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는 특별했어요.
민과 한나는 끝없는 밤길을 걸었다. 둘은 마치 시간이 지워진 것만 같았다. 민은 한나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었다.
“나는 맨날 아니래요. 처음에 나를 보고 호기심에 사람들이 다가와도 결국엔 아니래요. 참 웃기죠?”
민은 한나의 애써 지어 보이는 웃음이 아파보였다.
“참, 내가 뭐가 그렇게 비호감일까요? 내가 뭐가 그렇게 싫은지…. 어렸을 땐 막 남자애들한테 맞기도 했어요. 갑자기 그냥 이야기 하다가 날 때렸어요. 근데 웃긴 건 아무도 그 앨 안 말렸어요. 진짜 웃기죠. 정말 아무도 안 말리고 보고만 있던데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민은 대답 없이 한나의 말을 계속 들어 주었다.
“참, 그래도 다음날에는 그 친구들이랑 아무렇지 않게 놀았어요. 흑.”
갑자기 한나가 울기 시작했다. 민은 당황스러워 고갤 숙여 한나를 다독였다.
“괜찮아요?”
한나는 또 뚝 울음을 그치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왜 맨날 나한테 그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민은 한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도 그래요. 맨날 같이 물만 마셔도 누구랑 사귄다고 욕이나 먹고….”
한나는 민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 이번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민씨도 참 웃겨요.”
민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한나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쨌든 그래요, 나는 맨날 구석탱이에서 하고 싶은 것도 숨기고 살았어요. 나도 화려하고 반짝이는 거 좋아해요. 근데 그냥 나랑 안 어울린다고 주변에서 손가락질을 해대니까 내가 자신감을 가질 수가 없잖아요….”
민은 그런 한나를 보며 말했다.
“왜요. 충분히 잘 어울리는데요?”
한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어쨌든 그랬어요. 어렸을 땐 그게 다 인줄 알아서 내가 잘하면, 내가 예뻐지고 그러면 다 괜찮아지는 줄 알았는데, 커보니까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사람들은 내게 예쁘다는 소리를 절대 안해줘요. 해달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렇게 나를 깎아내리고 싶나 봐요. 혹시라도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눈이 이상하다며 오히려 면박이나 준다니까요? 내가 예쁘지 않은 건 알겠지만, 그래도 대놓고 사람들에게 그런 무시를 받으니까, 아니 은근히라도 그런 느낌을 받을 때는 정말…”
“한나씨 예뻐요.”
갑자기 민이 한나의 말을 끊었다. 한나는 놀란 얼굴을 했다.
“민씨….”
민은 얼굴이 벌개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한나씨 예쁘다고요!”
한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요. 근데 이젠 나도 알아요. 누가 내게 말해줬거든요. 나 정말 예쁘다는 걸 알아도 된다고.”
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우재 형이야…’
한나는 슬프지만 자신감에 찬 얼굴로 말했다.
“분명 그 사람에게는 내가 한 순간 그렇게 보였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알아요. 그때 그 순간만큼은 내가 그 사람에게 별이었다는 걸요.”
그 순간 민은 한나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민씨, 그래서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내가 가진 아름다움을 믿어 보기로 했어요. 나는 특별해요. 특별할 거예요. 내 꿈은 다 이루어질 거고, 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랑을 할 거예요.”
민은 한나를 두고 간 우재가 원망스러웠다.
“한나씨는 그 사람과 어떻게 될 거 같아요?”
한나가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여기까지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겠죠? 난 그 사람이 처음이에요.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왔다 가버렸지만 그 사람은 내게 선물 같은 존재였어요. 난 그냥 고마울 뿐이에요. 지금은 단지 아프기만 할 뿐이지만….”
민은 미간을 좁혔다.
“한나씨, 한나씨의 그 사람 지금 쯤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 우린 친구니까 같이 기다려요 그럼.”
한나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요. 여기 집까지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낼 10시 콩코드 광장 근처에서 봐요. 조심히 가요!”
두 사람은 깊은 새벽 다음을 약속하고 그렇게 헤어졌다.
한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몹시 피곤했다. 민의 위로로 우재의 일은 잊어버린 것 같았지만, 그 여자를 향한 우재의 떨리는 눈빛은 잊을 수가 없었다. 서로 앙칼진 목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익숙했다. 그 익숙한 사이에 한나는 낄 수가 없었다. 가만히 그 둘의 투닥거림을 보고만 있었다. 한나는 볼 위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직 우재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한나는 벽을 타고 주저앉아 버렸다. 한나는 가슴을 뜯었다. 짧았지만 강렬했다.
“나 이제 어떡해…, 흑.”
한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우재에게선 왜 아직도 연락이 없는 걸까. 한나는 우재를 기다려 보고자 했다. 또 다시 한나를 찾아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한나는 긴긴 밤을 이루지 못했다. 한나는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되고 한나는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다. 우재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한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대신에 민에게서 아침을 알리는 문자와 약속시간을 알리는 문자가 와 있었다. 한나는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 욕실로 나섰다.
오전의 파리 거리는 나름 북적거렸다. 사람들이 이곳저곳으로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한나는 선선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상쾌한 공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나는 이제 다시 정리가 됐다. 다시 이곳으로 온 이유가 되살아났다. 한나는 특별했다. 누구도 한나를 가질 수 없었다. 한나는 한나 것이었다. 한나는 이제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게 누구라도 한나 본인에게 충실하기로 했다. 잠깐의 꿈이었으니 잠깐만 자신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금방 떨쳐 버리고자 결심했다. 하지만 아직도 한나의 가슴에 한 이름이 떠올랐다. 우재. 한나는 길을 걸으며 울었다. 가슴에서 무엇인가 벅찬 것이 올라와 한나를 괴롭게 했다.
민은 단정한 차림으로 콩코드 광장 앞으로 나왔다. 한나와 비슷한 체격의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기웃기웃 거렸다. 어제 숙소에 우재는 들어오지 않았다. 민은 갑자기 우재가 괘씸해졌다. 민은 한나를 옆에서 지켜주고 싶었다. 처음이었다. 이런 소중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만남이 기대가 됐다.
민은 약속시간 훨씬 전부터 나와 한나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니 저멀리서 한나가 나타났다. 그토록 기다리던 한나였다. 한나의 얼굴은 어두웠다. 민은 그런 한나를 보자 밤새 위로를 해준 것 같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였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 우재 형을 불러 한나 앞에 세워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민은 한나의 수척해진 얼굴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잠 잘 못잤어요?”
한나가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아, 네…. 그냥 잠이 잘 안오더라고요. 걱정 말아요, 별거 아니에요.”
민은 한나의 메마른 얼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한나는 민의 걱정스런 표정을 보고 얼른 화제를 바꿨다.
“우리 저기 가요. 저기가 좋더라고요 전.”
한나는 민을 끌고 한 노천 카페에 가서 앉았다. 한나는 간단하게 메뉴를 시키고 민을 바라봤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다시 한국행이네요?”
민은 한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요 한나씨. 한나씨는 궁금하지 않은가 봐요?”
한나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뭘요?”
민은 숟가락으로 커피가 든 잔을 한번 휘젓고 그곳에 계소고 시선을 고정 시키며 말했다.
“한나씨가 내 일정을 모두 다 알고 있는데도 내가 별 말 안하잖아요.”
한나가 순간 멈칫 했다.
“한나씨는 참 사람이 순수한 건지, 바보인 건지 모르겠어요.”
민은 한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한나씨, 나 다 봤어요.”
한나가 놀라 말을 더듬었다.
“아, 아, 그, 그게…, 저어…. 뭘 봤다는 거죠?”
민이 말을 가로챘다.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우린 여전히 친구잖아요. 그쵸?”
민은 다정히 웃어 보였다. 한나가 슬프게 웃었다.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대체 이게 뭔지 모르겠어요.”
민이 갑자기 카메라를 들어 한나의 사진을 찍었다. 한나가 놀라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뭐예요!”
민이 생글 웃으며 말했다.
“제 친구 사진 좀 찍는 게 뭐 어때서요.”
민이 한나를 보며 다시 말했다. 한나가 찡그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용서해줘요. 당신 미소가 너무 슬퍼보여서요. 이것 조차도 전 간직하고 싶어지네요.”
한나는 아무말없이 여전히 찡그린 채로 주스를 한모금 마셨다.
“한나씨, 제가 떠나고 나면, 아니 우리가 떠나고 나면 한나씨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한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우재 형에게는 연락 왔어요?”
한나의 눈 그늘이 짙어졌다.
“모르겠어요…. 이제 진짜 모르겠어요.”
민은 자세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손에 깍지를 끼고 고심하는 듯이 말했다.
“한나씨가 슬퍼하는 거 진짜 힘드네요….”
한나가 슬프게 웃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말했다.
“민씨도, 우재씨도 이제 그만 떠나세요. 이렇게 내가 붙잡지도, 붙잡을 수도 없을 때 떠나요.”
민이 당황해 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이제 친구잖아요. 친구는 계속 어떻게 사는지 뭐하는지 알며 지내는 거라고요. 전 한나씨씨랑 계속 친구하고 싶어요, 그럴 거예요 전.”
한나가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보며 말했다.
“글쎄요…, 우리 친구 못해요.”
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진짜 고마워요. 민씨도 우재씨도. 좋은 꿈꾸게 해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민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한나씨 잔인한 사람이에요. 한나씨가 얼마 만큼이나 제게 다가왔는지 한나씨는 상상도 못할 텐데 말이죠.”
한나가 크루아상을 입에 집어넣었다.
“먹어요. 난 파리에 오길 참 잘한 거 같아요.”
민은 놓여 있는 커피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한나는 민과 식사를 끝내고 길을 걸었다.
“민씨는 뭐가 제일 좋아요? 아이돌 하면서.”
민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민하다가 힘겹게 말했다.
“솔직히 돈 많이 벌고, 인기 많고, 멋있고…, 많아요. 많긴 많은데…, 이젠 그것도, 못되게도 지겨워지려하네요.”
한나가 민을 바라봤다.
“한나씨는 내가 어떨지 감도 안 잡힐 거예요. 사람들도 날 모르겠죠. 건방지다라는 소리도 할 거예요. 근데 나는 힘든데 어떡해요. 뭐가 절 이렇게 만든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팬들 사랑에 절대 무뎌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민이 한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요? 나 뻔뻔한 거 같아요?”
한나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아뇨. 숨 쉴 곳이 필요한 거 같아서요.”
민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동안 애달프게 한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들은 건 처음이네요.”
한나가 다정히 웃어 주었다.
“그래요? 내가 한건 했나 보네요.”민이 한나를 보며 웃었다. 한나는 가던 갈을 멈추고 민을 한쪽 길가에 세웠다.
“민씨, 고마워요. 진짜 어제 민씨 없었으면 나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민이 불안한 듯 물었다.
“갑자기 왜그래요 한나씨?”
한나는 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이제 가요. 갈 때가 됐잖아요. 파리를 기억해도 좋고, 아니어도 좋아요.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다음에 혹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인사라도 해줘요. 그럼 정말 기쁠 거 같아요.”
한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한나는 눈물 고인 눈으로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민을 두고 떠났다. 민은 한나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나는 이미 다 정리한 듯 보였다. 우재에게 아침까지 연락이 없었을 것이다. 한나의 단호하고도 슬픈 뒷모습에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무엇인가가 민의 발목을 잡았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지만 지금 달려간다고 해도 달라 질 건 없을 것 같았다. 민의 아쉬운 얼굴에 한나의 눈물 고인 눈이 아른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