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판타지/SF
여기에 내가 있으니
작가 : 럭키민
작품등록일 : 201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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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망자
작성일 : 19-10-28     조회 : 300     추천 : 0     분량 : 4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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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억, 헉 - "

 

 원하는 깊은 숨을 내뱉으면서 숲을 가로질렀다.

 이마의 가장자리를 따라 투명한 땀이 맺혔다.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더 짙어졌다.

 숨을 뱉는 것인지 마시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거친 호흡을 하면서 이미 감각이 없어진 다리를 최대한 뻗으며 내달리고 있었다.

 

 거친 산길과 나뭇가지로 인해 그녀의 버선은 군데군데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고통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발에서 느껴지는 쓰라림은 잡혀서 매맞는 것에 비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쯤은 아픈 것도 아니었다.

 

 이 검은 산 속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저 불빛이 자신을 쫓아오는 불빛이라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망치기 위한 불빛이라는 것이 소름끼쳤다.

 

 도망쳐야해. 최대한 숨어야 해. 만약 잡히기라도 한다면 아버지의 빚을 갚으라는 명목하에 노비나 기생집으로 끌려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노비나 기생이나 그게 그건가? 만약 붙잡히게 된다면 난 어디로 보내달라고 빌어야 하나 -

 원하는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세차게 저은 후 나뭇잎을 손으로 헤치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저기 있다, 잡아라!"

 

 사사사삭 - 나뭇가지를 헤치고 여러 사람들이 빠르게 접근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는 등골에 서늘해 지는 걸 느꼈다.

 이미 마을에서부터 내달려왔던지라 힘이 풀릴 대로 풀려 있었지만 본인을 잡으려는 그림자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자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서 도망치고 있었다.

 이젠 진짜 한계다. 숨어야 한다. 더 이상 뛸 순 없다고 느낀 원하가 주변을 필사적으로 살폈다.

 그때 그녀의 시야 안으로 들어온 보라색 빛이 보였다.

 

 아니 저게 뭐지? 도깨비 불인가?

 보통 불이라고 하면 노란색이나 붉은 색일터.

 심상치 않은 색깔임을 감지한 원하가 저 곳을 향해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짧은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녀를 그 빛으로 내몰았다.

 

 "네 이년 거기 안 서??? 잡히기만 해봐라!!"

 

 원하는 망설임없이 보라색 불빛을 향해 뛰었다.

 이 쪽이든 저 쪽이든 그녀에겐 내키지 않았지만 한 쪽은 이미 주변에 팔려간 친구들에게 여러번 들었던바 결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머지 한 쪽으로 기대를 걸어보자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 길이 더 안좋은 결말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좋은 길이 될지.

 

 불빛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커다란 나무의 형상이 보였다.

 나무 사이로 아까 봤던 보라색 빛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나무 속에 문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집인가? 무서운 느낌이 들었지만 원하는 계단을 올라서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안에 계세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정적이 흘렀다.

 

 "저기요, 제가 진짜 급해서 그런데 저 좀 숨겨주시면 안될까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어느새 자신과 자신을 쫓아오는 불빛과의 거리가 좁혀진 게 보였다.

 시간만 낭비했다고 생각하며 뒤돌려는 순간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였다.

 긴 앞머리가 한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뭐냐 넌."

 "나으리, 지금 잡히면 제 인생은 이제 끝이거든요. 제발 숨겨주세요!! 사례는 어떻게든 해드릴게요!"

 

 오(烏)는 자신 앞에서 싹싹 빌고있는 손을 보았다. 여기저기 베인 듯한 손.

 간절한 눈동자. 참 맑은 눈이구나. 오랫동안 달려온 듯 보였다. 지쳐보였지만 눈이 맑았다.

 이런 영혼이라면 안으로 들여도 자신에게 폐를 끼칠 것 같진 않았다.

 사실 인간이 이 집을 보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니까.

 

 "들어와."

 문을 조금 더 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원하는 혹시나 그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빨리 들어갔다.

 차가워 보이는 오의 인상과 달리 내부는 의외로 아늑한 감이 들었다.

 밤이라 어둑하긴 했지만 유유히 날아다니는 반딧불이가 집 안을 밝히고 있었다.

 이렇게 반딧불이를 풀어놓는 집은 처음이었다.

 다들 잡아놓느라 혈안인데.

 

 "이리와서 앉아."

 원하가 쭈뼛쭈뼛 문 옆에 서서 집안을 둘러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오가 말했다.

 원하는 나무 밑둥을 깎아 만든 둥그런 의자에 앉았다.

 주변을 더 둘러보았지만 아까봤던 보라색 불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뭘 그렇게 두리번 거리는 거야? 무작정 남의 집에 들어와서는. 실례야."

 

 "아, 사실은... 아까 보라색 빛을 보고 여기로 온 거거든요. 근데 보라색 빛이 보이지가 않네요? 제가 반딧불이랑 착각을 했나봐요."

 

 보라색 불빛.. 이 아이가 그걸 본 거로군.

 오는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이 없어진 오를 보며 원하는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제가 정신없이 달리느라 눈에 헛것이 보였나봐요. 세상에 보라색 빛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하하."

 "......"

 "나으리, 저 여기 오래 있지 않을거예요. 저기 저 쫓아오는 사람들만 돌아가면 바로 나갈거예요."

 "......"

 "이 년이 어디로 갔지? 주변을 샅샅이 뒤져! 빈 손으로 돌아가면 우리도 성치 못할게야!"

 

 사람들이 원하를 찾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바로 나무 밖에 있는 듯 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며 주변을 뒤지는 소리와 횃불이 허공을 가르며 휙휙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오는 그녀의 목이 움직이는 걸 보았다. 긴장하고 있구나.

 둘 다 숨을 죽이고 있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그녀를 찾는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작아졌고 이윽고 사라졌다.

 여기에 없다고 판단했는지 저 멀리로 간 듯 했다.

 

 "휴우."

 한시름 놨다. 원하가 깊은 숨을 내몰아 쉬었다.

 

 "......"

 숨막히는 적막이었다. 아까 쫓기고 있었을 때도 힘들었지만

 이렇게 산속에서 정체가 뭔지 모르는 남정네와 단 둘이 아무말 없이 앉아있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도 망태기에 싸여서 죽기 직전까지 매맞는 것보단 낫겠지.

 

 "근데 넌 왜 쫓기고 있었던 거야?"

 오가 먼저 적막을 깨뜨렸다.

 갑작스런 물음에 긴장하고 있던 원하가 벙찐 표정을 하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저희 아버지 빚 때문에요. 갚을 돈이 없으면 저라도 팔아서 갚으라면서.."

 "그래서 도망쳐 나온 건가?"

 "네. 잡히면 죽느니만 못해요. 노비나 기생이 될테니까."

 "그렇군."

 "그리고 - 초면에 얘기하긴 좀 그렇지만... 제가 사모하는 도련님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노비나 기생이 되면 그분과는 영.. 연이 없어지는 거니까요.

 물론 저같이 가난한 집 딸이랑 잘 될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양민이면 연정을 품을 순 있으니까..."

 "그렇군."

 

 이내 또 적막이 흘렀다.

 이제 나무 밖은 풀벌레가 우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사람들이 저 멀리 가서 이 주변에 없는 게 확실한 것 같았다.

 원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오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으리!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됐으니 가봐."

 

 오가 일어섰다. 그는 뒤돌아서 불타고 있는 장작 더미로 걸어갔다.

 그 위엔 커다란 솥이 끓고 있었다.

 솥이 넘치기 전에 어서 저 아이를 내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들키겠지. 보라색 빛을 봤다고 했으니.

 솥뚜껑이 달그락 달그락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원하는 오가 있는 쪽으로 다가섰다.

 

 "나으리, 그래도 이렇게 그냥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제 목숨을 살려주셨잖아요. 저희 어머니께서도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을 해야한다고 하셨어요. 그렇지 않으면 까치보다 못한 인간이라며 가르치셨는데 - 근데 이건 나으리 식사인가요? 아직 저녁을 못 드신거예요?"

 "관심 그만 가지고 이만 가줬으면 좋겠는데. 숨겨달래서 숨겨줬고 쫓아오는 인간들은 사라졌고. 그리고 너, 오래 안 머무를거라고 했잖아?"

 "식사하시는 거면 제가 차려드릴게요! 제가 이래 봬도.."

 "아니 됐다니까?!"

 

 원하가 선반에 있던 그릇과 국자를 양손에 집어들었다. 그 모습을 본 오가 재빨리 솥 앞을 막아섰다. 둘이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다.

 

 "나리 제발 은혜 좀 갚게 해주세요! 이대로 돌아가면 도와주신 은인한테 아무 것도 안하고 왔다고 어머니한테 혼나요."

 "네가 아무것도 안하는 게 은혜를 갚는거야! 그만 돌아가!"

 

 원하는 자신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계속 막아서는 오가 방심하는 틈을 타 솥뚜껑을 열었다.

 당황하는 오의 표정을 보며 솥에 국자를 무의식적으로 넣어 그릇에 퍼담았다.

 

 "나리 말씀을 너무 섭섭하게 하시는 거 아니예요? 왜, 제가 그릇이라도 깰까봐 그러시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칠칠맞진 않답니.. 꺅!"

 

 오를 보다가 솥으로 고개를 돌린 원하의 눈에 들어온 건 보라색 액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라색 꽃잎이 든 액체였다. 빛이 은은하게 나는 꽃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꽃이었다. 신비롭기도 하고 요사스럽기도 했다. 한 눈에 봐도 예사로운 꽃이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놀란 원하가 그릇을 내던졌다.

 

 "야, 너 -"

 "엄마야!"

 

 오의 모습을 본 원하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원하가 내던졌던 그릇이 오에게 날아가 보랏빛 액체가 그의 오른쪽 어깨에 쏟아졌다.

 그리고 그 쏟아진 부분이 검은색 깃털이 돋아나면서 날개처럼 변했다.

 

 "이게 대체..."

 

 원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의 오른팔은 마치 까마귀의 날개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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