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서 나간 그녀가 한참 신경이 쓰여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괜찮으려나?' 천존님과 대화를 해봤지만 딱히 나오는 답은 없었다. 그럴테지...
그 넘치는 한(恨)을 어떻게 다 풀어주어야 할런지, 도통 감도 오질 않는다.
연락처를 가르쳐주기는 했지만 그걸로 해결될게 과연 뭐가 있을까?
제단에 향을 피워두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눈을 감고 내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데
무언가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영상이 있었다.
불.. 새빨간 화염이 온통 뒤덮여있다. 누군가가 처절하게 살려달라고 말하고 있고
그런 그 사람을 서서 바라보는 또 한사람이 있다. 웃는다. 더 애원이라도 해보라는듯
가열차게 비웃는다. 왜? 잠시 서 있던 그 사람은 처음부터 구해줄 생각은 없었다는 듯
자리를 떠난다. 다리가 불편한가.. 엉금엉금 기어 나와보려 하지만 화염에 휩싸여있던
그곳은 그 본연의 힘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져내린다.. 죽었을것이다.
"안돼!!"
소리치며 눈을 떴지만 그건 나만 보았던 환상. 아니 일어났을지 일어날지 모르는 일.
왜 눈앞에서 애원하는 그 사람을 못본척 떠나버린거지? 무슨 복수가 하고싶어서-?
속에서 울렁거리는 것을 참을수가 없었다.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가 토악질을 몇번
하고서야 진정이 됐다. 젠장... 다시, 다시 집중해보자. 일어났던 일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일어나지 않았다면 막을 수 있다는 말인데.. 내가 보았던 곳은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도대체 거기가 어디인 줄 알고 가서 막는단 말인가.. 차라리 일어난
일이라면 날 찾아왔을때 신고라도.. 아서라. 그조차 증거가 없다. 경찰이 무녀의 말을
믿어주기라도 한다던가. 애초에 영이라는 존재자체도 믿지 않는 그들일진대..
처음부터 무력감을 안고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건가.. '하..' 깊은 한숨만이 신당을
가득 채운다. 어디까지나 나는 현신할 수 있는 매개체일 뿐이다. 그래, 그뿐이다.
오전에 왔던 그녀보다 내가 보았던 이 일 역시도 심각한건 매 한가지이다. 대무님이
생각났지만- 정말로 급한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다. 혼자 해결해나가야 할
일도 있으니.. 수차례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하고 있던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건 앳띤 남자애였다. 얼굴을 보니.. 기껏해야 내 또래정도 되보이는-
이런곳에 발을 들이기가 여간 쉽지 않은 일인데. 긴장하거나 겁먹은 기색도 없다.
어떻게 되먹은 놈이길래.. 저렇게 태연자약하게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지?
말없이 한참을 눈만 보고 있었다. 역시나 아주 사그라들어가는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
여자는 분명한데.. 가늠할수가 없다. 형(形)체도 없다. 이전에 봐왔던 망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려 하는데 그 흐름을 끊는 그 애의 목소리-
"저기.. 궁금한게 있어서 왔는데요"
아.. 조금만 더 있었으면 알수도 있었는데..!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가요? 부모님 언제죽는지 궁금해서?"
.. 아차 싶었다. 맞다면 이 애는 그냥 나갈것이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이 애의
집을 알아내려 했었는데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내가 나를 자책하고 있었다.
"네??.. 아.."
맞긴 한가보네, 세상에 어느 호로자식이 부모 언제 죽을지를 물으러 와.
욕이라도 한사발 해주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이 애가 앞으로 저지를 짓이 무언지
몰라 섣불리 말할수가 없다. 내가 아까 봤던 그 영상이 맞다면 서서 웃고 있던 사람은 이 아이다. 그렇다면...
"그게 왜 궁금해요? 자식이 그런거 물어보러 올 건 아닌것 같은데"
모르겠다. 그 말을 듣고도 나가지 않는 걸 보면 궁금한게 남아있다는 말이겠지.
터져버린 입을 어쩌겠어. 천존님이 현신하시면 얘기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내 의지대로 꾹꾹 참아가며 말하고 있었다.
"... 몸이 많이 불편하세요 부모님이.. 3년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저 혼자
돌보기가 벅차서요.. 아직 학생이기도 하고.. 이젠 치료비도 없어서.."
개자식.. 거짓말을 잘도 늘어놓고 있어. 엄마 얘기를 하고서야 그 들릴듯 말듯 했던
여자의 모습이 내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이 아이의 엄마겠지.
'살려주세요.. 내 남편을.. 그리고 이 아이도.. 나쁜 아이가 아니에요'
세상에 제 부모 수명을 묻는 자식이 어찌 나쁘지 않다는 말인가. 그러는 어머니도
아들손에 돌아가셨는데 그 편을 들고 싶냐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 그럼 아버지만 계시다는 말인데.. 직접가서 아버님 얼굴을 봐야 알겠어요.
저도 이렇게만 들어서는 알수가 없네요"
좋은 핑계는 만들어졌다. 이 애가 넘어와주기만 한다면 집을 알 수 있을터. 그러면
어찌되든 한 사람이 억울하게 가는 일은 막을수도 있다.
"아.. 그게 좀.."
망설이고 있다. 진짜 죽일생각이라면 가르쳐주기 쉽지 않겠지.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 만약 이 애 집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알고도 막을 수 없다면?
"꺼림칙 하다면 어쩔 수 없죠. 다른곳에 가서 알아보세요"
엄마는 질식사, 아버지는 방화? 세상이 요즘 아무리 흉흉하다지만.. 내가 이런일을
직접 겪게 될줄이야. 이 남자가 부모님을 모셨다는것도 알수가 없다. 살아온것도
개망나니처럼 살아온 걸로 보이는데.. 부모마음이라는게 다 똑같은지- 그래도 제
자식이라 편을 들어주는건.. 하.. 내일 다시 올 그녀는 양반이었던 모양이다.
"아..아니요.. 그게 아니라.."
뭔가 자꾸 말할듯 말듯 한 태도에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던 참이었다
다그쳐봤자 얻을건 없다. 거의 도박이었다. 더는 묻지 않고 그 애를 말없이 지켜봤다.
"그럼.. 언제 같이 가주실 수 있는지.. 그리고 돈은 얼마를.."
"..가서 보고 말씀드릴게요. 지금 가요"
사실 돈같은건 받을 마음이 없다. 내 몸이 치이는걸 막기 위해 이 길로 들어섰을뿐,
무슨 일신의 영달이나 부귀영화를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다. 희민오빠처럼, 이현언니
처럼, 원한이 있든 그리움이 있든.. 풀어줬던 걸로 충분히 보람은 느꼈으니까.
이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막을 차례였다. 이 애의 맘을 돌릴 수 없다면 막아야한다.
알고서 막지 못했을때 그 죄책감을 내가 안고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첫날이기도 하고 저녁까진 있다가 가려고 했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일찍 문을 닫고
그 애를 따라 나섰다. 그 애의 아버지 수명엔 관심없다. 사는곳이 어딘지만 알면 된다.
"여기에요"
한참을 굽이굽이 골목따라 걸어온 그 길 끝에, 아주 허름한 주택 하나가 있었다.
끼익-
철문이 기분나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으악!!!!"
내가 머리를 감싸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게 뭐야!!!
"왜..왜그러세요?!"
도대체 이런집에서 어떻게 사람이 산거야. 사람이 아니라 온갖 혼령들이 다 섞여있다.
동물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지니고 있던 은중부를 문에 붙였다. 미치겠네 정말.
이게 지금.. 언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영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부적을 붙이고서야 한층 걷어내진 시야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아니에요.. 아버지는 어디계세요?"
분명히 내가 볼 수 있는 영들은 한정되있다고 알았는데 천존님이 자리를 잡으셨다더니
가까이 올수는 없어도 이젠 다 보이는건가? 후.. 심호흡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집안도 다를 건 없었다. 영들이 많다는게 아니라.. 뭐랄까. 그냥 사람이 살 수 없는
그런 기운을 가득 갖고 있다고 해야하나.. 이 폐가같은 집터는.. 대체 뭐야!?
작은 골방에서 가쁘게 숨쉬고 있는 중년의 남자. 이 애가 말하는 아버지겠지. 이미 눈은
이세상 사람의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눈이라기에는 너무 탁하고 바래져있다.
처음 보는 모습에 내 손도 떨리고 있었다. 얼굴에 손을 갖다대려 했다
확!
"헉"
송장처럼 누워있던 그 중년남자가 내 팔을 억세게 잡았다. 힘이라곤 지푸라기 하나도
잡지 못할만큼 없어보였는데.. 어디서 이런 힘이..?
"살..살려주시오.."
.. 뭐..뭐지? 아들이 뭘 생각하는지 아는거야?? 아니면 뭐..
"아버지는 하루에 열두번도 저런 얘길 하세요. 신경쓰실 것 없어요"
그래, 모르는 니가 보기엔 그냥 신경쓸 일이 아니겠지만 난 아니란다. 부여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얼마간 지나 중년의 남자도 스르르 힘을 풀었다.
아니,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잡귀들을 보고 있는지도..?
대무님이 어제 건네주셨던 귀령봉인부(鬼靈封印符)를 꺼냈다. 급할때 쓰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게 급한게 아니면 뭐겠어. 방안 구석에 하나, 방문에 하나, 대문에 하나.
영들이 파란불꽃으로 변하며 타오르는걸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셀수도 없다. 대체 이 많은 영들이 어째서 이 집에 모여서 진(陣)을 치고 있는거지?
"후우..."
중년남자가 숨을 길게 내쉰다. 대강의 영들은 정리가 된 것 같다. 어지러웠던 내 머리도 진정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았어요 여기서? 머리아프고 속도 안좋고- 짜증나고 화나고 분하고 별 이상한
생각은 다 들었을텐데 용케도 여기서 버텼네요?"
"그..그걸.."
어떻게 아는지는 니가 알아서 뭐하려고. 말한다고 믿기를 하겠어 알아듣기를 하겠어.
멀쩡히 돌아다니는 그 남자애가 신기할 따름이다. 아직 저 애에게서 별다른 낌새는
없었지만.. 봉인부를 한장 손에 접어 쥐고 있었다. 저 애가 등을 보일때 붙여볼것이다.
분명 이 집에는 이 부자(父子)와 관련없는 영의 장난일 가능성이 높다.
집을 둘러보겠다며 안내를 해달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그 애의 뒤에서 뒷짐지고 안방과
화장실, 창고를 차례로 둘러보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심장이 빠르게 뜀박질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애가 다 둘러봤다고 돌아보던 그 순간
쥐고 있던 부적을 등 뒤에 붙였다.
"음..? 왜그러세요?"
등을 툭 치듯 붙였기 때문에 아무 이상이 없는거면 그냥 내가 뜬금없이 등을 후려친..
나만 이상해지는 거군. 아무것도 아니라며 살짝 웃어넘겼다. 아닌가?
다시 그 아버지가 있는 방에 가려고 했던 그때였다.
"뭐.. 뭐에요? 뭐한거에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린다. 진짜였나...! 빙의였어?!
그 애와 떨어져 있는 거리는 다섯걸음정도. 고개를 비정상적으로 비틀며 손을 등뒤로
갖다대며 붙은 부적을 떼려했다. 안떼질거다.. 이상이 없다면 알아서 떨어졌겠지만..
영이 있는거라면 봉인할때까진 안떨어질거니까.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그 애를
지켜봤다.
"으아아아악!!!!!!!!!!!!!!!!!!!"
귓가를 찢는듯한 비명소리에 귀를 막았다. 마치 등에 불이라도 난것처럼 길길이 날뛴다
나한테 다가오려고 하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은듯 하다. 곧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알 수없는 소리를 내더니 고꾸라졌다. 부적이 바람에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그 부적을 주워 부엌에서 태워버렸다. 그리곤 중년남자의 방으로 달려들어갔다.
"하아.. 누구십니까..?"
.. 아까와 다른 눈빛이다. 아들이 미친게 아니었어.. 지박령인가..?
"저.. 어르신,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이 집에 어떻게 오시게 된거에요?"
"그게.. 그게 말입니다.."
연이은 사업실패로 재산을 전부 날리고 싼집을 찾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알 수 없는 것들이 눈 앞에 보이고, 착하던 아들은 갑자기 난폭하게 변해버리고.
아직 아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이사오고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영의 한풀이었다면 아들또한 잘못이 없다. 진실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마당에 고꾸라져 있던 아들도 방으로 들어오더니 날 처음 본
눈으로 묻는다. 누구냐고. 젠장할.. 생색낼려고 하는건 아니지만 갑자기 무단침입한
기분이다.
"집 터가 좋지 않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들어오게 됐어요. 앞으론.. 괜찮을
겁니다 아버지 잘 모시세요. 그럼.. 실례했습니다"
하아.. 석양을 바라보는 내 눈에 다행이라는 감정과 허탈한 감정이 교차했다.
♬♪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 아.. 기명오빠
"어디야? 신당에 왜 없어??"
"오빠 또 일찍 나왔어요? 의사 맞아? 병원에 놀러다님??"
"아니~ 그런거 아닌데?? 근데 어디냐구. 왜 없어??"
"아.. 일 좀 보느라 나왔어요. 지금 가는 길이에요"
"그래? 알았어, 기다릴게-"
집을 나서며 붙였던 봉인부는 전부 떼서 태워버렸다. 그래야 다시는 그 집으로
못돌아가지.. 신당 앞에서 짝다리 짚고 차에 기대있는 기명오빠와 마주쳤다.
"첫날인데 벌써부터 일이 있어? 무슨 일이었는데?"
반가워하는 얼굴도 잠시,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냥 총체적난국이었어요. 앞으론 지겹도록 겪을 일이겠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지만 그런게 아니다. 부적을 다 쓰게 되면 어떻게든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할 때가 올것이다. 약간은 두려웠다. 받은 부적도 몇장 없는데..
내일도 이만큼 버거운 일을 감당해야 할텐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영을 싣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바보같은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이렇든 저렇든 결국 내가
편한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지.
집으로 돌아와 무복을 곱게 다려 준비해뒀다. 저녁먹자는 기명오빠 말에 그냥 쉬겠다고
말하고 침대에 널부러져버렸다. 생각보다 쉬운건 아무것도 없구나.
내림굿을 안받아도 된다는 소리에 쉽게 생각했던게 사실이었다. 근데 아니군...
쏟아지는 졸음에 부모님이 오시는 기척을 듣고도 눈을 뜨지 못했다.
***
그리고 새벽녘에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난 내가 시계를 쳐다볼 겨를도 없이 무복을 입고
신당으로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내가 꾼 꿈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