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호가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윗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나 속이 너무 안 좋아, 토할 것 같아. 머리도 어지러워. 왜 이러지?”
수호와 하원은 어떻게 말하면 잘 말했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하고 있는데 복호가 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제일 심각한 건 내가 민병우를 어떻게 잡았는지 잘 생각이 안 난다는 거야. 정신 차리고 보니까 사건이 끝나 있었어. 중간중간에 민병우가 내 공격 피해서 열 받았던 건 생각이 난다.”
하원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민병우로 보였던 건가, 민병우 능력 중에 환각은 없을 텐데? 미심쩍은 눈빛으로 복호를 바라보던 하원은 복호 너머에 있는 수호를 보고 생각했다.
‘수호 누나는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복호는 기억을 더듬다 마지막으로 본 병우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해 수호에게 물었다.
“누나, 근데 걔는 왜 그렇게 피떡이 되어 있던 거지? 걔는 내 공격에 맞은 적 없는데.”
복호의 질문에 가슴이 뜨끔 찔린 수호는 멋쩍은 웃음을 날리며 복호를 툭툭 쳤다. 등을 내려치는 손길은 가벼워 보였지만 힘이 꽤 실려 있었다.
“야, 너는 평소에 안 그러더니 왜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잘 해결됐으니까 된 거지. 아픈 건 나중에 도윤 삼촌한테 말해보자.”
진짜 아파서 기운이 없는 건지 복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복호가 어색한 수호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더 실어버렸다. 옆에서 하원이 복호의 등을 뚫을 것처럼 세게 치고 있는 수호를 말렸다.
“누나 그러다가 복호 형 진짜로 토하겠어.”
수호가 그제야 놀라면서 손을 뗐다. 하원은 수호에게 나중에 얘기 좀 하자고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수호는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민병우가 복호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삼촌이랑 상의해 봐야겠어.’
복호와 수호, 하원이 조금 낡은 듯 보이는 5층짜리 건물 앞에 도착했다. 건물 윗부분에는 ‘애순이네 정육점’이라는 간판이 크게 붙어 있었다. 간판을 자세히 보면 애순이네 정육점 옆에 작은 글씨로 ‘& EPI 초능력 사무소’라고 쓰여 있었다. 그들은 1층에 있는 정육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정육점 안은 여느 정육점과 다를 바 없이 빨간 조명이 싱싱한 고기를 사방에서 비추고 있었다. 안쪽에서는 모델같이 키가 큰 남자가 칼을 크게 휘두르며 도마 위의 닭을 치고 있었다. 지적이면서 부드러운 미모의 그는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너네 마침 잘 왔다. 이리 와서 닭 좀 쳐. 요새 ‘비비네 치킨’이 하도 잘 나가서 숨돌릴 틈도 없다, 없어.”
“에이, 도윤 삼촌. 저희 방금 사건 처리하고 왔는데!”
복호가 투덜대자 도윤이 휘두르던 칼을 도마에 내리꽂았다. 탕-하고 꽂힌 칼 밑에 있는 도마가 꼭 자신인 것 마냥 움찔한 복호를 보면서 도윤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얕은 살기가 언뜻 보였다.
“아아- 남 복호 씨가 많이 힘들구나? 그래, 사람들을 전기 통구이로 만들려면 힘들지. 암, 힘이 들고말고! 우리 복호가 힘들면 쉬어야지! 들어가서 쉬어, 이참에 아주 영-원히 쉬자!”
전기 통구이라는 말에 아까 일이 생각난 수호와 하원이 움찔했다. 복호는 검은 아우라를 풍기는 도윤을 보며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걸 느꼈다.
“아, 아니에요! 저 팔팔해요! 우리 삼촌 일인데 당연히 도와야죠!! 하하하!”
복호는 불똥이 튀기 전에 후다닥 냉장고로 달려가서 닭을 꺼내왔다. 도윤은 복호의 빠릿빠릿한 움직임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하원이 닭을 꺼내는 복호에게 다가가 복호의 몸 상태를 걱정했다.
“형, 내가 할까? 아까 아프다고 했잖아.”
애타게 쳐다보는 강아지 같은 눈망울에 복호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하원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오는 길에 다 나은 것 같아. 이제 괜찮아.”
그때 시나몬 색 머리의 한 소녀가 정육점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활기차게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귀엽게 생긴 초록색 머리의 소년도 함께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도윤은 치고 있던 닭을 내팽개치고 두 팔을 벌리며 소녀와 소년을 향해 얼른 뛰어나갔다. 소녀와 소년도 도윤에게 달려와 도윤의 품에 안겼다. 도윤은 둘을 꼭 끌어안은 채 뒤뚱뒤뚱 원을 그리면서 돌았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예쁜 애순이, 도한이 학교 잘 다녀와쪄용? 괴롭히는 애들은 없고? 있으면 꼭 말해, 삼촌이 확 다 그냥!”
도윤이 얼굴을 험악하게 굳히고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괴롭히는 애가 있다고 말하는 순간 학교를 다 때려 부술 기세였다. 애순은 혼자서 말하다 흥분한 삼촌을 진정시켰다.
“삼촌! 우리를 괴롭히는 애가 있을 리가 없잖아, 우리가 누군데!”
도한도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맞아맞아, 누가 우리를 괴롭히겠어?”
도한이 도윤의 쓸데없는 걱정을 같이 달래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복호 형은… 패스, 옆에 있는 하원이 형이 좋겠다.’
하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던 도한은 하원의 찢어진 팔 부분을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하원이 형, 옷이 왜 찢겨 있어? 다쳤어?”
도한의 말에 정육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하원의 팔로 향했다. 하원은 겸연쩍은 듯 웃었다.
“그냥 살짝 스친 거야. 별거 아니야.”
“아닌데, 엄청 큰데?”
도한은 손목에서부터 팔까지 이어지는 긴 흉터를 가리켰다. 흉터는 굵고 긴 선의 형태로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하원이 손으로 흉터를 가리며 말했다.
“이건 원래 있던 거야, 흉터라서 안 아파.”
하원의 검붉은 흉터를 힐끔 쳐다본 복호는 풀이 죽은 채 조용히 자신이 꺼내 온 닭을 치기 시작했다. 시무룩한 얼굴로 닭을 치는 복호를 수호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도윤은 흉터 옆에 자리한 하원의 상처를 살펴보고 얼른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하원은 도윤이 상처를 치료하려고 하자 만류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진짜 살짝 긁힌 정돈데….”
도윤은 온화하던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단호한 표정으로 하원의 다친 팔을 살짝 당겼다. 하원의 상처를 꼼꼼히 살펴본 도윤은 혹여나 아플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소독약을 바르면서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런 거 치료 안 하고 놔두면 나중에 덧나서 골병든다. 어른 말 들어. 그리고 살짝 긁힌 정도는 무슨, 찢어졌네. 심한 건 아니지만 이러다가 또 흉터 남아.”
도윤이 하원의 팔을 치료하면서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말했다.
“우리 애순이, 도한이 오늘 뭐 먹고 싶어? 부대찌개? 닭볶음탕? 삼촌이 우리 조카들 먹고 싶다는 거 다 해줄게!”
하원이 머쓱한 미소를 짓고 도윤에게 말했다.
“삼촌, 애들 방금 나갔는데. 아무래도 비비네 치킨집에 치킨 먹으러 갔나 봐요.”
“또!? 그놈의 비비네 치킨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비비, 그 자식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엌!!”
갑자기 엄청난 힘으로 등을 가격당한 도윤은 아픔에 몸을 뒤틀어대며 뒤를 돌아보았다. 도윤을 때린 사람은 굵은 웨이브의 긴 갈색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아치형 눈썹에 동그란 눈은 속쌍꺼풀을 지니고 있었다. 작고 동그란 얼굴의 여자는 마른 편이었지만 힘은 장사였는지 때리는 힘이 어마어마했다. 여자는 도윤을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너는 치라는 닭은 안 치고 우리 주요 고객님 욕이나 하고 있니? 백수인 걸 거둬줬더니 일 안 하고, 뭐하냐?”
도윤은 억울한 듯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아, 누나! 백수라니! 나 정부에서 위탁하는 초능력 사무소 EPI 팀장이야!”
도윤의 누나이자 정육점 사장인 도연이 선홍빛 입술을 비죽 내밀고 비아냥댔다.
“네-네-, 돈 때문에 갈 데가 없어서 우리 정육점에 빌붙어 있는 그 유명한 EPI 말입니까?”
“누나!!”
누나의 비아냥거림에 얼굴이 벌게진 도윤이 도연에게 소리를 질렀고 도연은 큰 소리에 놀란 귀를 틀어막으며 같이 소리를 질렀다.
“왜!! 이게 어디서 사장님한테 소리를 질러!? 잘리고 싶냐!!?”
도윤은 누나가 소리를 지르자 약간 기가 죽은 듯 보였다. 도연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말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요즘 우리 정육점 매출의 반 이상이 ‘비비네 치킨‘인 건 알고 있지? 주문 온 물량 맞춰야 하니까 빨리 닭이나 마저 쳐. 나는 너희 매형이랑 데이트하고 올게. 그동안 일 잘하고 있어. 안 그러면 월급 깎는다. 우리 귀요미들은 이 화상이 일 잘하는지 감시하면서 까까 사 먹어용-.”
도연은 수호와 하원에게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여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도윤의 등짝을 짝- 소리가 나게 친 뒤 유유히 밖으로 나갔다. 도윤은 조용히 복호의 옆으로 가 도마 위의 닭이 마치 누구인 것처럼 열심히 열정적으로 쳐댔다. 수호와 하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잘려나가는 닭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
원목으로 만든 책장이 감싼 서재는 중후한 멋이 있었다. 서재의 가운데에는 두 남자가 원목 책상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한 채 있었다. 둘 사이는 대치 중인지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중년의 남자는 의자에 앉아 등을 등받이에 받치고 앞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장신의 늘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팔다리는 곧게 뻗어 있고, 적당한 근육이 몸을 이루고 있어 날렵해 보였다. 어깨는 넓게 벌어졌고, 긴 목선과 갸름한 턱은 날카로운 느낌과 우아한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아랫입술은 살짝 도톰하고 붉어 얼굴에 생기를 더했고 오뚝하게 선 콧대와 조화를 이뤄 마치 고귀한 천사를 연상케 했다. 양옆으로 길게 뻗은 눈매와 크고 깊은 눈은 맑고 선명한 눈동자와 더불어 천사의 이미지를 견고히 했다. 풍성한 속눈썹은 살짝 올라가 있어 눈매를 더욱 또렷하게 잡아주었다. 눈썹 위를 가지런히 덮는 금발은 그의 미모에 정점을 찍었다. 그는 중년의 남자를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요즘 선우, 너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이 들리더구나. 학교는 휴학 중이고, 밤마다 상종 못 할 쓰레기 같은 것들이랑 어울려 다닌다고.”
“글쎄요. 왜 그런 소문이 도는지 잘 모르겠네요. 아버지께서 걱정하실만한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선우는 소문 따위 자신은 전혀 모른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을 받아쳤다. 선우의 대답에 선우의 아버지, 선호는 조용히 책상에 딸린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책상 위로 던졌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사진들은 선우의 비행을 낱낱이 고했다.
“이래도 더 할 말이 있는 거냐?”
선호의 말에 선우는 눈썹을 꿈틀했지만 그뿐이었다. 자신의 소문에 관한 증거에도 선우는 여전히 태연했다.
“이제 저한테 사람까지 붙이신 겁니까. 뭐 증거가 있으니 더 이상 거짓말은 못 하겠네요.”
선우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선호는 뒷골이 당기면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과 눈 사이를 엄지와 검지로 잡아 마사지하며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선우를 다그쳤다.
“뭘 잘했다고 그렇게 뻔뻔한 게야, 내가 너 이런 헛짓거리나 하고 다니라고 좋은 것만 먹이면서 귀하게 키운 줄 알아!? 어제 최 변 만나서 유언장 고쳤다. 앞으로 네가 계속 이딴 식으로 행동하면 유산은 한 푼도 못 준다는 내용이다. 유산 상속 제대로 받고 싶으면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이랑 당장 연 끊고 나한테 성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
선호가 유산 상속에 대해서 말하자 선우의 고운 미간에 미미하게 주름이 졌다.
“아버지, 이런 식이시면 좀 곤란한데요.”
선호는 선우의 말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허, 네가 곤란하다고 하면 내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알아? 잔말 말고 다음 학기부터 복학해. 그리고 조용히 학교 다니면서 회사 이을 준비나 해라.”
선호의 명령조에 선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게 대단한 회사라고 이을 준비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전 아버지 회사, 잇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뭐라고!?”
선우의 비웃음 섞인 말에 선호는 격분했고, 앞에 널브러진 사진을 선우를 향해 던졌다. 사진은 선우의 얼굴에 작은 생채기를 내며 떨어졌다.
“성선우, 네 놈이 이렇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던 게 누구 덕인데 감히 그런 말을 해!? 내 돈으로 여태까지 놀고먹었으면 보답을 해야지! 내 말 듣지 않을 생각이거든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선우는 선호의 고압적인 태도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까와 다름없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선호를 바라보며 자신의 뺨을 슥- 쓸었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손에 피가 조금 묻어 나오자 지금까지 무표정하던 선우의 얼굴이 살짝 흐트러졌다. 선우는 씩씩대는 선호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뒤를 돌아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저, 저 놈이, 너 당장 이리 오지 못해!!?”
선호는 격앙된 목소리로 선우를 불렀지만 선우는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선우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나갈 준비를 했다. 흥분한 건지 옷장 속 옷을 고르는 손이 매우 거칠었다. 베이지색의 코트를 입고 나가려던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아까 선호가 쓰레기라고 지칭했던 것들에게서였다. 선우는 불규칙한 호흡을 진정시키고 무관심하게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