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대로 우등생이 될 수 없었다. 그건 영어듣기 평가를 자장가 삼아 듣는 아침 시간과 더불어 일반 수업시간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수포자에게 있어서 수학시간은 명상을 하기 참 좋은 시간이다. 수포자의 새싹이 보였던 건 중학생 때 가졌던 피타고라스 아저씨와의 뜨거운 만남 때였을 것이다. sin(사인), cos(코사인), tan(탄젠트)... 평생 살아가면서 두 번 이상의 만남은 절대로 가지지 않을 것 같은 녀석들을 소개해주는 수학선생님의 모습은 악마와도 같았다. 분명 수학 수업시간일 터인데 어째서 영어가 첨가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편하게 ‘위각’, ‘옆각’, ‘아래각’ 이렇게 심플하게 정의할 수는 없었던 걸까? 난 수학에 영어가 등장한 그 날, 가볍게 수학을 포기했다.
“... 그래서 이 공식을 대입하면 lim(리미트)...”
봐라... 피타고라스 때, 포기한 것은 선경지명이 따로 없었다. 시그마에 이어 리미트가 등장하는 것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란 빠를수록 좋은 법이지.
영어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던가. 한국인이란 자고로 한국어를 해야지. 아암. 그렇고 말고.
“다음 문제는 조금 쉽지?”
아뇨.
나는 속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반 학생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것인지 붓 몇 번 슥슥 거리고 그림을 완성시키는 밥 아저씨를 보는 듯한 눈으로 수학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쉬워? 뭐가요? 뭐가 쉬운 거죠?
나는 하품하며 창문을 내다보았다. 더운 여름날,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틀어주지 않는 학교의 스크루지도 울고 갈 운영으로 인해 열려있는 창문에서 덥고 습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음?”
수업시간에 돌아다니는 학생이 하나 눈에 띄었다. 서도우였다. 서도우는 마치 길고양이처럼 이리저리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수업 안 들어가나? 교정 저편에서 다가오는 선생님을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성큼 다가서서 인사한 녀석은 보건실이 있는 곳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아파 보이지는 않았는데... 우리가 추측하고 있는 데로 윤여진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거라면 윤여진이 없는 지금 보건실에 가는 것은 부자연스러웠다. 아니면 혹시 윤여진의 남은 패거리들에게 괴롭힘을 계속 당하고 있는 건가?
그렇게 칠판을 보는 척 하며 창밖을 함께 내다보기를 십수분이 지나자, 또 다른 학생이 교정을 서성거렸다. 그리고는 보건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서하람?”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교정을 서성거리던 녀석은 서하람이었다.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 수업시간에 저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체육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3반은 지금 영어시간이었다. 옆 반에서 우렁차게 영어선생님의 목소리가 간간히 들려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쉬는 시간에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반은 한 반도 보지 못했다.
어디 아픈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서하람이 보건실을 가는 듯 하더니 이내 교정에서 무언가를 찾아 손에 꼭 쥐고 다시금 건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굳이 눈을 돌리지 않았다. 서하람 역시 눈을 돌리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는 새하얀 사각형의 물체를 들고 있었다.
서하람은 갑자기 퍼뜩 그 물체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나를 다시금 쳐다보더니 건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간혹 나를 다시금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 뿐이었다.
“자, 그럼 이제 이 문제 풀 수 있겠지?”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고개를 돌려 칠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표정을 굳혔다. 여러 공식과 숫자들이 휘갈겨 있는 칠판은 내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나중에 신 공책이나 빌려야지...
*
수학시간이 끝나고 모두가 기다리던 점심시간 종이 울렸다. 전교생들이 올림픽 달리기 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쟁하는 이 시간을 싫어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 나는 신과 함께 급식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뛰지는 않았다. 경쟁하듯 뛰어가다가 괜히 사이코메트리가 불발이라도 하면 밥을 먹지도 못하고 보건실로 실려가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 강시준?”
그렇게 신과 함께 신명나게 급식실을 가는 데, 서하람이 나를 불러 세웠다. 신이 나를 툭 쳤다. 나는 나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짓을 해보였다. 하지만 어렴풋 아까 눈이 마주쳤던 것을 떠올렸다. 수업시간에 돌아다닌 것을 들켜서 그런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잠깐 할 말이 있는데, 점심 먹고 볼래?”
“지금 말해도 상관없는데...”
늦게 갈수록 급식실에는 사람이 적다. 그 말은 내가 불발이 일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걱정거리가 조금은 줄어드는 것을 뜻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신과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사람이 적은 장소일수록 좋으니까.
“아까... 봤어?”
“뭘?”
“......”
“교정에서 돌아다니는 거?”
내 말에 서하람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으나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알려져 있는 우등생 이미지의 서하람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신기했다.
“다른 건?”
다른 거? 나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서하람을 쳐다보았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지 알 것 같기도 했지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냥 너 돌아다니는 것만 봤는데... 창밖에 봤다가 너랑 바로 눈이 마주쳐서 당황스럽기는 했는데... 뭐 했어?”
“아니, 그냥... 공부가 잘 안 돼서...”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고 수업시간에 교내를 그렇게 돌아다닌다고? 아무리 공부를 잘한다고는 하지만 선생님들이 그런 편의를 봐줄 리가 없었다. 다른 학부모들에게 항의가 들어올 만한 일을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아마 거짓말을 하고 밖에 나와 서성였던 거겠지. 그래서 지금 나에게 저러는 것이다.
“그럼 됐어.”
서하람이 몸을 돌렸다. 신이 내 등을 툭 건드렸다. 신호였다.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행동이었다.
“아... 내 점심...”
왠지 눈물이 났다. 오늘 점심 엄청 맛있는 거라고 그랬는데... 오늘 닭강정 나온다고 했단 말이다. 학교 급식에서 유일하게 맛있는 닭강정이 나오는 날이건만. 나는 한숨을 내쉬고 뒤돌아가는 서하람에게 다가갔다.
“서하람!”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
서하람은 아주 좁은 공간에 있었다. 아, 이거 알아. 인터넷에서 몇 번인가 보았던 곳이었다. 1인 독서실 책상- 문을 닫으면 그야말로 혼자서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공간에 갇히게 되는... 그런 책상에 서하람은 앉아있었다.
“거 참, 이신... 내 말이 맞잖아. 공부하는 모습만 보게 될 거라니까...”
나는 투덜거렸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나는 서하람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와- 이 범생이... 어떻게 가장 기억에 강력하게 남은 과거가 공부하는 거지? 나와는 다른 종족이 아닐까 의심이 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보통은 즐거웠던 기억이나 슬펐던 기억이 진하게 남을 텐데, 아니면 황당했던 기억이나. 서하람은 말 그대로 공부하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재미없는 녀석-
“여보세요?”
그 때, 서하람이 전화를 받았다. 이렇게 단절된 공간에서 공부를 하면서 핸드폰은 밖에 둘 줄 알았는데 안에 갖고 들어오다니... 이제야 친근함이 느껴졌다. 그래, 너도 사람인데 공부만 할 수는 없지.
“그걸 왜 물어봐?”
누가 공부라도 물어본 건가? 서하람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까지 내가 지시를 해야해?”
지시?
지시란 무엇인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이 ‘지시’라는 것이다. 친구에게 지시를 하는 경우는 없다. 마치 자신이 ‘윗사람’이라도 되는 듯한 말에 나는 놀랐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당연한 걸 왜 물어? 밟아야지.”
밟아? 뭘? 설마하니 대화상 학교에 새로 심은 잔디가 잘 자라게 밟아줘야 한다는 얘기는 당연 아닐 테고. 누군가를 때린다는 이야기로 들리는 데...?
서하람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녀석은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듯 했다. 조금 전까지 짜증이 가득했던 얼굴로 명령했던 것이 맞는 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 당연히 찍어서 보내줘야지. 내가 그거 보면서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고 있는데. 그 벌벌떠는 모양새하며 비는 모습하며, 목소리 하며...”
뭐가 어쩌고 어째?
“야, 살살해. 살살.”
*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보건실 천장이 보였다. 손이 덜덜 떨렸다.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신은 보이지 않았다. 보건선생님도 보이지 않았다. 저 맞은 편 커튼이 쳐져있는 것을 보아 서도우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야, 살살해. 살살’
그제야 나는 어째서 서하람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생각하게 됐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분명 이 말을 들었었다. 전에 불발로 윤여진이 누군가를 때리고 돈을 받아내는 그 장면을 보았을 때, 그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서하람이 윤여진 패거리랑 같이 다녔던 거였어?
게다가 그냥 다니는 게 아니라 마치 사령탑과도 같았다. 그는 명백히 ‘지시’하고 있었다. 본인이 그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 아주 명확하게. ‘시키고’ 있었다.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우리학교 우등생이 일진이라... 어떻게 보면 그리 놀랍지 않은 이야기였다. 요즘엔 일진들도 공부를 잘 한다고 하던가?
“악몽이라도 꾼 거야?”
서도우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 조금 목소리가 떨리는 듯 했다.
“조금.”
“서하람이랑 친해?”
“아니.”
침묵이 감돌았다. 서도우는 아무래도 서하람이 윤여진과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서하람에 윤여진에... 그 교실에 있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의 추정대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면.
“학교 커뮤니티 봤어?”
“타나토스?”
커튼 너머로 서도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진짜 있을까?”
“......”
나는 답하지 않았다. 괴롭힘을 당하는 피해자들에게 있어서 타나토스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판이라는 이름의 범죄를 저지르고 다르는 녀석이 돌아다니는 것 역시 눈감아 줄 수는 없었다. 그는 심판 이라는 이름의 살인을 즐기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사이코메트리로 본 타나토스는 그랬다. 그렇지 않고서야 윤여진을 죽이면서 그렇게 즐거워할 리가 없으니까.
조용한 침묵이 이어졌다. 서도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