 나는 소리도 흐릿하게 들려왔다.

 

 “다행이 소홍이 일찍 발견하여…”

 

 소홍이란 어제 정원에서 보았던 나치야의 시비인 모양이다. 그녀는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옷을 껴입고 방문을 나섰다. 시비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수군거리다가 그녀가 문을 나서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아씨님, 벌써 기침하셨습니까.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굴어 송구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목을 메다니?”

 

 그녀의 의아한 모습에, 시비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소홍이 일찍 발견하고 구해서 무탈하다 하옵니다.”

 “가봐야겠구나.”

 

 그녀는 치마를 걷어쥐고 종종걸음으로 나치야의 처소를 향해 걸었다. 대나무숲이 가까워 오자 정원 안으로부터 니칸외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속에는 나치야의 울음소리도 간간히 섞였다.

 

 “아버지…소녀 불효막심하여 망극한 일을 저질렀으니 과도히 상심치 마시옵소서…”

 “원치 않는 혼사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애비의 늙은 목숨을 봐서라도…그리고 도륙당한 일가를 위해 복수하기 위해서라도…마음을 굳건히 해야 하지 않겠느냐?네가 어찌 그런 옥생각을 할수 있다더냐.”

 “송구합니다…아버지…”

 

 나치야의 흐느낌소리에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선자리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조용히 정원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을 가로질러 방안으로 들어서자, 니칸외란이 나치야를 마주하고 앉아 눈물을 주룩주룩 쏟고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를 발견한 나치야는 놀란 얼굴이 되었고, 니칸외란은 고개를 돌리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냐…넌…”

 “아버지…경성에서 내려온 저의 지인입니다.”

 

 나치야가 급히 니칸외란의 소매를 잡아당기자, 니칸외란은 눈을 흡뜬 채 부르르 수염을 떨었다.

 

 “경성에서...설마 어제 가마를 타고 들어온?”

 “서은이 성주님을 뵙겠습니다.”

 

 그녀가 살짝 만복의 예를 행하자, 니칸외란은 한켠으로 머리를 돌렸다.

 

 “이 늙은이에게 그런 예를 갖출 필요 없소이다. 인사를 받을 생각은 더더욱 없고.”

 “아버지.”

 

 나치야는 당황한 모습이었고, 서은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문안만 하고 가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 앞으로 다가서서 나치야의 손을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저는 무탈하오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괜한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하옵니다.”

 

 나치야가 다소곳이 하는 말에, 그녀는 쓸쓸한 생각이 들어 얼굴을 돌려버렸다. 다행이다 싶었다. 자결을 하면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명부의 규정이 머리에 떠올랐다. 만일 죄값을 치르면 나치야는 윤아로 환생할수도, 후세에 그녀와 친구로 될수도 없지 않은가.

 

 “참으로 바보같으십니다…”

 “네?…”

 “어찌 경망되이 목숨을 버린단 말입니까.”

 

 그녀의 나지막한 책망에 나치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만 일시 생각이 돌지 못하여…”

 

 나치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니칸외란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혹여 내 딸이 죽지 않았나 확인하러 오신게 아니오…”

 “아버지…”

 

 나치야가 다시 그의 말을 중단하자 니칸외란은 몸을 일으켜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서은은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눈을 들어 나치야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어제 제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아항과 녀영을 효칙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임도련님 마음은 알겠지만…도련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나치야가 참담하게 웃었다. 밤새 눈을 붙이지 않고 옥생각까지 해서인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무연하게 입을 열었다.

 

 “아황과 녀영의 눈물이 대나무에 얼룩이 질 필요 없이, 우선 제 피로 대나무를 물들이고 싶었습니다…다만 염라대왕이 용무가 바빠 저를 데리러 오지 않았나 봅니다.”

 

 염라대왕…문득 한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감을 느끼며 서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어제 염라대왕을 만나게 된 건 바로 나치야의 일때문이었을까.

 

 역사에서 나치야가 누르하치의 부인 명단에 올라있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바로 그녀의 죽음때문이였을까. 만일 그렇다면 어제밤 염라대왕은 자신과의 대화에 시간을 빼앗겨 그만 나치야의 목숨을 거둬가는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정녕 그렇다면…

 

 “바로 그것입니다!”

 

 그녀가 느닷없이 하는 말에, 나치야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운명 말입니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건, 우리가 스스로 만들수 있습니다.”

 

 나치야의 눈이 더 커졌다. 하긴 그녀절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말이 두서없긴 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나치야의 초점없는 눈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흥분을 눅잦히고 나치야를 향해 말했다.

 

 “솔직히 어제까지만 해도…저는 운명에 몸을 맡기려는 당신의 생각을 찬성하지 않으면서도, 저 역시 그 운명에 대항하는 방법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는 숨을 들이킨 후 나치야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린 충분히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정할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분명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나치야…당신도 더이상 자포자기 하지 마세요. 분명 지금보다 훨씬 좋은 날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제게 무슨 앞날이 있단 말입니까.”

 

 나치야의 힘없는 대답에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런 비관적인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분명 방법이 있습니다. 절대 이대로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나치야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여전히 멍해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나치야에게 몇마디 살뜰한 말들로 더 위로를 해준 다음 그녀는 나치야의 처소를 나섰다.

 

 후원을 벗어나 앞채쪽으로 향한 그녀의 귀에 문득 떠들썩한 소리가 전해졌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대청을 가로질러 앞마당으로 나가자, 대청앞 대문안에 화려한 가마가 한채 놓여져 있는것이 보였다. 가마앞에서는 여진의 옷차림을 한 기세등등한 교군군 몇명이 이성량의 군졸들과 대치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총병님이 나오시기전에 당장 물러가시오. 여기서 야료를 부리면 군법으로 다스리겠소.”

 “총병님께서 지금 추장님의 호의를 몰라주시는 게요?”

 

 교군군들 가운데 우두머리인듯한 자가 거들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린 총병님을 직접 뵙기전엔 절대 물러가지 못하겠소.”

 “무슨 일입니까.”

 

 그녀는 제일 뒤에 서있는 대청의 군졸에게 물었다. 군졸이 머리를 돌려 그녀에게 대답했다.

 

 “누르하치가 보낸 사람입니다.”

 “누르하치?”

 “가마에 사람을 보냈는데…글쎄 총병님께 첩으로 드리는 계집아이라고 합니다…누르하치의 동생 수르하치의 딸이라고 하는데 총병님이 이를 아시면 꼭 진노하실 겁니다.”

 “총병님은 어디 계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군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밤 지병이 도져 후원 처소에서 아직 기침을 못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침에 도련님께서 오늘은 의원외에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총병님을 경동치 말라는 분부도 계셨습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후원으로 되돌아왔다. 연못 맞은편에 있는 이여백의 처소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누르하치가 동생 수르하치의 딸을 총병부에 보냈던 일은 그녀도 미리 알고있는 역사상의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성량과 누르하치의 관계가 완전히 깨어지고, 요동 총병에 대한 누르하치의 도발이 시작된 것이라고 후세는 전하고 있었다.

 

 만일 이 한단락의 역사를 바꾸려면 지금 누르하치의 기염을 눌러야 했고, 또 그러려면 지금 병환에 누워있는 이성량 대신 누군가가 나와서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이여백의 처소에 들어서서, 외출복 차림으로 문밖으로 나서는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느닷없는 그녀의 등장에 그는 잠시 주춤했다.

 

 “웬 일이냐.”

 “대청은 저리 소란스러운데 형님께선 이리 편안히 잘 계시는군요. 그리고 지금 대체 어딜 가시는 겁니까.”

 

 그녀의 딱딱한 물음에 그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봉선각에.”

 “봉선각?”

 

 그녀의 높은 목소리에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잠깐 볼일이 있어서.”

 “되었습니다. 지금 일단 그걸 따질 시간이 없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우선은 대청으로 나가서 그 무례한 교군군들을 쫓아버리십시오. 병중의 아버님을 놀래키지 마시고…”

 “교군군?”

 

 그는 미간을 구긴 채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조급해졌다.

 

 "지금 누르하치가 여인을 보내어 아버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이건 누르하치가 총병부에 대한 도발입니다."

 "..."

 "그들을 쫓아버리지 못하고 아버님을 놀래키게 되면 돌이킬수 없는 후과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니 형님께서 이를 막아야 합니다.

 

 그는 잠시 의혹어린 표정을 지었다.

 

 “누르하치의 야심은 지금 시작이 아니었다. 아버님께서도 이를 알고 계실테고.”

 “하지만 누르하치의 진정한 도발은 지금부터입니다.”

 “그게 뭐. 어차피 도륜성의 일로 아버님께서도 출병을 검토하고 계실터.”

 "그래도 누르하치와의 관계가 지금 깨어져서는 안됩니다."

 

 그의 여유에 그녀는 한결 더 초조한 얼굴이 되었다.

 

 "만일 지금 누르하치와 버성겨서 헤투알라성을 공격하게 되면,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을 견제하는 헤투알라성의 힘이 약화되어 지금처럼 여진의 분란이 아닌 여진의 통일이 이루어질지도 모릅니다."

 "..."

 "그것이 아버님께서 니칸외란의 협박을 받으면서까지 지금껏 출병을 주저하는 이유입니다."

 "..."

 "헤투알라성이 무너지면 누르하치는 맹고의 고향인 예허에 가서 나린부루와 손을 잡게 될 것입니다. 나린부루와 힘을 합치면 여진의 통일은 떼놓은 당상입니다. 지금 아버님께서 주력하시는 일이 요동 여진인의 힘을 분산시켜 요동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아닙니까. 만일 여진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누르하치는 우선 먼저 요동을 정복하고 연달아 중원까지 침범할수 있습니다."

 "..."

 "형님께서 잊고 계셨습니까…저의 예지능력을."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에 그가 머리를 들었다. 그는 그녀를 깊이 주시하다가 피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

 "당신 언변은 춘추시기 소진,장의라도 울고 갈터.”

 “제 말이 틀렸는가요?”

 

 그녀가 빙긋 웃자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틀린 게 아니니 반박할 여지도 없군.”

 

 말을 마친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대청에 가있어. 옷을 갈아입고 바로 나갈테니까.”

 

 다시 대청앞으로 돌아온 그녀는 가만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문득 떠오르는 의혹 하나가 그녀의 안도감을 다시 불안감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봉선각엔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잠시후 그런 그녀의 사색을 중단하며, 대청앞에서 귀에 익은 침착한 목소리가 울렸다.

 

 “누르하치가 보낸 것이냐.”

 

 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길게 내리드리운 옷깃과 소매에 검은 색을 두른 학창의 차림의 이여백이 대청에 나타났다. 그 모습은 평소의 절제된 모습과는 달리 초연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 절륜한 모습에 금박을 박은 접선을 우아하게 펼쳐들고, 그는 우두머리가 되어보이는 교군군에게 의연한 태도로 말했다.

 

 “누르하치에게 묻노니, 무릇 혼인이란 매파를 보내 의사를 묻고 길일을 택해 납채를 보낸후 그 예식을 치르는것이 순서가 아니더냐.”

 “저어…그건 추장님께서…”

 “또한 아무리 첩을 들인다 해도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는 것이니, 총병부에서 십여년이나 자란 누르하치가 중원 관혼상례의 예의범절을 익히지 못한 것이냐.”

 “도련님의 뜻은…”

 “너희들이 아무리 여진인이라 하나 총병부에 와서는 총병부의 법도를 지켜줘야 할 것이다.아버님께 효도하는 누르하치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필히 사람을 보내 먼저 말을 떼라고 전하거라.””

 “네에…도련님.”

 

 교군군이 대답하자 이여백은 문득 미소를 지우고 쌀쌀한 어조로 우두머리 교군군에게 낮게 말했다.

 

 “그리고 또 전할 말이 있다.”

 “…”

 "누르하치가 예허와 손을 잡고 도륜성까지 공략했으니 총병부가 가만있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이리 선손을 쓰는 것임음. 내 알고도 구태어 따지진 않겠으니 더이상의 소란은 허용하지 않겠다."

 "소란이라니요. 소인은 그저..."

 "중원의 예의에 익숙치 않은 여진인들은 오늘 일을 알면 총병부에서 헤투알라성의 호의를 무시한다고 여겨 분란이 일 것이다. 허나 내가 만일 너희들의 오늘의 만행을 소상히 기록하여 요동의 백성들에게 먼저 고시하면 어떻겠느냐.”

 “소인의 무례함을 용서하시옵소서. 이 일은 추장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추장님은 다만 가마만 호송하라 명하셨을뿐입니다.”

 

 우두머리가 당황해서 무릎을 꿇었고, 이여백은 얼굴에 차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 교화(敎化)를 받지 못한 민족이라 이쯤 하고 말 것이나, 추후에 다시 이런 일을 벌인다면 먼저 너의 목을 치고 나중에 헤투알라성에 전할 것이니 그리 알거라.”

 "..."

 "알겠느냐, 어찌 대답이 없느냐. 수르하치."

 “네…네…소인네들…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여백의 느닷없는 호명에 얼굴색이 크게 변한 우두머리는 교군군들을 데리고 가마와 함께 줄행랑을 놓았다. 마당에 모였던 군졸들은 이여백을 향해 일제히 몸을 굽혔다.

 

 “오늘 둘째도련님이 아니었으면 일이 어떻게 번질지…소인들은 생각만 해도 두렵습니다.”

 “앞으로는 대문간수를 잘하되 아버님이 병중에 있는 기간 방문객은 일일히 내게 고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군졸들이 흩어지자 이여백은 대청안으로 들어갔고, 서은은 가슴 한가득 의혹을 품고 그뒤를 따라들어갔다.

 

 “형님, 어찌 교군군 우두머리가 바로 누르하치의 동생 수르하치인줄 아셨습니까.”

 "교묘하게 변장하긴 했으나 전에 헤투알라성에서 본적 있는 얼굴이라 기억에 남았다. 또 어린 딸을 호송하는 일이라 아비된 자가 어찌 따라오지 않겠느냐."

 "그렇군요..."

 "누르하치가 성급하긴 해도 그렇게 예의를 모르진 않아. 총병부에 가마를 보낸 것이 도발의 뜻이긴 해도, 아직 아버님께서 대노하셔서 출병하기를 원하는 건 아닐터."

 "그럼 왜..."

 "다만 자신이 대거 출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지. 누르하치의 목적은 그것 하나, 하지만 누르하치보다 좀 더 난폭한 수르하치는 기어이 아버님을 진노케 하고 싶었지."

 “전에는 아버님 혼자 충분히 누르하치를 대적할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누르하치의 세력이 점차 커지고 아버님 또한 환후에 계시니 형님께서 전보다 마음을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쩌면 지금의 성숙되고 안정된 누르하치를 대적할수 있는 사람은, 반생을 말안장에서 지내면서 출병과 전장에 능란한 이성량보다, 그 어떤 궤계에도 흔들리지 않고 상대방의 목적을 간파하여 정확히 허를 찌를줄 아는 그가 더 적합할지도 몰랐다.

 

 "굳이 오늘 의상에 힘을 준 이유도 따로 있습니까."

 

 눈을 들어 그녀의 청정한 시선을 마주한 채, 그는 접선을 접으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어찌 없겠느냐."

 "..."

 "이로서 총병부의 부화사치는 여진에도 다소 알려진터. 다음번 진상품은 여인보다 보물이 더 좋겠구나."

 "..."

 "천성이 검소한 누르하치가 보물을 모으려면, 몽고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느냐."

 "누르하치의 목표를 따돌리는데 그 이유가 있었군요."

 

 그녀가 웃자 그가 다시 접선을 펴고 천천히 흔들었다.

 

 "이미 총병부에 자신의 용기를 밝혔으니, 당분간은 몽고쪽으로 세력확장을 할 것이다. 몽고가 누르하치의 공격을 받으면 제아무리 니칸외란이 충동질을 한다 해도 쉽사리 동하지 않을 것이니."

 "참으로 좋은 환병지책입니다.그래서 말인데요, 형님..."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그녀는 언제부터 품고 있었던, 자신의 마음속 생각을 드디어 입밖으로 내뱉었다.

 

 "형님께서 요동 총병이 되어주십시오."

 

 그가 얼핏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의 의혹어린 눈길을 담담히 마주한 채, 그녀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 모든걸 바꿀수 있는 방법은…그것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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