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신 아빠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왠지 하지말라는 말이 하고 싶으신데 그러진
못하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휴우..' 나도 웬만해선 하기 싫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되나. 기명오빠와 저녁을 먹을때에도 나와보지 않으셨다. 내 딸이 이렇게 다닌다 해도 싫을 법한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와 같은 시간에 나가는 길에 기태오빠랑 마주쳤다
"지금 가냐?"
".."
더 붙잡고 묻지 않아서 그냥 웃어보이고는 집을 나섰다. 대무님보다 먼저 도착한 것 같았다. 가게에 어제보단 많은 사람들이 드글드글했다. 뭐 구경거리라도 났냐..
"오셨네요. 그런데 어쩌죠? 오늘.. 늦으신다고 하시던데"
나한테 전화도 없었는데?!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쿨럭"
음... 아.. 속으로 탄식을 했다. 아프신거구나
"대무님.. 저 혼자 어떡해요"
"미안하다.. 영 몸이 좋지 않구나. 빨리 갈테니 기다려주겠니.."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몸이 안좋으시다는데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해.
"네.. 빨리 오세요"
진민이라는 남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여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달갑지 않았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어제의 그 비상구로 들어갔다.
기다리겠다고는 했지만 여유있는 시간은 세시간정도. 그 남자가 따라와서는 도움이 될
만한게 있으면 돕겠다 했다. 혹시 쓰던 공간을 일부러 막은곳이 있냐고 물었다.
자기가 아는곳은 두군데라고. 소문이 돌면서 그대로 놔둬서는 안되겠다 싶어 못쓰게
막았다고 했다.
"거기가 어디에요?"
"지금 계신 그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하나 있구요"
그 두군데 말고 한군데가 더 있는것 같은데- 그건 잠깐 미뤄두기로 했다. 여전히 남아있는 탄 내음이 기분나쁘게 느껴졌다. 막은곳을 뚫어달라고 했다. 어디선가 길고 큰
해머를 들고 오더니 벽 가운데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쾅! 쾅!-
후두둑-
아예 시멘트로 막아버린 모양이었다. 그곳이 깨지며 문이 나왔다.
"그런데 여긴 위험.."
그의 말이 끝나기전에 문을 열었다. 한맺힌 통곡소리가 귓전을 시끄럽게 울렸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시끄러워..!'
".. 형님이라는 사람 오늘 내일 하죠?"
형님이라니. 말해놓고도 당황스럽다. 그 역시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그게 말이죠"
"당신은.. 그 형님이 없어지면 다음 보스로 올라갈테고"
서열관계는 정리됐지만 이게 지금 들리는 통곡소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거지?
"...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왜.."
"여기서 죽은 사람이 많다는건 당연히 모르실테고.. 왜 죽었는지도 모르실거고"
벽을 짚어보려다 말았다. 어제의 화염귀처럼 영상을 보는게 싫었다. 통곡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여기도 영(靈)이 아니라 귀(鬼)라면? 아찔해졌다. 비상구를 나와서 밖에 있던 남자들을 찬찬히 살폈다.
눈에 띄는 사람은 없지만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사람?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갔다. 내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분 나쁜 미소를 보이며 서 있던 남자는 별안간 연기처럼 사라졌다. 웃고 있었다.
다시 비상구로 달려갔다. 이놈의 테이블하고 의자는 왜 이렇게 많은거야!! 사람들을 막아달라고 했을때 이것들도 같이 싹 치워달라고 할 걸 그랬나. 다시 돌아온 그곳에선 더 이상의 통곡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남자가 사람이 아니란 상황정리는 됐지만 갑자기 사라져선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허공에서 목소리만 들리다 형체를 나타냈다.
'용케도 찾아냈네? 나이 든 여자는 모르던데'
나이 든 여자라.. 대무님을 말하는거군..
'난 당신네들 생리(生理)는 몰라. 뭘 원하는거야?'
'그럼 끼어들지 마'
'뭘 하든 관심은 없는데, 상관없는 사람까지 해치려고는 하지마. 그건 못봐주니까'
'상관없는 사람은 여기에 없어. 이런 뭣같은 조직에 몸 담고 있는 것 자체가 상관
있으니까 말이지'
원한령인가. 챙겨온 봉인부를 벽에 붙였다. 예의 그때 폐가처럼 느껴졌던 그 집에서처럼 파란 불꽃들이 몇몇 타오르는게 보였지만 별 다른 이상은 없었다. 붙어 있던 부적이 떨어지는 것을 잡아 그 남자에게 태우라고 얘기했다
'큭큭.. 어제 네 능력은 잘 봤어. 그런데 그따위 부적으로 나를 어째볼려고 했다면
실망이야'
이 새끼들이.. 어제 그놈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아무리 뭣도 모르는 것들이라 해도
그냥 될대로 되라는거야 뭐야. 그리고 뭘 기대했길래 자꾸 나한테 실망이래. 기대해달라고 한적도 없다고 미친놈아.
"북방흑제 현무는 멸방수패(滅防水牌)와 함께 현저(現著)하라"
미연언니의 오빠를 오라로 묶었던 흑제가 검은 오라와 함께 나타났다.
"상제님 명 받습니다"
"이 귀(鬼)를 처리하기는 쉽지 않을것이다. 오방신장 중 죽음과 어둠을 관장하는 그대가 이 귀를 잡으라. 평등에게 인도하는 길은 내가 할것이다"
흑제가 들고 나타난 푸른빛의 방패를 땅에 한번 찍고 말하기 시작했다.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자여, 그 억울함과 원통함을 한낱 인간은 알 수 없으니
당연히 그 원한이 깊은 줄 안다. 허나 직접 인간을 해치지 않더라도 해를 가하는 것
또한 씻을 수 없는 죄악이다"
그때에 봤던 오라와는 성질이 달라보였다. 그때는 그냥 쉽게 볼 수 있는 끈같은 것 이었는데.. 방패와 같은 푸른 빛의 오랏줄. 나는 흑제를 지켜보고 서있었다.
'흑제(黑帝), 몇년전엔 네가 두려웠었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는군. 그때 가까스로 피해 숨었던 걸 지금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아까의 남자. 나를 비웃으며 사라졌던 남자. 흑제가 던진 오라를 쉽게 피하며 징그럽게 뻗친 손 끝으로 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친..!! 내가 피할새도 없이 영들이
달려들었다.
그 순간 흑제의 오라가 변했다. 발끝에서만 나오던 검은 오라가 흑제의 몸을 감쌌다. 쥐고 있던 방패에서 나오던 푸른빛도 검은빛으로 변했다.
"저승으로 인도한다 하여 네가 저승의 심판을 받을 수 있을것으로 생각하는가. 염라대왕이 아닌 평등대왕의 손에 혼(魂)조차 갈기갈기 찢기리라"
뭐야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흑제의 말을 뒤이어 천존이 말했다
"흑제는 물러서라. 우매한 혼(魂)이 제 힘만을 믿고 귀(鬼)로 변하였으니 천지를 거스르는 일이라. 더 큰 화를 부르기 전에 소멸신장과 갑자신장 궁비라(宮毘羅)는 이 귀를 포박(縛)하라."
소..소멸신장?궁비라?? 천존의 말이 끝나고 흑제가 방패를 놓자 방패가 사라졌다.
내 눈으로 보고 있지만 믿기지가 않았다. 이윽고 나타난 소멸신장과 갑자신장의 모습을 보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소멸신장은 흑제와 다르지 않았지만 갑자신장은 12지신의 쥐와 같았다.
"흑제와 함께 저승으로 보내어 죄를 고(告)하고 뉘우치는것이 최선이나. 이 귀는 흑제의 손에서 벗어나 스스로 구천을 해맸다. 기회를 주었으나 반성하는 바 없이 감히 흑제에게 덤비려 하였으며 이 곳에 자리를 잡고 제 뜻대로 힘을 쓰려하니 소멸신장은 이를 봉(封)하고 갑자신장은 천옥(天獄)으로 데려가라"
소멸신장이 진언(眞言)을 외우기 시작했다. 갑자신장이 칠지도같은 검을 들자 그 남자가 모습을 감추려했다. 천존이 무적(無敵)이라고 생각했지만 힘을 쓸 수 없는 제약이 있듯, 신장들 또한 어쩔 수 없는것이 있는 듯 했다. 사라지는 그 귀를 소멸신장이 가까스로 묶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빠져나갔을것이었다. 이어 갑자신장이 검으로 머리를 찔렀다.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그때 했다. 찔렀던 머리에서 노란 연기같은것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멸신장 마연(磨硏) 천존의 말씀 받습니다"
"갑자신장 궁비라(宮毘羅) 천제(天帝)의 말씀을 받습니다"
"궁비라는 천옥(天獄)에서 대기하라. 내 명이 있을때 비로소 그 귀를 멸할것이다. 마연과 같이 돌아가라"
연기같은것이 혼인가? 천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났다.
"하. 하아.."
이렇게 오래 천존을 현신해본적이 없었다. 갈수록 보지 못했던것들만 보니 눈앞이 아찔했다. 자리에 주저 앉은 나를 보고 그가 다가와 괜찮냐며 부축했다. 얼마나 이렇게 서있었던거지? 그 남자를 지탱해서 일어났을때 대무님이 도착하셨다.
"무슨일이냐, 왜 여기에.."
안색이 좋지 않으셨다. 화염귀 때문에 힘드셨던 건 알지만- 하루사이에 이렇게 수척해지셔서 나타나실줄이야.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원귀(怨鬼)가 많아요. 대무님하고 같이 해도 위험해요. 방금 살귀(殺鬼)는 천존님이 보내셨지만.. 단순히 죽은 영가를 천도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 싶어요. 진민씨가 여기를 관리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 중에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이 원한을 품었겠죠. 오늘 내일 하시는 형님은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합니다. 길어야 이틀정도뿐이네요. 저와 대무님이 이 곳을 정리한다고 해도 앞으로 또 어떤일이 생길지 몰라요. 그래서 저도 더 이상은 도와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내가 조직생활 이란걸 알 리는 없었지만, 여기 한곳이 끝이 아니라는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아빠가 싫어하시는 일인데.. 끝도 없는 일을 맡아서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사람을 도우라고 했지만 이건 아니지. 귀(鬼)들을 정리한다고 끝나지 않을거라면 더는 손대지 않는게 좋을 것 같았다. 몇장 남지 않은 봉인부들은 영가들이 보이는 곳 마다 붙였다. 그 남자가 말했던 공간 하나와, 내가 느꼈던 남은 공간 하나.
그 두곳에 각기 다른 귀(鬼)들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향아, 다른 방법은 없겠니? 영들의 천도야 내가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이 귀(鬼)들은 자리를 잡고 시간이 지날수록 제(制)할수 없는 힘들이 생긴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는 이들이 아니라고 하지만 죽는것도 당연하다고 여길 수는 없지 않겠니"
"죄송해요. 저도 알고는 있지만.. 이런식으로 하다간 끝도 없어요. 차라리 이 사람이 이 일을 버리고 다른 일을 하라고 하는게 더 빠릅니다"
내가 말했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빚때문에 하고 있는 일인데 다른일을 하라니. 생각에 잠겨있던 대무님이 말씀하셨다.
"..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부탁할 수 없겠구나. 몸은 괜찮니?"
무슨 신장 무슨 신장 죄다 소환하는 바람에 정신만 없었을 뿐.. 몸은 괜찮았다.
비상구쪽 영들은 전부 제거했다. 문을 닫는 내 손이 가볍지는 않았다.
"대무님, 여기에 있는 귀들까지는 전부 없애볼게요."
담담하게 말했지만 힘들것이다. 대무님은 알겠다며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인사받는게
더욱 불편했다.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할 걸 알았기 때문에.. 아니, 내가 회피했다는게 맞는 말일것이다. 책임져야 한다는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아빠를 편하게 보고싶었다. 일주일,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 사람이 모르는 남은 하나의 공간, 그곳만 찾으면 된다. 내일 오겠다고(어차피 자정이 넘어서 오니까.. 시간상은 다음날이 맞음) 말하고
대무님과 얘기하는 그 사람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을 일이 있는건가? 왜? 영화나 티비에서 보던거랑은 다른가? 더는 휘말리지 말자 속으로 마음을 다 잡았다. 물 한잔 마시려 부엌에서 물을 따르고 있는데 기준오빠가 들어오면서 물어본다.
"언제 들어왔어? 뭐 타고 왔는데"
"택시 탔죠. 근데 오빠는 왜 지금 들어와요? 또 바로 나가요?"
"아니, 오늘 하루 좀 쉰다고 하고 온거지. 너무 피곤해서. 막내도 피곤하겠네?"
이것저것 묻지 않는 가족들이 고맙게 느껴졌다.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그래요"
"오빤 오늘 마지막에 웬 미친놈 하나를 맡아서 황당했어"
외투를 벗어 쇼파에 걸쳐두고는 털썩 앉아버리는 큰오빠. 말수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서 맞은편에 앉아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기태오빠였으면 방에 들어가서 잤을건데.
"왜요?"
"아니, 피를 질질 흘리면서 응급실로 들어온 남자가 하나 있었거든? 상처 좀 보자고 했더니 갑자기 괜찮다고 다시 나가버리잖아. 간호사들도 당황해서 그 남자 나가는거 보고만 있고. 뭐 그딴놈이 다 있나 싶었다. 그놈만 아니었음 더 일찍 오는건데"
목을 젖혀 한숨쉬는 큰오빠를 보며 혹시 그 남자가 내가 본 (형사가 내밀었던) 그 사진속의 남자와 비슷한지를 물었다. 하지만 마스크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제대로 본게 없다고 했다. 혹시... 하긴 그 형사가 다시 오지 않으면 별 쓸데없이 신경쓰는거였다. 짜증났겠다고 먼저 들어가서 쉬겠다고 했다
"아! 막내야. 일끝나면 미친놈들이 하도 많다 그래서, 택시도 위험할 것 같고. 오빠가 안되면 기태라도 꼭 부르고. 그 놈 그건 학교도 제대로 안나가면서 엄청 바쁜척 하더라고. 그러니까 혼자 다니지 마라. 병원 간호사들도 혼자 퇴근 하는 사람 없어 어제부터"
어제부터? 알겠다고 대답하곤 방으로 들어왔다. 고양이들이 뛰어다니다 날 보고는 제자리에서 빤히 쳐다본다. 밥그릇을 보니 누가 밥을 준 흔적이 있다. 기태오빤가? 여전히 두마리만 있네.. 신당 가기전에 물어봐야겠다. 대체 한마리는 어디로 갔어?
내가 몇시간 못잔건 기태오빠 '덕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