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를 앞둔 일주일 전.
마지막 후보자 토론회 도중
방송 사고를 낸 방송국 PD 신 귀남.
스튜디오에 이미 많은 사람이 방청했고
시청률도 20%에 육박했다.
개인의 일탈일 뿐이라는 방송국의 해명에도
커다란 음모가 있음을 제기해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입을 굳게 다문 귀남 때문에 방송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직속 선배인 보도국 윤 차장과
선배 PD인 태현이 사고 경위를 알기 위해서
사무실에 모였다.
# 보도국 차장실
" 경위서로 끝낼 것 같지가 않아요."
" PD가 생방송 중에 실수 좀 했다고 자르기야 하겠냐?"
경위서 양식을 받은 귀남은 애꿎은 볼펜만 돌리고 있었다.
" 아니 이게 보통 실수냐고요.
하필이면 오늘같이 민감하고
중요한 날에 사고를 친답니까?"
태현은 귀남을 이리저리 훑으며 화를 억 누르며 말했다.
" 거참. 그 정도만 하래도.
애가 반성하고 있잖아.
저것 봐. 파랗게 질린 거.
쟤 진짜 아무것도 몰라. "
" 모르긴 뭘 아무것도 몰라요?
지금 귀남이 12년 차에요.
날고 기는 놈이 저런 사고를 친 거예요.
의도가 불순해요."
"돌이킬 수 없잖아.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일단 경위서 받고 징계위원회 열면
그때 처리하면 되지.
뭐 회사 생활하다 보면 사고 칠 수도 있지.
넌 뭐 사고 친 적 한 번도 없냐?""
" 지금 쟤 두둔할 때예요?
계속 차장님이 감싸니까 기고만장해서
나대는 거라고요.
오늘 무슨 날인인지는 아시죠?"
"……."
" 오늘 대선 후보자 마지막 토론회에요."
"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빨리 다른 거 만들어서 묻자."
" 이거 묻을 수가 없는 게 생방송으로
시청자들이 다 지켜봤어요.
시청률 20%가 넘었다고요."
" 20%?"
" 아 그렇다니까요!"
" 아니 요즘 세상에 20%가 무슨 일이냐?
최고 시청률 아니냐?"
"……."
태현은 어이가 없어 등을 돌려버렸다.
" 지금 상황 어때?
아직도 전화 많이 오고 있냐?"
" 난리가 났다니까요.
지금 방송국 사람들 전부
퇴근도 못하고 전화만 받고 있어요.
빨리 해명하라고 난리에요."
" 무슨 해명?"
" 우리 방송국이랑 후보자랑 커넥션이 있는지 물어보는 거죠."
" 커넥션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여튼 소설 쓰는 언론 때문에
우리가 욕먹는 거잖아."
" 온갖 루머가 쏟아지고 있어요.
귀남 이가 신 후보자 아들이다.
아버지 덕에 방송국 낙하산으로 들어간 거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경위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귀남은 무릎을 꿇었다.
" 죄송합니다. 선배님.
사실은 제가……
약간 장애가 있어서
갑자기 말이 튀어 나올 때가 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겁니다.
신 후보자와 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맹세합니다."
" 너 정말 말 같지도 않는 소리 계속할래?
겨우 변명이라고 생각 해낸 게 그거야? "
" 정말입니다."
" 일 똑 부러지게 한다고
중요한 거 맡겨 놨더니 그걸 말아 먹어?
야, 됐다. 내가 미친놈이다.
너 그거 일단 한 시간 내로 다 써서
내 책상 위에 두고 퇴근해. 알겠어?
내가 너 한번 사고 칠 줄 알았다.
맨날 까불거리더니."
" 네. 알겠습니다.
경위서 써서 제출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귀남의 선배인 태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나가 버렸다.
" 야. 쟤 성질 머리 좀 봐라.
신 PD 일어나. 무릎은 왜 꿇어?"
" 갔어요? 거참.
저 선배는 나만 보면 저래요. 참나."
귀남은 태현이 나가자마자 소파에 털썩 앉았다.
" 근데 너 정말 왜 그런 거야?
내가 지금 계속 앉아서 생각하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되거든?"
차장은 조심스럽게 귀남에게 물었다.
"……."
" 말해 봐. 괜찮아.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야."
" 차장님. 제가 아무리 말해 봤자
안 믿으실 거예요. 절대로."
" 왜?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거야?"
"……."
" 알겠다. 일단 경위서 써라.
밖에서 기다릴 테니 나와.
소주나 한잔하러 가자."
"네......."
# 돼지 갈빗집.
1시간 후 방송국 앞 돼지 갈빗집.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돼지갈비를 열심히 굽고 있는 귀남.
소주병을 들어 혼자 따르는 윤 차장.
" 너 오늘 밥은 먹었냐?"
" 오늘 긴장해서 한 끼도 못 먹었어요."
" 밥이나 먹고 사고를 칠 일이지."
" 욕을 하도 먹어서 배고픈 줄도 몰랐어요."
" 너 방송국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 12년 됐죠."
" 방송국 짬밥 12년이 한순간에 날아갔네."
" 그러게요. 퍽퍽합니다. 하하"
" 너 인마 웃음이 나오냐?"
" 뭐 다 지나가겠죠."
차장의 빈 잔에 술을 따르는 귀남.
" 근데 말이야. 너 혹시 대학교 다닐 때 학생 운동 같은 거 했냐?"
" 저 겁 많아서 그런 거 못 해요."
" 그러면 정치에 관심이 많은 거야?"
" 아뇨. 저 사실 라디오국 PD 되려고
하다가 보도국으로 온 거예요.
저 사실 이렇게 골치 아픈 거 싫어해요.
정치니, 경제니 하는"
"아니면 정말 신 후보자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야, 그런 거야?
생각해보니까 너도 신 씨잖아."
" 아 아니에요. 차장님.
제가 무슨 관계가 있었으면 이렇게
고생하고 있었겠어요?"
" 그러면 아까 왜 그런 거냐?"
괜찮은 척 했지만 귀남도 자기가 한 행동이
자신의 커리어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줄 것인지
알고 있었다.
" 사실 말씀드려도 안 믿으실 거예요.
제가 생각해도 제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이해를 하실 수 있겠어요."
" 믿을 테니 말해 봐. 아니 말이 안돼서 그래.
어떤 미친놈이 생방송 중에 그것도 대선 후보자들
나와서 토론하는 중간에 PD란 놈이 뛰쳐 나가냐."
" 진자 그땐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 너 그때 무슨 말 했는지는 기억 나냐?"
" 기억나죠."
윤 차장은 귀남이 방송 중에 했던 동영상을 찾아서
보여 주었다.
" 야 이거 봐. 이게 미친놈이지. 참나.
국민 여러분! 신유택 후보자가 대통령이 될 겁니다!
이게 말이 되냐?
이거 무슨 내 귀의 도청 장치도 아니고……. "
" 진짜 제가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 이거 너잖아. 이거. 근데 만세는 왜 불렀냐?
뭐 독립 운동했냐?"
" 저도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
" 야, 귀남아. 말해 줘라.
내일 나도 할 말이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내가 너 아끼지만 이건 커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 아 차장님. 좀 조용히 말하세요.
안 그래도 오늘 방송국에서 사람들이
저만 쳐다봐서 쪽팔려 죽을 뻔했구먼."
" 아니 쪽팔려 죽을 짓을 왜 한 거냐고 대체 왜!"
"……."
" 말해 봐. 너 태현이가 갈궈서 그런 거야?"
" 아니에요. 그건. 선배한테 신세 진 게 얼만데요.
저 입사했을 때 2년 동안 태현 선배 집에 얹혀살았어요."
" 아니면 나야? 나 엿 먹이려고 그런 거야?"
"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거예요."
" 너 네가 뛰쳐나갔을 때 후보자들 표정 봤지?"
" 네."
스마트폰을 다시 꺼내 들어 귀남에게 보여준다.
" 야 너 이거 봐라. 이거 봐. 너 스타 됐다. "
1위 신 유택 후보자.
2위 QBS 방송국 PD.
3위 내 귀의 도청 장치.
4위 대통령 후보자 토론회.
5위 방송국 커넥션.
.
.
.
.
검색창 순위가 오늘 있었던 방송 사고의 여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대박 프로그램 만들어서
PD로 뜨려고 했더니
미친놈으로 먼저 떴네요.
언제 적 내 귀의 도청 장치야 참나."
" 자, 말해 봐. 너 왜 그런 거냐?
너 오늘 제대로 말 안하면 집에 못 간다."
소주를 들이켜고 탁자에 소주잔을 탁하고 놓더니
진진해진 얼굴로 윤 차장이 물었다.
사뭇 진지해진 윤 차장의 모습에 귀남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하기 시작한다.
" 제 눈엔 보였어요."
" 뭐가?"
" 신 유택 후보자가 당선이 되는 거요."
" 당선되는 게 보였다고?"
" 네. 다른 후보자들에겐 없었는데
신 후보자만 왕관을 쓰고 있었어요.
그리고 후보자 뒤쪽엔 신 후보자님
조상들로 보이는 분들이 줄지어 있었어요."
돼지갈비를 뜯던 윤 차장은 놀라 귀남을 쳐다봤다.
" 너 장난 하냐?"
" 장난 아니에요.
거봐요.
안 믿으실 거면서"
" 무슨 풀 뜯어 먹는 소리야."
" 저는 다 보인다니까요."
" 하. 진짜 후배라는 놈들이
다 왜 이 모양이냐.
참나. 이제 하다 하다 귀신이 보인다는
애들까지 나오냐."
" 선배님.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 얘 오늘 왜 이렇게 진지하냐."
" 저도 마흔 넘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하겠어요?"
"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눈에는 안 보이는데
네 눈에는 후보자가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었고
조상이라 하면 돌아가신 분들을 말하는 거냐?
혹시 귀신들을 말하는 거냐?"
" 귀신이 좀 그렇고요.
조상님이요. 돌아가신 분들"
윤 차장은 어이없어 하며 귀남의 접시에
돼지갈비를 올려 주며 말했다.
" 야. 너 지금 허기진 것 같다.
밥은 먹고 다녀라 미친놈아."
" 나 참. 진짜래도요.
그때 저도 뭐에 씌어서 나간 거예요.
어쨌든 오늘 일은 죄송합니다.
어떤 처벌도 받겠습니다. "
" 아냐. 죄송할 거 없어.
귀신 보이는 게 뭐 잘못이냐?
빨리 많이 먹어 둬."
" 차장님 안 믿으시죠??"
윤 차장은 신 후보자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안도하며
갈비를 다시 뜯기 시작했다.
" 아니 믿어. 나도 귀신 본 적 있어.
그래. 차라리 그런 이유라면 다행이다.
귀신이 보이는 게 차라리 나은 것 같아.
난 또 신 후보자랑 네가 뭐 엮어서
그렇고 그런 사이인 줄 알았지.
그런 거 아니면 됐다. "
" 저 이제 어떻게 하면 좋죠?"
" 야 뭐. 시간 지나면 괜찮아 질 테지.
대중들은 빨리 잊잖아.
하도 사건 사고가 많은 나라 아니냐.
내일 징계 위원회 열어서
적당히 처벌하면 잠잠해질 거야."
귀남은 소주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로
윤 차장에게 말했다.
" 근데 차장님.
만약에 신 후보자가 당선이 된 다면요?"
"……."
윤 차장은 멈칫하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일주일 후에 신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그 후폭풍이 클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피식 웃으며 소주잔을 들이켰다.
" 지금 신 후보자는 지지율이 12% 밖에 안 돼.
일주일 밖에 안 남았는데 역전될 것 같아?"
" 만약 이런저런 상황들이 생겨서 당선이 된 다면요?"
" 가능성이 없다니까?
지금까지 10%대 지지율로 역전한 후보자는 없어."
" 그……그렇죠. 아직까지는……."
"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조심해.
누가 술 사준다고 해도 절대 먹지 말고
세상이 달라졌어.
뭐 얻어먹으려다가 크게 탈난다."
윤 차장은 개의치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지나갔고
지글거리는 돼지갈비와 함께 소주잔에 담에 삼켰다.
" 귀남아."
" 네."
" 너 오늘 집에 가지 마라. "
" 왜요?"
" 집에 가지 마.
당분간 회사 숙직실에서 자는 게 좋겠다."
" 그러니까 왜요?"
뭐 혹시 뭐 납치되고 변사체로 발견될까 봐 그러세요?"
" 야. 재수 없게 그딴 소릴 하냐.
지금 우리랑 같이 들어온 놈이 있는데
그 놈이 네 등에 칼을 꽂을 놈이야."
귀남이 등을 돌려 보려 하자
윤 차장은 급한 나머지 소주잔을 귀남에게 끼얹는다.
" 야! 돌아보지 마."
몸에 소주가 잔뜩 묻은 귀남.
손으로 털어 낸다.
" 아 뭔데 이래요.
저 사람 누군데요?"
" 얍삽한 놈 있어.
예전에 기자였던 놈인데
요즘은 정치권에 빌붙어서
썩은 냄새 나는 것만 찾아내는 놈.
이제 돼지갈비도 못 먹으러 오겠다.
저 놈 뜬 거면 이미 넌 독안에 든 쥐야."
" 난 또 뭐 살인 청부업자라도 되는 줄 알았네."
"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저놈한테 걸리면 사회에서 매장이야.""
" 걱정 마세요.
저 털어 봤자 아무것도 안 나오니까."
" 아냐. 진짜 불안해서 안 되겠다.
당분간 숙직실에서 지내라."
' 아니, 집 놔두고 왜 숙직실에서 지내요!"
"너 어차피 집에 가 봐야 처자식도 없잖아."
" 그렇긴 한데, 저 이층 침대 지겨워요."
윤차장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무언의 압박을 했다.
" 어떻게든 너 살려 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이럴래?"
" 알겠어요."
" 너 당분간 방송국에서 못 나오니까
이거 좀 싸 달라고 해. "
" 밖에 나가는 것도 안 된다고요?"
" 내일부터 기자들 쫙 깔리고 너 감시 할 텐데
감당할 수 있겠냐?"
귀남은 세상의 어긋난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귀남은 자신이 감춰 왔던 비밀을 오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