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강남 표국을 떠나다
상자의 봉인은 멀쩡했다.
누군가 벗긴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봉인이 풀리면 진품인지 가품인지 가리기 힘들 테니.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봉인된 상태 그대로 가져가는 게 제일 낫다 본 거야.”
“조금만 늦었어도…….”
“아마도 박 표사가 죽으면 물품 먼저 확인할 거라 예상한 거겠지. 그렇게 홍정 자네도 독에 당하면 모든 게 수월히 풀리는 거고.”
“하늘이 도왔습니다.”
남영이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도왔죠.”
“아, 남 소저…….”
“됐어요.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장연청이 껄껄 웃으며 다독인다.
“동생이 아주 큰 활약을 했어!”
“별말씀을요.”
“일단 여기 마무리를 합세나. 그 거처에 널브러진 흑백교 잔당들은 홍정 자네가 처리해주게. 또 차가 고프니 얼른 가 마셔야겠어.”
“알겠습니다.”
“자, 일단 얼른 가자고.”
수습을 위해 본청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연청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다.
“동생이 홍정 자네의 해독약을 제조하는 동안, 내 부탁이 하나 있는데?”
“무엇입니까?”
“벽에 걸린 그 그림을 좀 살펴보고 싶네만.”
“계산행려도 말씀입니까? 그 그림은 아버님이 구해오신 거라 저도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림에 뭔가가 있네. 그걸 알고 이놈들도 잠입한 거지. 그나저나 아무리 표국 이라지만 대놓고 흉계를 꾸미다니.”
어두운 표정의 홍정을 보며 연청이 조심스레 다시 말을 던졌다.
“그 물건. 의뢰를 받은 건가?”
“얼마 전에, 수송의뢰를 받았습니다.”
“내 보기에 재수가 없네. 그 물품.”
“???”
“그냥 예감인데, 홍정 자네는 그 물건에서 손을 떼는 게 좋겠네.”
“그럴 순 없습니다. 중요한 의뢰라서…….”
“이 와중에도 그걸 수송할 생각인가?”
홍정이 입술을 깨물며 우직하게 답한다.
“장 대협. 이건 제 나름의 다짐입니다. 저도 곧 한 무리를 통솔하는 우두머리가 되려면 넘어야 할 산입니다. 어떻게든 의뢰를 완수하렵니다.”
“사내대장부가 하려 하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지. 허나 느낌이 안 좋아 충고하는 걸세.”
“......”
“말리진 않겠지만, 위험한 거 같으이. 조심하게나.”
홍정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청도 더는 묻지 않는다.
셋은 서로 말없이 본청을 향해 이동했다.
**
윤홍정이 부산한 표국 내부의 분위기를 수습하는 동안, 남영은 벽에 걸린 계산행려도를 계속 살펴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린 이가 누군지 알면 좋을 텐데.”
“선대 선배님인 건 분명해요. 그림이 그려진 시기로 보면 대략 100년 전?”
“나는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 확실히 보통 그림은 아니야.”
“여길 봐봐요.”
남영이 그림을 손으로 가리켰다.
“폭포 흐름이 이상하다고 했죠?”
“흐음.”
“휘어지잖아요. 여기서. 그것도 두 갈래로.”
커다란 산봉우리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 줄기가, 두 갈래로 휘어지고 있다.
“잠깐만. 여기 구름의 흐름도 이상한데?”
“그러네요. 구름은 평상으로 흐르고, 폭포는 곧바로 떨어져야 맞는 건데, 이 그림에서는 방향이 약간씩 달라요.”
구름의 흐름도 살짝 양방향으로 서로 엇갈려 올라가고 있다.
“커다란 산봉우리가 일직선으로 서있다면, 구름이 좌상 우상으로 조금씩 오르는 모양새고, 폭포 줄기가 좌하 우하로 휘어져 내려가요.”
“그리고 이 다리.”
산봉우리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 하나.
장연청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팔괘야.”
“팔괘?”
“무당파에서 강조하는 음양의 조화와 태극, 그리고 팔괘. 그래서 잘 알지.”
“장 형에게 듣고 보니 그렇네요. 산꼭대기와 밑자락, 구름의 양방향, 가운데 구름다리, 폭포 줄기 양 갈래가 각각 서로 다른 뻗음이에요.”
“여기, 잠깐.”
연청이 북동쪽을 가리켰다.
“북동쪽 간방 방향의 구름의 색이 조금 다르네.”
“아, 이건!”
남영이 가까이 살펴보더니 속삭였다.
“덧그림이네요.”
“그렇지? 뭔가 이상하더라고.”
“간방 방향은 예부터 귀신이 들어오는 곳이라 해서 중요하게 생각했죠.”
“아, 궁금한데 이거.”
연청이 찌푸리며 남영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그림을 훼손할 수도 없잖아.”
“뭐 어때요? 살펴보다가 모르고 그랬다 하면 되지.”
“안 돼. 강남 표국의 사유 재산을 함부로 망가뜨릴 수는 없지. 아무리 그래도…….”
“방법은 있죠.”
남영이 찻잔을 들고 오더니 살짝 바른다.
“으악! 뭔 짓이야?”
“가까이서 살펴보지 않으면 티도 안 나니 걱정하지 말아요.”
“막무가내구먼. 막무가내.”
구름이 그려진 곳을 조심스럽게 찻물로 바르니 조금씩 투명해진다.
희미한 윤곽이 보인다.
글자다.
낙산.
“낙산?”
“사천의 낙산 맞죠?”
연청이 이마를 '탁' 쳤다.
“어차피 우리가 갈 곳이 사천이었으니, 이참에 낙산에 들려서 정보를 캐보자고.”
“호오. 장 형도 무공비급에 관심이 많나 봐요?”
“사파 거대 세력이 원하는 것을 호락호락 넘겨줄 수는 없지 않나?”
“하긴 저도 그건 그래요.”
남영이 입술을 꾹 깨문다.
“흑백교가 우리 오독교를 좌지우지하는 꼴은 싫거든요.”
“남 말 같지가 않네. 무림맹도 그러니.”
연청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홍정이 돌아오면 우리도 바로 떠나는 게 좋겠어.”
“장강 구경은요?”
“나중에 가면 되지. 내가 같이할 테니까.”
연청의 말을 들은 남영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진다.
무심코 바라본 연청이 농을 던졌다.
“아니 얼굴은 왜 빨개지고 그러나?”
“뭐라고욧!”
“아 왜 화를 내고 그래…….”
득달같이 쏘아붙이는 남영의 눈초리가 매서워 연청이 얼른 입을 다문다.
홍조가 가득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어쩔 줄 몰랐던 남영이 급하게 찻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는다.
“뭔 차를 냉수 마시듯 털어 넣나.”
“조용히 해요. 남 놀리는 게 장기 시죠?”
“안 친하면 말도 안 걸어. 하하하.”
“참 자랑이십니다.”
연청이 웃으며 다시 짐을 챙기는 동안 남영이 그동안 궁금했던 걸 물었다.
“왜 무당파의 대 제자라는 걸 숨겼죠?”
“아. 한때는 대 제자였으나, 지금은 대 제자의 위치가 아니라서 그래.”
“그게 뭔 소리여요? 설마 쫓겨나기라도 했어요?”
침울해지는 연청의 안색을 보며 남영이 깜짝 놀란다.
“진짜 쫓겨났어요?”
“응. 사부님의 차를 훔쳐 마셔서…….”
“훔쳐 먹었다고요?”
배를 잡고 웃는 남영을 보며 연청이 한소리 던진다.
“뭐가 그렇게 웃기나. 참.”
“아니 웃기잖아요. 명색이 정문명파의 대 제자가 그냥 지인도 아니고 사부의 차를 훔쳐 마시다니!”
“그래. 마음껏 웃어. 신경 안 쓸 테니.”
“숨긴 이유가 있군요. 창피하니까.”
“그만 놀려…….”
“종종 언급할 농담거리가 생겨서 좋군요.”
깔깔거리는 남영을 보며 연청이 한숨을 푹 내쉰다.
윤홍정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대충 수습이 됐는지 아까보다는 한껏 나아진 표정이다.
장연청이 남영에게 부탁하자, 남영이 홍정에게 해독약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남 소저.”
“이 약을 먹은 뒤 삼일 술을 드시면 안 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우리는 이제 떠날게요.”
남영의 대답을 들은 홍정이 놀라며 되물었다.
“벌써 가시렵니까?”
“네. 저희도 일이 있어서. 그림은 잘 봤어요.”
“무림맹에 연락했으니 이제 곧장 대협과 남 소저의 공로도 인정받을 겁니다.”
듣고 있던 장연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돼!”
“네? 뭐가 안된다는 건지…….”
“아니. 아니야. 우리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니 이 일이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걸세. 그러니까 말하면 안 된다고.”
“아 맞다. 두 분은 비밀 임무를 수행하시는 중이셨죠. 깜박했습니다.”
“그렇지. 우리가 여기 있었다는 걸 발설하지 말게나. 무림맹에 특히나 더! 아이고 동생. 얼른 가야겠다.”
허둥지둥하는 장연청을 보며 윤홍정이 미소지었다.
‘장 대협과 남 소저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야. 은인이시다.’
윤홍정이 정식으로 포권하며, 둘에게 예의를 갖추고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언제든지 제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두 분은 제 은인이십니다.”
웃음기 가득했던 연청도, 남영도 이에 진지하게 예의를 갖추며 맞인사로 답했다.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게 되겠지.”
연청과 남영은 그대로 본청을 나섰다.
둘의 뒷모습을 보며, 홍정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
우한시 외곽.
터벅터벅 걷는 연청 옆에서 남영이 계속 재잘거린다.
남영은 다시 서생의 변장을 한 상태다.
주변 사람이 들을까 연청이 휘 둘러본다.
“동생. 다시 그런 복장으로 변장해놓고 왜 처자인 걸 팍팍 티 내나?”
“장 형. 이미 알잖아요.”
“아니 내 말은, 남들이 보면 되게 이상하게 보일 것 같으니까 그런 거지.”
“음. 차라리 서생 복장을 환복 하고 평소 복장을 갖출까요? 이거 너무 불편한데.”
“그러면 너무 눈에 띄잖아. 그리고 우리 지금 가는 방향이 사천 성도인데 들키면 안 된다고 동생이 말한 거 잊었나?”
“흥. 내가 오독교인 걸 알면 그쪽에서 뭐 선수라도 치겠어요? 여기 무당파의 고수분이 계신데.”
“아이고. 내 말을 말아야지. 남들 앞에서만 조심해 그럼.”
“네. 히히.”
밝게 웃으며 떠들던 남영이 갑자기 꾹 입을 다물었다.
저만치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
눈이 가늘어지며 남영이 그런 그를 살핀다.
연청이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좀 이상해.”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뒤로 묶었다.
복장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허리춤에는 술병을 하나 차고 있다.
검이나 다른 병기는 보이지 않는다.
강아지풀을 입에 물고 흥얼거리며 걸어오는 사내의 보법을 연청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저 보법, 심상치 않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평범한 이 같지는 않네요.”
“고수야.”
연청이 경계하며 속삭였다.
“걸음만 봐도 알 수 있어.”
“우와. 오히려 그런 장 형이 더 고수 같거든요?”
“아니, 나는 좀 특이 체질이야.”
연청이 남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대의 초식을 한번 보고 따라 할 수 있나?”
“불가능하죠. 모두 각자의 비공과 비기일 텐데.”
“나는 가능해.”
“정말요?”
“응. 내공이 아닌 외공을 다루는 초식이라면 그대로 흉내 낼 수 있어.”
“그거 말 그대로 천하제일의 희대의 재능 아닌가요?”
“말처럼 대단한 건 아니지. 왜냐면, 동생같이 독공이나 내공을 쓰는 이들에게는 의미 없으니까. 그냥 재주일 뿐이야.”
“흠. 그런데 왜 저 사람이 고수라는 거죠?”
“저건 따라 할 수 없어.”
연청이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이야. 신묘한 보법이다. 잠깐 본 거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헉. 그럼 저자의 정체가 뭘까요?”
“글쎄. 내가 아는 정파인들은 저런 복장은 하지 않지. 엄청 화려하잖아? 동생 뭐 아는 거 없어?”
“모르겠어요. 저희도 그렇게 교류를 안해서......”
“일단 부딪히지 말자고.”
연청과 남영은 방향을 살짝 틀었다.
가까이 다가온 사내가 둘을 스쳐 지나간다.
갑자기 사내가 몸을 돌렸다.
“천하제일 경국지색이로구나!”
허리춤에 찬 술병을 들더니 입에 쏟아붓는다.
남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장연청 역시 마찬가지다.
“왜 아름다움을 가리는지 모르겠지만 생애 봐온 이들 중 가장 아름답소. 낭자.”
술병을 다시 허리춤에 걸며, 사내가 껄껄 웃었다.
“그러니 술이 안 들어갈 수 없지.”
남영이 연청의 눈치를 살핀다.
장연청이 나서며 같이 껄껄 웃었다.
“눈썰미가 대단하시오! 안 그래도 동생의 미모가 천하제일이라 내심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남영의 얼굴이 또 빨개진다.
연청의 말을 들은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술병을 던졌다.
탁!
연청이 긴장하며 받았으나 딱히 내공이 실리진 않았다.
“형씨가 부럽소. 이런 경국지색과 함께하니. 그 술은 쉽게 마실 수 없으니 내 선물이라 생각하시오!”
“향만 맡아도 명주인 걸 알겠으나, 내가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니 아쉬울 뿐이오. 감사하오!”
다시 연청이 술병을 사내에게 던진다.
탁!
받아든 사내가 씩 웃는다.
“술을 못 마시는 사내도 있나?”
“술 대신 차를 좋아하오.”
“차는 계집들이나 마시는 거 아닌가?”
“정이 많고 선한 이들이 많이 마셔서 그런 오해가 많지요.”
“술은 아니란 말인가?”
사내가 입가를 쓱 훔친다.
“남장한 여인을 데리고 다니는 사내가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걸, 곧이 믿으라고? 저 처자에게 잘 보이려 하는 건가?”
남영이 이를 악물며 뭐라 대꾸하려 했지만, 연청이 살짝 제지하고 웃으며 받아쳤다.
“식견이 대단하오. 어찌 알았소?”
“하하하! 사내야 다 똑같지!”
“훌륭하오! 실례지만 존함을 여쭤도 되겠소?”
사내가 웃음기를 거둔다.
“내 이름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내 이름을 들으면 그대로 황천길로 가게 된다네.”
“그렇다면 말해주지 마시오! 우린 알아서 제 길 갈 테니. 반가웠소이다!”
더 캐묻지 않고 그대로 뒤를 도는 연청을 보며 사내가 예상 밖인지 크게 웃는다.
“나도 그쪽이 궁금하나 할 일이 있기에 이만 실례하오!”
사내도 몸을 돌렸다.
지켜보던 남영의 눈에, 등에 새겨진 문양이 보인다.
제비 한 마리.
“장 형. 혹시 쌍문비 라고 들어봤어요?”
“쌍문비? 아니?”
“저 사람, 등에 제비가 그려져 있어요.”
연청이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사내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바로 전에만 해도 코 앞이었는데. 대단한 경공이군.”
“확실해요. 쌍문비가 맞아요. 그의 경공은 사파 제일이라 불리니까. 그런데 왜 그가 여기에?”
“나는 자세히 모르지만, 그렇게 유명한가?”
남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천 쌍문비. 돈만 주면 어떤 짓이든 하는 자인데, 유명한 자객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