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버릇은 항상 알람보다 30분 정도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이 집에 사는 지난 5년동안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었다. 아파도 학교 보건실에 누워있을지언정.. 집에서 쉬고싶단 편한 소리는 입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일을 내고야 말았다. 이미 학교를 가고도 남을, 아니 지금 간다해도 이미 지각인 시간. 시계는 아홉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아연실색해서 화장실로 곧장 직행하려 방을 나왔는데 1층엔 기명오빠가 티비를 보며 앉아있었다. 인사할 새도 없이 난간쪽 화장실로 향하려던 찰나
"어? 벌써 일어났어? 더 자도 되는데-"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살짝 웃으며 말했다. '뭐라는거야.. 학교 졸업한지 좀 되서 시간 개념이 없어진건가.. 아님 학교다닐때 자기는 이시간에 간건가?' 꼭 말하는 투가 '학교같은거 하루쯤 안나가도 큰일 안난다~' 로 들렸기 때문에 왠지 모를 서운함이 들기도 했다. 관심이 있었다면 학교 갈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저렇게 태평한 소릴 할까 싶어서였다. 오빠도 나한테 그다지 관심이 많았던 건 아니었네. 대꾸하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가려 했는데
"이틀은 푹 쉬라고 하시더라 아버지가. 오늘내일은 오빠가 너 좀 챙겨줬으면 하셔서 그러겠다고 했고. 그러니까 학교 안가도 돼."
...!그런거였나? 그럼 벌써 학교에는 말씀을 하셨겠네.. 하긴,기명오빤 아버지 회사 다니니까.. 회사 하루이틀 정도야 무리도 아니겠지. 어차피 큰오빠는 레지던트니 집에 없을게 뻔하고.. 기태오빠랑 단 둘이 남지 않은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난간쪽에 멍하니 서있는 날 보더니 오빠가 2층으로 올라왔다.
"너 지금까지 단 한번도 지각이나 결석같은거 안한거 알아. 아침에 네 얼굴 본 거 5년동안 몇번 안되니까. 그래도 부모님 걱정시켜가면서까지 학교 가는건 좀 아니다. 오빠랑 아침먹고 얘기 좀 하자. 할말이 있어"
갑자기 학교가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에 맥이 풀려 멍해진거였는데. 학교 굳이 가려고 했던게 아니라. 그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1층으로 데려가 굳이 입맛없다는 나를 앉혀두곤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건지- 몇숟갈 뜨지 못하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가겠다 했다. 오빠는 먹은것들 정리하고 올라갈테니 방에 가 있으라고 하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곤 2층으로 올라왔다.
2층으로 올라오는 나선형 계단 끝 첫번째 방이 기준오빠 방이었다. 내가 온 그날부터 쭉 오빠는 학교에 병원에 쫓아다니느라 집에 있었던 날이 거의 없었다. 아니, 있어도 마주칠 시간이 없었다고 하는게 맞겠다. 지난 5년간 네번? 다섯번 봤다고 하면 말 다한거겠지. 하지만 그때마다 날 마주쳐도 그 흔한 인사한번을 건네지 않았었다. 그래서 내 머리속에 각인된 이미지는 '차갑다' 혹은 '무섭다' 였다. 왠지 나를 싫어하고 있는 듯한 태도에 주눅이 들어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옆은 기태오빠방. 기태오빠는 내가 집에 온 첫날 오른손을 크게 다쳐 못쓰게 됐다고 들었다. 어릴때부터 하프를 배우고 있었다고 들었는데..하필 기가막힌 타이밍에 이 집에 들어온 내가 못마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이후로 하프를 배우는게 거의 불가능했다 했으니까.. 오빠는 손을 다친 이유가 내가 이 집에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 하는 듯 했다. 다친것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던건지.. 그래서 더 날 괴롭혔나 싶어 참았던 것도 많았다.
닫힌 방문을 쳐다보다 난간에 잠깐 팔을 괴고 기댔다. 바로 맞은편으로 보이는 채광창. 그 밖으로 보이는 널찍한 정원 풍경, 팔을 뻗으면 한뼘정도 멀리 달려있는 화려하고 큰 샹들리에, 전체적으로 깔린 대리석 바닥 등등 처음 이집에 왔을때 이 넓고 화려한 집의 모습을 보고서 더더욱 주눅이 들었었다. 나도 부족함없이 잘 자랐지만, 여기는 '부족함'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게는 한번도 본 적 없던 신세계였다.
기태오빠 옆방이 내방이고, 기명오빠가 제일 끝방. 어쩌면 날 싫어하는 기태오빠 때문에 일찍 일어나 학교가는 습관이 들었을것이다. 집에 늦게 들어오기 위해 부러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들어와선 조용히 잠들고, 혼자서 감내하기에는 꽤나 고달팠던 시간들이었다. 이런저런 회상에 잠겨있느라 기명오빠가 올라온지도 몰랐다. 무슨 할 얘기가 많아서 저러나- 내 방 침대에 나란히 걸터 앉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소향아, 이건 어제 오빠랑 아버지랑만 의논해본건데- 몸이 언제 안좋아질지도 모르고 무슨일이 있을지도 장담을 못하니까, 고등학교 과정은 홈스쿨링이나 검정고시로 대체 해보는건 어떻겠어? 어제 그분이 말씀하셨던 것 처럼 아직 향이 니가 불완전한 상태 이기도 하고.. 그분 신당도 틈틈히 다니면서 몸도 마음도 추스릴 필요가 있겠다 싶어. 네 생각은 어때? 괜찮다면 그렇게 해보는게 어떨까? "
.. 오빠가 물어보는건 제안이 맞는데, 내가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하기에는 그동안 잘 키워주시고 대해주신게 있는데- 굳이 마음쓰이게 하면서까지 싫다라고 할 이유는 기태오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고.. 오빠 말을 듣는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서 가시넝쿨을 동앗줄 삼아 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럴거면 그냥 나가서 살고 싶어 오빠. 엄마가 주셨던 유산도 있고"
묶여있는 재산은 어제날짜로 풀리게 되어 있었다. 변호사와 만나 얘기만 정리하면 엄마가 주신 유산을 쓸수가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는 미성년자라서 집을 구할때 애를 좀 먹긴 하겠지만.. 그리고 내가 만약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 틈틈히 기태오빠와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오빠가 손을 다치고 3년을 내리 쉬고 이제야 다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상태여서 아직 졸업하기 전이었다. 그런 내게 지금 다니는 학교는 좋은 도피처였다. 그런데 그 학교까지 못가게 된다면 끔찍했다. 상상도 하기 싫은 상황이었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뭐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지 알겠어. 날카롭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시간을 좀 두고 - 알았지?"
성급하게 말을 꺼냈나 싶은 후회어린 표정이 가득했다. 내 앞에서 미안해하는 표정짓는걸 보는게 제일 싫었다. 그래서 좀 더 자야겠으니 오빠는 회사에 가라고 말했다. 눈을 질끈 감고 오빠가 나가는 기척을 귀기울여 듣고서야 감은 눈을 떴다.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 거리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진 저녁무렵 이었다.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불안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 기태오빠가 술을 한잔먹으면 저렇게 온 집안을 시끄럽게 하며 돌아다녔다. 부모님 계실때는 한번도 그러진 않았지만.. '설마..' 몸을 일으켜 앉자마자 방에 있는 불이 켜졌다.
"야, 팔자좋다? 이 시간에 잠이나 퍼질러자고-"
역시나.. 했던 것 보다 애써 놀란 심장을 진정시켯던 건 기태오빠 때문이 아니라 오빠의 오른팔에 매달려 있던 남자 때문이었다. 저렇게 매달려있는데 기태오빠가 아무렇지 않게 다닐 수 없을텐데. 분명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부적이 붙어 있는 집까지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원한을 가진령이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딱히 무차별적으로 다른사람한테까지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기태오빠한테 품은 원한이 큰 것이겠구나. 갑자기 별안간 뭐때문인지 모를 눈물이 툭- 떨어졌다. '억울해..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죽진 않았을 거야..!!' 분명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아닌데도 억울한 분노가 사무쳤다.
"서희민.."
무의식적으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의 이름을 내뱉았다. 분명 기태오빠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치며 '편하게 사니까 좋냐?'는 말 따윌 뱉으며 시비를 걸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이름을 말하자 심하게 동요하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거칠게 내 목을 움켜잡았다.
"너..지금 뭐라그랬어.. 다시 지껄여봐!"
거세게 조여오는 손아귀 힘에 나도 모르게 허공에 손을 휘젓다 오빠의 얼굴을 쳐냈다.
"푸학..켁....컥..하아.."
침대에서 떨어져 겨우 숨을 돌려 일어나자 마자 다시 내 목을 조여왔다.
"그 새끼 이름을 니가 어떻게 알아. 무당 딸년이라 너도 그렇게 될 팔자라더니- 아주 돌팔이는 아닌가봐? 가만히 있길래 재미가 없던 차였는데, 재밌네 너란 애"
피식거리며 웃다가 아귀힘이 풀린 틈을 타 기태오빠를 피해 계단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어깨를 붙잡혀 난간쪽으로 밀쳐졌다.
"왜? 그새끼가 너한테 뭐라고 하든? 들은거 있으면 한번 지껄여봐, 안그래도 오늘 술 마시다 내 손이 너 때문에 병신된게 또 생각나서 화가 치밀었는데-"
눈을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들었다고 해서 그걸 말했다간 더 좋지않은 상황이 벌어질게 뻔했다. 제정신에 말해도 내 뺨 후려칠 사람인데.. 술까지 마신.. 그런데 마지막 말이 내 귓가를 거슬리게 했다. 왜? 그 손, 나 때문이 아니라 오빠가 저렇게 만든 사람이 오빠 손을 그렇게 만든건데- 영가가 팔을 잡고 있으니 손을 못쓰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지껄여보라고, 뭐 들은거 없어?! 내 말 무시해?!"
"억울하다고! 오빠만 아니었어도 자살같은거 하지 않았을거라고!!"
내 말이 다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내 목을 잡고 뒤로 젖히기 시작했다.
"그래, 애초에 너 같은걸 입양한 부모님도 제정신이 아니지.. 걱정마- 여기서
떨어진대도 죽진 않을거야. 재수없으면 어디 부러지거나 하겠지"
오빠 팔을 잡고 있었지만 남자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미 상반신은 난간 밖에 있는 상태.. 순간 떠올린 건 샹들리에였다. 그걸 잡고서 어떻게든 해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여기까지 했으면 그만하지 않을까 했던 내 바람은 멋지게 빗나갔다. 결국 나를 발 끝까지 밀어내버렸다.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샹들리에의 윗부분을 아슬아슬하게 잡았지만, 줄이 힘없이 툭 끊어지면서 나도 그 자세 그대로 떨어졌다.
쿵 ! 와장창- !
샹들리에의 조명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며 파편이 온 몸에 박혔다. 일어나려 했다가 맥없이 바닥에 엎어져버렸다. 그때 들리는 현관문 소리.
"소향아!!!!!"
기명오빠가 들어오며 날 발견하곤 자지러지는 목소리로 소릴 질렀다. 대꾸할 수가 없다. 떨어지며 부딪힌 곳이 너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