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강남 표국을 방문하다
강남 표국.
한눈에 봐도 어마어마한 규모.
어지간한 소규모 문파들과도 맞먹는 수준이다.
표국 입구를 들어서니 넓은 장원이 그들을 반긴다.
귀한 석조들로 둘러싸인 연못에, 나무들이 가득하다.
윤홍정의 안내를 받으며 뒤따라 들어가던 남영과 연청이 감탄을 내질렀다.
“엄청나네요.”
“말로만 들었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절경이야 절경.”
“위세가 대단한 게 이해가 갑니다.”
“강남 표국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야.”
윤홍정이 들을까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연청이 속삭였다.
“무림맹과 손을 잡으면서 기하급수로 커진 거지.”
“어떻게 무림맹과 연을 맺게 된 걸까요?”
“소문에는 강남 표국의 총표두인 윤청지 대협이 현 무림맹주와 친분이 깊다는군.”
“인맥이군요.”
“세상살이 그야 당연한 거 아니겠나.”
“흐음.”
대화를 멈추고 남영이 연청을 넌지시 쳐다본다.
가끔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남영의 눈빛이 살짝 당황스럽기도 하다.
윤홍정의 말을 듣고 난 뒤로는, 그 눈빛이 더욱 깊고 날카롭게 느껴진다.
“인맥이라. 그래서 무당에서도 무공 전수를 해준 건가요?”
“아, 진짜 별거 아니야. 건곤진공 의 호흡법을 간단하게 알려 준거지. 기본 구결 정도는 알려줘도 무방해. 하도 졸라대서 사부님이 귀찮다고 나한테 떠넘겼…….”
“떠넘길 정도라?”
‘아, 실수했다.’
장연청은 얼른 말을 돌렸다.
“떠넘겼다기보다는 음, 진짜 그냥 무당파 방문하면 얻어가는 기념품 같은 거거든. 진짜 아무것도 아니니까.”
“흠.”
“아니 그런데 좀 그렇네. 내가 뭐 잘못 한 것도 아니고 왜 자꾸 그런 눈으로 보나?”
연청이 투덜거리자 남영이 씩 웃었다.
“뭔가 숨기는 것 같아 그럽니다. 장 형.”
“수, 숨기긴 뭘 숨겨?”
“제 정체는 다 드러났는데, 장 형은 안 그런 것 같으니 공평하지 못한 거 같아서.”
“오호라. 그런 건가?”
장연청이 마주 보며 히죽거렸다.
“동생이 더 숨기는 게 있다 보는데?”
“제가요? 이미 오독교 소속이며 사파 인인 걸 이미 다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더 있어 뭔가. 촉이야.”
“촉만 믿는 사람들은 항상 허세가 심하더군요.”
툭탁거리는 둘을 향해, 윤홍정이 큰 소리로 말했다.
“장 대협, 남 소협.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어느새 표국의 본청 입구에 다다랐다.
“이쪽입니다.”
으리으리하다.
진열되어있는 가구들은 물론, 벽에 걸린 서화나 그림들도 전부 진귀한 물품들로 가득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벽면 하나를 꽉 채울 정도로 커다란 산수화.
들어서자마자 정면에서 보이는 그 그림은 고풍스러우나 알게 모를 위압감을 준다.
벽에 걸린 그림을 주시하며 남영이 눈을 반짝거렸다.
“이 계산행려도는 일품이군요.”
“역시 그림을 볼 줄 아십니다.”
“산봉우리를 두른 구름이 뿌옇게 희미하다면, 밑의 떨어지는 폭포는 너무도 선명하게 뇌리에 박히니,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다 보면 서서히 깨달음을 얻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윤홍정이 감탄하며 남영에게 말했다.
“놀랍습니다. 이 그림의 유래를 혹시 아시는지?”
“아니요, 그림을 그린 이가 누군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범상치 않음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하긴 그럴 만도 합니다. 왜냐면 이 그림은…….”
장연청이 갑자기 끼어든다.
“하하하. 동생이 어찌 알겠나. 이건 내 촉인데, 무림인들만이 알 수 있는 그림이야. 무공의 흐름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 같은데?”
“그놈의 촉은…….”
남영이 흘기는 동안, 윤홍정이 웃으며 연청의 말을 받았다.
“장 대협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 표국 내에서는 유명하죠. 아버님이 예전에 구해오신 그림인데, 시대를 풍미했던 절대 고수가 자신의 무공을 표현한 거라는 소문이 있죠.”
“붓 끝에 실린 기세가 범상치 않아.”
“사실 저희가 이 그림을 정면에서 보이도록 걸어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윤홍정이 남영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일종의 문지기 역을 하는 거죠.”
“문지기요?”
“그 재능을 보는 거죠. 하하하.”
윤홍정이 자리를 권했다.
연청과 남영이 앉자, 홍정이 하인을 부른다.
하인에게 뭔가 지시한 그가 연청에게 말했다.
“식사는 조금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일단 제가 차를 가져오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잠시 쉬고 계시죠.”
“차! 아주 좋아! 알겠네.”
“장 대협. 저는 일 때문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물러나겠습니다. 있다가 다시 뵙도록 하죠.”
“어 그러게나.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윤홍정이 몸을 돌려 나가자마자, 남영이 연청에게 물었다.
“장 형. 저 그림말입니다.”
“음. 나도 느꼈어. 저건 평범한 그림이 아니야.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
“문지기라고 말한 뜻이 뭘까요?”
“글쎄, 추측이지만 그림에 숨겨진 비밀을 눈치챈 이들을 선별하는 게 아닐까?”
“네?”
“쉽게 말하면, 지금 동생처럼 무공을 숨기는 이들을 골라내는 거지. 그림을 봤을 때 행동이라거나, 표현이라거나…….”
“아 그래서 아까…….”
“그렇지. 일부러 끼어들었네.”
연청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인이 찻주전자와 차를 가지고 왔다.
연청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이고 역시 좋은 데라 비싼 차가~”
“장 형은 차만 보면 분위기가 확 변합니다?”
남영의 우스갯소리에 연청이 맞장구치듯 찻잔을 들었다.
“가식 떠는 거보다 낫지.”
“그야 그렇죠.”
“말은 이리 해도, 정도껏 해야지 조절이 안 되니 원.”
남영이 계산행려도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뭔가 세심히 관찰하는 것이 심상치 않다.
연청이 차를 마시다 말고 그런 남영에게 물었다.
“왜? 뭐 이상해?”
“폭포가 떨어지는 흐름이 좀 안 맞네요.”
“흠. 그림 좀 볼 줄 아는구먼?”
“아버지에게 많이 배웠죠.”
“아버님도 오독교 출신인가?”
장연청의 이 질문은 뼈가 있었다.
자연스레 던졌지만, 그 속셈을 간파한 남영이 정색하며 받아쳤다.
“그건 개인사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음. 뭐 동생이 그렇다면야 그런 거지. 아 얼른 이리와 이거나 들어. 이 향을 맡아보니 남방 쪽에서 온 거 같은데 말이지.”
“발효차네요.”
“역시 잘 알아.”
남영이 연청과 마주 앉으며 답했지만, 여전히 시선은 벽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쳐다보고 있었다.
**
“소 총표두!”
표사들의 거처.
몇 명의 표사들이 늘어져 있다가 깜짝 놀란다.
윤홍정의 방문에 놀랐는지 허둥지둥 이다.
둘러보며 박 표사를 찾던 홍정이 물었다.
“박 표사는 어디 있습니까?”
“박 표사님은 보관소 쪽에 계십니다.”
“음. 알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아버님이었다면 이렇게 빈둥거리는 꼴, 그냥 안 놔두셨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아시겠죠?”
“네!”
‘이래서 대대적인 물갈이가 필요해.’
홍정은 짜증 나는 표정으로 거처를 나섰다.
‘그런데 아직도 보관소에 있다고?’
윤홍정은 약간 의아했지만,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중요한 물건이니 경계에 더욱 신경을 쓰는 건지도 모른다.
신신당부해놓기도 했고.
구부정한 돌길을 걷는 동안, 윤홍정은 임무 준비에 대해 고민했다.
‘무공이 강한 이들로,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하려면 몇 명이 좋을까?’
“소 총표두! 오셨습니까!”
안전 보관소에 도착했다.
경계를 서고 있던 표사 둘이 윤홍정을 보자마자 크게 인사한다.
얼마 전 새로 들어온 이들이다.
표국에서는 정기적으로 인원을 모집한다.
강남 표국의 명성을 듣고 수많은 이들이 지원한다.
하지만 그중에는 묻어가려는 이들이 태반이다.
이 많은 모래알에서 옥석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박 표사님은 안에 계십니다.”
묻기도 전에 알고 답한다.
상대를 살피고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박 표사가 이번에 선발한 인원들은 기존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에 비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고맙습니다.”
홍정이 답하며 안전 보관소 안으로 들어섰다.
보관소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강남 표국 내에서도 극소수.
현재는 윤홍정과 표사들의 우두머리 뻘인 박 표사만 가능하다.
윤청지가 현재 홍정의 나이일 때부터 함께 동고동락한 이라 그런지, 표사들의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물론 윤청지도 그걸 알기에 조언자로서 홍정의 옆에 붙여준 것이다.
“박 표사님?”
윤홍정이 둘러보며 박 표사를 불렀다.
귀중품들이 가득한 곳에서도, 홍정은 최근 맡았던 그 상자가 들어있는 금고를 찾아 살폈다.
“오셨습니까.”
박 표사가 윤홍정을 보더니 금고 상자 하나를 가리킨다.
“열쇠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음, 한 번 다시 살펴봅시다.”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상자가 잘 있는 것은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옳았다.
박 표사가 그대로 금고를 연다.
상자가 보였고, 홍정은 바로 봉인의 상태를 확인했다.
봉인이 훼손된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다시 잠가주십시오.”
“네. 소 총표두.”
박 표사가 금고를 잠그더니, 열쇠를 건넨다.
홍정이 받아들고 품에 넣는다.
“계속 보관소에 계셨던 겁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출발하기 전까지는 자주 감시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임무에 투입할 인원들은?”
“열 명정도 됩니다.”
“좋습니다. 지금 보고 싶군요.”
“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장원 안쪽 거처에 집결해있거든요.”
“바로 이동합시다.”
홍정과 박 표사가 보관소를 나섰다.
장원 안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박 표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입도 무겁고 실력이 좋은 친구들입니다.”
“보관소 경계를 맡긴 그 사람들처럼 말이지요?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인재들을 모집할 수 있었습니까?”
“저 또한 지금의 인원들로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요. 명성이 높아지니 거만해지고, 수련도 않고요. 멍청한 놈들.”
“하하하. 역시 박 아저씨입니다.”
박 표사도 웃는 가운데, 어느새 장원 안쪽 끝에 위치한 제 2 거처 앞에 다다랐다.
홍정은 인기척을 줄이고 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확실히 다르군.’
눈빛이 살아있다.
누구 하나 널브러진 이 없다.
모두는 제각각 무기를 손질하거나, 명상하거나, 체력을 단련하고 있었다.
홍정과 박 표사를 본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열을 맞춰 인사한다.
“소 총표두님!”
홍정이 흡족한 미소를 띠고 박 표사를 바라보았다.
박 표사가 손짓을 하며 편히 서라 지시한다.
하지만 모두는 굳건히 서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준비가 잘 된 것 같군요.”
“안 그래도 언제 임무를 시작하는지 계속 물어보는 게, 근질근질 한 모양입니다.”
“반가운 손님이 오셔서 당일은 좀 그렇고, 대접 후 배웅해드린 뒤 출발하도록 합시다. 저는 다시 돌아가볼테니, 박 표사는 이 친구들과 술과 음식을 즐기도록 하시지요. 제가 일러두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들었느냐? 소 총표두님께서 오늘 크게 한턱 내신다 하니 모두 감사드려라!”
“감사합니다!”
밝아진 이들을 뒤로하고 윤홍정은 다시 거처 밖으로 나섰다.
준비는 다 된 것 같았다.
‘장연청 대협의 대접이 끝나면, 바로 내일 출발하도록 하자. 떠나기 전에 장 대협에게 약간의 무공을 전수받는 것도 좋겠지. 무당심법인 건곤진공의 호흡법만 알고도 내공 수련이 일취월장함을 느꼈어. 천하제일이라 칭하는 것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었다.’
홍정은 다시 장원 밖으로 돌아 나오며 생각했다.
‘그나저나 그 장 대협의 지기는 누구지? 분명 계산행려도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봤다. 무공을 할 줄 아는 자임이 분명해.’
본청이 가까워지는 동안 호기심은 가중 된다.
‘굳이 비밀로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왜 장 대협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하지?’
그 서생과 뭔가 관련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윤홍정은 생각한다.
본청에 다다르자 투덕거리며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홍정이 안으로 들어서며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을 준비하느라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그 어찌 차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연청과 남영 둘이 서로 노려보고 옥신각신하는 게 보여, 홍정은 잠시 말을 멈췄다.
“남방일세.”
“서남입니다.”
“남방이야. 이 차는 바다 건너온 거라고.”
“서남쪽 이민족들 따라 육로로 온 것이에요.”
“내가 더 잘 알아 차는.”
“그걸 어떻게 증명한답니까?”
“동생. 은근히 고집이 세다?”
“형님이라고 무조건 다 옳다 하면, 동생이 뭘 배우겠어요?”
윤홍정이 돌아온 것을 본 둘이, 같이 고개를 돌렸다.
“이 차 어디서 구한 건가?”
“아 장 대협. 죄송하지만 저는 차를 잘 모릅니다. 접대용 차는 다 아버님이 관리하시지요.”
“에잉. 도움이 안 되는구먼.”
남영이 코웃음을 치며 찻잔을 빙글 돌렸다.
“향은 제가 더 잘 알아요. 조향에 관련해서는 우리를 따라올 자들이 없지요.”
남영이 무심코 흘린 혼잣말에 윤홍정의 귀가 쫑긋 섰다.
‘평범한 서생이 아니라면? 만약 그가 무림인이라면? 향을 조합하거나 판별하는 ‘조향’에 대해 자부한다면……. 설마?‘
그때였다.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표사 하나가 헐레벌떡 본청으로 뛰어들었다.
“소, 소 총표두! 큰일 났습니다!”
“무슨 소란입니까. 손님 앞에서.”
윤홍정이 대꾸하며 뛰어든 표사를 보니, 얼굴이 식은땀으로 범벅이다.
창백한 표정은 심각한 일이라는 걸 말해준다.
숨을 몰아쉬던 표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바, 박 표사님이…….”
“뭐?”
이어진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주,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