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강남 표국의 소 총표두
대륙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강줄기.
사람들은 장강이라고 부른다.
그 압도적인 길이만큼이나 장강을 따라 여러 문파가 존재하며, 그중에는 강남 표국도 있다.
내로라하는 문파들 못지않게 세력도 그 실력도 커서, 중원에서는 이름이 꽤 알려진 곳이다.
호북에 위치한 성도인 우한을 흐르는 장강 아래 있었기에, 가히 중원에서도 가운데라 수많은 물자를 운송했다.
“소 총표두. 어떻게 하실 겁니까?”
“굳이 아버님께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손에 깨끗한 물만 묻히며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물건만 잘 전해 주면 되는 겁니다.”
강남 표국의 총 표두인 윤청지 의 장자인 소 총표두 윤홍정.
호북 지부는 본가와 가장 가까워서, 윤청지의 부재 시 윤홍정이 대리로 총괄 표두를 맡아왔다.
마침 윤청지가 무림 맹주 진가백의 초청을 받아 자리를 비운 사이, 큰 의뢰가 하나 들어온 것이다.
거액의 보수였기에, 윤홍정은 이참에 아버지에게 제대로 인정받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번 건만 잘 해결하면 정식으로 지부장 자리를 내어줄지도 모른다.’
윤청지는 항상 윤홍정을 무시했었다.
그렇지만 이번 임무에 성공한다면 평가는 반전될 터다.
하늘이 주신 기회다.
물론, 의뢰의 보수가 이상하리만치 큰 게 정상적인 물건이 아님은 눈치챘다.
조금 전 일이다.
복면을 쓴 이가 의뢰를 맡기러 온 것이.
“물건을 봐서도 안 되고, 목적지를 발설해서도 안 된다. 만일 조금이라도 새어나간다면 큰일 날 것이다.”
“물론입니다. 강남 표국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오.”
“그런데 흠, 윤청지 대인은 안 계시나?”
“아버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내가 잘 전해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흠. 명성이 드높은 강남 표국이니 알아서 잘하겠지만, 내 말 잊지 말고 꼭 전달하게.”
복면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엄청난 경공이다.
“저 사람은 고수입니다.”
“나도 잘 압니다. 정체를 숨기려고 흑의 와 복면을 걸쳤지만, 특유의 살기를 다 가리지는 못하는군요.”
“뭐 딱히 정파 사파 가려서 일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수상한 의뢰라면 총표두께 알리는 것이…….”
“아까 말했잖소? 나도 이제 성인입니다. 박 표사를 아저씨라 부르던 어릴 적 꼬마가 아니란 말입니다.”
“흠. 죄송합니다. 소 총표두.”
잔소리를 들어주면 한도 끝도 없는 일.
어차피 사람 호위도 아니고, 물건만 잘 전달해주면 그만인 쉬운 일이라고 윤홍정은 생각했다.
봉인이 된 상자는 작았다.
열려면 열 수 있겠으나 봉인은 위조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훔쳐봤다는 소문이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강남 표국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냥 안 보는 것이 제일이다.
복면인의 경고도 있었고 말이다.
운송을 시작하기까지 준비가 필요했다.
대규모의 이동은 눈에 너무 띈다.
소수 정예를 운용하여 비밀리에 이동해야 한다.
윤홍정은 박 표사에게 물품이 든 상자를 건넸다.
박 표사가 알아들었는지 말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인다.
“안전 보관소에 잘 두시고, 표사 들 중 무예가 뛰어난 이들로 선별 부탁합니다. 혹시 모르니 보관소 경계도 강화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소 총표두.”
박 표사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름 긴장 한 것일까.
청하 객잔의 술이 당긴다.
‘청하 객잔에 모처럼 들려볼까.’
윤홍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쨍!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린다.
아직 대낮이거늘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장연청이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뭔 대낮부터 술이야?”
“장 형. 우리가 차 없이는 못 살 듯이 저들도 술 없이는 못 사는 존재니 그렇지요.”
“나는 이해가 안 가. 술을 마시면 취하잖아?”
“그 취함에 만사 잊고 마셔대는 거잖아요.”
“차는 취하지 않지. 이 얼마나 좋은가.”
“취하긴 취하지만, 그 향에 취하죠. 심신이 안정되고 내공 운용에도 좋으며 기혈의 열림에도 도움이 되니, 이거야말로 일거양득 아닙니까?”
“하하하! 동생의 말만 들으면 세상 모든 영약이 차보다 못하군!”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장강 아래 위치한 청하 객잔.
호북의 성도인 우한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여기 확실히 차의 질이 좋군요. 얼른 장강 구경을 가고 싶네요.”
“급할 게 뭐 있나? 장강의 물줄기가 끊기는 것도 아니고, 여유 있게 하자고. 여유 있게.”
“사실 중원 출두는 처음이라 기대가 많이 됩니다.”
“하긴, 운남에서 곧바로 무당산으로 온 건가?”
“그렇습니다. 아버님이 하도 귀가 떨어지라 이야기하시는데, 아이 때부터 듣던 터라 유랑을 한다면 무당산부터 가겠다고 다짐했었지요.”
“사천 성도보다야 여기가 더 볼 게 많지.”
연청의 대답에 남영이 잠시 뜸을 들인다.
“사천 성도를 혼자 방문한 적은 없습니다.”
“아니 왜? 운남 에서도 가깝고 무엇보다 명차들이 많은데?”
“저희는 독을 쓰지 않습니까.”
“아.”
사천의 성도에는 정파의 명문세가인 사천당문이 위치하고 있다.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로 유명한 곳이다.
사파에서 가장 독을 잘 쓴다는 오독교와, 아무래도 서로 견제할 수밖에 없는 노릇.
“이런. 경쟁하는 처지니. 실수했네.”
“괜찮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서생인데 뭐 별일 있겠습니까. 장 형도 어차피 사천으로 가실 예정이니, 이번 장강 구경이 끝나면 함께 하시지요.”
장연청이 껄껄 웃으며 답했다.
“내 몇 번이나 말하나. 동생 같은 잘생긴 서생은 없다니까.”
“아 그만 좀 놀리세요!”
“수염은 안 기르나? 수염을 기르면 더 멋질 텐데.”
갑자기 입을 다무는 남영을 보며, 연청은 자신이 실언했나 해서 갸우뚱했다.
“음, 수염은 그냥 제가 싫어서.”
“아, 뭐 다 개인 사정도 있는 거고. 미안허이. 신경 쓰지 말게.”
‘이크! 무모증인가?’
당황하는 표정을 보니 맞는 것도 같았다.
‘뭐 사내가 수염이 안 날수도 있지. 어쩐지 곱상하기도 너무 곱상하더라고.’
피식 웃으면서 차를 따르는 연청에게 남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다.
“왜 웃습니까?”
“아니. 뭐 그냥 헛웃음.”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왜 이 상황에서 웃음이?”
“아, 사람이 그냥 웃을 수도 있는 거지. 그럼 울리? 웃으면 복이 온다고 복이.”
그때였다.
점원들이 분주하게 탁자를 치운다.
수군대는 걸 보아하니 귀중한 손님이라도 방문하는 것 같다.
여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일행 중 하나가 벌써 술에 취했는지 혀가 꼬이는 말투로 삿대질을 했다.
“아 왜 야단법석이야! 술 마시고 있는 거 안 보여?”
“아이고! 죄송합니다. 귀한 손님이 오신다기에…….”
“귀하긴 뭘 귀해? 누군데? 누군데 이 난리야?”
“강남 표국의 소 총 표두께서…….”
“......”
방금만 해도 난리를 치던 이가 무안한 듯 조용히 입을 다문다.
지켜보던 남영이 연청에게 살짝 물었다.
“강남 표국의 위세가 대단하네요.”
“그렇지. 아무래도 중원의 수많은 표국들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곳이니.”
“이름만 들어도 꼼짝 못 하는 게 이 지역에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나 봅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결정적으로는 무림맹의 비호가 크지. 무림맹의 운송업은 강남 표국이 대부분 담당한다네.”
“무림맹이요?”
“칠의 문파들의 연합. 현재 정파의 주축이지.”
“그럼 장 형의 무당파는?”
“무당과 소림은 무림맹의 가입을 거부했지.”
“음. 왜죠?”
“사람이 모이면 친한 이들부터 챙겨주잖아? 뭐 정파라고 해도 사람 모인 곳은 다 똑같은 법이니. 물이 너무 고이면 썩어버리고.”
“그렇네요. 사파의 입장에서는 재밌는 구경거리가 되겠지요. 어리석기는.”
“나는 옛적부터 싫었다고. 정파니 사파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남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그나저나 강남 표국이라. 강남 표국의 소 총표두라면......’
뭔가가 떠오를 것 같아 연청의 머릿속이 간질간질한다.
과거에, 강남 표국의 총표두인 윤청지 대협과 그의 아들이 무당파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내 얼굴을 안다고! 아이고! 큰일이다!’
장연청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기 동생. 인제 그만 가지 얼른.”
“에? 아까는 여유 있게 행동하라더니?”
“아니 여기 요리 잘하는 가게가 생각이 확 나서 말이야. 거기 줄 서서 먹는 곳이라 얼른 가지 않으면…….”
“또 맛집입니까? 배는 아직 안 고픈데…….”
그때 분명히, 대 제자로서 무당파 심법의 호흡 구결을 조금 전수해줬었다.
그냥 예의상 기본적인 부분만 며칠 지도했으나, 분명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무당파 대 제자라는 걸 벌써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연청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맛집은 배가 고파서 가는 것이 아닐세! 그 맛에 대한 미를 느끼러 가는 곳이야!”
“흠, 뭔가 다급하십니다?”
“그러니까 식도락이라는 게…….”
어서 오십시오!
커다란 환영 인사 소리와 함께, 강남 표국의 소 총표두인 윤홍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색 비단으로 치장한 화려한 복장의 앳된 청년이, 경호 인들과 함께 당당한 걸음으로 청하 객잔 내부로 걸어들어온다.
점원 몇이 바로 붙어 졸졸 따라다니는 걸 보니 가히 극상의 귀빈 대접이다.
“항상 가시는 자리로 준비할깝쇼?”
“고맙소.”
웃으며 답하는 윤홍정의 눈에, 옥신각신 중인 장연청과 남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장 대협이군!’
순간 표정이 밝아지며, 홍정이 둘이 앉아있는 탁자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돌린다.
얼른 가자고 재촉하는 장연청의 뒤에서, 윤홍정이 예를 갖추며 인사를 건넸다.
“장 대협! 다시 뵈니 정말 반갑습니다!”
‘하아, 딱 걸렸네.’
의아하게 쳐다보는 남영의 눈치를 보며, 장연청이 얼른 일어나 몸을 돌렸다.
싱글벙글 웃고있는 윤홍정에게, 연청이 후다닥 다가가 귓속말을 건넨다.
“내 정체를 말하지 말게나!”
하하하! 아이고 반갑네! 윤홍정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장연청이 얼싸안았다.
“이거 참! 여기서 보다니! 잘 지냈는가! 하하하!”
“장 대협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외모와 말투 십니다. 6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그대로시네요.”
눈치가 빠른 홍정이 알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우한에 오셨으니 대접을 해야지요. 지기분도 계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강남 표국의 소 총표두인 윤홍정이라 합니다.”
남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받았다.
“환대 감사합니다. 저는 남영 입니다. 그냥 서생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생이라는 말을 듣자 홍정의 눈빛이 달라진다.
“남 소협은 서화에 능하시겠군요?”
“아닙니다. 그저 수박 겉핥기지요.”
“저도 서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것 참, 술이 당겨서 왔더니 이런 반가운 손님들을 뵐 줄이야.”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장 형은 윤 소협을 어찌 아시는지?”
남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연청에게 묻는다.
‘저거 의심의 눈초린데.’
눈치챈 윤홍정이 얼른 대꾸한다.
“예전에 무당파의 무공을 조금 배운 적이 있습니다. 장 대협께서 며칠 저를 맡아 호흡법에 대해 가르쳐 주신 적이 있지요.”
“호오. 그렇습니까?”
남영의 눈이 더 가늘어진다.
“장 형은 무당파의 속가제자라고 했는데, 직계가 아닌데도 가르침을?”
“속가제자요?”
홍정이 살짝 눈썹을 올렸다가, 금방 원래의 표정으로 돌렸다.
“하하. 6 년의 시간은 길지요.”
“흠.”
장연청이 큰소리로 웃으며 분위기를 무마했다.
“자자! 하하하! 남의 과거사를 가지고 뭘 그리 대화하는가? 어, 술 마시러 왔다 했지? 내 술은 마시지 않네만 윤 소표두를 오랜만에 봤으니 마시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고.”
“장 형. 조금 전만 해도 맛집에 가자고 하더니…….”
“동생. 반가운 이를 만났는데 뭔 맛집인가 맛집은. 하하하! 거기 사실 별로 맛도 없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남영을 보며 장연청이 멋쩍게 웃었다.
윤홍정이 곁에 있던 수하에게 뭔가 지시를 내렸다.
“맛집이라면, 제가 잘 알지요.”
어느새 돌아온 경호인 둘이 커다란 술독을 들고 서 있다.
“청하 객잔의 술은 최고이니, 여기 술만 챙겨 가도록 합시다.”
“응? 여기서 먹으려는 게 아닌가?”
“명색이 강남 표국의 소 총표두인 제가, 은사 대접을 이런 곳에서 하면 되겠습니까?”
윤홍정이 둘을 향해 말했다.
“우한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를 대접할 수 있는 곳은 당연히 저희 강남 표국이지요. 진귀한 서화들도 많으니 남 소협도 관심이 많을 것입니다. 대접할 테니 저와 함께 가시죠.”
‘이거 뭔가 살짝 꼬이는 느낌인데?’
장연청은 잠시 고민했지만, 섣불리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 이거 어쩐다? 여기서 술 먹고 퉁 치려 했거늘.’
슬쩍 남영을 보니 여전히 자신을 흘겨보고 있다.
의심의 눈초리가 아니라 거의 의심 확정이다.
‘아니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은근 기분 나쁘네?’
갑자기 남영이 큰 소리로 답했다.
“좋습니다! 강남 표국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초대 감사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장 형? 장 형 때문에 이런 대접도 받고 말이지요. 일개 서생이 어찌 구경이나 하겠습니까!”
‘으이그. 엄청 비꼬는구먼.’
연청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뭔 사내가 저리 잘 삐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