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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서 만난 그대
작가 : 판도라
작품등록일 : 201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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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0-19     조회 : 311     추천 : 0     분량 : 1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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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폐하께서 출궁하시자 바로 뒤따라 왔습니다. 이태후마마께서 소인을 보내셨읍지요.”

 

 방에 금침을 펴면서 령이가 말했다. 서은은 그녀의 날렵한 동작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자리를 다 펴고 머리를 돌린후 령이는 그녀를 향해 방싯 미소를 지었다.

 

 “제가 궁에 남아 하도 허탈하게 지내니 이태후마마께서 헤아려 주시고 공주님께 보내주시더이다. 광녕성에 들어서자 궁의 호위무사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성안에 들어온후 총병부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너…아주 궁을 나온 것이냐.”

 

 서은은 놀란 눈길로 령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령이에게서 그 어떤 단단한 의지가 보여 그녀는 불안했다.

 

 “식솔은 어찌 하고 나를 찾아왔느냐.”

 “전…식구가 없습니다.”

 

 령이는 허리를 펴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딘가 쓸쓸하게 들려왔다.

 

 “고아로 어릴 때 궁에 뼈를 묻을 각오로 입궁하였으나…공주님이 떠나신후론 도저히 마음을 추스릴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쭉 공주님의 시중을 들게 해주십시오.”

 “령아…”

 

 서은은 앞으로 다가가 령이의 손을 꼭 잡았다.

 

 “너는, 너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만일…만일…내가 여기를 떠난다면 넌 어떡하겠느냐.”

 “저도 같이 떠나겠습니다.”

 

 령이는 그게 뭐가 어렵냐는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제 생활은 공주님을 떠날수 없습니다. 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오니 제발 저를 쫓지 말아주십시오.”

 “쫓는 것이 아니다.”

 

 서은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령이를 끌어 앉혔다.

 

 “우선 내 말을 들어보거라. 내가 아는 세상은…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사람들 모두가 평등하며 그 누구든지 다른 한 사람을 위한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난 네가…이제부터라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긴 어려우나…”

 

 령이는 살짝 눈웃음을 지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음생에…다음생에 태어나면 진정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겠습니다. 그러니 이 생은 부디 공주님을 위해 살게 해주십시오.”

 

 령이는 말을 마치자 마당의 등불을 끄러 나갔고, 서은은 그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너까지 왜 이래…너까지 이러면...내가 더 힘들어지잖냐…”

 

 령이의 시중을 받아 잠자리에 누운 그녀는 뒤치락 거리면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백의 쌀쌀한 태도가 눈앞에 얼른거렸다. 그리고 방금전 령이의 말도 귀가에 맴돌았다. 명부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염라대왕도 불안했고, 정혼자의 빈 이름만 바라며 총병부 후원의 한쪽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고있을 나치야도 속에 걸렸다. 그녀의 무거운 한숨소리에 령이가 살그머니 그녀의 자리옆에 다가왔다.

 

 “제가 같은 방에 있어 불편하신지요.”

 “불편하긴. 지금 네가 와줘서 다행이야.”

 

 그녀의 말에 령이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뭔가 발견한듯 새삼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전엔 여긴 침상을 놓았는데, 신혼방을 꾸미시느라 이렇게 방으로 놓으신 건가요.”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네가 이런 방은 처음 보느냐.”

 “네, 휘장으로 두른 넓은 침상은 보았어도, 이렇게 방을 다 틔워놓고 방바닥에 그대로 잠자리를 펴는 방은 처음입니다.”

 "요동은 추운 지역이라 간혹 이렇게 방을 놓아서 겨울을 보낸단다. 난 이런 방이 좋아서 이참에 새로 꾸민거고."

 

 그녀의 말에 령이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손벽을 쳤다.

 

 “그러고보니 이태후 마마께서…자녕궁이 불탄후 새로 마련한 거처에 이런 방을 만들었다고 다른 나인들에게서 들은적 있습니다. 모녀간에 취향도 닮으셨습니까.”

 “이태후 마마께서?”

 

 그녀는 머리를 흔든후 심드렁하게 령이의 말을 받았다.

 

 “닮긴 뭐가 닮았다고 그래.”

 “공주님은 모르실 겁니다. 공주님께서 궁을 떠나신후 나인들끼리 전한 말이 있습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공주님은 갈수록 이태후 마마님의 성정을 닮아 가신다구요.”

 “궁인들이 내 뒷담화를 한 걸로 들리네.”

 

 그녀가 피씩 웃자 령이는 황급히 두손을 내저었다.

 

 “저희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뒷담화를 하겠습니까.”

 “어느 안전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뒷담화를 했겠지.”

 

 그녀가 웃으면서 말하자 령이는 앵돌아져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다가 한식경도 안되어 다시 이불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공주님.”

 “왜에.”

 “저는 공주님께서 행복하게 지내실줄 알았는데…”

 

 령이가 말끝을 흐리자 그녀는 고개를 령이에게 돌렸다. 희미한 달빛을 빌어 령이의 눈에 살짝 물기가 차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네가 하고싶은 말이 무엇이냐.”

 "아까는 왜 낙루하셨습니까."

 "..."

 "도련님께서…정혼자가 따로 계셔서 그러십니까."

 “소식이 빠르구나…벌써 그것까지.”

 "제가 누굽니까. 전에 여기 있을때 친한 시비들이 여럿 됩니다."

 "그래...밟이 넓어서 좋겠다."

 

 그녀가 웃자 령이는 집요하게 캐물었다.

 

 "정녕 그것때문에 상심한 것입니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까 왜 눈물을 보이신 겁니까."

 “널 보니 새삼 반가와서 그랬지.”

 “제가 그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습니다.”

 

 그녀는 더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령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공주님께선…참으로 강한 성정이십니다. 그러고도 이태후 마마님을 닮지 않았다 하시렵니까.”

 

 그녀는 뭐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 안지나 령이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피씩 웃다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이틀이 지났지만 이여백은 과연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주구장창 방안에만 박혀있는 그녀에게 령이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도련님께선 정녕 이대로 발길을 끊을 예정이신지요.”

 “…”

 “혹시…이참에 정혼자인 그분과...”

 “쓸데없는 소리.”

 

 그녀가 면박을 주자 령이는 주춤했다가 다시 말했다.

 

 “공주님께서 한번 도련님의 처소로 가보시는 건 어떤지요. 아니면 제가 문안인사 드릴 겸 도련님을 찾아뵙겠습니다.”

 “괜한짓 하지 말거라.”

 “그게 어찌 괜한짓이라 하는 것입니까. 부부사이는 다툼이 있다 하더라도 침상은 같이 쓰는 것이라 했습니다.”

 “다 내 잘못이다. 그러니 여기 안오시는 것도 당연해.”

 "공주님의 잘못이라면 더더욱 찾아가 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서 도련님께 사과도 하시고 화해도 하셔야지요."

 "...내가 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란 도리를 공주님은 모르십니까.”

 “네가 뭘 안다고.”

 

 그녀는 픽 웃다가 다시 우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하긴…성인인 공자께서도 불치하문(不耻下问)이라고 하셨고 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꼭 그중에 내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师)고 하셨거늘, 내 너를 허술히 볼 것은 아니구나.”

 “그것 보십시오. 성인 공자님이 오늘의 일을 아셨나 봅니다. 그리고 시경에도 이르기를 요조숙녀, 군자호구(窈窕淑女,君子好逑)라 하였으니 공주님께서도 이젠 강한 성정을 거두고 군자의 짝이 될만한 요조숙녀를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됐다…더 이상 말하게 나뒀다가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论语,孟子,大学,中庸)까지 다 나오겠구나.”

 

 서은이 퉁을 주면서 일어서자 령이가 웃으면서 따라 일어섰다.

 

 “도련님의 침소로 가시렵니까.”

 “아니, 주방으로 가겠다.”

 

 서은은 가볍게 대꾸한 뒤 정원문을 나서 후원의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있던 식모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그녀를 맞았고 그녀는 잠깐 식모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오늘 오후 한시각만 이곳을 내어줄수 없겠습니까. 잠깐 쓸 일이 있어서.”

 “둘째아씨께서 쓰신다면 당장 내어드리죠. 그리고 저희를 쓰실 일이 있으면 바로 부르십시오. 식재료는 어떤 것을 쓰시겠습니까.”

 “다른건 필요없고 광에 넣어둔 언 감자가 있다면 좀 내어주세요.”

 

 식모들이 대답하고 나가자 서은은 령이를 돌아보았다.

 

 “너는 날 도와서 가마에 기름을 달이거라.”

 

 령이는 말없이 두팔을 거두고 나섰다. 그녀는 령이와 함께 한참 주방에서 돌아친 후 찬합을 가져와 손수 만들어놓은 음식을 담았다.

 

 “도련님의 침소로 갈 것이니 넌 처소에 돌아가 있어.”

 

 그녀의 말에 령이는 활짝 웃었다.

 

 "일찍부터 그리 하셨으면..."

 

 그녀가 살짝 눈을 흘기자 령이는 웃으면서 그녀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녀는 찬합을 들고 천천히 이여백의 방으로 향했다.

 

 마침 이여백은 어디 나가지 않고 방에서 서안을 마주하고 뭔가를 쓰고있었다. 그녀가 방안에 들어서자 그는 얼핏 눈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기 바쁘게 다시 머리를 숙이고 쓰던 것을 계속 썼다. 그녀는 조용히 앞으로 다가가서 찬합을 내려놓고 그와 마주앉았다. 그리고 그가 다 쓰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무엇을 쓰고계십니까.”

 “신충일이 서찰을 보내왔기에 회답을 하는중이었다.”

 

 그 역시 담담하게나마 대답을 해주었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 그분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다 하더이까.”

 “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더군.”

 

 서은은 미소를 짓다가 이여백을 쳐다보았다.

 

 “혹 회신을 하실 때 두마디만 더 보태주시겠습니까.”

 “말해보거라.”

 “사람들이 대나무의 지조를 높이 사지만 난초의 청정함도 결코 그 자질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자고로 청정함은 스스로 증명이 될 것이오니 혹여 나중에 세상에 버려지는 날이 있더라도 부디 마음을 깨끗이 하여 후일을 기약하라고 보태주세요.”

 

 그는 서찰 쓰기를 마치고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여긴 웬 일이냐?”

 “시간이 있기에 주방에 들려 서툴지만 음식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녀는 찬합을 들고 서안을 에돌아 그의 곁에 가 섰다.

 

 “초라한 솜씨를 웃지 말아주십시오.”

 

 그녀가 찬합을 열자 그는 안의 음식에 눈이 끌린 듯 했다.

 

 “이건 무엇인가.”

 “감자튀김입니다. 언감자를 기름에 튀겨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녀는 찬합안의 튀김을 꺼내 놓은후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잠깐 한숨을 쉬는듯 하더니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봤느냐?”

 “네?”

 “내가 왜 너한테 화났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방께서 부드럽고 유순한 아내를 바라신다면 저는 그 기대에 못미칠줄로 압니다.”

 

 그녀의 거침없는 말에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저로서는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의지는 없으니 부디 이런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는 잠깐 멍해있다가 곧 얼굴에 노기를 띄고 말했다.

 

 “그동안 반성을 하고있는줄 알았거늘.”

 “반성…”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고로 충언은 귀에 쓴 법이지요."

 "..."

 "꼭 마치 이 감자튀김을 만든 언감자처럼…언감자는 구워먹을수도, 삶아먹을수도 없습니다. 땅밑에서 시커멓게 얼어서 그 누구도 외면하지만 자기 몸을 가루내어 맛있는 음식을 만듭니다. 언감자가 낼수 있는 맛은 보통 감자가 낼수 있는 맛을 초과하고 또 절대 대체할수 없는 것입니다."

 "..."

 "저는 당신이 바라는 아름다운 부용꽃보다, 보기엔 초라하지만 진정 실속이 있는 언감자가 되고 싶습니다."

 "..."

 "그것이 제가 오늘 여기로 걸음한 이유입니다."

 

 그녀의 도전에 그는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언감자는 또한, 소박맞은 여인을 뜻한다. 진정 그래도 괜찮겠느냐."

 

 그녀는 그의 분노가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그는 그녀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붓을 집어들었다.

 

 "대체 너는…널 걱정하는 내 마음은 알기나 하는 것이냐."

 "글쎄요...왜 절 걱정하는지 알지 못할뿐더러 알고싶지도 않사옵니다. 어차피 제 성정이 이러하오니, 서방님께선 부디 다른 부인을 따로 들여 바라던 유순함을 찾으시옵소서."

 

 종이위에서 한창 어지러이 움직이던 그의 붓이 순간 멈칫했다. 뒤이어 그의 손이 종이를 와락 움켜잡았다. 그녀는 서글픈 눈길로 고개를 숙인 그의 냉랭한 얼굴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도 그토록 냉정했다.

 

 "저는 앞으로도 제 뜻대로 제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서방님은 서방님대로 세속을 벗어난 청정한 삶을 사십시오. 저는 당신의 생활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니, 당신도 되도록이면 이런 제 생활을 간섭하지 말아주십시오.”

 

 그의 어깨가 더욱 굳어지는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속되는 침묵속에서 방안의 공기마저 팽팽해 지는 감을 느끼며, 그녀는 정작 하고싶은 말들은 가슴 깊숙히 밀어넣은 후 그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혀보였다.

 

 “그럼 그렇게 알고 전 이만…가보겠습니다.”

 

 그의 분노를 등뒤로 고스란히 느끼며 그녀는 문밖을 나섰다. 하지만 몇걸음 못옮겨서 방안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에 그녀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하거라."

 "..."

 "나도 내 마음 가는대로 할터이니. 더이상 서로 상관 말고 제 갈길을 가면 되겠구나."

 

 탕 하고 방문이 닫혔다. 문득 눈앞이 핑 도는 현훈증을 느끼며 그녀는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는 한참 그 자리에 서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젠 이런 식으로나마 당신을 멀리해야 할줄은…”

 

 굳게 닫힌 방문은 바라보며 그녀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그래...잘 알고있었다.

 

 그가 그녀를 걱정하고 있음을.

 

 그녀 또한 그를 걱정하고 있음을.

 

 하지만 누군가는 명부에 대항해야 하는 것이기에.

 

 이것이 그녀의 숙명이자, 피해갈수 없는 현실이었기에.

 

 지금이 차겁고 냉혹하더라도, 견뎌내야 하는 것이기에.

 

 돌아서며 그녀는 끝끝내 참았던 눈물을 떨구었다.

 

 ......

 

 “저는 공주님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령이가 답답한듯 방안을 거닐었다. 서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을 마주하고 머리를 빗고있었다. 이여백과 냉전을 한지 몇일이 지난 어느날 오후였다. 그동안 령이의 쉬임없는 잔소리는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고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내가 뭘.”

 “화해를 하는가 했더니 그게 무어란 말씀입니까.”

 

 령이는 어이 없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빗을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네가 뭘 안다고.”

 “자초지종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이번은 엄연히 공주님의 잘못입니다. 지금 신혼초기에 기싸움을 하시는 겝니까. 그래서 초반에 이런 방법으로 도련님을 길들일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겝니까.”

 “내게 그런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령이의 흥분한 기색과는 달리 그녀는 사뭇 차분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한참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령이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언제까지 공주님이냐. 이젠 호칭을 달리해야 하지 않겠느냐.”

 “습관이 되어서…아씨란 호칭이 입에 붙지 않습니다.”

 

 령이가 저으기 민망한듯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더니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부축했다.

 

 “요즘 식사도 거르고 계신데 오늘은 죽이라도 좀 드십시오. 금방 후원 주방에서 보내온 것입니다.”

 

 서은이 머리를 끄덕이자 어린 시비들이 바로 상을 차려 들여왔다. 령이는 그녀를 방석에 앉히고 상위의 죽그릇을 들어 숟가락으로 가볍게 저어 식혔다. 서은은 멍하니 령이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돌려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이십니까. 음식이 구미가 당기지 않습니까.”

 

 령이의 의혹어린 물음에 서은은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그릇을 주시했다.

 

 “무엇이냐. 요즘 주방에선 부쩍 죽만 들이는구나.”

 “세상에…그걸 이제야 물으십니까. 원기를 북돋우는 연와(燕窝)죽이 아닙니까.”

 “연와라면…귀한 것인데 네가 궁에서 갖고 온 것이냐.”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며칠전부터 주방에서 들이던데요. 폐하께서 가지고 오신 것인지는 몰라도.”

 

 령이가 식힌 죽그릇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머리를 숙여 그릇을 보았다. 눈처럼 하얀 연와가 한눈에 들어왔다. 얼핏 봐도 궁중의 상등 연와가 틀림없었다.

 

 “이 귀한 것을…오라버니께서 너무 마음을 쓰시니 송구스럽구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온데 이정도도 못해주시겠습니까.”

 “그러고보니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통 문안도 드리지 못했구나.”

 “깜빡 잊을뻔 했습니다. 폐하께선 총병님과 수렵을 가셔서 며칠째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오니 마음 쓰시지 말고 푹 정양하십시오.”

 

 령이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다. 서은은 숟가락으로 죽을 둬번 젓다가 그만 그릇을 내려놓았다. 느닷없이 문밖에서 왁작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미간을 구기며 령이를 보자 령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령이가 방문을 열기 바쁘게, 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전해왔다.

 

 “이곳 아씨의 죽만 죽이고 저희 성주님의 약은 약이 아니랍니까! 하물며 정혼한 쪽은 저희쪽입니다!”

 “무슨 일이냐.”

 

 령이가 묻자 문밖의 시비들이 아뢰었다.

 

 “나치야 아가씨의 시비입니다. 굳이 찾아와서 저희가 성주님의 약을 건드렸다고…”

 

 서은은 몸을 일으켜 문쪽으로 다가갔다. 언젠가 나치야의 처소에서 본적 있는 소홍이 눈을 치켜뜨고 마당에 서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서은이 문밖으로 나오자 시비들은 소홍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여기는 둘째아씨님 처소야. 빨리 물러가거라.”

 “제가 왜 물러갑니까! 저는 꼭 아씨님을 뵙고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소홍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서은은 시선을 들어 가만히 그녀를 주시했다. 후자의 눈길에 섞인 한가닥 증오의 빛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한발자국 나섰다.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하거라.”

 

 시비들이 손을 놓자 소홍은 씩씩거리면서 자기 소매를 털었다. 그리고는 매서운 눈초리로 서은을 쏘아보았다.

 

 “며칠전 아씨께서 후원 주방에 납시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서은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소홍의 말이 귀가에 맴돌았다. 그러고보니 나치야와 니칸외란이 최근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신경이 씌였던 것도 떠올랐다. 그녀는 다시 소홍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넌, 지금 우리가 성주님의 약을 건드렸다고 말하고 있는 거냐.”

 “그날 후원 주방에서 달인 약을 복용하신 뒤, 성주님께선 갑자기 토혈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함부로 짚을수 없어 함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주방에서 아씨님의 연와 때문에 저희의 약을 달여주지 않기로…”

 “그건 네가 가서 주방에 물어야 할 일이지, 왜 여기 와서 소란을 피우고있느냐.”

 

 령이가 끼어드는 말에 소홍은 픽 하고 냉소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주방에 묻는단 말입니까. 주방에선 둘째아씨님의 죽에만 신경 쓰느라 저희 약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데요. 약이 지체되어 성주님께서 건강이 악화된 것은 물론, 아씨께서 도련님을 독차지 하고있는 바람에 저희 아가씨는 매일 눈물로 세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긴 아씨께서 애초부터 그걸 원하고 계신지도…”

 “무엄하구나.”

 

 령이가 발칵 화를 내자 서은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소홍에게 물었다.

 

 “성주님…환후는 어떠냐.”

 “아씨님이 관심해주신 덕분에 병이 아주 고황에 들었답니다. 그러니 고귀하신 아씨께서 이젠 만족하실런지요.”

 

 소홍의 가시 돋친 말에 령이는 더는 참을수 없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어찌 이리 무례할수가! 우리 아씨님은 엄연히 너의 윗전이시다. 주방에는 감히 아무 소리도 못하면서 여기가 그렇게 만만하더냐! 아씨님은 너그러우셔서 가만히 계신다 해도, 총병부의 법도는 너희들이 이처럼 방자하게 구는것을 절대 가만 두지 않을텐데.”

 

 소홍이 뭐라 맞받아 말하려 하자, 서은이 머리를 돌려 령이에게 말했다.

 

 “사정이 있는 것이니 그만하거라. 그 충직함이 가상하지 않느냐.”

 “아씨님!”

 

 령이가 발을 구르자 소홍은 인사도 하지 않고 휑하니 그 자리를 떴다. 모였던 시비들도 뿔뿔히 흩어졌고 서은은 뭔가 생각하다가 머리를 들고 령이를 불렀다.

 

 “겉옷을 내오거라. 아무래도 내 잠깐 가봐야겠다.”

 

 ……

 

 후원의 연못은 누렇게 마른 연잎들로 꽉 뒤덮여 있었다. 연못을 에돌아 니칸외란이 주숙하는 객청으로 향하는 서은의 마음도 누렇게 말라들었다.

 

 역사에서 니칸외란은 지금 죽는것이 아니라, 3년후 누르하치의 추격으로 명나라 변경까지 도망을 갔다가 종국에는 누르하치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까 소홍의 태도로 보아 지금 그의 병이 더없이 위중하다는 것은 짐작할수 있었다.

 

 가을을 알리는 바람이 연못을 휩쓸고 있었고, 그녀는 유난히도 차거운 바람에 자신의 옷깃을 바싹 여몄다.

 

 “명부에 대항하는 방법이란…내가 알고있는, 정해진 역사에 변화를 주는 것인데…”

 

 문득 들려오는 우뢰소리에 그녀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솜뭉치처럼 하얀 구름을 거두어내며, 어느새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옷깃을 여민후 객청쪽을 바라보았다. 객청 정원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한 군졸이 급히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녀쪽으로 뛰어오던 군졸은 그녀를 발견하자 우뚝 멈춰서서 그녀에게 머리를 숙였다.

 

 “아씨님…”

 “웬 일인가.”

 

 군졸의 황급한 표정을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군졸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니칸외란 성주가 위태롭습니다. 도련님께 이미 알렸습니다. 지금은 의원을 부르러 가는중입니다.”

 

 군졸은 말을 마친후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그녀는 객청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쪽에서 터지는 울음소리에 언뜻 정신을 차렸다.나치야의 울음소리인 듯 했다.

 

 “아버지, 제발 눈을 뜨고 저를 좀 보세요…”

 

 그녀가 객청안에 들어서자, 나치야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달려나와서 그녀의 소매를 움켜잡았다.

 

 “임도련님, 아니 아씨, 어서…어서 의원을 불러주세요.”

 “이미 부르러 갔습니다.”

 

 서은은 손을 내밀어 거의 쓰러지려는 나치야를 부축했다. 그리고는 침상에 누워있는 니칸외란을 돌아보았다.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니칸외란의 피골이 상접해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오늘밤을 넘기기 어려울것 같다는 예감이 얼핏 들었다.

 

 “나치야…너무 급해하지 말고…총병님께 맡기세요.”

 

 그녀의 말에 무슨 자극을 받았는지, 나치야는 갑자기 그녀의 부축을 뿌리쳤다.

 

 “어떻게 맡긴단 말입니까. 천륜입니다. 아무리 못된 아비라 해도 제게는 유일한 혈육입니다. 어찌 한낱 남에게 아버지의 목숨을 맡긴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서은은 나치야의 말에서,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그녀를 위로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누워있던 니칸외란이 기침을 하며 몸을 뒤척였다. 나치야는 황급히 침상쪽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나치야…”

 

 니칸외란은 그제야 약간 정신이 드는 듯 했다. 그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문득 서은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흡떴다.

 

 “누…누구냐.”

 “저입니다. 성주님…”

 

 서은이 천천히 침상쪽으로 다가가자, 니칸외란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두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가! 물러가!!! 이 요상한년아.”

 “성주님…”

 “그렇게 나를 괴롭히고도 내 죽는 꼴을 보려 왔느냐. 약에 손을 쓴 것도 모자라 기어이 나를 죽이려 왔느냐…당장 물러가거라!!!”

 “성주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서은이 어리둥절해 있자 나치야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밀쳤다.

 

 “가요…가…아버지가 당신을 보기 싫어하는 거 모르십니까? 빨리 나가세요!”

 

 서은은 나치야에게 떠밀려 문밖까지 밀려나왔다. 잠시 휘청거리던 그녀는 등뒤의 누군가에게 의해 몸을 가눌수 있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와있었는지 이여백이 바로 그녀 뒤에 서있었다.

 

 “…”

 “도련님…”

 

 나치야는 이여백을 보자 금세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세차게 어깨를 들먹였다.

 

 “제발 구해주세요...아버지…제 아버지를…”

 

 이여백의 시선이 그녀를 스쳐 나치야에게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는 빠른 걸음으로 객청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그녀는 잠깐 굳어졌다. 그렇게 문밖에 서있는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치야도 몸을 돌려 객청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니칸외란의 미약한 목소리가 방안에서 띄염띄염 흘러나왔다.

 

 “도련님…원하지 않는 혼사인줄 알면서도…제 딸의 장래가 걱정되어 그리하였습니다…절대 원수에게 딸을 보낼수는 없었습니다. 하오니 부디 이런 못난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부디 불쌍한 제 딸에게 그 미움을 전가하지 말아 주십시오…”

 “성주님, 심신을 굳건히 하십시오. 의원이 올 것입니다.”

 

 이여백이 위로하는 말을 니칸외란은 서둘러 잘랐다.

 

 “지금 중요한 것은…그게 아닙니다. 도련님께서 한가지만…단 한가지만 제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게 혼사의 일이라면…”

 

 이여백의 목소리가 난감하게 들려왔고, 니칸외란은 쿨럭쿨럭 기침을 깇었다.

 

 “그 일이…그 일이 아닙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죽으면…절대...소식을 봉쇄하십시오. 크게는 요동을 위해서 몽고의 움직임을 막아야 하고, 작게는 누르하치가…원수를 제거했다고 마음을 놓게 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미리 저와 얼굴모습이 비슷한 사람을 물색해 놓았으니, 그 사람이 저를 대신해 총병부에 기거하는 척 해주십시오. 나중에 적당한…적당한 시기에 제가 죽었다고 세상에 알리면 됩니다.”

 “…”

 “그동안 도련님의 혼사를…이 늙은이의 욕심으로 함부로 끼어들어서 죄송하외다. 나치야와의 일은…더이상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서은은 그만 머리를 돌렸다. 요동을 주름잡은 일대의 간웅(奸雄)도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는 한 인간으로서, 한 아버지로서 약하고 평범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니칸외란의 말에 나치야는 슬피 흐느꼈다.

 

 “아버지…”

 “아가…이 애비가…네게 미안하구나.”

 “아버지…그런 말씀은…하지 말아주세요…”

 “아니다…이 애비는…평생 너를 이용만 했어도 언제 한번 네게서 불평을 들은 적이 없었다. 너의 혼사도, 내 욕심과 목적만 앞세웠었다…지금 와서 그 피해를…네가 보고…네가 그 죄값을 치르는구나.”

 “아버지…흑흑…”

 “마지막으로…애비가 네게 해줄 일이 뭐가 남아있겠는지…아가…부디…잘 살아야 한다…”

 “아버지…의원…의원이 곧 올거에요…조금만…조금만 더 버티세요. 아버지…”

 “울지…말거라…그리고…문밖의 저 아이를 불러들이거라…내 긴히…할…얘기가 있다…”

 

 문밖에 서있던 서은은 그 말에 몸을 흠칫했다. 문이 열리면서 눈물범벅이 된 나치야가 밖으로 나왔다. 서은은 나치야가 자신에게 머리를 끄덕이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객청안으로 들어섰다. 니칸외란은 그녀를 보자 알릴락말락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리…가까이 와주시오.”

 

 서은이 주춤주춤 침상곁으로 다가가자, 니칸외란은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에게 머리를 바싹 기울이고 또박또박 말했다.

 

 “싫지 않은데…싫어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소.”

 “…”

 “밉지 않은데…기어이 미워해야만 하고 말이요…”

 “성주님…”

 “애초에 누르하치의 칼밑에서 나를 구한 적 있는 그쪽이, 내 딸의 앞길을 막는 정적이 된다면…나는 내 평생의 힘을 다해서라도…그것을 막을 것이요.”

 “저는…나치야의 정적이 아닙니다.”

 

 그녀의 나직히 중얼거리는 말에, 니칸외란은 참담하게 웃었다. 그의 우멍한 눈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하늘은 이미 나치야가 있는데…왜 또 그쪽을 보냈는지…내 기어이 물을 것이요.”

 “…”

 “내가 죽은 후에도…나를…원망하지 말아주시오. 난 내 딸의…아비일뿐이니.”

 "제가 왜 성주님을 원망하겠습니까..."

 

 그녀가 급히 대답하자 니칸외란은 처연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고맙소. 공주마마..."

 "...!"

 

 어떻게 그녀의 신분을 알았을까. 크게 뜬 그녀의 눈을 보면서 니칸외란은 다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치야에겐 구태여 말하지 않았소."

 "..."

 "뭐 하긴...알아도 별로 감흥이 없겠지만."

 "..."

 "나중에라도 원망하고 싶으면 날 원망하시오. 나치야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렇게 알쏭달쏭한 말을 간신히 남긴 채, 니칸외란은 입을 다물고 가쁜 숨을 톺아올렸다. 잠시후 그는 착잡한 눈빛으로 한참동안 서은을 보다가 그만 푹 하고 머리를 떨구었다. 때마침 차반을 들고 문안을 들어서던 나치야가 달려들어오면서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안돼요!!!”

 

 마지막 숨을 거두는 니칸외란의 창백한 얼굴위로, 문틈으로 스며들어온 저녁노을이 붉게 비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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