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임신
한나는 며칠 째 입맛이 없었다. 하루 종일 누워있기만 했다. 가게의 사장님도 요즘들어 부쩍 수척해진 한나의 모습을 보고 한나가 곧 쓰러질까 후가를 내주었다. 한나는 뭘 먹든 게워내기 바빴다. 한나는 이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나는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혹시…’
한나는 책상에 놓여 있는 작은 캘린더를 들었다. 날짜가, 날짜가 분명 지나있었다. 그것도 몇 달 씩이나. 한나는 3달째 생리를 거르고 있었다. 한나는 아차 싶었다. 그리고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Donnez-moi ce chose.”(그거 하나 주세요.)
한나는 약국에서 테스트기를 사자마자 근처 상가 화장실에 들렀다. 그리고 확인했다. 두 줄이었다. 한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한나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
‘키울 거야…’
한나의 결심은 단호했다. 한나는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우재씨에게 말해야 할까?’
한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재에게 말하면 그 뒤는 감당할 수 없었다. 한나는 우재 모르게 키우기로 결심했다. 원래 아빠 없는 아이처럼 키우기로 결심했다. 아이가 커서 궁금해 해도 알려주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둘 다에게 못할 짓이지만, 한나는 아기를 지울 수가 없었다. 한나는 이를 갈았다.
한나는 산부인과 번호가 찍힌 핸드폰을 손에 들고 사라 병원 건물 앞을 서성였다. 한나는 두 손이 떨리게 핸드폰을 꼭 붙들었다. 한나는 핸드폰을 꼭 붙들고도 이따금씩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잽싸게 닦았다. 한나는 숨을 가다듬고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 넘어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나는 대답을 주저했다. 스피커 넘어 한나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Alors? Vous avez appelé le gynéco?”(여보세요? 산부인과로 전화 거신 거 맞나요?)
한나의 입술이 떨렸다. 한나는 더듬더듬 숨을 쉬며 말했다.
“J'ai un bébé……. Je…, Puis-je passer un examen gynécologique?”(제가 아기를 가졌어요. 저…, 산부인과 검사를 받아 볼 수 있을 까요?)
한나는 말을 마치고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쉬었다. 직원의 발고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Oui, bien sûr. Félicitations! Quand est-ce que je vous le promet?”(아, 그럼요. 당연하죠. 축하드려요! 날짜 언제로 잡아 드릴까요?)
한나가 눈을 감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Quand est-ce possible?”(날짜 언제가 가능하죠?)
한나는 병원 벽에 주저앉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겨울이 드리워진 파리의 하늘은 회색 필터가 낀 맑은 듯 그렇지 않은 듯 한 하늘이었다. 한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나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한나는 애써 엄마를 지웠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한나의 얼굴에 햇빛이 내리 쬐었다. 한나는 문득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한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나지막히 읖조렸다.
“과일이야…”
한나는 시장에 갔다. 한나는 면 가방에 과일을 미친 듯이 담기 사직했다. 과일 청과 아주머니가 한나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Il y a une fête aujourd'hui?”(오늘 파티가 있나 봐요?)
한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Mon bébé veut manger.”(제 아기가 먹고 싶어해요.)
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하고 아직 나오지 않은 한나의 배를 보며 말했다.
“Oui, vous devriez faire une fête. Je vais te donner quelque chose de plus bons et de plus joli.”(그렇담 당신은 파티를 해야 겠네요. 내가 제일 맛있고 예쁜 걸로 골라 줄게요.)
한나는 아주머니를 향해 함박 웃어보였다.
“Merci.”
한나는 한손에 가방을 걸고 라즈베리가 든 종이를 들었다. 그리고 단른 한 손으론 그 종이 봉투 안에 든 라즈베리를 집어 먹으며 걸었다. 여태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한나는 과일을 먹으며 생각했다.
‘딸이려나?’
한나는 뭐든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나는 자꾸만 우재 생각이 났다. 한나는 애써 우지를 지우려고 했다. 사실 그에게 변명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진짜 그 여자와는 아무 관계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음 졸이며 가슴 아픈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한나는 마지막 라즈베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 진짜 잘 할 수 있을 거야.’
한나는 집에 와서 누웠다. 한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한나의 얼글이 아득해졌다. 몇 개월이 지나도 우재는 답도 없을 편지를 지극 정성으로 보냈다.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한나는 망설여졌다.
‘우재씨에게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한나는 인터넷을 보았다. 오늘도 어제도 한국의 포털 사이트를 장악한 알플라워의 컴백 소식이 보였다. 우재의 화려한 앨범 자켓 사진이 곳곳에 게시 되어 있었다. 한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배에 손을 얹었다.
‘아가야, 미안해. 하지만 엄마가 최선을 다할게.’
한나는 인터넷에 들어가 프랑스 대학을 알아보았다. 한나는 아이를 프랑스에서 키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여동생이 있는 한국으로 가서 가족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엄마에게는 모르게 하고 싶었다. 한나는 양육수당도 알아보았다. 한나는 이제 제대로 된 일을 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불어와 어정쩡한 커리어로 한나가 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없었다. 한나는 막막했다. 하지만 배를 쓰다듬으면서 아이를 위해서는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나는 다시 펜을 들고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나는 다짐했다.
‘멋진 엄마가 될 거야.’
다음날, 한나가 출근했다. 사장부부가 한나는 보더니 남자 사장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한나야, 다시 얼굴이 좀 나아 보이네?”
한나가 수줍게 웃었다.
“제가 요 며칠 시들시들 했었죠? 죄송해요. 열심히 할게요.”
여자 사장님은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그런 의미가 아니야. 네가 다시 나아진 것 같아 기쁘기만 하다.”
여자 사장님은 잠시 한나의 눈치를 보더니 한나에게 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그때, 그 있잖니, 그 너에게 쪽지를 남기고 간 청년과는 잘 되었니?”
한나의 얼굴이 짙어졌다.
“아,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사장부부가 머쓱한 얼굴로 한나에게 말했다.
“아이고, 괜한 걸 물어봤네. 기분 나빴다면 용서해주려무나.”
한나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당연히 궁금해 하시겠죠. 그 사람이 뭐 어디 평범한 사람이던가요.”
사장 부부가 큰소리로 웃었다.
“맞아, 맞아. 고맙다 한나야.”
한나가 생긋 웃었다. 사장부부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한나야. 여기서는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꼭 말해줘야 한다? 네게 무슨 일이 있는데도 우리가 모르고, 돕지도 못한다면 그건 정말 끔찍하단다.”
한나가 눈을 글썽였다.
“감사해요. 제가 사장님들을 만난 건 진짜 축복이에요.”
여자 사장님이 한나의 등을 쓸었다.
“오늘도 즐겝게 하자.”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나는 저녁 장사를 마치고 센느 강변을 걸었다. 한나는 자신의 배를 감싸 쥐었다. 이제 날씨는 완전히 쌀쌀해졌다. 한나는 더욱 움츠려 들었다. 한나는 아이에게 아빠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 말 없이 키우려 했지만 아이는 언제고 반드시 궁금해 할 것이다. 그 때를 위해서 한나는 뭐라도 준비를 해뒀어야 했다. 문득 한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우재씨랑 찍은 사진이 있던가…?’
한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없었다. 한나는 아쉽다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보여줄 사진조차도 없다니. 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었다. 완전히 우재를 지울 수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나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은 새벽이어서 받지 안ㅎ을 것이다. 하지만 한나는 끊기지 않는 연결음에 대고 외쳤다.
“엄마, 나 임신했어!”
한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나 이 애 낳으려고!”
한나는 다시한번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엄마, 미안해!”
한나의 배가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한나는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나는 복대를 풀고 출근길을 나섰다. 한나는 가게 문 앞에 도착하자 숨을 크게 들이 마쉬며 문을 활짝열고 큰소리로 인사했다.
“Bonjour!”
사장부부가 동시에 한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Bonjour!”
“Bonjour!”
한나는 자신을 보고 태연히 다시 자기 일을 하는 사장 부부를 보며 당황했다. 그리고 자신의 배와 사장 부부를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배가 아직 많이 안 나왔나?’
한나는 이상히 여기며 여자 사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더 의식적으로 배를 내밀며 말했다.
“제가 할까요?”
여자 사장님은 한나를 흘끗 보며 태연히 말했다.
“이제 보여주기로 한 거야?”
한나가 놀랐다. 그런 한나를 보더니 남자 사장님이 말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어요 한나양.”
한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 여자 사장님이 한나 곁으로 와 말했다.
“한나야, 전에 말했지. 무슨 일 있을 땐 말하라고. 말해도 된다고 했잖니.”
한나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울었다.
여자 사장님은 그런 한나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이제라도 말해주려고 해서 고맙다. 그동안 얼마나 혼자서 애를 썩인거니?”
아직 손님이 없는 홀에 한나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자 사장님도 냅킨을 정리 하다 말고 한나의 곁으로 와 주인과 같이 위하였다.
“우리가 같이 본 세월이 있는데. 비록 짧지만 그것도 세월이라면 세월이라 할 수 있겠지. 이 먼 땅에 너도 우리도 정 붙이며 살아가려 하는데 그 정도는 터놓고 얘기해도 된다 한나야.”
한나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 사장님이 한나의 어깨를 쥐었다.
“너 같이 작고 마른 애가 먹는 것도 없이 배만 불룩 튀어나오고, 요새 과일만 먹고 음식을 보면 힘겨워하는데 모를 수가 있어야지.”
여자 사장님은 한나는 한번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데는 없니?”
한나가 고개를 저었다. 남자 사장님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나에게 물었다.
“여자애니 남자애니?”
한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몰라요.”
한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남자 사장님이 활짝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말 해주기를 기다렸다. 어찌나 궁금하던지.”
여자 사장님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일 할 때 힘들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꼭 말해야 한다?”
한나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사장님.”
한나는 웃으며 퇴근했다. 한나에게 죽으란 법은 없었다. 파리에 한나의 인생이 있었다. 사장부부도 있었다. 한나는 든든한 가족이 생긴 느낌이었다. 한나는 집으로 곧장 달려가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이제 더 이상 입덧도 하지 않았다. 사장님의 말을 듣는 순간, 따뜻한 눈길을 느낀 순간 한나의 모든 답답함이 다 게워져 내려 간 것만 같았다. 한나의 눈이 싱그러워졌다. 한나는 아이의 이름을 고민했다. 사장 부부의 위로와 우재와의 행복한 순간 모두를 담은 이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는 그날 아주 깊은 잠을 잤다. 한나의 꿈에서 아이는 무럭무럭 사랑을 받고 자라고 있었다. 한나는 다음날 눈을 뜰 때까지 꿈속에서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한나의 아침은 상쾌해졌다. 한나는 일어나자마자 아이의 동동거림을 느꼈다. 아이는 열심히 한나의 배를 걷어차고 있었다. 배가 가끔가끔 아찔했지만 괜찮았다. 한나는 이 아이가 누구보다 생명력 있게 움직였으면 했다. 태어나서도 화창한 가을날의 하늘처럼 밝고, 또 밝게만 자라줬으면 했다. 한나는 아침을 분주히 준비했다. 이제 더 이상 대충 먹지 않았다. 한 끼 한 끼 한나는 최선을 다해 차렸다. 한나에게 있어서 이제 식사는 아기에 대한 예의였다. 나중에 한나는 아기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넌 정성스럽게 차려진 식탁과 같이 태어났어. 고맙다.”
한나는 추운 겨울을 따사롭게 비추는 햇빛을 받으며 길을 나섰다. 유난히 상쾌한 아침이었다. 한나는 센느 강변을 걸었다. 매일 걷는 길임에도 매일 같이 우재가 떠올랐다. 우재는 결코 지울 수도 지워지지도 않을 것이다. 한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우재는 한나의 한 부분이 되었다. 아이 때문이기도 했고, 강렬하고도 짧았던 사랑 때문이기도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 그리웠다고 말하는 상상도 해봤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 때문이었다. 한나는 눈을 질끈 감고 행복한 상상만 하기로 했다. 그때 한나 앞에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낙엽이 다 진 나무에서 마지막 하나가 한나의 얼굴에 날렸다. 한나는 그 마지막 낙엽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가을이야. 내가 사장님들을 만나 것도, 우재씨를 만난 것도 다 가을이야.’
그리고 얼굴에서 낙엽을 털어내며 생각했다.
‘가을이로 하자.’
한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가을아 안녕? 너는 가을이야. 우리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