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광해
한나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일어났다. 한나는 배를 만져 아기를 확인했다. 한나는 가디건을 하나 걸치고 거실로 나왔다. 주방에서는 말 없는 엄마가 묵묵히 칼질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나는 주방으로 갔다. 한나는 어색하게 엄마를 불러 보았다.
“엄마….”
엄마는 말없이 냄비를 열어 간을 확인했다. 한나는 여전히 멀뚱하게 주방을 서성였다. 그때 엄마가 한나에게 주걱을 쥐어주며 말했다.
“밥퍼, 그리고 미나도 깨우고.”
한나는 약간은 기쁜 마음으로 밥을 퍼 식탁 위에 놓았다.
미나까지 내려와 다 같이 1년 반 만에 아침을 함께 하였다. 미나는 투덜 거렸다.
“아이씨, 나는 아직 방학인데, 이렇게 일찍 깨우냐…”
엄마가 미나의 등을 찰싹 때렸다.
“잔말 말고 밥이나 먹어.”
한나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미역국 끓였네?”
엄마는 한나의 말에 대꾸 없이 일어나 지글지글 구워지던 고등어를 팬에서 꺼내왔다. 미나는 이 둘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마는 다시 자리에 와 앉으며 말했다.
“애 병원은 가봤고?”
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엄마가 한숨을 쉬며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했다.
“어이고, 외국에서 잘도 볼라고…, 거기는 여지들이 애 낳고 바로 일어나 일한다던데….”
한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거기도 잘 되어있어. 여기서는 어느 병원이 좋대?”
엄마가 마음에 안든다는 듯이 입 꼬리를 샐쭉 거리다 고민하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선우네 엄마가 간호사로 있는 그 병원으로 가봐. 거기가 요즘 엄마들이 많이 간다더라. 의사가 친절하대.”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나는 한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언니는 이제 뭐할 거야? 일단은 애 낳을 때까지는 꼼짝 못하겠네?”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가 미나의 옆구리를 찔렀다. 조용히 밥을 먹던 한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 아프다고 그랬잖아.”
미나가 밥을 오물 거리며 말했다.
“응, 아팠어. 일주일을 입원했는데, 저기 봐.”
미나가 부엌 한 구석을 가리켰다.
“저게 다 약봉지야.”
부엌 한 구석엔 처방 받은 약들이 몇 겹 둘레로 휘감아져 휜 봉투에 각각 담겨 있었다. 그 봉지가 다섯이나 되었다. 한나는 글썽이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모른척 밥을 먹었다.
“별거 아니야. 한달 치라서 그래.”
듣고 있던 미니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 저게 별거 아니라고? 엄마 이제 진짜 관리하고 일도 쉬엄쉬엄해.”
엄마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일을 쉬엄쉬엄 하면 누가 돈을 버니?”
한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간 엄마를 보며 말했다.
“나 알바라도 하려고. 아직 배도 안나왔고…, 카페 같은 데라도…”
그 순간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너! 엄마 가슴에 피멍들게 할래? 그 만큼 했으면 됐지! 너 이제 배가 나온 것도 티가 나는 데, 누가 널 받아주니, 그리고 해봤자 식당일 카페는 널 뽑아주지도 않아!”
엄마가 씩씩 거친 콧김을 내쉬었다. 한나가 고개를 떨궜다. 한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엄마가 뒤돌아보며 한나에게 말했다.
“그릇 비우고 가! 이제 네가 살길이 이런 거야. 마음이 서럽고 복잡스럽고, 미안하고, 벙벙 한 거, 그게 네가 겪을 일이라고.”
한나가 눈물을 흘렸다. 다시 뒤 돌아 설거지를 하려다 이내 허리춤에 손을 얹고 눈을 질끈 감고서 말을 이었다.
“내가 내 딸들 아빠 없어도 공주 같이 키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얼마나, 내가 얼마나 흐흑흑…”
한나가 엄마 뒤로가 엄마를 껴안았다.
“엄마 미안해…”
엄마는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미나는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먼 곳을 바라봤다. 부엌에는 엄마의 눈물 자욱이 짙게 번져 갔다.
민은 노트북으로 파리에서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봤다. 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민은 한나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한나가 생생히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았다.
“한나씨…”
민은 한나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나의 모습이 겹쳐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다시 휴가가 찾아온다면, 단 며칠이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민은 당장에라도 파리로 날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컴백 날짜는 가까웠고, 컴백이 가까워질수록 민은, 알플라워는 쉴 새 없이 바빠졌다. 민은 핸드폰을 들었다. 민은 메신저에 들어가 한나의 프로필 사진을 확인했다. 그녀는 여전히 파리일 것이다. 그때였다. 민은 한나의 프로필 사진이 바뀐 것을 확인했다. 한나의 프로필 사진은 분명 한국이었다. 메시지란에도 변화가 있었다.
‘우리집’
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한나씨!”
민은 한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자 했다. 민은 한나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내 보았다.
“한나씨는 좀 특이해요.”
한나가 허공을 응시하며 태연히 물었다.
“뭐가요?”
민은 한나를 보며 말했다.
“제가 본 적 없는 분위기랄까…, 여튼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거 같아요.”
방금 우재의 여자를 확인한 한나는 여전히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도 그러더라고요. 내가 특이하다고…”
민은 끼어들 수 없는 그 사이에 가슴이 아팠다. 민은 한나에게 당차게 말했다.
“나는요, 한나씨가 정말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한나는 피식 웃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러겠죠. 이렇게 스타를 두 명이나 만나고 대화도 나누고 밤도 지새웠는데요.”
민은 가슴이 아팠다. 한나의 아픈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나의 가슴에 멍을 새긴 우재형도 괘씸했다. 민은 다시 찬찬히 한나의 프로필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한나의 사진에는 많은 장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도 눈에 띄는 사진들이 있었다. 나이가 지긋이 들어 보이는 여자와 한나와는 닮았지만 더 어려보이는 여자, 그리고 한나 이렇게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민은 그들이 가족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배경에 멀리 보이는 빨간 등대가 하나 있었다. 민은 그 등대를 확대해 확인했다. 그리고 당장에 인터넷에 빨간 등대라고 치기 시작했다. 한 시간 뒤, 민은 포털 사이트에 한 검색어를 띄어 놓고는 할 일을 다했다는 표정으로 진이 빠져 있었다. 검색창에는 ‘광해’라고 쓰여있었다.
한나는 엄마와 함께 산부인과에 왔다. 이제는 제법 배가 부풀어 올라 있었다. 엄마는 그 긴 시간 동안 혼자서 쩔쩔 매며 자신을 스스로 부양해야 했을 딸을 생각하니 속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애써 손은 꾹꾹 누르며 참았다. 엄마는 전보다 마른 한나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너는… 임산부가 처녀 때보다도 더 말랐니? 거기서 뭘 제대로 먹긴 먹은 거야?”
한나가 웃었다.
“그럼, 나 거기서 좋은 사장님 부부 만나서 얼마나 잘 먹고 이쁨 받고 그랬는데.”
엄마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됐다.”
둘은 진료를 마치고 나왔다. 병원 앞에는 포장마차 한 대가 들어서 있었다. 한나가 웃으며 말했다.
“엄마, 나 핫도그.”
엄마가 한나를 데리고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한나는 핫도그를 하나 시키고 엄마는 오뎅을 집어 들었다. 한나는 행복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진짜 이거 프랑스에서 먹고 싶어 죽는 줄 알았잖아.”
해맑게 웃는 딸을 보고 엄마는 다시 울컥했다. 그리고 오뎅을 하나 채 다 먹지 않고 내려 놓았다. 한나는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 안먹어? 엄마 오뎅 좋아 하잖아.”
“어 오뎅 안먹을 거지?”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거 들고 가자. 여기요.”
엄마는 돈을 내고 한나를 끌고 나왔다. 한나는 어리둥절하였다.
“엄마, 내가 또 뭐 잘못했어?”
엄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뭐 먹고 싶었다. 뭐가 하고 싶었다. 할 때마다 엄마는 왈칵왈칵 한다고! 너도 네 자식 낳으면 알게 돼! 가자.”
한나는 머쓱하게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민은 한나가 광해 어디에 살고 있을지 추리를 해보았다. 답은 없었다. 아무리 지방 도시라도 그 넓은 곳에서 어떻게 한나씨를 찾을지 생각만 해도 막막했다. 민은 다시 한나의 프로필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등대가 보이고 바다가 보였다. 민은 하루라도 빨리 한나를 찾고 싶었다. 민은 갑자기 핸드폰을 거칠게 탁자에 던졌다. 그리고 일어섰다.
“그냥 가서 찾자.”
민은 코트를 들고 무작정 한나를 찾으러 길을 나섰다. 민이 나가려고 하자 거실에 있던 매니저 형이 민에게 물었다.
“어디가?”
민이 당황한 듯 형에게 되물었다.
“형, 오늘 나 스케줄도 없는데 왜 있어요?”
매니저가 성태가 웃으며 말했다.
“니네 오늘 피팅 하러 가야돼. 잊었어? 내가 단톡에 문자 남겼는데?”
민은 밀려 있던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민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
성태가 먹던 과자를 내려놓고 민에게 말했다.
“다음 주에 이삼일 정도 시간 내줄테니까 그때 가. 괜히 사고 치지 말고.”
민의 눈이 커졌다.
“뭘요? 어디를요?”
성태가 웃었다.
“너 그 여자애 찾으러 가는 거잖아. 그 애가 한국에 들어 왔나봐?”
민의 표정이 구겨졌다.
“형,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거예요?”
성태가 싸늘한 표정으로 민에게 한 서류 뭉치들을 보여줬다.
“나는 진심으로 너네 걱정한다. 형 알잖아. 이 애가 대체 누구길래 우재도 너도 이렇게 그 일주일을 걔한테 매여 있었니?”
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형, 이게 대체 뭐하는…”
“디메이션이야. 거기서 나한테 전화가 왔어. 너네 다 뿌리겠대. 간신히 막았어.”
민이 눈을 감았다.
“민아. 너 연예인이야. 그것도 제일 잘나가는 아이돌. 이런 거 급이 다르다고. 너네가 쓰던 수저도 알아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너네 행동 잘해. 형도 알지. 나 여자친구 사귀는 거 터치 안해. 근데, 이건 아니지 않나? 두 명이서 한명을…, 그리고 처음 만난 여자랑. 민아, 우리 곧 컴백이야.”
민이 작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