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배전단 : [ 11화 ] 개무시 2
놈들에게 개무시를 당해 자존심이 구겨졌지만, 녀석들은 다만 내가 부러워서 저러는 것일 게다. 녀석들 역시 아직 솔로들이었거든. 어쨌건 나는 이 베이비 스튜디오의 사장인 정태 놈에게 아양을 떨어야만 했다.
“도대체 얼마나?”
“야, 그게 혹시 오늘 증말 잘 되면, 밥만 먹고 헤어질 수 있냐? 술도 근사한 데서 먹구. 그러다 혹 19금 찍을 지도 모르잖아.”
“그니까 얼마나?”
“내가 얼마 전 우리 엄니 환갑잔치 하느라 카드한도가 꽉 막혔잖아. 그래서 현금이 아무래도 필요하잖아. 그니까 한 20만원?”
“에라이, 내가 먹고 죽을 꺼도 없어. 자, 여기 5만원!”
“아~ 그건 좀 아닌 듯한데... 요새 5만원으로 스테이크라도 먹겠냐?” “그래? 그럼 필요 없다구?”
정태가 매정하게 5만원 지폐를 다시 집어넣자,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에이 무슨 이 정도면 괜찮지. 땅 파바, 100원이라도 나오나. 내가 월급날 갚을게. 그뿐이냐. 내가 잘되면 가만있겠냐? 내가 바로 새끼 칠게.”
“그냥 너나 잘해. 너나.”
예상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리저리 모은 실탄을 들고 소개팅에 나가면 되는 상황이 되었다. 때마침 상진이 녀석이 중국음식을 잔뜩 시켜서 먹고 가라고 했는데, 정태의 잔소리가 또 시작되었다.
“야, 임마. 도대체 뭘 이렇게 많이 시켰어!”
한 상 가득 차린 중국요리에 정태가 한 소리 한 것이다. 하지만 상진이 누군가? 정태 잡는 상진이었다.
“자식, 어차피 지가 다 먹을 거면서, 아까우면 나 먹는 건 달아놔 임마.”
“아 진짜 친구란 놈들이 도대체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야, 서준아. 니도 먹구 가라. 어차피 소개팅 가서 밥도 못 먹고 헤어질게 뻔한데 뭐!”
상진이 녀석이 초치는 소리를 했다. 재수 없게.
“야, 무슨 재수 없는 소릴 하구 그래. 내가 이 소개팅, 얼마나 기다린 건데.”
“에이~ 니는 안 돼! 안 돼!”
상진 녀석의 말에 정태까지 가세해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왜? 뭐가 안 돼?”
“그걸 몰라서 묻냐? 너 아직도 모르겠어. 너한텐 첫사랑 귀신 붙어서 니가 암만 설쳐도 총각 딱지 떼기 힘들다니깐.”
“미친 놈! 지랄을 해라. 무슨 첫사랑 귀신?”
“에? 얘 봐라! 얼마 전에도 술 꽐라 돼서는 또 걔 이름 막 부르면서 울고 그랬잖아!”
“야이, 미친 노마 내가 또 언제 그랬다구 그래?”
“어라? 똥 싼 놈이 성질낸다고. 정태야, 쟤 저번에 그랬어? 안 그랬어?”
“그랬지!!”
정태가 상진의 말을 인정하며, 고개를 또 끄덕끄덕 거렸다.
“벚꽃 떨어지는 날 되면, 미친놈처럼 술 쳐먹구 꽐라 되는 거 한 두 해 보냐?”
“그치! 한 10년 됐지!”
“그러니까! 미친 놈. 10년이면 강산도 변하잖아.” “야, 내가 언제 걔 생각한다구 그래? 나 진짜 다 잊었는데.”
“안 돼! 내가 보니까 너 걔 귀신 붙어서 니 어깨에 붙어 다니는 거 같애. 어디 가서 살풀이라도 해야지 총각 딱지 뗀다구.”
“음... 그건 좀 필요할 듯. 걔 이름 뭐지? 지... 지...”
정태와 상진 두 놈이 머리를 쥐어짜며 나의 첫사랑 스토리를 쑤시면 내가 꼬리 말아야 했다.
그 때 이후로 내가 진상을 필 때마다 저 두 녀석이 뒷감당 해준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젠장. 벌써 10년이 됐다. 걔가 사라진지, 10년 됐다. 녀석들 말마따나 액땜하듯 살풀이라도 해야 할 듯. 그때 이후로 영 여자 복이 없었다. 덤비는 여자들도 있고, 썸 타는 여자들도 많았지만 대개는 이상하게 끝이 안 좋았다.
얼마 전의 일이다. 셋이 간만에 나이트클럽에 갔다. 그것도 강남까지 원정 뛰었다.
셋이 나이트클럽에 가면 일단 내게 여자들의 신호가 몰려온다. 게다가 내가 촉이 좋아서 상대가 원하는 말을 착착 꺼내주면 그 날은 불타는 19금을 찍을 수도 있는 상태가 바로 된다.
그럼 의리 빼면 시체인 내가 정태랑 상진이 한테도 그녀의 친구들로 커플을 딱 만들어줬는데 글쎄 여자애들이 먼저 가자더라구.
어디냐구?
어디긴 어디야? 뻔히 떠오른 거기. M으로 시작되는 청춘들의 안식처지.
우리 셋은 그날 계 탓다고 서로들 환호했지.
근데 말야...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있는 줄은 그때 다시 확인했어.
M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필요한 것이 있어서 다들 편의점을 먼저 들렀지. 대개의 M에는 피임을 방지하거나, 병균으로부터의 감염을 방지할 수 있는 장화가 있는데 혹시나 없으면 어떡해. 그럼 다시 나와야 하잖아. 그래서 우리 셋은 그 고무장화를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지.
근데 말야...
그녀들도 잠시 후 들어와서는 뭔가를 사려다 편의점 사장님과 시비가 붙은 거야. 우린 그녀들이 난처한 상황에 빠진 것이라고 착각하고는 정의의 기사행세를 했지.
왜 그러시냐구?
우린 편의점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께 정중하지만, 묵직하게 물었어.
근데 말야...
“아니, 학생들한텐 담배 못 판다구요.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돼요?”
“네???”`
그녀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청소년이었어. 미성년자. 고삐리.
나 정말 그때처럼 황당했던 적이 없었네.
근데, 자기들 고삐리면 더 좋지 않냐구. 그냥 자자구. 막 떼를 쓰는 거야. 근데 어떻게 그런 핏덩이랑 19금을 찍어. 아무리 세상이 말조 라두.
그래서 모텔 앞에서 걔들 훈계했지. 그냥 팍 분위기 깨졌지.
잠시 후 걔들은 지들끼리 내 욕하면서 나이트클럽 가는 거야.
그 덕에 상진이랑 정태도 덩달아 커플 깨졌을 거 아냐. 상진이랑 정태한테는 그 날이 정말 소중하고 성스러운 날이었던 거야. 자신들을 남성, 여성도 아닌 중성인 줄 알고 살았다가 성정체성을 모처럼 깨닫게 된 날이거든.
잠시 후 우린 아무 말 없이 소주를 먹었지.
안주가 모자라니깐 상진이랑 정태가 나를 안주 삼아서 소주를 먹더군.
아~. 내가 뭐 잘못한 건 아니잖아. 근데도 녀석들은 날 안주 삼아서 씹어 먹더군.
그때 창밖으로 벚꽃이 날렸어.
그러면 안 되는데 벚꽃이 날리는 거야.
사실 벚꽃을 먼저 본 건 상진이야. 녀석은 마치 보면 안 될 것을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된 것처럼 말했어.
“어? C발 벚꽃이다!”
정말, 싫어하는 티가 팍팍 났지. 상진이랑 함께 정태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어.
다 내 탓이야.
녀석들이 살면서 가장 아름답게 생각할 수도 있는 벚꽃을 저리도 싫어하게 된 건, 사실 내 탓이야.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게는 벚꽃이 바로 트리거야. 방아쇠라고. 이렇게 벚꽃이 날리는 걸 보면, 마치 방아쇠를 잡아당긴 듯 사고를 치는 거야.
벚꽃만 보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상흔이 뛰쳐나와. 10년 전 사라진 내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알코올과 버무려져서 진상이 되는 거지.
술 먹으면 진상이 되는 게 아니라, 술 먹다 벚꽃을 보면 나는 진상이 되는 거야.
그 날도 돌이키기 싫을 정도로 진상을 폈다고 해. 물론 나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아마도 필름이 딱 끊긴 상태에서 영화를 찍는 거지. 이번에도 블록버스터급이었다고 해. 녀석들의 고충을 듣고 있자니, 괜히 미안해지더라구.
어쩔 수 없이 내 첫사랑 귀신에 대해 짧게 언급을 해야 할 것 같네.
그래. 10년 전이었어. 나는 고삐리였지. 그리고 그녀와 나는 서로 좋아했어.
상진이는 우리 둘을 보고 어울린다고 했어. 왜냐하면 어느 누구하고도 어울릴 수 없는 두 사람이 함께 커플을 이뤘다나. 뭐 그래서 어울린다는 거야.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실 나와 그녀의 만남은 좀 특이했어. 일종의 교통사고 같은 거라고 할까? 그 날은 나는 물론이고 정태, 상진과 함께 모두 퇴학을 당할 뻔했던 날이었어. 그때 내가 대형사고를 하나 터뜨리거든. 여기서 그 사고를 설명하는 건 무의미하니깐 그냥 스킵하고 넘어갈게.
어쨌건 잠시만 10년 전 고삐리 시절로 돌아가야겠어.
하여간 대박 사고를 친 뒤 우리 쓰레빠 3인조는 교무실 앞에서 벌을 서고 있었어. 교복은 어디다 버리고, 하와이안 셔츠 차림에 쓰레빠를 끌고 학교에 등교를 했는데 딱 걸린 거지.
근데 그렇게 서있던 내게 당시 담임 쌤이 정말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더라구.
“서준아, 너 왜 이러니. 너 안 그런 놈이었잖아. 넌 이런 놈 아니야!”
나는 좀 난감했지만, 사실대로 말했어.
“저, 원래 이런 놈인데요~”
담임은 그 말을 듣고 노려보다가, 다시 안타까운 얼굴이 되며 부드럽게 말하더라.
“아냐! 넌 원래 이런 놈 아니라니까. 이렇게 살다간 10년 뒤엔 뭐가 될라구 그래? 엉?”
사실 그때는 담임의 관심도 다 귀찮을 때였어. 근데 되돌아보니 그런 분이 없으시더라구. 참 교육을 실천하는 바람직한 교사셨던 거지. 키가 작고 안경을 쓰신 분이었는데, 그 분이 나중에 내가 졸업식 끝나고 따로 찾아가 인사드렸더니 증말 좋아하시더라. 좋은 분이야. 얘기가 또 딴 데로 샜네. 내가 좀 그녀 얘기만 하면 중언부언 중구난방 주저리주저리 하는 거 같네. 나름 힘들어서 그래. 이해 부탁해.
내가 그녀를 본 건 잠시 후였어. 나를 보며 난감해하는 담임과는 달리 평소 교내 시크녀로 유명했던 미술 여선생님이 있었는데 갑자기 끼어든 거야. 이렇게!
“더 나뻐지기야 하겠습니까!”
“그러게요. 더 나뻐지기야 하겠... 아니!! 정말 불쾌하네요. 선생님. 이런 상황에서 스퀴즈번트 하시면 안 되죠!”
미술샘은 좀 시크해서 그렇지 심성은 착한 분이었는데, ‘더 나뻐지기야 하겠냐’는 말은 참 맞는 말이었어. 그 뒤로 더 나뻐지지는 않았거든. 하여간 나는 미술샘과 담임샘의 논쟁을 듣다가, 내 운명의 그녀를 보게 된 거야.
내가 더 나빠질 것인지, 아닌지로 그렇게 심각하게 논쟁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잠시. 미술샘 뒤편으로 오로라처럼 빛이 뿜어져 나왔어.
바로 그녀였어.
무슨 조각상을 품에 앉고 미술샘을 따라온 것 같았는데, 잠깐 스친 그녀와 나의 눈빛은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만들어 냈지. 왜 첫눈에 반한다는 얘기... 다 구란지 알았어. 근데 아니더라구. 마른 하늘에 축포가 터지고, 운명의 팡파레가 들리는 듯. 물론 그렇지는 않았지만, 나는 큐피트의 화살을 맞은 듯 그녀에게 반했던 거야.
평소 무뚝뚝한 4번 타자로, 강북 짱 강서준으로 살아왔는데 내 심장이 벌컥 깨어난 거야. 드디어 동물에서 인간이 되는 순간이랄까!
그 뒤로 계속 이어지는 나와 그녀의 새드 스토리는 이쯤에서 끝낼까 해.
어쨌든 다 지난 일이니까!
어쨌건 그녀와 헤어진 날.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가 사라진 날.
그 날 이후로 난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었어. 오지 않는 그녀를 난 오랫동안 기다렸어. 그때 벚꽃이 떨어지고 있었어. 처연했지.
뭐, 이젠 오래 지난 얘긴데... 이게 술만 먹으면 도지거든. 특히 술 먹는데 벚꽃 날리면 띠리리 과거로 가버리나봐. 이런 새드 스토리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도 낭만 아닌가? 가끔씩 헛것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날도 꿈에 그녀가 나타났는데... 글쎄 그녀의 얼굴이 마치 달걀귀신처럼 맨들맨들 하더라구. 10년이 지나서여서 인지 그녀의 얼굴이 생각이 안 나는 거야. 아, 이젠 잊고 싶다 증말.
하여간 그런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정태랑 상진은 나를 송곳으로 후벼 파는 거지. 혼자 잘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기도 하겠고. 그때 다시 상진이 넋두리처럼 말했어.
“그니까, 걔 이름이 뭐냐구? 첫사랑 귀신 이름이 뭐였지? 지... 지...”
“맞다 그래~ 걔 이름 지연아 잖아.”
정답!
답답했던 상진의 뇌를 뻥 뚫어주듯 정태가 정답을 얘기했다.
지! 연! 아!
순간 나의 뇌 속에서는 혈류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나! 할아버지가 말했던 운명의 상대! 그 운명의 상대가 혹시?
하지만 그녀는 이미 10년 전 사라진 사람인데... 정말 녀석들의 말처럼 첫사랑 귀신이 붙은 건가? 에이!!! 절대 안 돼!! 혼자서 녀석들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 난 허세를 부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야 이 자식들아. 내가 오늘 확실히 모텔 잡고, 소개팅 녀 샤워 할 때 셀카 찍어서 보낸다! 기대해!”
< 개무시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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