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경직된 얼굴로 빔프로젝터가 쏘아대는 자료를 은색 지시봉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화를 억누른 듯 무척이나 낮았고 끝이 가늘게 떨렸다.
“현재 제주지부의 피해 상황을 계속 조사하고 있으며, 괴집단의 정체에 대해 나온 건 화염 능력자가 있다는 것과 이쪽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 외에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빠른 수습을 위해 초능력 전담 부서 측의 상황 정리팀을 파견했습니다.”
남자는 숨을 한 번 고르고 긴 책상에 2열 종대로 앉아 서로 마주 보고 수군대는 고위 간부들을 쳐다보았다. 역시 하람원이 습격받은 사실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나 보다. 하긴, 50년 전통이니 뭐니 하면서 제일 크게 떠들어댄 건 저들이니 충분히 이해한다. 남자도 적잖은 충격을 받긴 해 이 상황이 무척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들 중 한 명이 손을 들어 남자에게 의문을 풀어주길 요구했다.
“자네는 왜 괴집단이 이쪽 일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역시나 그 부분에서 질문이 들어올 거라 예상한 남자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미리 준비한 자료를 열었다. 괴집단의 예상 이동 경로를 그린 자료는 누가 봐도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이동을 보여주었다. 남자가 은색 지시봉으로 빨간 선을 따라 같이 움직이며 괴집단의 마지막 도착지인 지하에서 멈추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들은 이미 하람원의 내부에 관해 관계자 만큼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깔끔한 이동은 처음 와보는 곳에선 불가능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지하를 노렸다는 점에서 적어도 하람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거나 관계자일 가능성이 가장 유력합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고 수군거림은 아까보다 배로 커졌다. 그때, 긴 책상의 끝, 가장 높은 이가 앉는 상석에 앉아 있던 이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가 일어나 박수를 치자 눈치를 보던 나머지 사람들도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끝나고 그는 입을 열었다.
“초능력 전담 부서 총괄 책임자 한우진 씨의 혜안은 박수를 드리고 싶군요. 거기까지 파악하다니요, 정말로 대단합니다. 제가 일정이 있어 회의는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나머지는 믿음직한 한우진 씨에게 맡기겠습니다.”
우진은 평소의 딱딱한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수줍어하는 얼굴로 약간 붉어진 귀 끝을 훤히 드러낸 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대통령은 회의실을 나가기 전, 우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살며시 힘을 주어 잡았다.
“저는 우진 씨가 어서 이 사태를 수습할 거라 믿습니다.”
대통령의 신뢰 어린 말에 어쩔 줄 모르며 고개만 숙이는 우진의 귀에 대통령이 비밀 얘기를 하듯 속삭였다.
“지하에서 일어난 일은 일단 묻어두세요. 무려 50년 전통의 초능력자 양성소입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초능력자요. 하람원의 밑바닥까지 탈탈 털린 걸 알면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하람원이 괴집단에 의해 습격받았고 피해 상황을 조사 중이라는 뉴스만 내보내세요. 위임되신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조용히 넘어가도록 하죠.”
분명 맞는 말인데 어째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인자하게 웃는 얼굴 뒤에 무언가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우진은 뒷골이 쎄- 하게 당기는 느낌을 무시하려 노력하며 대통령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다른 고위 간부들이 다 나가고 혼자 남은 우진은 아무 의자나 골라잡아 앉았다.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받은 보고서를 펼쳐 맨 마지막에 쓰여 있는 문장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하람원 측에서 지하 조사를 거부함.’
대체 왜? 분명 하람원과 초능력 전담 부서는 동등한 위치에 있어 그들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협력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일 텐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오는 후배를 보고 머릿속에서 파생하는 여러 의문을 숨겼다. 아직은 의문을 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우진은 회의실을 나섰다. 회의실 맞은편 빌딩 꼭대기에 자리한 전광판에서는 뉴스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하람원 제주지부가 괴집단에 의해 습격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정부는 초능력 전담 부서를 통해 하람원 제주지부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최대한 빠른 수습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하람원 제주지부에서는….”
﹡ ﹡ ﹡
형광등을 과도하게 설치하여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36평의 방에는 흥분한 나머지 사방으로 침 튀기며 말하고 있는 남자와 그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는 군중들이 있었다. 남자는 번들번들한 연보랏빛 머릿결을 한쪽으로 쓸어넘겨 단정한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검은 테 안경은 남자를 엘리트로 보이게 하기 충분했다.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연보라색 빛이 사람들을 둘러싸 그 주위를 맴돌았다. 2명씩 짝지어져 앉아 남자를 보는 사람들의 눈은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초점이 맞지 않고 약간 풀려있었다. 남자는 꾸리꾸리한 냄새가 나는 요강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이것이 바로 그 전설의 요강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수군댔다.
“저게 집안에 두기만 해도 모든 액운이 사라지고 부와 건강을 준다는 그 요강인가 봐요.”
“효과가 그렇게 좋다네요. 저희 아파트 옆 동에 사는 민철이 엄마는 저거 들인 뒤로 아휴, 피부가 아주 그냥 연예인 뺨치던데요.”
그 순간, 팟 하고 모든 형광등이 동시에 꺼졌다. 삽시간에 어두워진 방에서 몇몇 사람들은 남자에게 항의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예요!?”
“씨X, 이게 뭐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틈에서 남자는 소리 높여 외쳤다.
“여러분 괜찮습니다! 진정하세요!”
대체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남자도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당황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음에 남자의 말은 가볍게 묻혔다. 점점 혼란이 가중된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고, 여기저기 다른 이를 밀치며 출구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밝은 빛이 쏟아졌다.
“하하하, 안녕?”
새하얀 빛을 등지고 말하는 어떤 이의 낭랑한 인사말에 사람들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일제히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광 때문에 외형이 자세히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상큼한 웃음을 날리며 인사한 사람은 윤곽만으로도 매우 큰 키와 넓은 어깨를 가진, 덩치가 꽤 있는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탁 튕기자 불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시야가 밝아지자 눈이 부신 사람들이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열심히 사람들을 달래보려던 남자도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시리도록 밝은 빛에 눈을 찡그리며 요란하게 등장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너, 너는?! 네가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남자의 손가락 끝에는 빛이 돌아와 밝아진 내부 덕에 역광으로 가려졌던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대뜸 손가락질하는 그가 마음에 안 들어 미간을 살짝 찌푸린 남자의 눈은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워 먹이를 사냥하는 부엉이의 눈을 연상케 했다. 스포츠 컷으로 잘린 금빛 머리칼은 부엉이를 연상시키는 데 일조했다. 트레이닝복 상의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남자는 체대생 느낌을 물씬 풍겼다. 남자는 자신이 굉장히 힘들었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눈썹을 한껏 아래로 내리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형님이 너 찾아다니느라 쉬지도 못하고, 입맛도 뚝 떨어져서 밥도 잘 못 먹었잖니. 요 볼 좀 홀쭉해진 것 봐.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됐어.”
“복호 형, 우리 중에서 밥 제일 많이 먹었잖아. 살쪄서 둔해진 것 같다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왜 여기서 헛소리야.”
시무룩한 얼굴로 찡얼대는 남자의 뒤에서 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서 조명을 한껏 받는 것 같은 흰 피부에 깔끔한 외모를 지닌 청년이 복호에게 태클을 걸면서 나왔다. 복호는 속상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원아 네가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단다. 흑흑, 우리 애가 이렇게까지 차갑다니….”
하원은 손으로 눈가를 쓸며 우는 척하는 복호를 뒤로 한 채 손을 들었다. 손끝이 은빛으로 빛나면서 찰랑거리는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원이 가볍게 손짓하자 도망칠 준비를 하는 남자의 앞에 물로 된 두꺼운 벽이 생겨났다. 맑게 찰랑거리면서 단단해 보이는 수벽(水壁)이 자신을 가로막자 남자는 놀라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하원이 남자에게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민병우 씨, 당신은 자신의 초능력인 사람들을 현혹하는 초능력, 일명 패시네이트로 사람들에게 기만을 일삼으며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였기에 당신을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민병우, 피곤하니까 튈 생각하지 말고 제발 그냥 조용히 가자.”
병우는 이때까지 모아온 돈이 든 가방을 꼭 껴안고 비아냥댔다.
“허, 너희쯤이야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거든? 너희야말로 험한 꼴 보기 전에 조용히 가지 그래?”
말을 마친 병우가 복호와 하원이 막기 전에 재빨리 튀려고 했으나 자신의 품에서 쏙 빠져나가는 가방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돈 가방은 상앗빛의 막에 쌓여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둥실 떠오르더니 그대로 한 여자에게 날아갔다. 여자는 차분한 분위기의 청초한 얼굴이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말괄량이 같은 느낌이 있었다. 복호는 가방을 손에 쥔 여자를 보고 해맑게 웃으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누나!!”
우렁찬 복호의 목소리 덕분에 하원도 여자를 발견하고 차가운 얼굴 대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하원이 아까와는 다른 다정한 목소리로 반갑게 말했다.
“수호 누나 잘 왔어. 마침 딱 누나가 필요한 타이밍이었는데.”
수호는 냉큼 달려와 옆에서 알짱거리는 복호의 등을 두드리면서 웃었다.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간 함박웃음은 청량함을 선사했다. 턱 부근까지 오는 단발의 크림색 머리칼은 흰 피부와 더해져 후광처럼 보였다.
“내가 원래 이런 타이밍 하나는 기똥차게 잘 맞추잖아. 이제 슬슬 끝내야지? 가자, 복호야! 네가 마무리할 차례다!”
수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복호는 병우에게 달려들었다. 병우는 달려드는 복호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옆으로 굴렀다. 그런 병우를 보고 복호가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수호와 닮은 그 웃음은 둘이 남매라는 걸 확실하게 증명했다. 입술 끝에 보조개를 달고 웃는 모습은 복호의 훤칠한 외모를 부각했다. 병우가 피하는 바람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던 복호는 사냥감 보듯 병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지금 술래잡기하는 거야? 재미있겠는데, 누가 더 빠른지 한번 해볼까?”
반드시 잡으려는 자와 무조건 도망치려는 자, 둘만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