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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서 만난 그대
작가 : 판도라
작품등록일 : 201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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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0-19     조회 : 297     추천 : 0     분량 : 13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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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이건 무엇이냐.”

 

 새벽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려올 때, 어렴풋한 방안 정경이 눈에 들어온 모양으로 이여백이 입을 열었다. 노곤해서 잠시 눈을 감으려던 서은은 이여백의 시선을 따라 베개옆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러다 그의 의혹어린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그건.”

 

 그가 손을 뻗어 그것을 가져오려 하자,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그 물건을 등뒤로 감췄다.

 

 “안됩니다.”

 “아직 숨기는 것이 이리 많아서야.”

 

 그가 잔잔하게 눈꼬리를 휘였다. 그녀는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시고 뭐라 하실까봐…”

 “뭐라 하지 않을테니 얼른 보여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천천히 그것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흰 깁에 둘러싸인 다소 딱딱한 물건이었다. 그가 깁을 풀어헤치자 그 딱딱한 것에 뭔가 차거운 광택이 비쳤다. 그는 잠깐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그녀를 다시 보았다.

 

 “뭐냐…”

 “단검입니다. 저번에 검을 꺽으신 후 그 일부분을 간직하였습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녀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제게는 소중한 것이니 갖고있게 해주십시오."

 

 그는 한숨을 내쉰 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화초나 지분을 좋아해야 할 여인의 몸으로 단검을 지니고 있다니."

 "..."

 "혹 적을 만나 무기가 없을까 염려되면 내 따로 마련해주마."

 “그런 게 아닙니다. 이 단검은…제게는 너무 소중한 당신의 약조였습니다. 그 약조를 잊지 않고자…”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경성밖 수림에서 생사를 약조하는 그의 태도는 줄곧 그녀를 불안하게 했고, 그녀는 단검을 간직하는 것으로 그의 운명을 바꾸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굳히는 중이었으나 그것을 입밖에 낼수는 없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이젠 일어나셔야죠.”

 

 그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왜 벌써 일어나.”

 

 그녀는 또 한번 얼굴을 붉혔다. 얇은 속옷을 사이두고 등에 닿은 그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첫닭이 홰를 치고있습니다. 윗분들께 문안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식된 도리를 어찌 그리 잘 알지.”

 

 그가 웃으면서 하는 말에 그녀는 살짝 머리를 돌렸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틀리진 않아. 다만 아내된 도리도 그렇게 잘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서방님도 참.”

 

 그녀가 새침한 얼굴이 되자 그는 그녀의 몸을 돌려 자신을 마주보게 했다. 그의 아름답고 단단한 가슴을 마주한 그녀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잠시 허둥댔다.

 

 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합니까.”

 “니칸외란때문에…나치야때문에…네게 정당한 명분을 주지 못해서.”

 “잊으셨습니까. 이 모든건 저때문에 벌어진 것이고 제가 당신을 핍박한 것입니다.”

 

 그녀는 머리를 들고 그에게 담담히 웃어보였다.

 

 “지금이 최선입니다. 당신에게나 제게나..."

 

 마음 한구석에 짐이 있다면 서로에게 올인하기 힘들테지요. 허면 제가 돌아가는 시간도 앞당겨지진 않겠죠.

 

 그녀는 고개를 저어 어수선한 생각을 털어버린 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다 해가 중천에 뜨겠습니다. 앞채로 가서 문안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먼저 가서 폐하를 뵈어야 한다.”

 “오라버니께선 앞채에 계신 게 아닙니까.”

 “비밀리에 후원 별채로 모셨다. 이틀전 니칸외란이 나치야를 데리고 친지를 만나고 온다 하였으니 당분간은 후원에 경성에서 손님이 온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럼 일단 저 혼자 가서 아버님과 식솔들을 뵙고 인사 드리겠습니다.”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는 먼저 그를 도와 만력을 알현할 의관을 갖추었다. 중의를 단정히 여며주고 도포를 찾아 입혀주는 그녀의 귀가에 대고 그가 속삭였다.

 

 "가서 인사만 하고 방으로 와서 기다려."

 "..."

 "긴히 할 얘기가 있느니."

 

 고개를 들자 그의 선연한 눈빛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에게 그가 머리를 숙이는가 싶더니 곧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재촉했다.

 

 "어서 가보십시오."

 "어찌 이리 재촉이 심할까."

 "오라버니께 저도 곧 가서 문안 드리겠다 전해주세요."

 

 그를 배웅한후 그녀는 손수 단장을 하고 최대한 수수한 의복으로 갖춰 입었다. 그리고는 밖을 향해 물었다.

 

 “지금이 언제냐.”

 “진시(辰時,아침 7~9시)가 지났습니다. 둘째아씨님.”

 

 그녀는 서둘러 문을 나섰다. 앞채로 가서 대청안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줄느런히 앉아서 담소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들어서자 모두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복잡한 시선들속에서 니칸외란의 날카로운 눈길과 나치야의 초점없는 눈빛을 발견하고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사람들의 주목하에 그녀는 이성량이 앉아있는 좌석앞으로 다가와 정중히 만복의 예를 올렸다.

 

 “아버님. 아침문안이 늦어 송구하옵니다.”

 “괜찮느니. 아가…헌데 여백은 어딜 가고 너 혼자냐.”

 

 그녀는 이성량의 말가운데 숨은 뜻을 알아듣고 차분한 어조로 그의 말을 받았다.

 

 “서방님께선 무예를 수련하느라 잠시 출타하셨습니다 . 특히 소첩을 먼저 보내어 죄를 청하라 하였으니 부디 아버님께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위로 어른들이 이리 와계신데 아무리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한들 어찌 예의도 갖추지 않는 것이냐. 어험.”

 

 이성량은 짐짓 소리를 높여 꾸짖고 다시 좌우를 향해 두손을 맞잡았다.

 

 “평소 자식을 종용하여 이런 꼴을 보이게 되었으니 부디 그대들은 웃지 말고 앞으로 이 사람을 본받지 마시게.”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총병님께서 겸양하셨습니다.”

 

 좌중이 웃으면서 응수하는 가운데 니칸외란만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무예를 게을리 하지 않는 점은 요동의 남아들이 흔히 있는 일이오나, 일개 소첩마저 총애만 믿고 지아비가 자리를 비운다 하여 아침문안을 게을리 한 것은 흔하지 않사옵니다.”

 “며늘아가가 근자에 몸이 약해 일찍 기거를 못하니 성주는 너그러이 생각하시게.”

 

 이성량의 대꾸에 니칸외란은 냉랭하게 웃었다.

 

 "소인이 총병님의 말꼬리를 잡자는 것은 아니지만, 총병님께 며늘아가는 제 딸아이 하나뿐으로 알고있사온데 어찌 이런 말실수를 하시는지..."

 "그건..."

 

 니칸외란은 이성량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인이 총병부 자제분이 첩을 들이는 일에까지 왈가왈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혼자의 예우를 받고싶다는 것이온데 오늘과 같은 모욕과 박대를 당한다면...”

 “인사…올리겠습니다.”

 

 이성량이 다시 입을 열기전에 서은은 니칸외란을 향해 급히 허리를 굽혔다.

 

 “소첩이 불미하여 문안이 늦어진 점 송구합니다. 부디 착석하시어 소첩의 인사를 제대로 받으십시오.”

 “정 그렇다면...”

 

 니칸외란은 못이기는척 자리에 앉았다. 그의 입꼬리가 야비하게 말려 올라갔다.

 

 "내 오늘 제대로 된 문안인사 한번 받는다면 이같은 모욕과 박대를 잊을만한데...문안인사는 여진의 식으로 말이오. 괜찮겠소?"

 

 니칸외란의 말에 이성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진의 식이라면 혼례를 한 이튿날 아침 신부가 상하 일가 여러 친척들에게 일일히 차를 권하는 일이라는 것을 요동지방 사람들은 잘 알고있었다. 니칸외란이 일부러 이성량을 난처하게 굴려고 이런다는 것을 서은은 알아차렸다.

 

 "성주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녀는 의연한 얼굴로 자신을 따라온 시비에게 차를 가져오라 명한 후, 손수 차반을 들고 이성량부터 시작해서 차를 붓기 시작했다. 여진의 풍속이 번거롭기는 했지만 니칸외란을 눅잦히려면 결코 경거망동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니칸외란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차를 부은 후 두손으로 차잔을 공손히 받쳐들었다.

 

 “성주님께 문안 드리옵니다. 차를 받으십시오.”

 “...”

 

 갑자기 니칸외란이 손을 내밀어 차잔을 탁 쳐버렸다. 쟁그랑 소리와 함께 차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어지고 차물이 서은의 치마에 튕겼다. 그녀는 깜짝 놀라 니칸외란을 보았다. 니칸외란은 그녀를 통채로 집어삼킬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고, 그옆의 나치야는 낯색이 하얗게 질려 이 상황을 바라볼뿐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성주님께서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혹여 소첩이 뭔 실수라도 하였습니까.”

 “어찌 차를 올릴 때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오?”

 “니칸외란!”

 

 이성량이 노기띈 목소리로 부르자, 니칸외란은 이성량을 향해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리 어제 정식 혼례식을 올렸다 하여도 납채, 친영 등 절차를 밟지 아니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는 분명 정실로 들어올수 없는 신분을 가졌기 때문이겠지요. 기왕 소실로 들어온 이상 앞으로도 주종 관계가 엄연해야 합니다. 제 딸아이는 정혼자입니다. 정혼자의 아비인 저한테 무릎을 꿇는 것이 가당하지 않겠습니까."

 "..."

 "식솔이 늘었으니 총병부의 기강은 지금부터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인의 요구가 과분한 것입니까."

 “아버지…그만하세요.”

 

 나치야가 체념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친지분들이 보고 계십니다. 이젠 그만 끝내십시오.”

 “나치야, 넌 나약해서 허구한 날 울고만 있지만 이 아비는 그렇지 않느니라. 누가 내 딸의 눈에서 눈물을 빼면 난 그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을 빼낼 것이야.”

 

 니칸외란은 서은을 노려보며 말했다. 서은은 허리를 굽 히고 묵묵히 깨어진 차잔을 거두었다. 니칸외란이 얄밉긴 해도 이 순간 나치야에 대한 부정(父情)은 진심이라고 생각되었다. 머리를 돌려 이성량을 바라보니 그 역시 자못 안타까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담담한 어조로 니칸외란에게 말했다.

 

 “소첩이 여진의 법을 알지 못해 무례함을 범하였으니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녀는 다시 차 한잔을 따른후 한손으로 천천히 치마자락을 잡았다. 그리고는 살풋이 만복의 예를 행했다.

 

 “이젠 차를 받으실수 있겠습니까.”

 

 서은의 행동에 나치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서은의 마음도 편치 못했다. 니칸외란에게 이용을 당하고 자신의 행복은 희생해야 하는 나치야, 친구를 닮은 그녀에 대해서 서은은 줄곧 이름 못할 동정심과 안쓰러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서은은 누르하치에 대한 나치야의 감정을 분명히 알면서도, 역사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녀를 이여백에게 맺어주려는 자신의 이기심이 부끄러워졌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만사를 불구하고 나치야를 도와 누르하치와의 인연을 맺어주었으리라. 만일 나치야가 윤아였다면…

 

 “차를 받으십시오…나치야.”

 

 윤아를 꼭 닮은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만일 오늘의 일이 없더라도 언젠가는 나치야에게 사죄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그것이 방식을 달리하여 앞당겨 졌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내렸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그바람에 또 한번 바닥에 떨어져 산산쪼각이 난 차잔 조각을 힘주어 밟으며, 한 훤칠한 인영이 좌중의 눈앞에 나타났다.

 

 “…!”

 "가자."

 

 이여백의 낮게 깐 목소리였다. 그녀는 흠칫 놀라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그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을. 그는 그런 눈길로 잠시 그녀를 보다가, 대청의 이성량과 니칸외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채 그녀의 손목을 다시 잡아챘다.

 

 “여기서 뭐하는 거냐? 어서 가자.”

 

 그녀는 미처 어쩔새없이 그에게 끌려나갔다. 그에게 잡힌 손목이 사뭇 아파와서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그는 굳어진 얼굴로 후원에 이른후에야 비로소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그토록 다정했던 어제밤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한심하구나.”

 “?”

 “뭐하는 짓이냐?”

 “…”

 "대체 그들이 뭐길래…니칸외란과 나치야가 뭐가 되어서 네가 이토록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이냐."

 "서방님..."

 "아버님도 그렇지만 너도 똑같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도 수단을 가리지 않고 싶은가."

 “무슨 말을 그렇게!”

 

 그녀가 참지 못하고 반박하자 그는 홱 고개를 돌렸다.

 

 "아주 지긋지긋하다. 아버님도 타협만 하시더니 너까지 지금 이게 뭐냐고."

 "제 말을 좀..."

 "차라리 폐하께 이실직고해서 니칸외란을 감금하고 몽고의 침범을 미연에 방비하면 뭣이 문제 되겠느냐!"

 “누르하치요.”

 

 그녀의 말에 그는 이해 안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누르하치?”

 "네, 바로 누르하치가 문제입니다."

 "..."

 "지금 우리에게 제일 큰 적은 니칸외란도, 몽고도 아닌 바로 누르하치입니다.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만든 사람도 누르하치구요. 누르하치가 도륜성을 도륙내지만 않았더라면, 니칸외란이 나치야를 데리고 총병부로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

 "지금 아버님께서 몽고의 침범을 최대한 막으려 하는 것도, 그동안 길렀던 요동의 힘을 몽고에 분산시키면 세력이 커지는 누르하치를 견제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

 "아버님도…굽히고싶어 굽히는줄 아십니까. 시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아서 잠시 타협하는 것뿐입니다. 어찌 저같은 한낱 아녀자도 아는 도리를 서방님께서 모르신단 말입니까.”

 

 모를리가 없다. 다만 이 모든 것을 알고 감당하는 그녀가 안쓰러워 화를 낸다는 것을 그녀 역시 잘 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그였고, 화내야 할 사람은 그녀였다.

 

 "지금 누르하치를 막을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 뿐입니다. 이대로 두면 요동은 누르하치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요동뿐만 아니라 중원까지 범하게 되겠지요. 그런 누르하치를 막아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그것 또한 잘 아시겠지요.

 

 그는 미간을 구긴채 그녀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그를 묵묵히 보면서, 그녀는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가슴 깊숙히 삼켜버렸다.

 

 지금 요동 총병이 되어 누르하치를 막지 않으면…역사에 기재된대로 명은 청에 의해 몰락되고, 당신은 누르하치와의 사르후 대결후 쓸쓸히 자결하게 되겠지요...

 

 "그건 제가 절대 두고 볼수만 없는 결과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녀는 앞으로 한걸음 다가서며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티없이 맑고 간절한 눈빛에 그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

 

 “네 죄를 알겠느냐!”

 

 별채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만력이 큰소리로 호통쳤다.이여백의 뒤를 따라 방안에 들어선 서은은 영문을 알수 없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오라버니…서방님...”

 “서안아, 총병부에서 공주 신분으로 예우해주지 않는 것까진 짐도 뭐라 하지 않겠다. 이건 네가 택한 길이었으니. 허나 어찌 네게 부인의 명분조차 주지 않았던 게냐.”

 “오라버니께서 참으로 소식이 빠르십니다.”

 

 그녀가 빙긋 웃자 만력은 크게 이마를 찌푸렸다.

 

 “짐은 지금 농을 할 기분이 아니다.”

 “오라버니께서 서방님의 죄를 물으시기전에, 차라리 제게 그럴듯한 신분이라도 하나 만들어 주시든가요.”

 

 그녀는 만력을 향해 태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만력은 절레절레 머리를 가로저었다.

 

 “일국의 공주가 신분을 버리고 요동까지 따라왔다면, 총병부에서 네 신분을 감춘다 해도 마님이나 아씨에 합당한 예우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역시 봉건시대 군주라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만력은 이여백을 돌아보았다.

 

 "짐은 이 일에 너의 뜻을 알고싶을 뿐이다.”

 “폐하께서 소인에게 뜻을 물으신다면,”

 

 이여백은 만력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담담하게 말했다.

 

 "창해는 물이 되기 힘들고, 무산외엔 구름이라 할수 없사옵니다.(曾經滄海難爲水,除卻巫山不是雲.)"

 "서방님도...새사람 웃는 소리에 옛사람 우는 모습 보이지 않는 게 맞는거죠.(只闻新人笑,不见旧人哭)"

 

 그녀가 웃으면서 말을 받자 이여백이 쓸쓸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나는 깨진 옥이 될지언정 완전한 기와장으로 남진 않으리라(宁为玉碎,不为瓦全)."

 

 만력은 어흠 헛기침을 하면서 둘의 대화를 중단했다.

 

 “지금 짐을 앞에 두고 감히 둘이 문자를 희롱할소냐!"

 "오라버니는 그 호칭부터 좀 어떻게 하십시오."

 

 그녀의 가벼운 핀잔에 만력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어제는 너의 좋은 날이라 참았고 오늘은 아침부터 별렀거늘 네가 이 오라비의 마음도 모르고 사람을 김빠지게 하는구나."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녀는 찻잔에 차를 따라 만력에게 권하며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정사를 뒤로 한채 불원천리 요동으로 오신 사실에 저는 이미 감읍하고 있사옵니다. 하오니 더이상 절 위해 뭔가 하지 마시고 이만 고정하시옵소서."

 

 만력은 길게 한숨을 내쉰후 다시 이여백을 노려보았다.

 

 "오늘은 네가 운이 좋은줄 알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만력이 되었다는 뜻으로 손을 내젓자 이여백은 시선을 들어 만력을 보았다.

 

 "오늘 아침 소인을 부르신 게 이 일때문이십니까."

 "그건 아니고."

 

 만력은 잠시 차를 입에 가져다 대다가 미간을 구겼다.

 

 "이게 총병부에서 제일 좋은 차냐?"

 "상등 차이긴 하지만 최고급은 아닙니다."

 

 이여백의 차분한 말에 만력은 얼굴을 크게 찡그렸다.

 

 "어찌 최고급을 내오지 않는단 말이냐..."

 "총병부에 이목이 많아 매사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폐하께서 주의하셔야 하는 것이 비단 호칭뿐만이 아닙니다."

 "이래서 여염에서는 집나오면 개고생이라 하였구나."

 

 만력이 한탄하는 소리에 서은과 이여백은 서로를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

 

 "몽고가 중원을 침범한지 30여년이 지났어도 중원은 몽고라면 아직도 벌벌 떨고 있다. 영원백이 몽고를 진압해 위엄을 떨쳤지만 단지 영원백 혼자 힘으로는 부족할까 염려되어 겸사해서 왔노라."

 

 차를 물리고 아침상을 받으며 만력이 말했다. 다행이 상에는 요동의 특산과 별미가 푸짐하게 차려져있어 만력의 얼굴은 금세 화색이 돌았다.

 

 "너희들의 생각엔 몽고를 제압할 힘이 또 어디에 있을고."

 

 상에 놓인 꿩다리를 집어들며 만력이 물었다. 서은은 이여백을 바라보았고 그는 만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인의 소견으로는.”

 

 만력이 계속 말하라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누르하치가 이 일의 적임자인줄 아뢰옵니다.”

 “누르하치?”

 "네. 몽고는 자고로 여진과 마찬가지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어 그 세력이 분산되어 있습니다. 소인이 알기로는 누르하치가 해서와 교분을 맺는 방법은 바로 화친이라고 합니다. 여진인은 예로부터 여러 부족을 공략하고 그 부족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 부족간의 동맹을 결성합니다."

 "화친이라..."

 "만일 폐하께서 지금 칙서를 내려 누르하치로 하여금 몽고의 작은 부족을 먼저 공략하게 하면 그들 또한 여인을 내주어 화친을 도모할거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지면 앞으로 그들이 요동을 침입한다 해도 우선 먼저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흠…”

 

 만력은 머리를 숙이고 한참 생각에 잠겨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누르하치의 세력이 커지면 어떡하겠느냐.”

 "거기에 대처방법이 따로 있습니다. 폐하께서 칙서를 내리실때 누르하치에게 공격과 화친의 양면적인 전략을 제시하시면 이를 견제할수 있을 것입니다. 일찍 징키스칸 시절에 몽고가 만주를 들이쳤기에 많은 여진인들이 학살을 당했다 하옵니다. 그러니 그 후대인 누르하치도 몽고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할 거라 사료되옵니다."

 "..."

 "또한 여진인과 몽고인은 다 기마민족이라 그 성품이 잔인합니다. 칙서를 꾸밀때 우선은 공격하고 나중에 화친하되 화친을 원하지 않는 부족은 조공을 바치게 하십시오. 일단 공격을 하게 되면 여진인 역시 잔포한 성격이라 몽고인들을 가만 나두지 않을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몽고의 일부 부족은 누르하치를 경계하게 되고 일부 부족은 그 기세에 억눌려 잠시나마 항복하게 될 것이나 이들은 결코 누르하치의 세력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만력은 머리를 들고 이여백을 깊게 주시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네, 폐하…하문하시옵소서.”

 “왜 지금까지 정국에 관심이 없는척 하였느냐.”

 “소인…생각이 짧고 아는 것이 적어 폐하의 시름을 덜어드릴수 없음이 항상 유감이옵니다.”

 “흥…”

 

 만력은 꿰뚫어 보는 듯한 눈길로 이여백을 바라보았다.

 

 “짐이나 황실에 도움을 주기 싫어서는 아니고.”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이여백이 침착하게 대답을 하자 만력은 되었다는 듯 소매를 저었다.

 

 “이만 알겠다. 이제 경성에 돌아가면 곧 칙서를 내리겠노라. 그리고…”

 

 만력은 잠시 서은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이여백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앞으로라도 저 아이가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항상 조심하거라. 내 서안의 일이라면 백번이라도 요동에 올수 있으니.”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원백이 은퇴를 요구하는구나. 내 허락하지는 않았으되 그 뜻도 잘 아느니 이제 경성에 돌아가면 바로 교지를 보내주마."

 

 이여백이 시선을 들었다. 서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우선은 너를 요동 부총병으로 임명하여 네 아비를 보좌케 할 것이니 그때 가서 더이상 사양하면 그 죄를 엄히 다스릴터. 알겠느냐.”

 

 이여백은 대답대신 서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만력에게 말했다.

 

 “만일…앞으로 행여 소인이 총병직을 맡게 된다면 아버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뭐가 어떻게 될 것이 있느냐. 달이 차면 이지러지고 해가 차면 기울게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자 세상의 법칙이거늘."

 "..."

 "그리고 영원백은 설사 은퇴하더라도 백작의 작위가 있지 않느냐.”

 

 말을 마친 만력은 머리를 돌려 서은을 보았다.

 

 “이번에 이렇게 와서 네 혼례를 보았으니 시름을 놓았구나. 궐에 계신 어마마마께서도 네 일로 시름이 깊단다.”

 “어마마마…”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만력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든…그분께선 우리를 낳아 기르신 어머니가 아니더냐. 앞으로도 종종 소식을 전하거라.”

 “네에.”

 

 그녀의 대답에 만력은 얼굴을 펴며 크게 웃었다.

 

 “듣자니 요동지역이 수렵에 좋은 땅이라 하더군. 더우기 이 아침상을 보니 손발이 근질거려 견딜수가 없구나.”

 

 만력의 말에 둘은 어안이 벙벙해서 만력을 보았다.

 

 “폐하께선…바로 환궁하는 것이 아니셨습니까.”

 “무슨 소릴.”

 

 만력은 이여백의 물음에 호탕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쩌다 빠져나온 궁인데 왜 그리 빨리 돌아가겠느냐. 그렇게 알고 좋은 말을 몇필 준비해두거라. 운이 좋아 담비를 수렵해 가면 어마마마께 좋은 털옷을 선물할수도 있으니 그 또한 아들로서의 효도가 아니겠느냐.”

 

 서은은 다시 이여백을 보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 내색도 내지 않고있어 가슴 한가득 의혹을 품고 별채를 물러나왔다.

 

 ……

 

 신방으로 향할 때까지 이여백은 종잡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그녀 역시 눈치만 살피다가 방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시비들을 밖으로 물렸다. 둘만 남게 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를 보았다.

 

 “서방…님.”

 

 그는 아무 말없이 그녀를 보았고 그녀는 숨을 들이킨 후 그를 향해 말했다.

 

 "제게 하실 말씀이시라는 건..."

 "너냐."

 "..."

 "아버님의 은퇴를 종용한 사람 말이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아버님을 핍박한 것이 맞습니다."

 “…”

 “일전에 총병직을 사퇴하라 제가 요구를 했었습니다…”

 “내가 널...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가 한숨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실망어린 말투에 그녀는 가슴이 철렁하여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일전에도 얘기했었지만..."

 "..."

 “범상치 않은 네 재주는 내 일찍 알고있었다 하였다.”

 “…”

 “하지만 너의 야망까지는 미처 알지 못한 부분이다.”

 “말씀이...과하십니다.”

 

 그녀는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는 급히 말을 내뱉었다.

 

 “야망이라니요…어찌…”

 "아까는 폐하 앞이라 함구했지만..."

 "..."

 "네가 진짜로 변하였구나."

 

 그의 말이 아프게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네 생각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저는…제가 변했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부풀어버린 오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그녀가 체념조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의 오해에 화가 치밀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저는 처음부터 저였습니다. 서방님께서 저를 잘못 알고 계셨겠지요.”

 “그래, 그 말이 맞는 듯 하다.”

 

 그의 차거운 말에 그녀의 눈확에 이슬이 맺혔다. 하지만 그녀는 고집스레 얼굴을 돌려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몸을 돌렸다.

 

 “어쩌면 처음부터…남장을 하고 날 따라온 그때부터…넌 줄곧 그랬었다. 그리도 세상이 우습고 내가 쉬웠던 거냐. 모든것을 네 의지대로 조종하여 움직일만큼.”

 

 그녀의 눈에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등진 채 말했다.

 

 "아버님께 요동 총병직이란 어떤 자리인데…그런 아버님이 네 요구에 대답했다면 그건 또 얼마나 큰 희생을 감내한 건지 넌 잘 모를 것이다."

 "알고...있습니다."

 "알면 그리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총병이 되겠다 하지 않았느냐. 뭘 그리 서두르느냐."

 

 그건...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요...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다만 요동 총병이 되겠다 대답한 건 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였지, 결코 아버님의 희생과 네 요구때문에 그리 대답한 것이 아니였다. 이번 일은 너의 실수다.”

 “서방님.”

 “총명한 사람은 그 총명에 자기 자신이 치이기도 하지.”

 “허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결국 비겁한 자의 변명일 뿐입니다.”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에 잠시 노기가 스쳤다.

 

 "비겁한자라, 지금...반성은 커녕 격장법을 쓰고있는가."

 "제가 반성해야 할 일이 서방님께서 반성하실 일보단 크지 않을 듯 싶습니다만."

 

 방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숨막힐듯한 침묵이 한참 이어졌고 드디어 그가 몸을 돌렸다.

 

 “내 당분간은 걸음하지 않을 것이다. 잘 생각해보거라.”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안의 적막한 공기가 다시 그녀의 몸을 엄습했다. 그녀는 소리없이 그 자리에 무너졌다. 억울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훔칠 념도 하지 않았다.

 

 맹세컨데 이런 식으로 그를 도발하거나 자극주려고 마음 먹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질책에 그녀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그녀는 그를 돌려세우고 그의 오해를 풀어줄만한, 그 어떤 부연설명도 할수 없었다.

 

 그가 사라진 공간을 향해,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을 위한…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제가…이기적으로 보인 건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제게 반성하길 바라는 건가요.”

 

 그녀는 고즈넉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가 기울자 시비들이 저녁찬합을 들고왔지만 그녀는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해가 지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 등불도 켤 생각을 안한 채 그녀는 요지부동으로 한자리에 앉아있었다. 머리속에는 온통 그가 했던 말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총명한 사람은 그 총명에 자기 자신이 치이기도 하지.”

 

 그럴까. 과연 그럴까. 허나 왜 자신만은 마음 가는대로, 내키는대로 세상을 살면 안되는 걸까. 밤이 깊어 그녀가 망부석처럼 굳어질 무렵, 누군가 가볍게 방문을 두드렸다.

 

 “아씨님…”

 “몸이 불편하니 아무도 들이지 말거라.”

 

 그녀는 무기력하게 말했다. 하지만 문밖의 사람은 여전히 집요하게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그녀가 반응이 없자 드디어 문이 삐걱 열리며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그만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불편하니 건드리지 말란데두!”

 “공주님!”

 

 그녀를 향한 환희 섞인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숙했다. 그녀는 급히 머리를 돌렸다. 뒤이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그녀의 눈에서는 크다란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흘러내렸다.

 

 “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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