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섭섭한 어떤 사이
우재는 유리를 안아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유리를 침대에 내려놓고 우재는 문 앞에 서서 서성였다. 그때 우재를 힘겹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재야…”
우재는 유리의 곁에 섰다. 유리는 우재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가지마….”
유리는 다시 잠에 들었다. 우재의 눈썹이 떨렸다.
“나보고 어떡하란 소리야….”
우재는 그대로 침대 옆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 시각 한나는 일을 끝내고 평소 때처럼 이라고 하기는 뭐 하지만 요 며칠처럼 센느강 다리 아래에서 우재를 기다렸다. 한나는 아직까지 연락이 한번 없는 우재에게 조금 섭섭하던 참이었다. 한나는 약간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기다렸다. 눈앞에서 젊은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었다. 한나는 우재를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생각했다.
“아주 연락도 없고…, 만나면 혼내줘야지.”
한나는 약간 억울한 듯이 듣고 있을 우재의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났다.
한나는 계속해서 기다렸다. 하지만 우재에게서 연락은커녕 문자 한통도 오지 않았다. 한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나?”
한나는 찬바람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걸 느꼈다. 한나는 늦어도 좋으니 우재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나의 바램과는 달리 그날 우재는 한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나는 생각했다.
‘이게 내가 섭섭해도 될 일인가?’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왜 이렇게 창피하지?’
‘우재씨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내가 화내도 될 일인가?’
한나는 머릿 속이 복잡해졌다. 한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갔다. 한나는 우재를 잘 알지도 못했다. 알아가고자 다짐은 했지만 그것은 진짜 다짐뿐이었다. 한나는 한순간에 쌓아올린 우재에대한 믿음이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한나는 눈물을 삼켰다.
‘그래, 우재씨는 연예인이잖아. 며칠만으로도 나는 특별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고. 고마운 거지. 억울해 하지 말자. 강한나. 그냥 내 삶에 특별한 이벤트였어.’
한나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피어났지만 이내 다시 금새 그쳤다. 한나는 굳은 다리를 풀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한나는 웃음이 났다.
“뭐야….”
한나는 탁자 위에 가방을 올려놓다가 쪽지를 한 장 발견했다. 한나는 그 쪽지를 보자마자 얼굴이 붉어졌다. 우재의 섬세한 손 글씨로 적어진 쪽지였다.
‘한나씨! 잠시 숙소에 다녀올게요! 무슨일이 있지 않은 이상 금방 다시 올 거예요. 연락할게요. 사랑해요.’
한나는 우재를 두고 많은 생각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바보…, 우재씨도 못 믿고….’
한나는 우재의 쪽지를 한참 들여다 보다 우재에게 문자했다.
‘우재씨, 꼭 연락해줘요. 기다릴게요. 사랑해요.’
우재는 엎어진 몸을 일으켜 세워 핸드폰을 확인했다. 배터리가 없었다. 한나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다. 유리의 핸드폰을 보았다. 잠금장치가 걸어져 있었다. 우재는 한나에게 연락을 하지 못한 걸 후회했다. 그렇지만 우재 앞에는 1년 만에 나타난 오랜 연인이 찾아왔었다. 모든 것이 소설의 끝처럼 끝난 사이였지만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우재는 가슴을 쓸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핸드폰이 꺼졌으니 한나의 연락처를 알 도리가 없었다. 매니저 형에게 연락을 하자니 호텔 프론트에서 아이돌 가수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우재는 유리를 두고 가기도 쉽지 않다는 걸 느꼈다. 우재의 한숨은 밤하늘처럼 깊어만 갔다.
유리는 잠에서 깨어나면 우재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유리는 의자에 앉아 침대 한쪽 귀퉁이에 얼굴을 묻고 잠에 빠진 우재를 보며 흐뭇해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우재의 살짝 보이는 우재의 뺨을 조심스레 쓸었다. 그때 우재는 유리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떨어졌다.
“뭐하는 짓이야.”
유리는 섭섭한 얼굴로 놀라며 대답했다.
“내가 뭐 못할 짓 했어? 그냥 네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거야.”
우재는 약간 짜증이 난 얼굴로 유리에게서 뒤돌아서며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유리야 제발 돌아가 줘.”
유리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같이 가자.”
우재는 황당한 표정으로 뒤돌아서며 말했다.
“유리야 아직도 모르겠어? 우린 그때 끝난 거야. 네가 자꾸 이렇게 나온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유리는 다시 침대에 앉았다.
“너 아직 만나는 사람도 없잖아. 그리고 우린 그때 너무 좋았고. 난 아직 네가 그리워 우재야.”
우재는 한나 이야기를 하려다가 말았다. 지금 유리 상태에서 말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우재는 유리를 다시 설득했다.
“유리야. 네 말이 맞아. 우리 진짜 서로 사랑했잖아. 근데 이젠 아니야. 끝났고, 다시 시작할 맘이 난, 난 말이야, 전혀 없어. 유리야. 네가 원하는 건 이제 될 수 없는 거야. 이제 너는 한국으로 다시 가서 네 삶을 살면 돼. 나도 너를 그리워했던 적이 있었겠지. 근데 지금은 아냐. 내겐 다른 것들이 더 소중해지기 시작했어.”
유리의 눈이 매서워졌다.
“다른 거?”
우재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너 상태 형 번호 있지? 얼른 걸어봐 여기 떠나야지.”
유리는 우재의 얼굴을 보며 씁쓸해했다.
유리와 우재가 묵는 호텔 로비에 어떤 한 여자가 목에 카메라를 들고 구석에 앉아있다. 그녀는 화가 났다. 자신의 우재가 다시 그년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골치가 아팠다. 근 1년 동안 그 여자의 모습이 사진에 찍히지 않아서 행복했었다. 하지만 다시 그 여자의 모습이 찍히고 있다. 여자는 울그락붉으락하는 얼굴로 카메라를 만지며 호텔 엘리베이터를 주시하고 있다.
여자의 모든 스케줄은 우재의 스케줄과 같았다. 여자는 철저히 우재를 따랐다. 여자는 우재가 자신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우재의 많은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진도 가지고 있었다. 여자는 언제든지 우재를 파멸할 수도, 별로 만들어 줄 수도 있었다. 여자는 우재가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였다. 여자 앞에 우재와 그 뒤에서 따라 나와 살포시 우재의 팔짱을 끼려고 하는 유리가 보였다. 여자는 카메라를 들었다. 여자는 우재의 모든 것을 찍었다. 들키지 않는 선에서 여자는 최선을 다해 따라다니며 찍었다. 여자는 씩씩댔다.
‘개년.’
카메라를 최대한 낮추고 아무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다시 나타났다고?’
여자는 손에 쥐던 막대사탕을 바닥에 내리치고 사정없이 밟았다.
‘우재씨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예?’
여자는 우재와 유리가 가는 길을 뒤쫓았다. 여자는 유리를 살폈다. 늘씬한 자태가 훤칠한 우재와 아주 잘 어울렸다.
‘일반인치고 저렇게 생기긴 힘들거야. 하지만 우재씨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네가 망치면 안되잖아!’
유리가 우재의 팔짱을 끼려고 할 때마다 우재는 자연스럽게 팔을 풀었다. 여자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우재씨도 너는 이제 질린 거라고.’
여자는 해가 뉘엿뉘엿 져 가도록 그 둘을 좇았다. 드디어 여자가 떨어져 나가고 우재는 혼자 남았다. 우재는 루브르 궁 주변의 한인 식당가를 걸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갑자기 우재는 멈춰서더니 멀리서 한 조그만 한식당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우재가 그곳에 들어가려나 싶었다. 그리고 자신도 들어가려는지 주머니에서 유로화를 주섬주섬 꺼내 세어보았다. 그때 여자는 갑자기 환해진 우재의 얼굴을 보았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난 듯한 얼굴이었다. 그 작은 한식당에는 작은 여자가 있었다. 작고 하얀 수채화로 세상 모든 꿈을 모아 그린 듯한 사뿐한 여자가 열심히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여자는 우재의 얼굴을 보았다. 우재는 애틋하게 그 작은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녀는 우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여자는 카메라를 들어 그 모습을 찍었다. 우재는 여전히 애틋하게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우재의 얼굴과 그 소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린 것 같은데…, 어떤 사이지?’
유리 때와는 달랐다. 여자는 왠지 우재가 그 소녀 앞에 선다면 인정해버릴 것만 같았다. 우재는 한참을 멀리 서서 그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떠났다. 여자의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마치 유리를 처음 본 그 순간 같았다.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감정의 간격에 숨이 막혔던 때였다. 여자가 가질 수 없는 그가 누구는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억울하고 답답했다. 여자는 메모리칩을 수 없이 갈아 끼울 만큼 우재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젠 다시 쓸모없어졌다. 여자에게 남은 건 파멸이었다. 우재를 가질 수 없다면 파멸 시킬 것이다. 여자의 셔터 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우재는 멀리서 일하는 한나를 바라보았다.
‘예쁘다. 내 눈에만 예쁠까? 아니 누가 보아도 예쁠 거야. 미안하다. 한나에게 미안하다.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아닌가. 생각보다. 내 존재가 그리 크지 않을지도 몰라. 한나에게 오늘 어떻게 다시 다가가야 하지? 예쁘다. 한국에 돌아가면 한나는 어떻게 하지? 한나를 데리고 떠나고 싶다. 한나와 내 사이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칭칭 동여매고 싶다.’
우재는 한참을 바라보다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온 그는 매니저 성태를 찾아갔다.
“형! 대체 무슨 짓이야? 왜 갑자기 유리를 부르고 그래?”
옆에 있던 하루와 유노가 놀라 일어났다.
“뭐어? 유리? 유리 누나가 여기까지 왔다고?”
하루와 유노의 표정이 굳어졌다. 유노는 짜증이 난 얼굴로 말했다.
“형 유리랑 끝난 거 아니었어?”
하루도 놀라 말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다시 시작한 거야? 형 울며불며 술 먹고 들어온 게 1년도 더 된 거 아니었어?”
우재는 대답 없이 질끈 눈을 감았다.
성태는 우재의 눈치를 보며 일단 애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일단 앉아. 그리고 쉿. 듣는 사람이 많다고.”
우재는 씩씩대며 자리에 앉았다. 성태는 쭈삣대며 말했다.
“저, 네가 요새 너무 우울해 보여서…, 요새 그런 것들로 사건도 많이 일어나고 해서, 내가 너 기분 풀어주려고 연락을 했지…, 근데 그게 아니었다면 미안하다. 잘못했다아. 용서해주라.”
성패는 우재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슬쩍 머리를 들어 우재 쪽을 살폈다.
“계속 이러고 있을까?”
우재는 어이없다는 듯이 성태를 바라보았다.
“아, 몰라 일단 나 충전기 좀 주고 유리 걔 자기 방에 들어갔으니까 걔 얼른 다시 한국 보내요 형!”
성태는 싱긋 웃으며 일어나 우재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배고프지? 뭐 시켜줄까?”
“아, 됐어요 형!”
성태는 우재의 눈치를 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옆에 있던 유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형, 우리 조심해야 돼요. 알죠?”
우재는 미간이 좁아지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알지. 미안해. 피해가는 일 없게 할게.”
그때 하루가 유노의 등짝을 세게 때렸다.
“멤버들끼리 돕고 살아야지! 말 한번 살벌하게 하네!”
그리고 우재의 등짝도 때렸다.
“혼날 줄 알아요. 형!”
우재는 하루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때 나갔던 성태가 다시 들어왔다. 성태는 몹시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 왜 그래요?”
우재가 걱정스레 물었다. 성태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그게…, 유리가 연락이 안되네…. 호텔에 연락도 해봤는데 방을 뺐다네.”
우재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한참 고개를 젖히더니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성태를 바라보았다.
“나둬요. 뭐 다시 연락 오겠죠. 아니 걔는 반드시 다시 연락할 거예요.”
우재의 근심은 깊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